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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흔드는 풍수의 바람을 잠재워라
한국인은 왜 풍수사상에 집착하나
한국인은 풍수지리를 좋아한다. 이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이왕이면 부모를 좋은 데 모시는 것이 좋지 안은가?” 라는 말이 단적으로 선호하는 이유이다. 이왕이면 돌아가신 부모를 양지 바르고 나무뿌리가 덮치지 않고 뱀이 살지도 않는, 좋은 곳에 모시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는 말을 그 누가 부인하리오? 솔직히 말해서 기독교 신자라도 이런 풍수 선호도는 비신자나 타종교인과 똑같이 가지고 있다. 시신을 화장하면 풍수와 해당이 없을 것 같으나 유골분(遺骨紛)을 땅에 묻는다면 명당을 찾게 된다.
이런 전제 하에 한국인이 왜 풍수를 그리 좋아하는가를 긍정적인 면에서 먼저살펴 보기로 한다. 혹시 이 글이 풍수를 옹호하고 선전을 한다고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풍수사상에 대하여 제대로 공부하고 나서 그런 평가를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한반도라는 자연조건이 주요인
첫째로 한국인이 풍수에 집착하는 이유를 든다면 한국의 자연 조건과 어느 정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한국이 사막이라든지 한없이 넓은 평야라면, 스위스나 네팔같이 험준한 산이 그득한 산악국가라면, 언제나 눈과 얼음이 뒤덮인 한 대지방과 북극과 남극 지대라면 풍수지리설이 있겠는가 말이다. 물도 없고 산도 없고 바람도 안온(安穩)하지 않은 곳에는 매장(埋葬)이 없을 것이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한구구과 같은 매장은 안될 것이다.
주로 온대 지방에, 그것도 중국이라는 동양의 한자문화권에, 그중에도 유교문화권에, 그러니까 중국과 한국과 일본이 세계200개국 중에서 풍수지리설의 해당국이 되게는데, 일본은 아직 확실한 규명은 안되었으나 불교 영향인지 우리가 말하는 풍수지리설이 거의 없다.
원래 이삼천 년 전에 중국 황하강 유역에 살던 중국인이 살아있는 사람의 주거 생활의 여건상 풍수를 만들어서 썼는데 지금은 글 크게 작용하지는 않고 있다. 중국이라는 그 넓고, 그다양한 지리조건에서는 풍수지리가 다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산 사람의 풍수든 죽은 사람의 풍수든 말이다. 또한 조상숭배 못지 않게 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를 하는 중국인에게는 풍수지리설 이론을 만들기는 하였으나 실용면에서는 큰 힘을 쓰지 못하였다. 사막과 고원과 홍수가 빈번한 강 유역에는 해당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이 자연지리조건상 풍수지리설을 적용하는 데 알맞아서 자연히 이 풍수리지설에 매달린다고 하겠다. 세계풍수연구학회가 열린다면 한국이 독무대일 것이다. 어디나 조상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는 자연조건이 잇는 데서야 어이 풍수지리설이 발달하지 아니하리오?
종교성과 밀착되어 발전하기도
둘째는 종교면에서 유리하게 밀착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교와 불교와 도교와 무속과 기타 민간 신앙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풍수지리설을 이용하고 그 이론을 심화하였다는 말이다.
산을 예로 들면 나무를 해오고 산나물을 채취하고 산짐승을 사냥하고 휴식을 하는 면에서는 대단히 좋은데, 한편 달리 보면 길을 잃어 죽을 수도 있고 호랑이 같은 맹수에게 죽을 수도 있고 산불이 나서 목숨과 재산을 다 잃을 수도 있고 도적이 출몰할 수도 있어서 대단히 위험하기도 하다.
이런 산을 인격화하고 신격화한 것이 산신령신앙인데 천년 이상씩이나 사찰에는 대웅전뒤에 규모는 작지만 원래 인도에 없던, 중국에도 없던 산신각이 있다. 산신 신앙은 이렇게 견고하게 내려왔다.
장례라면 매장이라는 인식에서 대체로 무덤을 산에 쓰는 우리는 풍수지리면에서 산신 신앙을 무시할 수가 없다. 매장을 하려면 그 터를 주관하는 토지신에게, 또는 산신에게 신고(신고,이라고 한다)를 하여야 하고, 이장(移葬)을 하려면 그동안 잘 보호해주셔서 감사하고 이번에 부득이 l사를 하니 허락을 해달라는 신고를 또다시 한다. 이러한 산신신앙이 바로 풍수지리설과 결합이 된 것이다.
우리가 산에 올라가서 절을 보면 실로 명당중에 명당에 있다. 대표적인 곳이 전남 해남 대흥사(大興寺)다. 뒤에는 땔감과 산나물이 있는 산이 둘러쳐져 있고, 이 산에는 물이 나오고 풍관을 좋게 하고 비바람을 막아준다. 앞에는 냇물이 있는데 이는 생활용수가 되고 농사를 지을 산업용수도 되고 불이 나면 소방용수가 된다.
그리고 절에 들어오는 먼 산길은 전란이 나더라도 적이 잘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 된다. 한마디로 절은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장풍(藏風)과 득수(得水)를 최고로 갖추고 있다. 모름지기 풍수지리를 공부하려면 사찰의 위치를 한번 음미 할 일이다. 그 만큼 우리 선인은 자연과 인간가 종교를 잘 조화하였던 것이다.
유교 창시자인 공자와 그 후대 한국과 중국 학자를 모시는 서울 성균관자 지방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을 보면 또한 그 자리를 명당에 썼다. 전국 어디나 바로 향교 자리도 명당이라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한국교회는 선교정책이나 경제적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실제로 자연환경에서 복된 자리를 찾고 쓰는 풍수지리와는 대체로 거리가 멀다.
기도원이라는 곳도 보면 자연의 포근한 멋을 거의 상실하고 있다. 도대체 건물만 뚝딱뚝딱 지어놓고 사람만 수용을 하려고 든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기독교는 한국의 자연과 악수를 하지 않고 거슬리고 무시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말이다. 기도원을 장풍득수라는 측면에서 고찰 해보면 나름대로 의미있을 것이다.
어쩌면 기독교는 한국 역사상 가장 풍수를 적대시하는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로서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라고 보는, 극히 인간에 유리한 공리적인 종교로 후세 사람에 의해 평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일반 신자가 여전히 풍수지리에 매력을 갖는 것은 확실히 모순되기 때문에 규명을 분명히 해야 할 문제이다.
“어느 종교든 땅에서 좋은 점을 얻고 살도록 만든다. 기독교든 천주교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면 되는가? 사실 수맥이 지나간 곳에 집을 지어 살고 물이 고인 곳에 부모시신을 두고 살면서 후손이 건강하고 부자되고 출세하기를 바라는가? 안될 말이다.
땅을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땅의 성질을 알고 활용하라는 것이 신앙적이 아닌가?”라는 논리 앞에 당신은 신자로서 얼마나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하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천주교에는 수십년간 수맥을 찾아 가뭄에 지하수를 찾고 학교와 부대 에 우물자리를 알려주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는 ‘임(林)신부’ 가 있다. 필자는 그의 책을 읽어보았는데 감동과 공감이 많았다.
“풍수지리를 긍정적으로 사람의 복리면(福利面)에서 보면 되겠구나. 무조건 알려고도 하지 않고 반대만 일삼을 일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어느 것이나 유리와 불리, 공익과 공해라는 두 면이 있는데 풍수지리도 좋은 면을 취택하자는 말이다.
하여튼 우리 선인(先人)은 이제와 보니까 부정적인 면이 보이지만 당시로 보면 다 긍정적인면에서 종교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풍수지리가 아예 종교로까지 진전을 한 것이다. 결국 종교가 사람을 위하려는 노력이라고 보면 그 많은 풍수의 이로움으로 볼 때 종교가 되지 않겠는가?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고 신도 이롭다는 기독교로 보면 문제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현실적인 이익을 충족시키려고
셋째는 결국 현실적인 윤리와 이익이 다 충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좀 나누어서 볼 일이다. 먼저는, 시간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장구(長久)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집을 하나지어 놓으면 써어 무너지거나 불이 나거나 어떤 큰 역사(役事)가 있어서 허물거나 새로 짓기 전에는 영구히 자리를 잡고 있다. 한 번 잘 지으면 미래에 좋고 한 번 잘못 지으면 항상 두통거리다. 그러니 집 한채를 지을 때 얼마나 현재와 미래를 저울질하겠는가?
이제 개인집 차원을 넘어 마을도, 도시도, 수도 서울도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 건축공사와 토목공사와 도시건설공사는 자연히 지리공부를 수반한다는 말이다. 현재와 미래를 그 건설자가 생각했다면 지금 우리는 좋은 과거에 좋은 현재에 좋은 미래를 생각한다.
요즘의 텔레비전 연속사극 가운데 “용의눈물”에 나오는 초기 조선건국의 인물들이 다 풍수지리를 달통한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 600년간 건재한 우리의 서울은 그 때 정도전(鄭道傳)이 구상한 것이다.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서울 동쪽 왕십리 중심으로, 하륜(河崙)은 서울 서쪽 신촌 중심으로 수도 자리를 생각했는데 정도전은 청계천, 종로를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정도전의 600년 구상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도 수백 수 천년간 그렇게 살 것이다.
이처럼 집과 마을과 도시와 서울의 풍수지리는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가 수백 수천년 이어갈 어떤 인간 거주지를 구상할 수 있는가? 오늘날 기독교 신자가 새서울자리를 잡고 최적(最適)의 거주 활동지로 설계를 한다면 600년 전의 정도전을 따를 수 있을까?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가? 그런 큰 구상을 할 때 적어도 하나님께 천년을 내다볼 안목을 달라고 기도를 하겠는가?
한편, 사람이 죽어서 좋은 땅 무덤에 묻히는 것은 음택(陰宅)풍수라고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풍수지리라고 하는 것은 음택풍수, 바로 묘자리 풍수다. 죽은 사람은 다 심판을 받아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갈 삶은 지옥에 가버리는데 죽은 조상이 살아있는 후손과 무슨 이해간(利害間)에, 호오간(好惡間)에 관련이 있느냐고 기독교가 말한다면, 이 음택풍수는 다 미신이고 거부될 사상이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믿지 않으니까 문제이다.
“예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돌아가신 분은 사후에 행복하도록 하려면 후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독교가 들어온 지금도 나의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예수를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어떤가?” “전통적으로 좋다는 풍수지리를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조상을 대한다면 윤리도덕상 온당한 일인가?” “이왕이면 좋은 데 조상을 모시자는데 굳이 반대하고 나쁜 데다 모신다면 후손으롯 그 무슨 억하심정(抑河心情)이요 불효인가? 도대체 그런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질문에 답변을 명쾌하게 하지 못한다면 풍수지리설은 여전히 세력을 가질 것이다. 풍수지리설이 나쁘다면 한국인에게 위와 같은 질문에 기독교로 구원을 받지 못한 조상이 사후에도 좋은 자리에 계시라고(사시라고, 주무시라고)한 것이 뭐가 나쁘냐는 말이다.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사후에 묻힐 명당을 고르고 나서는 아주 기뻐서 그 날 밤 미리 잠들 것을 시험하자고 하여 그 명당 곁의 큰 냇가에서 수박을 하였다. 그래서 왕이 숙박한 내라 하여 왕숙천(王宿川)이다. 실제로 후에 그의 능은 건원릉(建元陵)이다. 그가 지금 동구능 명당을 찾아내고 서울로 오던 고개에 올라서서 서쪽을 보고는, “내가 살아서 행복한 곳, 종로 서울이군, 그리고 동쪽을 보니 죽어서 복락을 누릴 신후지지(身後之地)라 좋구나.
아, 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있을 근심걱정(憂)을 이 자리서 다 잊었노라(忘)” 고 해서 그 고개가 망우리 고개다. 이런 지명을 남길 정도인 이성계를 오늘날 어떻게 풍수지리설과 떼놓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풍수지리설에는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과 지점의 땅이라는 증거가 있고 누구에게나 판단할 소재가 있다.
공간상 최선의 자리를 찾고자
다음은, 공간상 최선의 자리라는 확신을 준다는 말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유리한 곳이다. 우선 자연여건상 위에서 사찰을 살펴보았듯이 살기가 좋은 곳이다. 풍수(風水)는 장풍(藏風)득수(得水)의 준물이다. 장풍은 지상 공중 조건이요 공기요 코로 호흡하는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좋은 대기(大氣)로 공해가 없는 공기다.
성난 바람인 광풍(狂風) 질풍(迭風) 태풍(颱風)이 없는 잔잔한 바람, 훈훈한 바람, 조용히 고여 있는 바람이다. 그래서 명당은 산이 삼면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게 있지 아니한가?
득수는 지표상 표면조건이고 거주활동 여건이며 식수(食水)와 농경(農耕)과 수운(水雲) 환경상 청결을 유지하는 오물처리조건이다. 물이 없이는 산 사람도 살 수 없는데 죽은 사람이 살 수 있는가 말이다. 논리상 죽은 사람이 산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상식으로는 말을 하겠는데 풍수지리에서는 죽은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활동을 산 사람같이 한다는 것이다. 설화에도 나오고 실화라고도 하는 이야기를 한번 해 보자.
근래에 들어 두통이 있는 자식이 자다가 꿈을 꾸는데 돌아가신 부모가 나타나서, “얘야, 웬 잠이 그리 많으냐? 나는 지금 물구덩이에서 편히 살지 못하는데 말이다.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고 있는데 너는 어찌 그리 잠만 자느냐? 그러니 마른 데로 이사를 좀 해다오” 하고 하여 놀란 자식이 부랴부랴 부모의 묘를 파보니 과연 나무뿌리가 시신을 칭칭 감고 있고 물이 교여 있어서 이장을 하였더니 두통도 낳고 집안우환이 다 풀렸다.
부모시신에 나무뿌리가 침노해서 감고 있으니까 자손이 두통이 생기고 물구덩이에 놓여있으니까 집안에 우환질고가 있다는 말은 결코 부모 시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산 사람마냥 살아 활동을 한다는 사고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이애기를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것이 우리의 복음전도의 대상이 한국인들의 세계관과 의식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왜 풍수사상이 한국인들에게 그렇게 뿌리 깊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현대에도 코로 숨쉬고 잎으로 마시는 대기와 음식문제는 심각한 생활조건이다. 이런 현대문제를 이미 수천 수백년 전에 산 자와 죽은 자의 생활조건이라고 간결명료하게 제시해서 풍수라고 한 것은 대단한 선견지명이다. 그러고 보면 대기오염이 극시만 현대는 어디에 살든 누구나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복을 못받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공간상 최적의 여건을 예나 이제나 지니고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 공간(空間)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 조상이 현실의 삶에서 유용하기 짝이 없는 지리역사 공부를 한 것이다.
“산지조종(山之祖宗)은 곤륜(崑崙 중국 곤륜산)이요 수지조종(水之祖宗)은 황하수(黃河水)라. 곤륜산이 똑 떨어져서 삼각산이 되어 있고…서울이 되었구나(또는 이집 선산이 되었구나)” 라는 신선타령이 있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거주지는 결코 그 고장 수십 평 좁은 차원이 아니라 중국 명산대천과 한국 명산대천이 다 지기(地氣)를 모아 보내서 여기가 일등산천이니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뜻이다. 바로 내가 사는 고장과 집이 우주의 중심이고 우리 조상의산소가 이름 그대로 유명한 집, 바로 명당(明堂)이라는 사고다
그러니까 우주, 당시는 중국과 우리나라인데, 우주천하 역사도 알아야 하고 지리도 알아야 한다. 어느 무덤이든 백두산 정기를 받은 명당이라고, 그 백두산 기운이 산맥이라는 용트림을 해서 내려온 끝대목이 이 산소라고 하는 점은 일반인에게 고도의 원시적이고 굉시적(宏視的)인 지식이다. 그래서 그 집 선산까지 이어오는 산맥과 산줄기는 용(龍)이 내려 온다고 해서 실제로 용이라고 한다.
결국 풍수지리는 삶의 문제였다는 점을 엿볼수 있고, 때문에 한국인에게 그렇게도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을 이기적으로만 추구하는 게 문제
끝으로 이것이 중요한데 인간의 행복과 복락의 추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산 자도 복받을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산 후손과 죽은 후손은 결코 생사로 인하여 나눤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지 다 살아서 희로애락과 길흉화복을 같이 한다. 이것이 진정한 조상숭배요 혈연공동체이다. 그러니까 죽은 조상은 산 후손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화장을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닌 매장을 해야 한다. 만날 수도 있고 서로 호소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도 있다. 그래서 조상의 산소는 동네가 가까이 있다. 자손이 멀리 출타해서 살아도 명절이나 청명한식과 시월 시재 때는 산소를 찾아와서 인사를 드림으로 하나가 된다.
이렇게 일체감을 조손간(祖孫間)이 가진다면 이왕이면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복락을 차지 하여야 한다. 이것이 명당을 썼더니 당장 복이 발생하는 임시발복(臨時發福)이고 수년 수십년 수백년 후에 복이 발생하는 만시발복(晩時發福)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어떤 효자 노총각이 노모가 돌아가시자 어떤곳에 묻으려고 동네에 내려가 큰 기와집에 들어가서 주인을 찾아 괭이와 삽을 빌리자고 하였더니 그 여주인이. “나는 홀몸인데…. 혼자 묻기가 힘들 것이니 거들어주겠다” 고 하여서 어머니를 잘 묻고 그 부자 과부와 혼인을 해서 아들 낳고 딸 낳고 후에 과거에 급제해서 잘 살다가 죽었다.
이런 이야기는 허다한 풍수설화다. 이것을 보면 발복이라는 것을 이내 알수 있다.
1)부(富), 부자가 되었다 : 돈이 생겼다. 가난을 면하였다. 살림이 피었다.
2)귀(貴), 출세를 하였다 : 과거에 급제하였다. 벼슬을 얻었다. 세력을 가졌다.
3)색(色), 처자식을 얻었다 : 장가를 들었다. 시집을 갔다. 아들과 딸을 두었다.
4)수(壽), 오래 살았다 : 건강하였다. 병이 나았다. 장수하였다.
이것은 동서고문을 통하여 누구나 바라는 욕망이고 소원이고 희망이고 꿈인데, 명당을 써서던번에 벼락같이 다 달성을 하였다. 위 이야기에서 그 아들은 우연히 명당에 어머니를 쓴 것이고, 그러자 거기 산신령이 즉시 부자 과부의 꿈에 나타나서 ‘연장을 빌리러 오는 총각과 부부가 되어라’ 하고 지시를 한 결과니까 임시발복치고는 실로 신속하기 짝이 없다. 효자니까 명당에 어머니를 모셔서 복을 받는다는 사고는 바로 윤리도덕 준수도 일등이고 욕망소원도 달성이라는 양수겹장과 같은 이로움이다.
일반 평민은 위에 보이는 부귀영화와 처자식을 잘 두기와 수명장수를 갈망하지만 현실로 보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그런데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을 써서는 손쉽게 이루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명당이며 놀라운 풍수지리겠는가?
“복을 주는 명당, 이것만 찾으면 행복은 말할 것이 없다.” 이 욕망추구와 그 달성이 풍ㅇ수지리설이 존속한 이유이다. 그러니까 시신을 명당에만 쓰면 죽음이 바로 생산이고 불행이 행복이다. 시신을 땅에 묻는 것은 바로 후손의 출생이다. 죽음이 출산이라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기독교적이다.
부활이라는 개념이 약간은 있기 때문이다. 명당에 썼더니 자손이 번창을 했다는 것을 이것 말고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잠재적으로 풍수지리설을 선호하는 한국인은 윤리로 욕망을 묶어서 효도하고 발복을 하였다고 필자는 풀어보겠다.
그러나 이 풍수지리설에 비판할 것이 있다. 무엇보다 이기적이고 자기 가문의 행복을 바라고 인간의 노력보다는 손쉽게 행복을 차지하려는 것이다. 결국 조상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그 조상을 통해 자기 자신의 이득만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면에서는 자연을 보호하겠지만 자연을 또한 훼손하는 점도 있다.
게다가 현대 문명발달에 역행하는 것과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와 목적에 어긋나는 일등은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유리한 측면들을 생각한다면 한국인이 왜 풍수에 집착을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풍수사상의 기원을 추적한다.
새들은 둥지를 아무데나 틀고, 짐승들은 아무데나 굴을 삼는 것일까? 이들은 그 종의 유전인자에 새겨진 본능에 따라 생존에 유리한 장소를 선택하는 듯하다. 인류의 조상들도 무작위로 삶의 거처를 정했을까? 대대로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부족마다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적절한 터를 잡는 노하우(Know-how)를 비밀히 간직해왔음 직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도 홍수 때문에 집을 물가에 바짝 대고 지을 사람은 없을 테고, 그렇다고 근처에 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지역에 마을을 열 리도 만무한 것이다. 그리고 겨울철에 북풍이 부는 지대에서 집의 대문을 북쪽으로 내는 어리석은 종족도 없을 것이다.
옛부터 인류는 최적의 장소 선택법 개발해
그리하여 예로부터 인류는 ‘이곳’과 ‘저곳’ 의 차이를 눈여겨보았고 민족마다. 특정 모걱을 위해 최적의 장소를 선택하는 방법들을 개발해 입에서 입을 전수시켜온 것이다.
아무 동굴속에나 들어가 말과 생각을 멈추고 가만히 있어보는 실험을 해봄 직하다. 그러면 얼마 안있어 서늘한 기운 대신에 돌들로부터 쏟아지는 기운 때문에 몸이 더워오는 것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짐승과 원시인들은 생각과 말에서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들은 굴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땅의 자궁이 라는 상징성이 있기에 동굴은 원시인들에게 최초의 거처가 된 듯하다.
다음으로 싱그러운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에 들어가 가만히 있어보라. 잎에서 뿜어내는 산소며, 음이온이며, 여러 생명적 기운으로 몸과 마음이 절로 긍정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말을 지껄이고 싶지 않고 그 둘레의 편안함에 그냥 안기고 싶어진다.
이리하여 숲속은 예로부터 성서로운 공간으로 경외시된 것이고, 그런 곳의 나무를 베는 것은 나라의 법으로 금했을 뿐 아니라 그랬다가는 그 땅 신의 노여움을 사 아무리 먹어도 성에 차지 않는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는 이야기도 유럽에서 전해온다. 아브라함이 아내가 죽었을 때 굳이 ‘나무숲이 들어서있고 동굴이 있는 밭’을 매장지로 고른 것은 무작위에서 나온 발상이었을까? 우리로 멈추어 생가가케 하는 바 있다.
희랍, 로마에서는 도시나 건물을 짓기에 앞서 그 터에서 자란 가축의 간이 건강한지를 살피고 그타당성을 가늠했다고 한다. 그 간의 상태는 결국 그곳 토질과 기후와 그외 여러 요인에 대한종합적 지수가 될 테니 이는 옛시대의 지혜를 보여준 예라 하겠다. 의술의 원조 히포크라테스도 어느 장소는 어떤 질병치료에 매우 유리하고 또 어떤 장소는 다른 질병 치료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희랍의 철인 플라톤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장소들은 바람과 태양, 기타 물이라든가 토양의 변화에 따라 안성맞춤일 수도, 아주 운이 나쁠 수도 있다. 이런 영향은 비단 신체에 좋은 영양소를 공급하느냐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을 착하게 할것인지 악하게 할 것인지에도 마찬가지의 영향을 미친다.”
우리들은 상이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기질이 산세라든지 평야라든지에 따라 펵이나 다르다는 것을 짐작하는데, 플라톤은 사람의 성품조차도 장소적 특질과 관련이 있다고 언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플루타크는 땅 위의 어떤 곳이 여타 지역의 건강과 활력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신체의 어떤 부분도 중요치 않은 부분이 없건만 그래도 전신에 골고루 피를 보내주는 심장이 매우 중요하듯이,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중심적 장소가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되는 것일까? 이상과 같이 고대 유럽인들도 어떤 목적을 위해 터를 잡을 때 거기에 맞는 장소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장소가 있다는 전이해를 지녔던 것이다.
성경도 특정 처소의 지형이 주는 유익 인정
이제 성경을 열고 여기저기를 흝어보기로 하자. 엘리야는 아무데서나 기도하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왜 굳이 먼 호렙산을 찾아가야만 했는가? 야곱은 아무 개울가에서나 하나님과 씨름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브니엘에서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일까?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들 때 아무 장소에서나 진기한 꿈을 꿀 수 있었을까? 아니면 벧엘에서만 ‘하늘문’이라 고백한 꿈을 꾸게 된 것일까?
빈들에서 양을 치던 모세는 아무데서나 들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떨기나무가 있던 그 자리에서만 들을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왜 번번히 상수리나무 근처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보게 된 것일까?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데 실패했을 때 왜 같은 장소에서 재시도하지 않고 장소를 옮겨가며 한 것일까? 이런 사례들은 신(神)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모든 장소가 동등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처소가 더욱 특별하다는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다윗왕이 남북 지파들을 통일하고 도읍을 정할 때 왜 가나안 시대부터 멜기세덱 제사장이 ‘천지의 창조자’를 모시던 예루살렘을 택했을까?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아무 곳에나 세운것일까, 아니면 어떤 고려에서 그 장소를 정한 것일까? 모세는 출애굽한 백성들을 이끌로 나아갈 때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빈 땅을 영토로 삼지 않고 왜 굳이 남들이 천여 년 동안 살아오고 있는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며 싸워 쟁취하도록 고집한 것일까?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브라함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장지를 아무데나 쓰지 않고 굳이 ‘나무숲이 있고 동굴이 있는 밭’을 사들인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메시아가 출현한 곳은 아무데나가 아니라 베들레헴이라 하고, 나사렛에서는 변변한 인물이 날 수 없다는 관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모두 특정 처소의 지형이 위대한 인물의 출현이나 국가와 자손의 번영등에 더욱 유리하다고 믿었던 증거다. 지중해 연안과 중도의 옛사람들은 특정 목적을 위해 장소를 정할 때 무작위가 아닌 신의 감응이나 전래돼 내려오는 토목건축상의 비전에 따라 행했던 것이다.
고대 지중해 연안, 신에 감동된 자가 터를 잡아
이런 사상은 고대에 더욱 두드러져, 황제들이 토목공사나 전쟁을 벌일 때는 적절한 터와 유리한 위치와 합당한 시기를 정하는 전문인들의 자문을 받았다. 사람들은 이 우주에 ‘좋은 곳’과 ‘좋지 않은곳’이 있음을 예감하여, 불행이 겹칠 경우 장소를 옮김으로써 처지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우주 위 만 가지 물상과 사태는 서로 연결돼있기에 산 사람이 기동하는 터와 혈통을 물려주고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들이 묻힌 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어, 실수와 허수 또한 두 개의 연립방정식의 관계로 생각해 후자를 정하는 데도 각별히 마음쓰기에 이른 것이다.
각종 목적을 위해 ‘장소’를 잡는 ‘풍수술’은 그 기원을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다만 고대 지중해 연안에서는 주로 신의 영을 받은 이들이 수행해오다 합리주의적 사고로 대처되면서 맥이 끊겼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한(熯)대가 기원으로 여겨지면 합리주의적 사고의 여과를 거치지 않았기에 저마다 검증되지 않은 기술들을 주장하는 난맥상의 인상을 풍겨온 것이다.
3-4세기 동진시대 곽박, 근대 풍수체계의 기원
좀더 좁혀서 볼 때, 근대적 형태의 풍수 체계를 세우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3,4세기 동진시대의 곽박(郭璞)이라고 한다. 3세기 말의 형편을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만리장성의 공사를 지휘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게 된 진나라의 장구 멩티엔은 침통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늘 아래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이기에 이제 죄없이 죽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리고 나서 잠시 숙연해졌다가 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계속하였다.
“그래, 내가 죄를 지었지, 그러니 나는 죽어 마땅해, 린타오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랴오퉁까지 만리가 넘는 해자(垓字)를 두른 성벽, 내가 이 공사를 하면서 대지의 혈맥을 끊어놓는 일을 피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내 죄다.” 그런 다음 그는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이 증언에는 대지에 혈맥이 있다는 것ㅇ, 자의건 타의건 혈맥을 끊는 자는 간접적으로 저주를 받게 된다는 신념이 깔려있다.
3세기경 풍수는 두 유파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방위를 중시하며 주로 나침반을 도구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산천의 흐름을 중시하는 유파가 그것이다. 그러다 12세기에는 주 희(朱憙)의 형이상학적 이론이 흡수되면서 풍수사상은 개화기를 맞았다고 본다. 이런 중국의 풍수설은 한국, 일본, 라오스, 태국, 필리핀, 월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다양한 열매를 맺는다.
이기주의 벗어난 환경학적 풍수 필요
이제 우리가 지적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들 지역에 퍼진 ‘풍수술’은 저마다 너무나도 다른 방법들을 주장하여 안잡한 양상을 드러냈다는 점과, 땅이란 그 지대에 살아 숨쉬는 생물들 전체의 번영에 관여할 텐데도 김씨, 이씨, 박씨 등의 씨족 이기주의에 관여한다고 믿는 협소함이다.
그러므로 풍수가 공동체적 관심을 품고, 터를 찾는 보다 단순, 명료한 방법을 제시할 수만 있다면 도시계획으로부터 실내의 가구배열에까지 적용할 수 있는 ‘환경학’ 이라 할 수 있겠다. 17세기의 한 풍수이론가는 길상의 장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런 장소에는 마술적 빛의 감촉이 있다. 그것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 말로는 표현이 안된다.
산은 순수하고, 물은 맑으며, 태양은 아름답다.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 하늘에는 새로운 빛이 서렸다. 별천지, 바로 그것이다. 혼돈 속에 평화가 있고, 평화 속에 명랑한 기운이 감돈다. 이 곳으로 걸어들어 오면서 사람들은 각성됨을 느낀다. 앉거나 눕거나 가슴은 환희로 가득찬다. 이 곳에 기가 모이고, 에너지의 정수가 취합된다. 빛은 중천에서 비치고, 신비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간다.”
누구나 마음을 고요히 하고 몸을 부동으로 한채 한 장소에 앉아서 그 일대의 분위기, 기운, 영을 감지한다면, 이런 길상의 자리를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몸을 내신 창조주를 모시기에 굳이 ‘사마리아냐, 예루살렘이냐’를 따지지 않고 어디서나 길상의 터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네 강이 만나는 데 위치한다는 에덴 동산은 아담이 하나님을 직접 뵙고 살던 터였기에 길상의 원형이었는지도 모른다.
풍수사상의 허와 실을 진단한다.
전국적으로 ‘장승백이’란 지명을 갖는 곳이 상당히 많다. 서울에도 장승백이란 곳이 있다. 문자 그대로 장승이 박혀있던 자리이다
최근 전주에서의 일이다. 전주에도 ‘장승백이’라는 지명을 가진 (洞)이 있다. 이미 장승은 없어졌지만 지명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다. ‘우리 것을 살리되 그 동(洞)의 특징을 부각 시킨다’는 취지에서 그곳 출신 시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동사무소 앞에 커다란 장승 두 기를 세웠다.
이에 대해 일부 기독교 단체가 중심이 되어 ‘장승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철거 운동을 벌였다. 장승을 세운다는 것이 미신이자 우상숭배라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곳도 아닌 동사무소 앞에 장승을 세워 놓았으니, 장승을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충분히 반대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양측간에 갈등이 생겼다.
장승, 우상숭배의 대상(?)
싸움에는 원인 제공자가 있기 마련이다. 공연히 장승을 세워 기독교단체의 심사를 건드는 축이 잘못이랄 수 있다. 그러나 철거운동을 시작한 일부 기독교단체의 오해 또한 갈등의 원인이었다. 쌍방 서로에 대한 잘못이 아니라, 장승의 기원 자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부질없는 싸움이었다.
첫째, 장승을 세운 측은 장승이 서야 할 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에 장승을 세움으로써 그들의 무지를 드러냈다. 장승은 문자 그대로 ‘장승백이’ 라는 지명이 있는 고갯마루에 세워져야 함에도 거기서 멀리 떨어진 동사무소 앞에 세웠으니 이것은 세운 자의 잘못이다.
둘째, 기독교인들이 장승을 미신이니 우상숭배니 하는 것 역시 장승의 세워진 본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승은 우상숭배의 대상도 아니고 미신도 아닌 자연과학적 근거에서 세워졌다. 또한 그것은 본질적으로 풍수지리 적 사고의 산물이다. 비단 장승뿐만 아니라 마을 앞의 당산나무, 돌탑, 남근석, 선돌(입석)등도 미신이나 우상숭배를 목적으로 세워지거나 심어진 것이 아니라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생겨난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나이 드신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이것들 앞에 촛불을 켜놓고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는 장면이나 그 흔적들을 종종 본다. 그것 역시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의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것들이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되어야 한다.
혹자는 반문할지 모른다. “풍수지리 자체가 미신이고 허황된 궤변으로 세상을 속이려 하는 데 그렇다면 당연히 장승이나 당산나무 등은 미신이고 허황된 것 아닌가?”
풍수지리에 미신적 요소가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또일부 직업풍수들은 그것을 미끼로 하여 돈을 버리고 건전한 사회 통념을 혼란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은 풍수지리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풍수지리네 기생하는 것들로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들이다.
농경사회에서 풍수는 종합과학의 일종.
흔히 ‘풍수지리’ 하면 많은 지식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묏자리 잘 써서 그 덕분으로 잘되는 것” 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는다. 풍수지리의 한 부분인 음택(묘지)풍수 때문이다. 필자 역시 ‘묘지풍수’는 이제 정리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본다.
과거 묘지풍수가 유행했던 것은 그 당시 과학 및 정신 발달 수준, 조상신 숭배, 죽음관, 호를 중시하는 유교의 영향 등에서 기이한 것이다. 음택(묘지)풍수가 정리된다고 해서 풍수지리 전체가 전부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풍수지리의 또 다른 분야인 ‘양택 및 양기풍수’의 타당성은 아직도 유효할 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국토개발과 심각한 환경오염에 당면한 우리 시대에 그 효용성은 더욱더 증대되고 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사람들이 터를 잡는 데 있어 풍수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풍수지리는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을 전제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명당’이라 부른다. 명당이란 사람(산 사람, 죽은 사람모두 포함)들이 물질적, 정신적인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안정과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즉 산 사람이 살터를 고르는 것을 양택(陽宅:집이나 서원, 사찰 혹은 정자)혹은 양기(陽基: 마을, 읍, 중소 대도시)풍수라 하고, 죽은 사람이 들어갈 자리를 고르는 것을 음택(陰宅:묘지)풍수라 부르는데, 음택풍수는 정리되거나 그 이론자체가 재구성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앞에서 언급했다.
명당을 현대적 개념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간으로 구성된다. 첫째, 방어 공간: 주산(진산), 청룡, 백호, 안산, 객수 등으로 이루어진다.(龍과 砂). 둘째, 주거 공간: 혈장(冗)무덤이나 집터 혹은 핵심 건물이 들어서는 곳. 셋째, 생산 공간: 명당수가 흐르는 명당(明堂과 水)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은 모두 이 세 가지 공간을 구비한다.
마을을 예로 하여 사람들의 풍수적 행위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추적해 보자. 예컨대 사방에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들이나 강은 방어 공간이 되며, 집들이 들어서는 곳은 주거 공간이 되며, 마을 앞에 펼쳐지는 논밭들은 생산 공간이 된다.
이 세 가지 공간이 좋은 조건을 갖출 때 풍수에서 말하는 기(氣)가 갈무리되어(藏風)사람들은 그 기에 감응되어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풍수의 논리이다. 이때 가장 좋은 터로서는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바람을 갈무리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물을 얻는 것과 바람을 갈무리하는 것 두 가지 가운데 우선 순위를 풍수지리에서는 전자에 두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풍수의 법술은 득수(得水)가 으뜸이오 장풍(藏風)이 그 다음이다.” 즉 바람과 물 두 가지가 중시된다. 그래서 풍수(風水)라 하였다.
액(厄)막이로서의 수구막이와 골막이
1. 물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물을 현대적 의미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
첫째, 식수로서 중요하다. 둘째,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배출하는 오폐물을 정화한다. 셋째, 농경사회에서는 농업용수, 즉 관개용수로 쓰인다. 넷째, 쾌적한 기후나 습도를 유지시켜 준다. 명당수가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주변 지형지세가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특히 마을을 좌우로 감T고 있는 두 산줄기 가 교차하여 마을을 감싸주지 않으면 비록 마을에 좋은 물이 많이 흐른다 하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둘째, 셋째, 넷째 기능을 제대로 다할 수 없다.
청룡 백호가 교차하면 자연스럽게 마을 앞을 빠져나가는 물들이 하나로 합쳐져서(合水)좁은 수구를 형성한다. 즉 마을을 흐르는 명당수가 굽이굽이 흘러가면서 마을이 배출하는 오폐물을 정화시킨다.
직직직 직f 직강(直江)보다는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정화작용을 잘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물이 곧장 빠져나가지 않고 완만하게 굽어 흐르면서 마을 앞에 형성된 생산공간. 즉 논밭을 윤택하게 해준다.
만약 마을을 좌우로 감싸는 두 줄기(청룡 백호)가 교차하지 않고 두 팔을 앞으로 나란히 하는 듯한 형상이 될 때, 즉 마을 입구(수구)가 넓을 때 마을을 관통하는 명당수는 곧장 직류하여 빠져나간다. 당연히 논밭을 윤택하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벌어진 두 산줄기 사이로 골바람이 마을 안으로 불어와 쉽게 건조한 기후조건을 만든다.
자연조건에만 의지해서 농사를 짓던 농경사회, 그리고 건축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방풍과 난방시설이 어려웠던 농경사회에서는 물길의 흐름과 유속을 좌우하는 수구(水口)를 몹시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수구가 좁아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조여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러한 땅은 문자 그대로 유토피아일 뿐 주변에서 찾아보기란 매우 힘들다. 당연히 사람들은 문제가 있는 땅을 고쳐 쓰거나 보완해서 쓰는 방안을 강구한다. 그것이 바로 ‘수구막이’ 라는 비보(裨補)풍수이다.
수구막이란 다름 아닌 마을 입구(수구)가 지나치게 벌여져 마을 안이 밖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넓을 때 그것을 막아주는 것을 말한다. 수구막이로서는 마을 입구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거나 돌탑을 쌓거나, 선돌(입석)이나 장승을 세운다.
현대적 개념으로 말한다면 일종의 방풍용이다. 방풍뿐만 아니라 도둑이나 외적들로 하여금 동네를 은폐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당연히 마을에서는 수구막이로 세워지거나 심어진 장승이나 숲을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심어진 나무들은 거목과 고목이 되면서 당산 나무가 되고 장승들은 세월의 이끼가 끼면서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으로조차 여겨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k을을 지켜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장승이나 선돌 하나 세우거나 나무 몇 그루 심는다고 본래적 지형과 기후 조건이 많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동시에 마을의 지형적 취약점이 무엇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는 일종의 경고 표지로서도 작용하였다. 그것은 농경사회에서의 소박한 과학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2. 바람
풍수에서 중시하는 두 번째 요소가 바람을 갈무리(장풍 : 藏風)하는 것이다. 농경 사회의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특히 매서운 겨울 바람은 무서운 존재였다.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 가운데 북쪽이나 서쪽의 어느 한 부분이 푹 꺼져 그쪽으로부터 불어오는 골바람은 더욱 더 사납다.
게다가 전통 가옥이 대개 목조 건물이거나 초가집이기 때문에 골바람을 맞는 곳의 화재 위험은 다른 곳보다 더욱 더 높다. 과거 불이 자주 나는 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도깨비 장난이나 혹은 귀신이 든 흉가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바람맞이 터에 자리를 잡은 것이 원인이었다. 귀신이나 도깨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골바람이 부는 고갯마루에 역시 나무를 심거나, 돌탑을 쌓고 더러는 장승을 세워 바람을 막으려 했다. 이것을 민속학적 용어로 ‘골막이’ 라고 부르는데, ‘수구막이’와 같은 원리이다. 후세에 사람들은 그 본래적 의미를 망각하고 일종의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명당을 쓰면 부귀해진다(?)
흔히 “명당에 무덤을 쓰거나 집을 짓고 살면 부귀영화를 누린다” 고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조븐 의미에서 말하는 풍수용어 ‘명당’은 생산 공간이다. 생산 공간이 넓어야 많은 곡식을 생산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명당은 인간을 부양할 수 있는 ‘토지의 하중(荷重)능력’ 이다. 명당이 넓다고 해서 무조건 토지의 하중 능력이 크다고 말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수구막이’. ‘골막이’ 가 잘되어 토지가 윤택하고 좋은 기후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명당의 생산력이 높으면 부유해지고, 이유가 있으니 자식을 가르칠 것이다. 가르친 자식 가운데 출세한 사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명당이란 땅은 단단하고 일사량이 풍부한 데다가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기후조건이 쾌적한 상태를 갖춘 곳이다.
자연히 자연재해로부터 보호를 받아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반은 맞는다는 말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반은 틀렸다는 것은 묘지풍수에 해당되는 말이다. 무덤을 잘 쓰면 부귀해지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다.
조선 시대 국교는 유교였으며 인간사회의 기본 윤리 또한 유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유교의 중심 윤리는 충효였다. 생전에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 가장 큰 충효였다. 생전에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 가장 큰 효이지만 돌아가신 부모를 잘 모시는 것도 효라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부모를 어떻게 잘 모실까? 양지 바른곳, 전망 좋은 곳, 즉 좋은 땅에 모시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묘지 명당 개념으로 정착화된다. 산 사람이 좋은 땅에 살면 부귀해 진다는 개념이 죽은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용되고 관념화 된 것이다.
최근 묘지 문제, 특히 호화 분묘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인사나 돈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이다. 서울 근교, 경기도 일대의 호화 분묘를 답사해보면 알 것이다. 있는 사람, 가진 사람들의 짓이다.
일반 서민들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 일부 직업 풍수들이 편승하여 풍수를 더욱더 사술로 타락시키고 있음도 사실이다. 사회지도층인사나 돈 많은 사람들이 풍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코미디일 뿐이다.
풍수지리의 과학적 수용
풍수지리는 과거 농경사회의 산물이었다. 치산치수의 능력이 열악한 상태에서 또 자연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활용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합리적 지혜였다. 자연의 재난을 피해 안정된 생산 활동과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는 합리적 사고였으며, 산 사람을 위한 학문이었다.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죽은 자를 위한 터잡기, 즉 묘지풍수로 그 비중이 옮겨진 것은 분명 풍수의 ‘타락’이었다.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조에는 화장제도가 선호되었기네 묘지풍수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산 사람의 터, 즉 마을이나 도읍지를 어떻게 하면 좋은 땅으로 만들어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산물이 바로 ‘수구막이’나 ‘골막이’로 형태로 나타나는 비보풍수였다.
서구과학의 유입으로 풍수지리가 할 일이 줄었다. 그러나 용도 폐기된 것은 아니다. 서구의 물질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물신화(物神化),특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그만 이라는 천민적 발상들은 자연에 대해서도 돈을 우려내는 대상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무분별한 국토개발, 환경 파괴, 강과 하천의 오염 등으로 인한 생태계 전반의 악무한적(惡舞限的)발전에 대한 대안을 서구 과학은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1970년대 초 영국의 대기 화학자 제임스 러브룩이 주장한 ‘가이아(Gaia)이론’ 정도이다. 그보다는 풍수지리가 더 많은 해결책과 대안을 제시해줄 것이다.
물론 기존의 풍수지리 패러다임을 그대로 활용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특히 묘지풍수와 그에 빌붙어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는 일부 직업풍수들이 사용하는 풍수술에 대한 정리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신적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풍수지리가 가졌던 과학적 요소를 발전시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면, 풍수지리는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묘자리, 자손의 ‘운명’을 좌우하는가
이른바 음택풍수(陰宅風水)를 평가할 때도 결국 세계관학적 시각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거니와, 본 문제를 일단락 연구하고서 드러나는 바도 마찬가지임을 밝힌다. 그래서 문제의 성격과 그 결론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먼저 이와같은 문제를 고려해보아야 하는 ‘우리는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현실 직시자로서 하나님 경륜 감지하는 기독인
우리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엡1:4)에 의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은혜로 우리 주 예수의 진리(道/the Way, 요14: 6)되심을 마침내 믿게 된 자요,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과연 성령의 내주, 충만, 동행하심 가운데 있게 된 자로서 더욱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져 가고 날로 더욱 그렇게 되기를 사모하는 자들이다(엡3:19).
우리는 모든 것의 알파와 오메가는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 심을 안다. 그리고 인생의 생사화복과 역사의 흥망성쇠는 오직 그 분에 의해 좌우됨을 밝히 믿고 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여호와여
큰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
위의 시편93편에 노래되고 있는 신앙을 우리도 갖고 있다. 이 신앙이 이스라엘 가운데 영글기 위하여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나 애쓰셨는가. 구약은 구구절절이 우리 주 여호와 계서 당신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땀방울과(선물로 흥건히 젖어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진리가 보다 확연히(성삼위 하나님의 빛으로)계시되 어 확증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독생하신 하나님(cf.요 1:18)은 피까지 흘리셨다.
이제 허다한 증인들의 증거와 성려의 내적 증거로 말미암아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께서 만유(萬有)의 주재(主宰)되심을 우리 또한 믿으니 이 믿음은 과학 이상의 거룩하고 고상한 참 과학(빌3:8)이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믿는 게 아니요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이 보지 못하는 바를 우러러보게 된 자들인 것이다.
즉 우리도 ‘큰 물이 소리를 높이고’ 흉용함(시93:3)을 잘 알고 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이 ‘큰물’로 ‘하수’로써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듯 위용을 떨치는 위협적 상황을 모르지 않는 것이다(사8:7-8: 28:2, 59;19: 렘46:8). 실제로 이러한 역사의 물결에 의해 세계사가 엮어져 왔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여호와여 큰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시93:3) 라고 거의 동일한 말을 세 번이나 강조하여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실에 눈감은 자들이 아니요 오히려 냉철하게 잘 직시하고 있는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속적 현실주의자에 머물지만 은 않는다. 바로 이 물결을 타고 오시는 주님의 섭리도 보고 이 큰 물결을 일으키시며 여사를 깊음 가운데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경륜도 감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주 “높이 계신 여호와 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시93:4)하심을 우러러 믿는 신기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시93:1)를 노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물결이 깊음 가운데서 보니 다 우리 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어 물결이 모든 것을 삼키듯 흉용하다. 할지라도 우리 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세계는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할 것”(시93:1)이다. 이와 같은 만고불변의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나아가서 성삼위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시93:2)
세계사를 움직이는 물적, 혼적, 영적 차원의 물결
그런데 우리 주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있는 ‘물결’은 여러 차원으로 되어 있다. 우선 셋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여러 해전, 신학 하시는 분이셨기에 그 인연으로 구 서독을 가로지르는 차를 동승하게 됐던 분이 있었다. 그는 교회 정치에도 노련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우뚝 우뚝 솟은 공장의 위용들과 굴뚝들을 보며 그분은“독일은 이 힘, 이분출하는 기운(起運)으로 2차 세계대전을 치루지 않고서는 못 배겼구나‥”라는 혼자말을 하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심코 보아 넘겼을 광경들을 보고 독일의 넘쳐나는 힘(起運)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기운(起運)의 ‘물결’들로 세계사는 형성돼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 ‘기운의 물결’을 보는 사람은 본다. 성경도 이와 같은 물결을 잘 보고 있다. 당장에 상기한 시편93편이 그러하지 아니한다. 그러나‘물결’엔 이와 같은 ‘물적(物的)기운의 물결’ 만이 있는 게 아니고 ‘흔적(魂的)기운의 물결’도 있다.
일제(日帝)가 한국을 속방(屬邦)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위협도 하고 회유도 하는 가운데 ‘월남 이상재’ 를 자기들의 앞잡이로 만들고자 했던 모양이다. ‘그 배고픈’민족 청년운동을 그만 두시면 노후에 편히 지낼 농장(농장)을 사실 수 있도록 당시 거금인 5만원을 드리려 했을 때, 선생은 눈 하나 꿈적도 안 하시고 ‘그 배고픈’ 청년운동하기를 마지 않더란다.
이런 저런 회유에도 불응하시니 마침내 대 일본이 세계를 상대로 전쟁할 군수물자를 대는 거대한 군수공장을 보여주면서 선생의 기(氣)를 위협적으로 꺾어놓으려 하더란다. 그런 엄청난 군사적 위세를 보시고도 선생은 어린애 장난처럼 여기시고 말더라나!
그렇다. ‘기운(氣運)의 물결’엔 이처럼 ‘혼적(魂的)기운의 물결’도 있다.
믿는 성도들에겐 영적 기운의 물결이 있다.
또 한번 그러나 우리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물적․혼적 기운만이 아니라 ‘영적기운의 물결’이 있음을 안다. 마가의 다락방의 120문도에게 불기 시작한 오순절 성령강림의(靈的 氣運의) 바람 ‘물결’로 하여 이 물적이고 세속적이며 육적이고 차안적인 세상에서 영적이고 거룩하며 천상적이고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탁류와 같이 거세게 출렁이는 육적 탐욕적 야욕적 ‘기운의 물결’에 이 거룩하고 종말론적 ‘성령의 물결’이 침몰당하지 않도록 힘이 말세지말(末世之末)을 사는 우리 성도들의 중차대한 사명이라 할 것이다.
성령을 근심하게 할 모든 어두운 죄악과 허물과 중상모략의 유혹에서 해방되자. 성령을 소멸하는 모든 육풍(肉風)과 야욕(野慾)을 달성코자 권모술수를 일삼는 모든 어둠의 일을 버리자. 어린아이가 순전한 젖을 사모하며 성장하듯 성삼위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만을 순전하게 사모하는 순결한 성도들이 되자.
풍수사상은 오직 지기(地氣)만을 말할 뿐
이렇게 기(氣, 氣運/힘)에는 우선 간단히 말해서 세 가지(물적․혼적․영적 기/기운)가 있는 것이다(氣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 實體를 무차별적으로 표현하는말로 쓸수 있자면).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밝히 깨닫고 있으며 실증적으로 체험도 하는 기독 신앙 생활인이다.
그런데 풍수사상(風水思想)에서는 오직 지기(地氣)만을 안다. 사람의 정신성을 인정하는 듯도 하나 결국 인정하고 아는 것은 ‘기(氣)’요 고차원적으로는 유물적 기 (唯物的氣)요, 소박하고 즉물적으로는 ‘지기(地氣)’만을 인지(認知)할 따름이다.
우리는 물적 차원의 기(氣)만이 아니요 혼적 영적인 능력도 있음을 인지하는 열린, 탁 트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풍수 운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저 영원한 영(영)의 세계가 있음을, 우리 주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말미암아 우리 주성령 하나님의 살아 역사 하심 을 닫는 은혜의 자리에 아직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로 지기(地氣)를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이 지기(地氣)하나로써 풀고자 하는 엉뚱한 억지 내지는 미신에 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분을 전체로 삼고 자 하는 오류가 있으며,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자 하는 잘못이 있다.
그 극단적인 예가 음택풍수(陰宅風水)에서 말하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이다. 우리도 물론 물적인 기(氣)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풍수사상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동기감응’은 아닐지라도 모종의 동기감응은 얼마든지 았음을 알고 있다. 기(氣) 혹은 기질(氣質)이 같은 사람끼릴 유유상종한다든지, 같은 사람인 고로 상대방의 마음을 미루어 짐직할 수 있다든지….
동기감응론, 곽복의 금낭경에서 비롯
풍수설의 동기감응론은 금낭경(錦囊經)의 동기감응론을 말한다. 금낭경은 주후 4세기경 동진(東晋)시대의 곽복(郭墣)이 지은 ‘장서’(掌書)를 이름인데 워낙 유명하여 ‘장경’(裝經)리라 높여 불리다가, 당나라 현종이 비단주머니에 두고 아꼈다 하여 ‘금낭겨’(錦囊經)이라는 이명을 얻게 된 책이다.
이에 대하여 장설이란 사람이 해석하여 말하기를 “위에서‘경’이라 한 것은 대략 ‘고장경’(古葬經)을 일컫는다. 만약 혈중(穴中)에 감응이 미치면 즉 부모의 복이 자식에게 미치는데, 부모가 돌아가시어 이미 장사를 치렀기 때문에 귀(鬼)라 하며, 살아있는 자식이 그 음덕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복이 살아있는 자식에게 미친다고 한 것”이라 하였다.
같은 구절에 대하여, 우리 나라의 풍수 원조로 추앙되는 도선국사에게 풍수를 가르쳤다고 속설이 전하는 (역사적 사실은 아님) 당대의 저명한 풍수학인 일행선사는 또 이렇게 주석을 다았다.
“위에서 경이라 한 것은 ‘금낭경’의 저자 곽박이 ‘청량경’(靑량經)을 인용한 것”이라고 하면서, 또 말하기를 “살아 있으면 사람(人)이요, 죽으면 귀신(鬼)이다. 부모가 돌아가시어 장사를 지냈는데 그 분들이 (즉 귀신이) 지기(地氣)를 얻으면 같은 종류의 가가 서로 감응하게 되고, 그 복은 반드시 살아있는 자식들에게 (즉人 에게)응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구리 광산(銅山)이 서쪽에서 무너지는데, 영험스러운 종(鐘)이 동쪽에서 울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고 하였다.
이 비유에 대해서는 장설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덧붙인 설명을 알아보자. 한 나라 미앙관(未央官: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에도 등장하는 한나라의 궁전 이름)에서 어느 날 저녁 아무 이유없이 종이 스스로 울었다;. 그것을 보고 임금이 괴이쩍어 주위를 둘러보며 물으니, 마침 곁에 시립하고 있던 동방삭(원래는 한 무제 때 사람, 벼슬이 금마문시중-金馬門侍中-에 이르고 해학과 변설로 이름이 난 사람이다. 三千甲子東方선으로 알려진 이)이, 이는 반드시 구리광산이 무너진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되지 않아 서촉 땅 진령에 있는 구리광산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왔는데, 날짜를 헤아리니 바로 미앙궁의 종이 아무 이유 없이 도 없이 스스로 울린 그 날이었다. 신기하게 여긴 임금이 동방삭에게 어떻게 그리된 줄을 알았느냐고 물었다. 동방삭이 대답하기를“무릇 구리 종을 만든 구리는 바로 그 구리광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기가 서로 감응하는 것은 사람이 부모에게서 몸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 “물체의 서로 감응이 그와 같은데, 황차 사람에게 있어서랴, 귀신에게 있어서랴” 하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 장설은 “구리광산이 무너짐에 따라, 바로 그 광산에서 나온 구리로 만든 구리 종이 스스로 우는 것은, 마치 돌아가신 부모의 본해(本骸)가 동기(同氣)인 자식에게 복을 입힘과 같은 것이니, 이는 모두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마치 부모의 장사지낸 유골이 생기를 얻으면 자손이 왕성한 복을 얻음과 같다”고 해석을 했다.
산 부모자식간도 동기감응 적용 안될 때 많아
이것이 ‘금낭경’이 밝힌 동기감응론의 비유적 설명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이란 돌아가신 부모, 조상의 유해가 땅 속에서 좋은 기(氣)를 받으면 그것이 살아있는 자식, 후손에게 복으로 돌아가고. 반대로 나쁜 기에 접하면 흉사가 있게 된다는 설이다. 그리하여 자식된 자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명당(명당)에다 부모 조상의 유해를 묻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이러한 풍수설이 오늘날 다시 인구에 회자되는 까닭은 이와같은 속신(俗信)을 여전히 따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증거이다. 이 개명한 천지에,21세기를 몇 해면 맞이하게 되는 세기 적 전환의 문턱에 서서 최첨단 과학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상당수 이러한 동기감응설의 주장을 여과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1997년10월20일 KBS TV특별기획“미스터리 법정”에서 ‘배심원들의 판결’을 보니 다섯 사람은 동기감응설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았으나 적어도 세 명은 그것을 신봉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갓 쓰고 간 담배 물고 나온 촌장들이 동의 표를 던진 게 아니라(이른바 배심원 가운데 그런 모습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사회 활동층인 젊은이들 가운데 그만큼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이 동기감응설을 받아들이고 있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
일찍이 이 음택풍수의 핵심인 동기감응설의 망국적 폐해와 그 허무맹랑성을, 멀지 않은 시대를 살다간 우리의 실학자들이 날카롭게 비판퇴치하기에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홍대용(洪大容)같은 이는 중형을 당한 죄수가 옥에 있을 때 겪는 고통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것인데도 그것 때문에 밖에 있는 자식이 악질에 걸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하면서, 산사람의 경우도 부모자식간의 동기가 감응되지 않음이 그와 같은데, 어찌 죽은 사람의 기 (氣)가 살아있는 아들에게 미치랴“고 조소를 금치 않았다.
우리도 홍대용과 같은 냉철한 판단력을 가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과연 홍대용의 말은 현실 적으로 올곧은 지적이 아니던가. 진실이 이러하거늘 어찌하여 문명이 더 발전했을 21세기 문턱을 사는 현대인들로서 아직도 음택풍수의 동기감응설에 현혹되고 있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옛 선조들의 명철한 판단력은 실로 실증(實證)에 입각하고 있지 단순한 주의주장이 아님을 한 두 예를 더 들어보자.
실학자들, 무덤 풍수와 자손 길흉 무관하다
성호사설(星湖僿設)의 작가 이 익은 전주 경기전 부근에 있는 묘소를 철거할 때 그 무덤의 풍수적 적부 여부와 그 자손의 길흉을 살펴보니 제대로 부합되어 나타나지 않더라는 예를 제시하며 그 허망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 묘자리 잘 쓰고 못 쓰고 함에 따라 지식의 길흉(吉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이 이와같이 실증되고 있는데도 ‘동기감응론’을 들어 음택풍수를 아직도 신봉할 수 있다는 미신적 집착은 어디서 오는가?
박제가 (朴齊家)의 날카로운 논증을 피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중국의 들녘을 보면 모두다 밭에다 장사를 지냈는데 한없이 넓은 들에 봉긋봉긋한 것이 서로 비슷하며, 당초부터 청룡백호며 사격(沙格) 진혈(진穴) 따위가 다를 것이 없다. 시험삼아 우리나라 지사(地師)에게 이 곳에 와서 묘터를 잡게 한다면 호호탕탕(浩浩蕩蕩-아주 넓고 끝이 없음)하여서 평소에 공부하였던 것을 바꿔야 할 것이니 장사에 대하여 한 가지로만 논할 수 없음이 이와 같다….
매장이 아니라 수장(水葬). 화장(火葬). 조장(鳥葬). 현장(懸葬).을 하는 나라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임금과 신하도 있다. 까닭에 오래살고 일찍 죽음과 집안이 흥하고 망함과 팔자가 궁하고 좋음과, 살림이 가난하고 부함은 천도의 자연이고, 삶의 행동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장사한 터의 좋고 나쁨에 관련시켜 논할 것이 아니다.“
이와같이 이 민족의 선각지들이 음택(陰宅) 발복(發福)의 허망함을 힘써 논증해 주었는데 도 음택풍수에 아직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우리 선각자들만큼 철저하게 반성해보지 못한 까닭이리라 생각된다.
과학적 단순동기감응실험, 음택풍수 입증 못해
1997년 10월20일 자KBS TV의 “미스터리 법정”은 CRS실험을 해보니 동기감응을 하더라는 식이었는데. 이또한 문제 투성이임을 조금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간취(간취)하여 마지 않았으리라. 과학사를 전동한다는 어느 교수의 지적도 있듯이 그 실험과 정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뿐더러 설혹 그 실험대로 세 사람의 젊은 청년에게서 채취한 정액에 자극을 가하니 세 청년의 정액에 같은 반응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음택풍수식의 동기감응설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은두말할 나위도 없다.
예를 들어 유물론자가 있어서 인간도 결국은 물질의 고도한 섬세한 현상일 뿐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즉 인간이 하나의 물질적 존재임에 불과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소박하게- “사람을 버스에 태워놓고 흔들어보니까 다른 물건처럼 움직이더라”는 내용을 실험해 보인다고 해서 사람이 다만 물질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논증이 다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물론 인간도 물질적 존재 곧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확인은 할 수 있겠으나 그로써 인간이 ‘다만’ 물질적 존재에 불과함을 입증하는 것은 아직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 청년으로부터 채취한 정액에 자극을 가하니 세 청년의 체내에 있는 같은 정액에 동일한 반응이 일어나더라는 ‘동기감응’ 이 실험상 입증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음택풍수의 동기감응론 을, 묘자리 잘 쓰면 자손이 잘 된다는 식의 ‘동기감응’을 입증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풍수지리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음습하고 어둑어둑한 곳은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양지 바르고 훈훈한 바람이 고즈넉히 열린 공간에 화통하게 불어오는 곳에서는 안도의 평안함을 본능적으로 느끼지 않는가.
바로 이러한 곳에-가능하다면- 자기를 낳아 주신 부모와 조상 네 를 모시고 싶어하는 것은 소박한 효심(孝心)의 발로로서는 가상한 일이요 기특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거기에 ‘동기감응론’을 들먹이면서 음택풍수를 따라 -억지로-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명당’ 묘자리 찾기만을 고수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음택풍수를 이론적으로 지탱하는 ‘동기감응론’을 단순한 애교로만 볼 수 없고 그 허구성을 예의 간파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우리 민족의 선각자들은 훌륭하게 해냈다. 이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세계관학적이고도 신앙적인 입장에서 음택풍수의 미혹에 스스로는 물론 다른 사람도 걸려들지 않도록 계몽할 책임이 있다.
풍수를 삶의 지리학적으로 풀려는 시도에 관해
이제 한 걸음 나아가 풍수사상을 조금더 깊이 논구하려면, 최근 풍수사상을 세상의 제도권에서 학술적으로 논의하게도 하고 모든 매스컴들이 앞다투어 다루는 데 일조 하는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최창조씨 의 풍수사상을 간단히 나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는 현명하게도 타락한 풍수사상과 건전하고 바람직한 풍수사상을 구분하면서 자신의 단호히 건강하고 생산적이며 건전한 풍수사상을 견지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풍수사상의 방향성 제시의 한 단초(端初, Ansatz)로서 감지하의 최근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환경운동을 생명운동으로 바꿔 부르려 한다. 생명운동은 풍수학 등과 결합해 지금 문명의 가장 초미한 문제인 에너지에 관한 원칙적인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수와 과학, 풍수와 환경운동의 연구와 활용이 본격화되기를 바란다. 환경운동과 과학계에 풍수운동이 일어났으면 한다.
에너지 체제는 양기(養氣)와 양생(養生)의 생명과학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기계와 공구의 회로들은 생명의 원리에 따라 양기 양생에너지 체제에 적합한 유기적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태양열 또한 채취 양식이다. 그러나 풍력, 조력과 함께 그것은 순환 질서이므로 오염, 변질, 파괴의 위험은 없었으나 과다한 의존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농업은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 산업으로 부활해야 하며 공업은 유기공업, 생태공업, 생명의 공업으로 대전환 해야 한다. 정보화는 영성의 통신, 창조적 신령의 통신 네트워크로 고양되어야 한다. 모든 생명은 통신한다. 무기물도 통신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지구와 우주와의 신기(神氣)의 통신이 가능하다면 현 문명의 모든 장애와 병폐와 모순은 다 극복될 수 있다.
채취는 먹이사슬의 질서이지만 과도하면 곧 약탈이다. 약탈은 생태계 변질의 끝이다. 기와 생명의 이중성, 상보성 원리, 음양의 원리에 따라 기를 모으고 융합시켜 새로운 생기를 창조하는 양기의 원리에 입각해야 오염과 에너지 문제의 원천적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풍수의 원리, 땅의 생명원리에 적합하다.
생명과 영성, 그리고 그것을 모으고 길러 새로운 창조의 기운을 생산하는 풍수의 기본 원리에서 새 문명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풍수사상을 다시 보니”. 신동아 1991.1)
김지하 시인의 이른바 생명운동의 윤곽을 가늠케 해주는 글이다. 오늘날 직면한 인류사적, 문명사적 의식의 대전환을 요청하는 위기에 직면하여 새로운 인류의 발전 성장 목적으로 나름의 방향 설정을 제시한 것은 의의 있는 시도라 여겨진다. 다만 풍수학을 인류가 당면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쥔 양하는 기본 전제와 출발을 제하고 본다면 말이다.
실로 생명의 존중과 모든 것들과의 생명의 창조적이고 거룩한 교통(交通), 교류(交流), 통신(通信)혹은 코이노니아를 현 문명의 발전 방향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신학(聖經神學/誠구神學)적으로, 그리고 진리와 생명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나아가 聖三位一體神)의 신앙에 입각하여 오직 더욱 가득히 주 예수(聖三位一體神)안에서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고 성장할 수 있음을 분명히 믿는다. 또한 이 새롭고도 영원한 생명은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공동체 가운데의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코이노니아(交流 交通 交際)(仁)로 지금부터 영원히 성장 발전할 것임도 확신한다.
이와 관련 최창조도 ‘삶의 지리학’을 말하는데 그의 본 뜻만으로는 의미 있는 방향설정으로 보인다. 다만 그는 교양 있는 풍수학자로서 그간 풍수사상의 이기적이고 국가 사회적인 병폐를 야기한 잡술(雜術)로서의 음택풍수 사상과 자신을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기(氣), 특히 지기(地氣)에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대단한 집착을 떨구고 있지 못함을 볼 수 있다. 이는 안타깝게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우리 하나님을 아직 만나보지 못한 소이 인 듯 하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구령 사업에 힘쓸 뿐만 아니라, 현 문명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해결의 방안을 제시하고 갈 길을 밝혀주는 이 새대 의 사명을 감당해야 될 것이다.
성경으로 본 풍수지리와 땅
세기말을 앞둔 지금 세계는 환경문제에 집중시키고 있다. 인류는 개발을 앞세워 너무도지나치게 환경을 파괴하였고, 그 결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온갖 환경 파괴와 오염으로 우리의 생존마저 위협 당하게 되었다. 최근 들어 선진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들은 파괴된 환경의 회복을 논의하는 국제회의를 끊임없이 열고 있는 형편이다. 환경문제는 이제 더 이상 어느 한 개인의 관심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생존과 걸린 공통적 관심이 되었다.
이제 신학계도 ‘창조질서의 보존’ 을 우선적인 당면 과제로 채택하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외면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무분별한 개발정책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인류는 비로소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오래 전부터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알고 있었다 그런 지혜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것이 풍수지리사상이다. 풍수지리의 근본적 개념 중 하나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하나의 상관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는 후대에 이르러 이기적인 기복사상과 접목되면서 잘못된 풍수속설로 전락하고 말았다.
땅에 대한 관심은 성경에서도 중심적 주제이다. 성경의 서두인 창세기는 하나님이 땅을 어떻게 창조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루어 졌으며, 성경의 대미를 이루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부분은 새롭게 창조된 새하늘과 새땅에 관한 내용이다. 이것은 성경의 시작과 마지막 모두가 땅과 관련된 것임을 말해준다.
본고는 성경의 중심주제 가운데 하나인 땅의 중요성과그신학적 개념은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한 땅 이해는 또한 전통적인 풍수지리에서의 땅이 해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땅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횟수가 구약에서만도 2,504번이나되며, 때문에 성경에서 네 번째로 많이 쓰인 단어이다. 말텐스 (Elmer A. Martens)교수는 단어가 사용된 통계만 놓고 보면. 땅 은 '계약' 보다도 더 중심적인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 에 관한 본격적인 연 구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것으로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가나 안땅의 신학적 의미는 아브라함의 가나안이주 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창세기 12장에 소개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부름에는자손의 번성과더불어 땅을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들어 있다(창12:2-7). 여기에 서 약속된 땅이란 이스라엘 민족이 앞으로 살게 될 실제적인 가나안 땅을 의미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더 깊은 신학적 차원이 들어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부름이 한 민족의 조상으로서의 어느 한 개인의 부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 속사를 향한 큰 부름. 곧 에덴동산에서 추방당 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부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가나안으로의 이주는 한 민족을 형성하기 위한 출발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 전체를 향한 구원의 부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가나안 땅 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땅이면서 동시에 인간 전체에게 회복될 에덴동 산의 유형으로 보아야 한다. 가나안의 유현으로서의 에덴동산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보다도 에덴동산은 단순히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생활 근거로서의 땅 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목적이 담긴 의미의 땅이다.
그 땅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 과 자연 사이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 는 삶이 가능한 축복의 땅이다. 하나님께서 에덴을직접 창설하시고(창-2:8), 인간으로 하여금 그곳에서 만족스러이 살게 하셨다. 물량이 풍부하여 네 강의 근원을 이루게 되는 에덴동산은 분명히 인간의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선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그땅의 비옥성을 지속적으로 가꾸며 보존시키는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 2장 15절에 언급된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하나님의 의도는 곧 축복된 에덴동산을 선물로 받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다스리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는 땅을 경작하여 가꾸는 인간의 근면한 모습을 보여주며. 지키다에 해당하는 샤마르는 창조된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사명을 말하고 있다. 전자가 개발의 측면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 곧 개발이 결코 창조의 본질을 파괴해서는 않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대신(對神)관계를 비롯하여 대인(對人)관계가 단절되었고 급기야는 축복된 땅으로부터 추방되는 비극적 운명을 겪게 되었다.
에덴과 가나안 땅을 유형적 측면에서 비교하여 볼 때. 두지역 사이에는 구원론적 차원에서의 신학적 연속성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가 잇다. 그러나 두 지역의 환경을 놓고 볼 때에는 심각한 해석의 난점을 만나게 된다, 즉 에덴동산은 네 강의 근원을 이를 만큼 물이 풍부한 곳인 반면에. 가나안 땅은 언제나 물의 부족을 경험 하게 되는 걱박한 땅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물이 풍부한 바벨론에 서 물이 없는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신 것이다. 외적인 조건을 놓고 볼 때, 아브라함이 이주하여 온 가나안 땅은 그가 떠나온 자신의 고향과 비교가 안될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는 고대근동의 비옥한 초생달지역 으로 잘 알려텨있는 당대 최고 문명의 중심지였다.
특별히 그곳은 거대한유프라 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흐르면서 생활에 필요 한 물을 넉넉히 공급해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가나안은 대조적으로 언제나 물이 부족한 문명 의 외곽지역이었다. 더구나 가나안의 남쪽과 동쪽 지역은 사막에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늘 사막의 고온건조한기후의 영향을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물이 부족 한 가나안으로 불러 내신 것인가? 유형적으로 에덴에 해당되는 가나안이 외형적 조건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띄게 되는 신학적 의도는 무 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가나안의 외형이 아니라 그 땅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고찰함 으로 해결될 수 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게 될 삶의 실제적 허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곳은 단순히 물의 풍부와 땅의 비옥함만으로 살아가 는 세속적인 땅이 아니다. 예레미야가 지적한 것처럼, 그곳은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렘2:13)는 신앙고백 위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거룩한 땅이다. 가나안 은 삶의 풍요성만 강조되는 아다마 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서 참다운 '아다마' 를 경험하게 되는 '에레츠' 로서의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디인가
성경에서 가나안 땅은 여러가지 다양한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름답고 광대한 땅(출3:8).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3:8, 민 13:27, 신8:9, 부족함이 없는 땅(신8:9)등이다.
이런 표현들 속에는 그 땅이 갖고 있는 비옥한 생산성을 비롯하여 그로 말미암아 생겨 지는 땅의 풍요로움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땅의 설명들은 단순히 땅의 객관적인 평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갖고 있었던 역사적 경험과 그 경험 속에서 발견한 신앙고백이 더 중요한 발달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이스라엘의 지리적 환경은 주변의 강대국에 비하여 그 조건이 매우 열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최고의 복지로 받아들일 수 잇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 땅을 조명하였기 때문이다
1)땅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속한다
가나안 땅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우선적으로 고백하였던 신앙은, 하나님이 그 땅의 주인이라는 점이다. 물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된 땅의 모든 소유권을 가지고 있음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선택과 밀접히 연관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될 것이라 는 선언 속에서도 "세계(땅)가 다 내게 속하였다(출19:5)는 말씀이 그 배경과 근거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이 땅의 주인되심이 가장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는 곳은 회년 규정과 관련된 레위기 25장23절이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너희는 나그내요 우거하는 자로써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 귀절에 나오는 '토지' 는 히브리어 '에레츠' 에 정관사를 붙인 '하아레츠' . 곧 그땅 (the land)인데, 이런 경우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강조는 땅의 소유가 하나님에게 속한것이기 태문에 땅을 개인의 소유물처럼 마음대로 처분할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강조는 땅의 소유권자가 하나님이심으로 이스라엘은그 땅에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며 보장된다는 점에 있었다.
(2)선물과 기업으로서의 땅 개념
하나님이 땅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개념과 연관된다. 성경에서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선물임을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땅의 약속은 하나님이 그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확약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도 신실하신 것이기 때문에 약속이기보다는 오히려 맹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데이비스 같은 학자는 '약속의 땅' 보다는 '맹세의 땅' 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명기서에서는 하나님이 땅을 선물로 주신 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귀절이 30여 군데 이상이나 되고 있다. 신명기 6장 10-11절은 가나안땅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선물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귀절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이나 집, ''네가 파지 아니끌' 우물 "네가 심지 아니 한" 포도원과 감람나무 등을 얻게 된다는 표현은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노력이나 계획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니넘의 선물임을 밝히고 있다.
가나안이 하나님의 선물에 의한 땅임이 자주 반복 되는 것은 그땅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로 은혜를 강조하는 것과 더불어 이스라엘은 스스로 그 땅을 차지할 아무런 근거나 능력이 없음을보여주기 위함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그땅을 받을 만한 아무런 공로도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아름다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은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신9:6).
그들은 목이 곧은백성으로서 늘하나님을 거역하였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선물로 받을 수 잇는 근거를 성경은 두 가지 측면으로 제시한다. 하나는, 하나넘이 이스라엘의 열조를사랑하셨기 때문이고(신4:37-38), 또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힘이 세거나 수효가 많은 민족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약한 민족이었기 때문이다(신7:7).
전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 준다고 한다면, 후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결코 자만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하여 한 일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땅으로 나아가 차지하는 '순종' 이었다(신1:8,4:1,6:18,7:1,8:1,10:11, 11:8.29)
가나안 땅이 하니님의 선물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유업이라는 법적 용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유업' 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나할라인데,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소유권으로서의 재산을 의미한다. 그런 기본적 의미와 더불어 나할라는 땅의 소유권자이신 하나님이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 가나안을 점령한 이후 각 지파들에게 분배된 땅. 그리고 분배된 땅이 후손들에게 분깃으로 물려주는 상속의 땅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폰 라드가 지적한 것처 럼, 약속의 땅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땅 보다 '유업' 이라는 용어로 훨신 더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안식년을 비록하여 희년 등과 같이 토지재산권과 연관된 중요한 사회제도들은 모두가 땅이 하나님의 선물로 분배받아 사용하고 있다는 신앙과 직결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마치 소작논이 지주의 땅을빌어 생활을 유지하듯이 , 나그네(게르) 신분으로서 하나님의 땅에 살고 있을 뿐이다 (레25:23).
(3)거룩한 삶을 요구하는 가나안땅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 신분으로 그 땅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한 생활양식 이 요구되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땅을 자유롭게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땅이 선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이후에도 땅의 소유권은 여전히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에 대한 책임성을 요구하시게 된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 윤리, 도덕적 규정들은 모두가 그 땅에서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들로 이해된다. 특히 신명기12장 1절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을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회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은 신명기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신4:5, 14; 5:31;6:1; 11:31-32).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소유하는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한다면, 그 땅을 유지하고 그 땅에서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이스라엘의 순종에 있었다.
성경은 특별히 가나안 땅에서 행해서는 안되는 특정 범죄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일들을 행하였을때 그것은 자신들에게 부정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그들이 살고 있는 땅 을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매춘행위는 온 땅의 죄악이 되며(레19:29), 피를 흘리는 일도 땅을 더럽히게 된다(민35:29-34).교수형 당한 죄인의 시체를 밤까지 나무에 달아 매놓지 말아야 할 것도 땅의 더러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신21:23).
과연 이러한 범죄들이 실제적으로 땅을 더립히게 되는 것인가? 물론 땅이 더러워진다는 표현은 일종의 유형적 상징띠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더불어 그땅에 거하시는 분으로이해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잘 못을 범하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에게 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더럽혀진다는 생각이 불가능하므로 그 대신 땅이 더럽혀진다는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땅이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중간지점으로 역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땅이 더럽혀지는 것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었던 가나안 원주민들도 그 땅을 더럽힐 수가 있었다. 레위기 18장 24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앞서 가나안족속들이 그땅에서 쫓겨난이유는그들의 가존한 일로 인하여 땅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라고 밝히고있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 15장 16절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기가 왜 아모리 족속의 죄악과 연관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이스 라엘이 출애굽한 뒤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은 아모리족속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이 그 땅에서 축출당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차지할수 있었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과 더불어 가나안 족속들의 행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땅과 관련된 하나님의 공의는 이스라엘에게 도똑같이 적용되었다. 이스라엘이 행 하는 가증된 일들은 땅을 더럽게 만들게 되고 더러워진 그 땅은 이스라엘을 토해 낸다는 것이다(레18:28).
땅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 땅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해야만 했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땅에서의 생존을 유지하며 주어진 복을 누릴 수가 있었기때문이다.
(4)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하나님의 선물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가장 크고 좋은 선물임 이 분명하다. 그래서 성경은 가나안의 풍요로움을 여러가지의 다양한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가나안에 대한 다양한 표현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다. 성경에서 20여회 정도 사용된 이 표현은 가나안 땅의 비옥한 성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젖' 과 '꿀 은 옛 근동지방의 신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신의 특별 선물 혹은 신 의 기호 식품들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언급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생산성 높은 '아름다운 땅에 대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명기 9장7-9절에서는 그 땅의 비옥함을 "그곳은 골짜기에 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의 실제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표현은 액면 그대로를 받아 들이 기가 힘들다. 일년중 절반 이상 계속되는 고온 건조한 기후적 환경과 개발의 여지나 조건이 희박한 땅, 더구나 이스라엘의 주변을 동쪽과 남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사막들, 거기에다 이스라엘의 중심 무대였던 산간지방은 온통 석회질 바위로 뒤덮여있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은 어디인가를 묻지 않을수없다
과거에는 젖과꿀이 흐를 만큼 기름진 땅이었으나 험난한 역사를 겪으면서 본래의 아름다움이 파괴되어 지금과 같은 황폐함만 이 남게 된 것일까? 아니면 성경의 표현은 이스라엘 땅에 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이상적인 땅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에 불과 한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은 가나한을 다른 지역과 비교 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땅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땅으로 받들였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선물로 주신 땅이기 때문에 다른 비교가 허용 될 수 없는 절대적 의미의 땅으로 받아들며 졌다. 신명기 11장 10-12에서는 이집트와 가나안 땅을 비교하고 있다. 이집트는 물이 풍부하여 언제라도 파종과 물대기가 가능한 땅이다.
반면에 가나안 땅은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곳이며, 땅 경작에 필요한 농업용수는 전적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의존하는 땅이다. 이러한 객관적 비교에 의하면 이집트는 살기에 편하고 좋은 문명의 중심지 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신명기 저자는 이집트 보다 가나안 땅이 훨씬 좋은 땅임을 보여주고 잇.다.
그러한 편 가의 근거는 가나안이 하나님의 권고 하시는 땅이라는 점과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곧 세초부터 말까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서 얻은 풍요는 단순히 먹을 것이 많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의 풍요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축복은 하나님 안에서 얻는 쉼의 축복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관계속에 있는 '땅' 이라야
땅은 인간의 생존에서 어느 무엇보다 중요시 되는 필수적 요소이다 그래서 땅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변함없이 추구해온 재산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땅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더 좋은 땅을 찾게 되었고, 그러한 노력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도 발 견되는 공통적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부터 좋은 땅을 선택함으로 개인과 자손이 잘되며, 집안과 사회가 안정되고, 더나아가 국가가 번영하는 미래가 있기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바람은 풍수사상으로 체계화되기도 하였다. 성경에서도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하 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에게 자손번성의 축복과 더불어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에게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 이후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고향으로 정착하였으며 수천년에 걸친 험난한 역사속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나가는 견인차적인 역할을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약속받은 가나안 땅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더 좋은 지리적 환경이나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다였다 무엇보다도 항상 물의 부족을 경험해야 하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 땅을 다른곳과 비교되지 않는 절대적 땅이요 최고의 복지로 받아들인다. 무엇이 그들로 그러한 토지개념을 갖게 하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들의 관심이 '아다마 로서의 땅이 아닌 '에레츠' 로서의 땅에 있었다는 것서 찾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도 따지고 보면 더 좋은 땅에 열악한 환경으로의 역이주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이 목표하였던 가나안땅도 나일강의 풍부한 수원이 있는 이집트에 비하면 형편없는 환경의 땅이 분명하다.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지향하였던 땅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하나님의 지배나 있는 땅 '에레츠 였다. 이런 신앙 안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부정적인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할수 있었고. 더나아가 땅을통하여 하나님을섬기며 순종하는 삶을추구하였다.
그들에게 가나안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중간지점이었으며 하니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가능한 거룩한 영역이었다. 땅에 대한 이러한기본적 자세는 가나안에 감추어진 땅의 참된 축복성, 곧 '아다마' 를 발견하고 누릴 수 있는 영적 시각을 열어주는 것이다.
풍수사상에 대한 신학적 제안
풍수지리를 흔히들 동양철학의 논리로 땅을 점치는 비과학적 미신 쯤으로 여긴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렇게 글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풍수지리의 실상은 교회로 하여금 그것을 주목하게 하며 신학적으로도 다루어 볼필요를 충분히 느끼게 한다. 현재 한국의 풍수는 풍수 지리학 이라는 아카데미즘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우 학술총서에서 는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인문사회과학서의 하나로 「한국의 풍수지리J(1984)를내놓았다 이 책을 쓴 당시 서울대 지리학과 최창조 교수는 그 동안 뒤처져있던 풍수지리를 한국의 대표사 상의 하나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하였다. 그로 인해 세계 각국의 지리학계는 풍수설이 지리학을 규명하는 핵심적 이론이 된다는사실 을 서서히 인정하고 있다 한다.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이상해 교수는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풍수지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건축가 박시익은 이후 고려대학교 에서 "풍수지리 발생 배경에 관한 분석 연구 건축에의 합리적인 적용을위하여"(1987)란 논문 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풍수지리 연구자로서는 국내 최초로 공학박사가된 사람으로, 미신으로 여기기 쉬운 풍수지리를 공학과 산업의 대상으로 올려 놓은 점이 인정 된다고하겠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풍수지리학과를 설치 하는 대학과 대학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미 건축분야에서는 풍수원리에 입각한 방법들이 실제로 응용되고 있다 건물의 형태와 방향, 구조 등을 풍수에 맞춘 예들이 부지기수이고 지하 에서 수맥이 올라오는 경우 그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동판을 바닥재로 시공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풍수 인테리어' 라는 새로운 분야가 생겼는데, 안방. 현관, 부엌 , 거실, 화장실 등의 위치와 방의 형태, 천장의 높이와 형태. 창문의 규모 등을 풍수적으로 안배하는 것이 그 일이다. 이렇듯 풍수지리는 이제 더이상 '유물' 로 남아있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의 대표적 사상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고, 현대 지리학에 독특하게 공헌할수 있는 체계와 경험을 갖고 있다.
종래 의 지리학이나 역사학, 철학, 민속학, 문화인류학 등의 틀을 넘어서 지금은 건축학 및 환경학 등공학과산업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른바 지관(地官)이나 승려, 혹은 전통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의 형이상학적 시각을넘어서 건축가와 인테리어 전문가등의 실제적인 손으로 파급되고 있다.
요컨대 전통적인 풍수지리설이 과학화. 현대화, 대중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교회와 신학도 풍수지리에 관심을 가질 때가 온 것이다. 이에 필자는 목사로서 풍수지리의 원리와 실제중 무엇을 어떻게 성경적으로 인정할 수 있고, 또 인정할 수 없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필자는 특히 이 작업의 합당한 효과를 위하여 '하나님의 입김' 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먼저 풍수지리란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토지관(土地觀)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설의 원리와 기본은 크게 세 가지로서 음양론(陰陽論)과 오행설(五行說) , 그리고 주역(周易)이다. 중국류의 우주생성론은 동양적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것에 따르면 우주의 근원은 태극(太極)이다.
그것이 음양(陰陽)으로 분리되고. 이 음양이 기가 교차되어 물(水), 불(火) , 나무(木)금속(金) 흙(土) 등의 오행(五行)을 만들었고. 오행이 서로 수없이 조합되어 만물(萬物)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다 즉 자연이든 사람이든 형이상자든 형이 하자든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을 음양의 기(氣)로 해석하는 것이다.
역(易)이란 문자 그대로 변화' 를 뜻하는 것으로서 우주의 근본 원소인 음향의 기운이 끊없이 변화하며 만물을 빛어내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은 이 변화를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설명한 책으로서 결국 역(易)이란 음양이기(陰陽二氣)를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음양오행설과 주역이 어떻게 풍수의 원리로 적용되는가?
풍수의 목적은 이미 널리 알고 있듯이 땅 속을 흘러다니는 생기에 감응함으로써 인생의 재난을 피하고 복을 받 을수 있는 명당자리, 즉 진혈을 찾는 데 있다. 풍수설의 기본원리는 과정과 방법을 통하여 알 수있다. 여기에는 풍수의 기본 요소인 산과 물,방위가 음양 오행설 및 주역의 팔괘등과 혼합되어 여러 가지로 중요시되지만 역시 그 본질은 천지의 생기를 감응하여 받음으로써 인생의 행복을 구하는 것이다.
결국 풍수의 원리들 가운데 근본이 되는 기의 이치로써 음양이기론 인 것이다. 대부분의 풍수지리서들도 풍수의 핵심이 기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땅 녹의 생기가 가장 충만한 명당 (진혈)을 찾는 것이 풍수의 목적이며,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방법이 곧 풍수지리의 이론인이다. 필자의 눈에도 풍수지리설은 기(존)의 이론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풍수설을 알려면 기를 알아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의 존재와 기능을 입증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기의 존재를 묻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그 기능을 활발히 묻고 있는때이다 현재 기에 대한현대적 연구가다 양하게 이루어지면서 기의 의미를나타내는 말 들이 연구분야에 따라점차로 많아지고 있다
.필자가 알고 있는 것들만 해도 바이탤러티 .바이오플라스믹 에너지 , 미트겐-선. 프리 에너지, 공간 에너지 생체 에너지, 생명자기 생명에너지, 코스믹 에너지 플라스마 에너지 , 바이오 라스마, 생명자기적 파동, 오르곤 에너지. 명선, 면역력, 에롭틱 에너지, 에텔. 제로점 에너지. 피라미드 파워, 오라, 히란야 파워, 헥 사그램 파워. 사이코트로닉 에너지, 영적 유동 체, 두뇌 방사. 생명의 기운, 우주기운. 염력 , 우주딜, 우주파동, 우주의식, 지상의식, 빛. 광명. 실상 성령 등 약40여 종이 있다. 이 많은명칭들은 전통적으로 기(준. Ch' i~Ki)라고 일컫는 미지의 에너지의 존재를 입증해주기에 충분하다.
물론 기의 존재론적 정의를 확실하게 내리기에는 아직도 멀었다. 그러나 이토록 다양한 명칭들이 기가 에너지로서 존재한다는 사실과 인간과 자연의 모든 영역에 걸처 포괄적으로기능 하고 있다는사실 또한근대과학의 물김이원론과 환원주의를 극복한 현대물리학적 세계관의 모범이라는 것을 증거 하고 있음을 부인 할수는 없다.
1388년 동경에서 열린 중일평화우호1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움의 공동각서는 바로 이러한 기의 규모와 학제성-과띤벌을 보여준다. 인간 과학의 입장에서 술발하는 기의 과학은 철학, 심리학, 의학, 동양의학, 물리학, 재료과학, 정 보과학 및 종교학 등을 인접학문 및 영역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기에 대한위의 많은명칭들 과학제적인 현대 기과학의 동향은 사실상 '우주생기 생기만물 이라는 기의 전통적 개념과 영역에 그대로 접근하고 있다. 기는 우주의 근본요소로서 우주에 가득차있고, 인간과 자연에 존재 하는 모든 삼라만상은 기의 무수한현상 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sl다. 풍수지리의 이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 특히 철학과 종교부문은 충분히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철학과 종교는 우주의 근본적 원리와 궁극적 해답을 찾는 첫을 사명으로 삼는데, 그것은 사실 창조주의 계시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위에서 열거한 기의 명칭들 가운데 성령' 이라는 이름은 기에 대한 이해가 명백히 잘못된 경우이다 하나님께서 기일 수는 없다. 기에 대한 교계와 신학계의 이해가 세계적으로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고 있는점을 감안하면 이런 오해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성령과 기를 직접 비교하여 하나님을 기화시키는 것은결국 하나님의 인격성을박탈 하며 신학을 기학으로 만드는 결과를 빛게 돼있다. 처음부터 너무나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보인다. 교회와 신학이 기를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개념과 범주를 성경적으로 비평할 만한 도구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기는 하나님의 입김에 붙들려있다
필자는기의 개념과벙주에 대한성경적 비평개 념을 '하리넘의 입김' 이라고 생각한다.' 풍수지 리를 성경적으로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입김과 기를 간단하게나마그 개념과 범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