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읽으시는 분 중에 혹시 말을 많이 해서 입이 아프신 적이 있는가 모르겠다. 내 경우에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점 그러더니 울증(농입니다, 또 오해하실라- 몸 피곤할 때란 뜻입니다)일 때는 정말, 말이 싫고 귀찮다. 집에서와는 반대로 밖에서는 별로 말 안하는 걸 즐기는 내 경우는 정도가 좀 심하다. 누가 얘기 하시는 분이 계시면 그저 좋다. 내가 하는 얘기나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나 다 그 게 그 거다. 다 생각이 있으신 얘기들이니까 내가 꼭 얘기 안해도 되고 해서 내가 말이 적으면 더 좋다, 입 안아프니까. (너무 이기적인가, 잘 모르겠다) 내 맘이나 편하고자 그냥 '말 많은 것보다 백번 좋다'고 자위한다.
근데 꼭 자기가 한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 계시다.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모여서도 꼭 얘기를 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 (사실 나도 몸이 내 맘대로 콘트롤이 잘 안될 때는 그런다. 말 하기가 귀찮아지다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쉴 줄 모르고 나오는 이유가 그렇다. - 지난 번 나눔의 집 송년회 때 쏭샘이 한마디 하라고 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쓸데 없이 말만 많았다. 분위기가 얼마나 썰렁하던지... 내 몸도 잘 가누질 못해서 분위기 썰렁한 줄 파악도 못하는 거다. 쏭샘 죄송.) 이런 분이 통반장 300명씩 모여 있는 곳에서 한마디 하면 그 효과가 참 좋다. 그런데 꼭 얘기 안해도 될 때 말이 많아서 분위기 가라앉힌다. - - ;
내 경우에는, 특히 수요일을 지나면서 스파트를 올렸던 내 체력이 주일에는 거의 바닥이 나는 반면 이성적인 상태는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그 상태가 극명하다. 정희씨 말로는 교회 사람들에게 내가 차갑게 대한다고 한다. 사실은 그 게 아니라 떨어진 체력에 할 일은 많고 대충 그 게 그 얘기면 말 안하는 게 내 속과 겉이 편해서 그런 건데, 오해가 생기는 모양이다. 한무리교회에 출석한지 7~8년은 된 거 같은데 아직도 형님 집사님들이 말을 놓지 않고 있는 게 어쩐지 그런 거 같아서 깨름직하다. (오해들 마세요. 제가 울증일 때라 ~~~ 조증일 때는 반대거든요, 민경이를 보시면 아시잖아요. ^^)
사람들은 다 착각을 하고 산다. 그 중 하나가 다 자기 얘기를 잘 들을 거라는 착각이다. 신문에 투고를 하면 자기가 쓴 글부터 찾아 본다. 혹시 잘못 나가지나 않았나... 하지만 EBS의 실험결과, 전혀 반대로 사람들은 누가 무슨 얘길 하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더 잘 기억한다. 들을 귀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고 하는 착각에 살기 때문이다. 신문에 쓴 자기의 투고에 대해 기억해주는 사람들, 방송에서 자기가 한 말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들, 별로 없다. 착각이다. 다 착각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회개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착각은 긍정적인 면도 있다. 우리가 어떻게 착각의 긍정적인 면을 살리느냐가 삶의 활기를 찾기 비결일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 일이다. "연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습니다. 글이 써졌다면 그것은 누군가 연필을 잡고 글을 썼다는 것이지요. 나는 가끔 깊은 착각 속에 빠져 들곤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나를 들어 쓰셨던 것임에도 나는 내가 무엇을 한 것 마냥 으쓱해 하곤 합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주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되어지길 기도합니다. *^^* "
말 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 착각을 한다면 "아마 내가 말을 안해도 할 말들은 다 한다, 내 동료들이 다 잘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신뢰가 구축된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긍정적인 착각일 것이다. 말하기 귀찮아서 안하는 내 경우 말고 이런 긍정적 착각을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신협도 하고 마을만들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 안해도 알아서들 잘 하니까 ~~~ 참 기분을 좋게 하는 착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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