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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 - 키예프 루스가 번영을 구가하다가 여러 공국으로 분열하다!
'키예프 루스' 는 “루스” 라고도 불리는데 중세 동유럽에 존재했던 나라로 유럽에서는
가장 영토가 넓었으며 류리코비치 제국 이라고도 하는데...... '키예프 루스‘ 와
그 키예프 루스의 일부인 '키예프 크냐지국 (키에프 공국)’ 은 전혀 다른 개념 입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 측에서는 '키예프 루스' 가 멸망한 뒤로 블라디미르- 수즈달 대공국 → 모스크바 대공국
으로 이어진다고 보며 반면에......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몽골 침공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남서부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으로 키예프 루스 직계가 이어지니 "최초 우크라이나 국가"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프랑크왕국의 대왕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라틴어로 쓰면 Karolus (Carolus) 인데,
프랑스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이라며 “Charlemagne 샤를 마뉴” 라고 부르는데 반해
독일인들 역시 자기 조상이라며 “Karl der Große 카를 마르텔” 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합니다.
스웨덴 남부에 살던 노르드인 (바이킹) 들이 발트해를 건너 벨리키 노브고로드 일대에서 류리크
왕조 (노보고르드 공국) 를 개창하고는 그후 남하해서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정복한 후에 제2대 대공 노브고로드의 올레그 때 중심지를 남쪽 키예프 (키이우) 로 옮겼습니다.
이 나라를 세운 민족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노르드인이라는 주장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니,
같은 바이킹 계열 집단이 정복하여 지배층이 된 노르망디 공국,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잉글랜드 역시 노르드인의 도래 이전에도 이미 일정 수준의 국가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국가’ 수준으로 발전했는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노르드인들이 도래하기 전부터 이 지역에는 토착
세력이 존재했으며, 북쪽 바이킹들과 남쪽의 유목민들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동슬라브 계통 국가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자신들의 시조가 되는 국가를
노르드인들이 세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부정하고 동슬라브인들이 건국했다고 주장하지만 키예프
루스의 노르드인 도래설을 써놓기도 하니 키예프 루스가 노르드인이 세운 국가라는 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루스' 라는 단어 자체가 노르드인을 의미하는 만큼 노르드인이 상대적으로 가장 지분이 크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으니 초기 러시아 연대기나 기록들은 루스인을 정복자- 지배자, 슬라브인을
피정복자- 피지배자로 구분하며 '루스인의 땅' 은 단지 이 노르드인들이 점유하고 있는 땅으로 국한합니다.
당시 러시아 땅에는 발트인, 핀인, 슬라브인, 튀르크인들이 함께 살면서 서로 연합하기도 하고 분열하기도 하면서
섞이다가 최종적으로 노르드인에 의해 군사적으로 통합되고 훗날 기독교 공인으로 인해 문화적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잡다한 민족들이 '동슬라브인', '루스인' 이라는 동일한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중세 초기에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인하여 유럽의 동쪽 대부분은 슬라브인이 다수인 지역이 되었으니
중앙 유럽에 자리잡은 서슬라브인과 발칸반도에 자리잡은 남슬라브인과 달리 동유럽에
자리잡은 동슬라브인은 기독교 문명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러 부족들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그중에 키예프 (키이우) 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일대는 튀르크계인 하자르 칸국의 영향권에 있었고, 노브고로드
를 포함한 러시아 북서부는 슬라브족이 우랄계 민족이나 발트계 민족과 함께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던중 8세기 중반부터 바이킹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러시아 북부에 루스 카간국이 성립되었는데 9세기에 류리크가
이끄는 바랴그인(바랑인) 바이킹 세력이 855년에 라도가 호수에 정착했고, 862년에는 일멘 호수에 도달해
노브고로드를 건설했으며 사후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남하해 키예프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은게 키예프 루스 입니다.
12세기《원초연대기》에 따르면 노브고로드 일대는 슬라브족, 핀족, 발트족이 서로 싸우느라 혼란
스러웠으니 현지 부족이 류리크를 찾아가서는..... '이 일대는 혼란스러우니 이곳을
다스려 달라.' 고 초청했고, 류리크가 이에 응해 바랴그인을 이끌고 이 지역을 평정했다고 합니다.
류리크는 노브고로드를 건설해 근거지로 삼고 세력을 확장했으며 879년 류리크가 죽었을 때, 올레그가 어린 류리크
의 아들 이고리 류리코비치를 대신해 통치했으니 882년에 드네프르강을 타고 키예프로 가서 류리크의 아들
이고리가 정당한 지배자라며 키예프를 지배하고 있던 류리크의 부하 아스콜드와 뒤레를 죽이고 접수했다고 합니다.
이후 올레그는 키예프 인근 여러 동슬라브족들을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으니 키예프 루스는 910년에 카스피해를
통해 이란 북부 마잔다란 지역을 약탈하기도 했고..... 흑해를 통해 동로마 제국에 원정을 가기도 했습니다.
올레그의 뒤를 이은 자는 초대 대공 류리크의 아들로 알려진 이고리 류리코비치였으니 941~944
년에 다시 동로마 원정에 나섰으나..... 945년 동로마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는 길에 키예프 공국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감을 품은 드레블랴네족에게 살해당합니다.
이고리 류리코비치의 아들 스뱌토슬라프는 너무 어렸기에 이고리의 아내 올가 대공비가 섭정했는데,
드레블랴네족에게 응징을 가해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에서 세례를 받아 루스 최초의 그리스도교도 군주가 되었고 아들 스뱌토슬라프 1세는
965년부터 군사활동에 나서 볼가- 불가리아 칸국을 복속시켜 볼가강 일대의 무역로를 장악합니다.
또한 하자르를 공격해 수도 이틸을 함락시켰는데 슬라브 부족들은 9세기 바랑고이족들이 남하하기 이전까지
하자르 칸국에 공물을 바치던 상황이었고 루스인이 남하해 하자르 칸국은 슬라브 부족들에게
영향력을 상실하다가, 10세기에 키예프 루스에게 침공받아 멸망했으며 하자르에
공물을 바치던 슬라브 부족 상당수가 루스인에게 투항한 것을 계기로 "키예프 루스" 는 점차 슬라브화 됩니다.
이후 스뱌토슬라프는 스뱌토슬라프 전쟁을 일으켜 발칸 반도의 강국 불가리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거의
점령하는등 강력한 군사력을 입증했지만 동로마 제국도 공격하다가 요안니스 1세에게 패배
하고 돌아오던 중에 유목 민족인 튀르크계 페체네그인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두개골은
술잔이 되었다고 하며 동로마 제국은 키예프공국 병사들의 활약상을 보고는 바랑인 친위대를 창설합니다.
스뱌토슬라프 전사후 야로폴크 1세가 왕위를 이었는데 980년에 옛 수도 노브고로드를 지배
하던 블라디미르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야로폴크 1세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니,
블라디미르 1세는 국경지대의 발트족과 동슬라브족, 핀족 등을 정벌하여 국경을 안정시킵니다.
그러고는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누이 안나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정교회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지만 기독교화 과정은 평화롭게 진행되지 않았고 노브고로드를 비롯 노르드 성향이 강한 북부
지방에는 반란과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후 정교회는 동슬라브인들의 명실상부한 전통 종교가 됩니다.
키예프 상인들은 드네프르강과 흑해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 교역했으며, 볼가강의 아틸과 불가르를 거점
으로 삼아 이슬람의 아바스 칼리파조와 교역했고 블라디미르 1세 사후에는 야로폴크 1세의 아들
스뱌토폴크 1세가 대공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정교회가 아닌 가톨릭 신자인데다가 권력 유지를
위해 동생들을 살해한 탓에 민심을 잃자...... 야로슬라프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스뱌토폴크 1세를 죽입니다.
야로슬라프 1세가 재위하면서 영토가 대폭 확장되었고 11세기 중반에 최전성기를 맞이하기에
이르렀으며 세 공주들을 프랑스, 헝가리, 노르웨이 왕에게 시집을 보냈고,
여동생들을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공작 카지미에시 1세 및 동로마 제국의 황자와 혼인을 시킵니다.
야로슬라프 1세 자신도 1019년 스웨덴왕 올로프 솃코눙의 딸 잉에예르드 올로프스도테르
(Ingegerd Olofsdotter) 와 결혼하는 등 적극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혼인 외교정책을 펼쳐서 전쟁을 피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한편 중세 유럽의 문화적 패권국인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를 방해하는 페체네그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적극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여《루스카야 프라우다》라는
동슬라브 최초의 법전을 편찬하는등...... 키예프 공국은 내외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며 번영합니다.
1169년 루스 공후들 중 가장 세력이 막강하고 야심이 큰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보골륩스키 공후의
군대가 키예프를 공격했는데, 보골륩스키는 아들을 보내 전투를 치르게 했으며 키예프를 점령한
군대는 3일간 도시를 약탈했는데 보골륩스키는 키예프로 옮겨와서 수도로 삼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보골륩스키가 클라즈마 강변에 있는 자신의 수도인 블라디미르를 선호한 것은 12세기 루스 정치, 경제,
사회에 일어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니.... 키예프와 드니프로강 중류 지역이 끊임없는
전쟁에 휘말려 있는 동안 키예프 세계의 변방에 있는 주요 공국들이 더 부유해지고 강해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서부 카르파티아 산맥 아래에 갈리치아 공국은 동로마 제국의 후원 아래 다뉴브강을 이용해 발칸
지역과 교역을 했으니 이곳의 공후들은 공국을 번성시키는데 드니프로 강 교역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의 보골륩스키는 볼가강 교역을 장악하고 있던 불가르인들을 쫓아내는데 성공합니다.
북서쪽에 자리한 노브고로드공국은 발트 지역과의 교역으로 부를 쌓았지만 드니프로강 교역로는
여전히 존재했고.... 폴로베츠족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교역량은 더 증가했지만,
드니프로강 교역로는 루스에서 더 이상 유일한 교역로도 아니고 중요한 생명선도 아니었습니다.
12세기 초반부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로가 더 각광을 받게 되면서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쇠퇴함에 따라 키예프 루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는데, 당시 키예프 루스
는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기에..... 무역 쇠퇴는 국가 경제의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키예프 루스는 체계적인 대공위 계승 시스템이 갖춰졌다기 보다는 대공위 계승자들이 지방 도시를 다스리며 내전을
벌이는, 일종의 봉건적인 상태였기에 국력을 단결시키기 어려웠으며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 쇠퇴기에 접어든 키예프 루스를 중흥시켰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마련되지 못합니다.
경쟁자들에게 쫓겨난 대공은 다시 세력을 키워 키예프 대공으로 복위하기도 했는데, 뱌체슬라프 1세 때부터
쫓겨났다가 복위함이 관례처럼 되풀이되었고 심지어 류리크 2세는 무려 5번이나
즉위했으니, 이렇게 키예프 대공 자리가 불안정해지자 키예프가 각 공국을 통제할수 있는 힘 또한 약해집니다.
키예프 루스는 므스티슬라프 1세 대에 브세볼로드 1세의 자손들을 모두 동로마 제국으로
추방했지만, 결국 그를 마지막으로 이후 여러 공국들로 분열된 채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등이 강국으로 성장합니다.
칸국과 페체네그족을 주무르던 키예프 루스였지만, 말기에 접어들면 유목민족 쿠만, 즉 폴로베츠족
과 볼가 불가르의 침략 앞에 시달렸으며,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보리스테네스 강
(드네프르강) 일대 비옥한 흑토 평야는 전성기 시절에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평야 지대 특성상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넘나들던 유목제국의 기습과 침략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분열되어 있었던 루스 공국들은 1223년 몽골 제국이 숙적인 쿠만을 침공하자 쿠만 보다 더 위험한 상대라 파악하고는
연합군을 구성했으나 칼가강 전투에서 불세출의 명장 우량카이와 수부타이에게 대패했는데, 이번은 본격적인
공격이 아니라 호라즘 왕조 잔당을 처리하고 지나가다가 건드려본 정도였기 때문에 몽골군은 이기고도 돌아갔습니다.
14년 후인 1237년에 몽골 제국의 바투 칸이 본격적으로 루스를 침공하는데..... 바투는 랴잔, 블라디미르,
수즈달 등 동쪽의 공국들을 하나하나 박살내며 키예프로 진격했으니 당시 키예프 대공이었던
미하일 2세는 헝가리에 있었는데 그 사이 갈리치아의 다닐에게 키예프가 점령된 어수선한 상황이었습니다.
시민들은 군사 지도자 드미트로의 지휘 아래 끝까지 항전했지만 치열한 공성전 끝에 성벽은 무너지고 키예프 루스는
1240년에 멸망했으니.... 키예프 공국의 난민들은 북쪽의 척박한 삼림 지대나, 반대편인 러시아 남부의
스텝으로 대거 피난을 떠났으며 빛나는 문화도 쇠락하고 키예프 루스의 영토 대부분이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립니다.
몽골인들은 고향과 환경이 비슷한 우크라이나 초원지대에 관심을 가지고 직할통치했고, 삼림지대에 있는
모스크바, 노브고로드 등 루스 북부 쪽은 지구 반대편인 한반도의 고려 처럼 간접통치를 시행합니다.
몽골의 지배는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이 조금씩 힘을 길러 몽골을 쫓아낼 때까지 수백년간 계속되며, 1326년
에는 루스 세계 전체의 정교회를 관할하는 키예프 부주교좌도 전쟁과 몽골의 직접지배로
쇠퇴한 우크라이나를 떠나,모스크바로 옮겨갔으니 키예프 대공 직위는 명목상으로
킵차크 카간 및 루스 공국을 대표하는 작위가 되었지만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키예프를 점령하니 소멸합니다.
키예프 루스 (노보고르드 공국 포함) 시조는 류리크 (862년 ~ 879년) 고 남진해 키예프를 점령한 이는 노브고로드
의 올레그 베쉬 (882년 ~ 912년) 이며 그가 죽은후 류리크의 어린 아들이었던 이고리 1세 스타릐 (912년 ~
945년) 이 이었고 수십명의 후계자로 이어져 스타니슬라프 이바노비치 (1302년 ~ 1321년) 이 마지막 입니다.
키예프 루스국 아래에는 수많은 공국이 있었으니 먼저 수도에 자리한 키예프 공국이 키예프 루스 전체의 군주 대공이
통치하는 키예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며, 갈리치아 공국은 폴란드와 헝가리에 이웃하여 둘의
영향력이 강했고 공작위가 단절되어 이웃 볼히니아 공국의 로만 므스티슬라비치 대공이 갈리치아 공국을 합병합니다.
페레야슬라우 공국은 우크라이나 키이우주에 속한 페레야슬라우를 중심으로 한 드니프로강 동안을 다스렸던
공국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합병되어 소멸했으며 체르니히우 공국, 랴잔 공국과 투로프 공국,
슬루츠크 공국, 폴로츠크 공국, 비테프스크 공국, 드루츠크 공국 등은 이후 리투아니아 왕국에 점령됐습니다.
민스크 공국, 스몰렌스크 공국에 노브고로드 공국은 류리크 가문의 발원지인 노브고로드가 중심인 공국
이었으나 시민 의회인 베체의 영향력이 강해져 공작은 상징적 국가 원수가 되어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되었으며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은 동북부에 있던 공국으로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의 전신입니다.
목조로 지은 교회 건축물들이 아름다움과 특유의 건축 형태로 유명했으나, 목조 건물 특성상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없으며 역사 기록과 그림을 바탕으로 키예프 공국 시대의 목조 건축물들을 복원한 야외 박물관이
우크라이나 키이우와 르비우에 있으며 이외에도 러시아의 황금의 고리 지역에 루스의 옛 흔적이 꽤 남아 있습니다.
류리크 왕조의 대부분 신민들은 슬라브인들이었는데 슬라브 정체성이 키예프 지역 너머로 퍼져나간 것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수용하고, 교회 슬라브어를 예배, 설교, 지적 대화의
언어로 삼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기독교는 슬라브어와 슬라브 문화라는 치장을 하고 나타납니다.
시가 문학이 발전했으며, 《이고르 대공의 원정기》 같은 수준 높은 고전 서사시 작품도 있고, 정교회
수도자들이 집필한 《원초 연대기》는 류리크 왕조의 기원부터 1110년까지를
다루었는데..... 슬라브족의 초기 역사, 분파, 습속에 관한 여러 가지 구전 설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146년 부터 1154년 사이에 일어난 공후 이쟈슬라프 2세의 키예프 대공위 계승 투쟁을 비롯한
이야기를 담은 《키예프 연대기》도 있으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의
문학사에서는 키예프 공국 시대의 문학 작품을 동슬라브족 문학의 시초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후에도 13세기 후반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에서 키예프 공국 시절 연대기에 영감을
받아 《볼히니아 연대기》를 편찬하였으니..... 《열왕기》와 《이사야서》의 영향을 받은
《볼히니아 연대기》는 교회와 관련된 일 보다 세속적이고 군사적인 일들에 관해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흑해 및 카스피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 동로마 문화 및 중동의 선진 문화를
적극 흡수하면서 높은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니..... 동로마 제국 으로부터
이식받은 동방 정교회와 이콘의 전통 또한 동슬라브족 문화를 특징 짓는 키예프 공국의 유산입니다.
다만 정교회 신앙이 일반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니, 키예프 공국 내에서는
정교회와 다른 종교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해 줄 교육받은 성직자의 수가 부족했기도 하였고, 문화적
저항 때문에 키예프 루스 주민 대다수는 정교회와 슬라브 토속 신앙을 둘 다 믿는 이중신앙을 따랐습니다.
루스가 공국들로 분할되기전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비잔티움의 제도를 받아들인 루스는 자신들의 땅을 전통적인
부족 족장인 크냐지들이 통치하는 볼로스트 혹은 즈믈랴스로 나누었으니 산하에 존재하는 씨족 공동체 단위는
포고스트라고 불렸으며, 비체라 불리는 민회가 정기적으로 열려 자유민들에 의해 마을의 주요 사안을 논의했습니다.
11세기 이후 키예프 루스가 하위 공국들로 분할되기 시작하면서, 공국들은 행정제도를 갖추기 시작했으니 기존에
한 부족 단위를 일컬었던 볼로스트는 공국 산하의 행정구역으로, 포고스트는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교구의
교회들이 위치해 볼로스트의 하위 행정구역이 아닌 '교구의 중심이 되는 마을' 과 주변을 포괄하는 단위로 변합니다.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 체르니고프(체르니히우), 키예프(키이우), 류베치, 프스코프, 폴로츠크, 비텝스크
같은 키예프 대공국의 주요 도시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흑해를 잇는 수상 교통로에 건설
되었으니, 특히 흑해와 가까운 키예프와 스칸디나비아와 가까운 노브고로드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서유럽 출신 여행자들은 키예프 루스에 많은 도시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루스를 '도시의 나라' 라고
칭했는데, 상인들의 권리는 '스메르드' 라고 불리는 자유민 농민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
했으니 상인을 살해할 경우에는 자유민 농민을 살해한 경우의 벌금 보다 2배 이상 금액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상인들의 권리가 높았던 이유는 키예프 루스의 전사 계급이기도 했으며, 대외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니, 상인들은 동로마 제국, 중부 유럽, 스칸디나비아, 이슬람 칼리파조
와 교역했고 동로마 제국에는 밀랍, 꿀, 아마, 가죽, 대마, 귀금속, 무기, 갑옷을 수출했습니다.
또 상인들은 이슬람 칼리파조에는 노예와 모피를 수출했으니 스페인의 후우마이야 왕조의
노예 대부분은 키예프 공국에서 유대인 상인들을 통해 수출된 "슬라브족 노예" 였습니다.
1132년경 키예프 대공가의 분열로 블라디미르- 수즈달, 갈리치아- 볼히니아, 노브고로드 등 여러 도시국가가
독립하면서 키예프 공국은 크게 쇠퇴하기도 하였는데.... 독립 당대의 인구수는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