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이석(宋彝錫)
[본관] 은진(恩津)
[생졸년] 1641년(인조 19)~1694년(숙종 20) / 향년 53세
[거주지]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군서(君叙), 고조부는 응기(應期)이고, 증조부는 방조(邦祚)이며, 조부는 시형(時瑩), 부친는 기선(基善)이다. 증조부 방조(邦祚)와 우암(尤菴) 시열(時烈)의 부친인 갑조(甲祚)가 형제간이므로 시열(時烈)에게는 재종손(再從孫)이 된다.
1684년(숙종 10) 선공감 감역관(繕工監監役官)을 제수 받은후 , 1686년(숙종 12)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를 지내다가 1687년(숙종 13) 2월에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도임(到任)하여 1688년(숙종 14) 3월에 지병으로 교체되었다.
선공감 감역으로 재임시 환관(宦官)이 제멋대로 금원(禁苑)에서 벌목하는 것을 엄금하다가, 그들의 중상모략을 받아 파직되었다고 전한다. 공(公)은 54세인 1694년(숙종 20) 12월 25일에 졸(卒)하여 배위(配位) 완산최씨(完山崔氏)와 청주(淸州) 만산(晩山)에 합장하였다.
최씨는 감찰(監察) 세영(世榮)의 딸인데 부덕(婦德)이 있어 공을 잘 받들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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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현감 송공 묘갈명(縣監宋公墓碣銘)
은진 송씨는두 선생이 나온 뒤로 우뚝이 하남(河南)과 같은 가문이 되었으며, 그 자제들은 모두 행실로 가문을 계승하였다. 휘가 이석(彝錫), 자가 군서(君叙)인 사람이 있었는데 우암의 종손(從孫)이다. 약관의 나이에 부모를 잃었으나 그 집안을 보전하고 제사를 지켰다.
아우와 누이 예닐곱 명은 모두 어렸는데, 지성으로 길러서 때를 놓치지 않고 혼인시켰다.서쪽 교외에 연체당(聯棣堂)을 지었는데 우암이 기문을 지어 그 행실을 찬미하고, 또 유중도(柳仲塗)의 말을 인용하여 권면하였다. 공은 전전긍긍하며 감히 가르침을 실추하지 않고, 항상 지성으로 봉양을 마치지 못한 점을 지극히 애통해하여 아우들을 마주보며 눈물을 흘렸다.
매일 새벽이면 가묘에 인사드리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고하였으며, 기일을 만나면 마치 처음 상을 당했을 때처럼 애통해하였다. 재계할 때는 반드시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으며, 한겨울에도 목욕을 그만두지 않았다. 따로 제기를 갖추고 재계하는 옷은 다른 데 쓰지 않았다.
평소 늘 옛 교훈을 인용하여 술잔을 앞에 두면“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는가.”하고, 밥상을 마주하면 반드시“조금씩 먹고 빨리 삼켜야 한다.”하였으니, 한마디 말과 한 가지 일조차 소홀히 넘어가지 않았다. 남을 대할 적에는 너그럽고 온화하여 간격을 두지 않았으나 옳지 않은 일을 보면 용서하지 않았기에 친족들이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공의 조부 진사 휘 시영(時瑩)은 예전에 많은 선비들의 앞장을 서서 상소하여 율곡과 우계 선생이 받은 무고를 변론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97, 숙종 23), 대군 사부에 임명되어 심양(瀋陽)으로 가게 되었는데, 형님 충현공(忠顯公) 시영(時榮)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였기에《예기》에 실려 있는 형제의 원수를 대하는 의리를 인용하여 마침내 가지 않았다. 부친 휘 기선(基善)은 가문과 국가의 깊은 원수를 통탄하며 은둔하여 생애를 마쳤다.
공 역시 평소 벼슬할 뜻이 없었으나, 만년에 선공감 감역관에 임명되자 억지로 한번 나아가 법을 지키고 공무를 수행하였다. 환관이 대궐 뜰의 나무를 함부로 베는 것을 보고 통렬히 금지하였는데, 곧 그의 흉계에 빠져 대궐 담을 수리하지 않은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제거(提擧)가 변호하여 공을 복관시키고 환관에게 벌을 주었다. 차례로 승진하여 전생서 주부가 되고, 비안 현감(比安縣監)이 되어 백성을 사랑하고 학교를 일으켰으나 겨우 1년 만에 병으로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우암이 화를 당하자 공은 스스로 청주(淸州)의 만산(晩山)에 은둔하였다.
선생의 손자 교리 주석(疇錫)과 의논하여화수(花樹)의 고사를 본떠 계(禊)를 맺어 우호를 다지기로 하고 동당계(同堂禊)라 이름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공은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 12월 25일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54세였다. 처음에는 문의(文義)에 장사 지냈으나 나중에 만산 선영 유좌(酉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모친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부친은 목사 성기(聖基)이다. 배위는 완산 최씨(完山崔氏)로 감찰 세영(世榮)의 딸이다. 공보다 1년 먼저 태어나 77세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한번은 자기 아들을 여종에게 맡겨 젖을 먹이게 하고 자기는 남편의 아우에게 젖을 먹였는데 아우는 살았지만 아들은 죽었으니, 친족들이 어려운 일이라 여겼다.
3남 4녀를 낳았으니 장남 백원(百源)은 일찍 죽었고, 다음 성원(性源)은 군수를 지냈고, 다음은 만원(萬源)이다. 딸들은 진사 이흥조(李興朝), 사인 이사도(李思道), 진사 김시서(金時叙), 사인 조명제(趙明濟)에게 시집갔다. 백원의 계자 갑상(甲相)은 진사를 지냈고 김종대(金宗大)와 한상태(韓相台)는 그의 사위이다.
성원의 계자는 복상(復相)이고 딸들은 참봉 임안세(任安世), 사인 이윤제(李胤濟), 이광(李垙)의 아내가 되었다. 김시서의 아들과 사위는 현행(顯行), 면행(勉行), 근행(謹行), 선행(善行), 이동필(李東馝), 안표(安杓)이다. 성원이 명을 청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지금 사람들이 / 凡今之人
누군들 형제가 없으랴만 / 孰無兄弟
서로 원망하고 도모하여 / 相怨相猶
변치 않는 이가 드무네 / 鮮或不替
연체당이라는 편액을 달고 / 聯棣之扁
동당계를 맺었네 / 同堂之禊
나는 그 사람 생각하니 / 我懷伊人
그 마음 몹시 은혜롭네 / 其心孔惠
우애하고 순종하니 / 曰友曰順
효도를 바탕 삼았네 / 惟孝爲基
대현이 없었다면 / 不有大賢
이 사람이 어디서 본받았으랴 / 斯焉取斯
내가 그 미덕을 모아 / 我最厥美
후세에 전하노라 / 以訊來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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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현감 송공 묘갈:
이 글은 송이석(宋彝錫)의 묘갈명이다. 송이석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군서(君叙)이다. 1641년(인조 19) 태어나 1694년(숙종
20) 12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두 선생: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말한다.
[주03] 하남(河南)과 같은 가문:
하남의 유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주04] 서쪽 …… 권면하였다:
송시열의 기문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43에 〈연체당기(聯棣堂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유중도는 송나라 사람 유개
(柳開)이다. 형제간의 다툼이 부녀자에게서 비롯된다고 한 그의 말이《소학》〈가언(嘉言)〉에 실려 있다.
[주05] 어지러운 …… 않았는가:
《논어》〈향당(鄕黨)〉의 “술은 일정한 양이 없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06] 조금씩 …… 한다:
《예기》〈소의(少儀)〉의 “많이 떠 먹지 말고 들이마시지 말며 조금씩 먹고 빨리 삼켜야 한다.[毋放飯, 毋流歠, 小飯而亟之.]”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07] 예기에 …… 의리:
《예기》〈곡례 상(曲禮上)〉에, “아버지의 원수는 같은 하늘을 이지 않고, 형제의 원수는 무기를 찾으러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벗의 원수와는 같은 나라에서 살지 않는다.[父之讐, 弗與共戴天, 兄弟之讐, 不反兵, 交遊之讐, 不同國.]” 하였다.
[주08] 화수(花樹)의 고사:
당(唐)나라 장안(長安)의 위씨(韋氏) 집안에서 친족들이 모여 꽃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잠삼(岑參)이 〈위원외가화수가
(韋員外家花樹歌)〉를 지어 칭송하였다. 이로 인해 친족의 모임을 화수회라고 한다.《岑參集 卷4》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