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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華城)은 ....
사적 제3호로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 재위 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으며, 축성 시 48개 시설물이 있었으나.....시가지(市街地) 조성 또는 전란(戰亂) 등으로 일부 소멸되고, 41개 시설물만이 현존하고 있다.
각 시설물의 용어 설명이다.
팔달문에서 시작...
수원화성을 이루어 내는 精神의 힘은 거대한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세부적인 치밀함이고, 전체와 세부를 일관하는 정돈된 지향성(指向性)이다.
수원화성의 쓰임새는 군사시설물이고, 그 드러남은 조형 예술품이다. 수원화성은 아름답고 강력한 진지(陣地)이다. 그 아름다움은 땅에 들러 붙어서 부화하지 않고, 그 강력함은 미의식으로 잘 단도리가 되어 거칠거나 사납지 않다.
수원화성은 성벽에서 쓰임새는 드러남 속에 숨어 있고, 드러남은 쓰임새 속에 숨어 있다. 쓰임새와 드러남이 서로 숨고 또 숨겨서 함께 드러나는 것은 아름다움의 강력함과 강력함의 아름다움이다.
수원화성에서는 아름다움은 강력함으로 발현되고, 강력함은 아름다움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양쪽을 동시에 변증적 통합으로 현실의 땅 위에서 空間化 해내는 힘은 땅의 기초를 다지는 일의 토목공학적 성실함과 자재를 쌓아 올리는 일의 건축학적 과학성과 일과 사람과 자금과 노동과 시간과 환경을 조직하고 관리해 내는 행정작용의 꼼꼼함이다.
정신(精神)과 기술(技術)은 다르지 않고, 삶과 꿈이 다르지 않다. 수원 화성은 땅 위의 성곽이고, 마음 속의 왕도이다.
팔달문 옆 길...이 길에서 화성 순례를 시작한다. 성곽을 따라 걷는 길...총 5,744m이다. 골프 한 라운딩의 거리이다.
서남암문(西南暗門)...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들키지 않게 군수물자를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만든 군사시설로 , 유사 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 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메워 폐쇄하였다.
서남암문은 성벽의 서남쪽 모서리로부터 화양루에 이르는 통로이다. 벽돌로 벽을 쌓고, 돌로 성벽의 밑 부분과 주춧돌을 놓아서 벽돌의 질감은 돌의 강고함 위에 실려있다. 모든 성곽의 암문은 은폐된 시설물인데, 수원화성의 서남암문은 위치를 은폐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 암문은 돌출되어 잇고 또 여장 위에 포사를 만들어서 쉽게 눈에 띈다 아마 특별한 관측소로 쓰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서남암문의 포사는 작고 단정하고 날렵해서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다. 그 포사건물은 자신의 안과 밖을 치밀하게 관찰하려는 者의 시선으로 긴장되어 잇고, 그 삼엄한 시선까지도 풍류화되어 있다.
서장대 ... 패션쇼 리허설 중이었다. 돌라 오는 길에 다시 한 번 방문... 팔달산 정상에서 성 주변을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 사방 100리가 한 눈에 보였단다. 지금은 아니다.
화서문과 동북 공심돈......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경이다.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은 돌과 벽돌의 조화에 있다. 돌은 희고 벽돌은 회색인데...돌의 흰색은 거무스름하고, 벽돌의 회색은 희끄므레해서 돌빛과 벽돌빛은 서로 튕겨내지 않는다.
대체로 돌은 구조물 전체의 기초를 버티고, 벽돌은 그 기초 위에서 장식적인 부분을 이룬다. 벽돌의 장식성은 군사적 실용성에 엄격히 복종하지만, 그 복종의 흔적을 성곽에 드러내지 않는다.
벽돌은 돌에 비하여 훨씬 더 단정하게 규격화되어 있고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조형물을 만들기에 편하다. 벽돌의 옹성은 군사적 실용성을 생활 속의 친근함으로 바꾸어 놓는다. 대체로 말해서 성벽의 기초부분은 돌이고 그 벽 위나 벽 주변에 설치되는 치성,옹성,망루,여장,봉수대는 벽돌이다.
그래서 수원화성은 공격하는 者의 사나움이나 방어하는 者의 움추림을 드러내지 않고, 마을의 일상 생활과 자연 지형을 따라서 조화롭게 뻗어 나가는 평화로운 구조물들의 흐름을 보여준다.
동북공심돈...동북쪽에 있는 공심돈(空心墩). 공심돈은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의 동태를 살필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 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이다.
공심돈은 성의 각루(角樓)의 일종이지만 공심돈의 외벽은 돌출한 모서리를 드러내지 않고 부드럽게 곡면처리되어 잇다. 그래서 공심돈은 사격진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각진 사나움을 드러내지않는다. 성벽을 따라 들어선 수 많은 시설물들 주에서 가장 큰 화력을 일시에 쏟아 낼 수 있는 요새이지만, 바라볼 때 벽돌의 질감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의 흐름에 실려 있어서 우뚝하되 돌출하지 않는다.
북포루(北砲樓)... 모두 5곳이 있다. 대포 발사를 위한 장소이다.
치성...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 나오도록 힌 구조물..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장안문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正門이며 北門이다. 남문이 아니라 북문을 정문으로 삼은 것은 서울이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은 북문으로 서울을 맞이하고 남문(팔달문)으로 영남과 호남에 이어진다. 남문의 규모와 위용은 정문인 북문과 똑 같다. 서울에서 화성 북문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나 영,호남에서 화성 남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화성에 대하여 느끼는 신뢰감은 똑같다. 그래서 수원화성은 왕조의 기획과 집행으로 이루어낸 신도시이지만, 서울에 부속된 신도시가 아니라 내륙 한복판에 건설된 또 다른 수도라는 느낌을 준다.
현대 도시의 일상 공간에서 옛 왕도의 자취가 이처럼 확실하게 살아서 작용하는 도시는 수원말고는 없다. 그래서 수원은 서울, 경주, 부여나 안동보다도 더 오래된 마을이라는 느낌을 준다. 신라 금관이나, 백제의 금동향로 그리고 고려청자처럼 박물관 진열장 안에 들어있는 문화재가 아니라
대도시의 일상 공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수원 화성은 가장 활발하게 살아있는 문화재이다.
그리고 성벽이 대도시 시민의 일상적 공간의 일부라는 점에서 낙안읍성이나 해미읍성과도 다르다.
성벽의 바깥쪽을 따라서 성을 한바퀴 돌 수도 있고, 성 안쪽에서 성벽을 따라서 돌 수도 있다.
북동적대...적대(敵臺)란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敵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로, 적대는 시설물의 半만 외부에 노출되어 있고, 半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북동포루
성안을 가로지르는 수원천(泉)... 200년 前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흐른다.
화홍문
방화수류정...방화수류정은 장안문과 그 주변 성벽을 엄호하는 각루이며 초소이다. 이 초소는 화려한 정자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건물의 구조는 대칭괴 비례를 무시하면서 불규칙한 공간배치를 보인다, 추녀가 서로 부딪치고 용마루 선이 어긋나면서 건물 전체는 늘 움직이고 있는 생명체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방화수류정은 龍淵이라는 작은 연못을 내려다 보고, 멀리는 수원 북쪽 넓은 들을 조망한다. 哨所가 亭子이고, 亭子가 哨所이다. 용연은 성밖에서 성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를 일시적으로 가두는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 안에 작은 人工 섬을 만들고, 버드나무나 꽃을 심어 군사 시설물을 인공의 풍류로 바꾼다.
수원 시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개천(광교대천)은 이 용연에 고였다가 화홍문 밑을 지나서 성안으로 흘러든다. 용연은 이 하천의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담수시설이었을 것이다. 물길을 가지런히 내는 공사는 축성의 공사 중 가장 먼저 시행한 공사이었다.
화홍문은 성의 북쪽 수문이다. 돌다리 위에 누각을 지었고, 돌다리 밑으로는 7개의 홍예 밑으로 물이 흐른다. 강고한 성벽 밑을 늘 물이 흘러서, 수원 성벽에서는 흐르는 것들이 강고한 것들의 밑바닥을 쓰다듬어 준다. 王都는 存在와 生成의 두 축 사이에서 현실의 들판 위에 성벽을 이룬다.
북암문...암문이 4개 있었으나...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암문이다.
적의 동태를 살피는 구멍...곧게...아니면 아래를 향하고 있다.
연무대...군사훈련장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내부에는 나선형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3층 누각까지 올라 갈 수 있다.
적이 동향을 실피며 대포도 발사할 수 있다. 원형 건축물로는 유일하다.
멀리서 본 창룡문..화성의 동쪽 문으로 4개 대문 중 규모가 가장 작다. 호성이 남북의 축으로 주요 동선이 계획되었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가 가장 적은 것을 고려한 듯..... 성안의 모습이다..
동북노대 (東北弩臺)... 노대(弩臺)는 쇠 화살을 쏘는 곳으로 성밖의 적의 동향을 성내에 알리는 진지 역할을 하는 진지이다.
창룡문에서 바라 본 연무대.. 서장대가 군사 지휘본부라면, 연무대는 군사훈련소이다.
창룡문 성 밖의 모습....
동포루
동포루.....밖에서 본 모습
봉돈......성곽과 맞물린 벽돌로 쌓은 봉화대. 그 규모와 외관이 마치 예술작품 같이 정교하다. 화성의 사주경계와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용인의 석성산과 서해안의 홍천대 봉화에서 응답하였단다.
봉수의 관장은 중앙의 경우 병조(兵曺)의 무비사(武備司)가 관장하고, 지방의 경우에는 관찰사, 수령(守令), 병사(兵使), 수사(水使), 도절제사, 순찰사 등 모든 군사책임자가 그 임무를 맡았다.
봉수대에는 봉졸(烽卒)인 봉수군(烽燧軍)과 하급장교인 伍長이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봉수군은 밤낮으로 망보는 일을 직접 담당하였고 오장은 봉수대 위에서 봉수군과 함께 기거하면서 봉수군을 통솔하고 봉수대의 이상유무를 진장(鎭將)인 수령에게 보고하였다. 진장은 오장과 봉수군의 후망근무를 감시하고 이들과 연대책임을 지고 그들의 차출 및 출근상황과 봉수대의 이상 유무를 살폈다. 오장으로부터 異狀有無를 보고받은 수령은 아무 이상이 없을 時에는 월말마다 고낯라사에게 보고하는 한편 3,6,9,12월의 매분기별로 병조(兵曺)에 보고하였다.
봉수군과 오장은 전부 봉수대 근처에 거주하는 자로 정하였고, 봉화시에는 운암(雲岩)이나,풍란(風亂)으로 연기와 불꽃이 통하지 않을 때에는 봉수군이 다음다음으로 치보(치보)로 급히 달려가서 얼림하여 그 임무를 수행케 하였으며, 봉수군은 다른 일에 종사티 못하고 오로지 망보는 일만 담당하도록 하였다.
봉수군은 봉군 또는 봉화군으로 통칭되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봉수군이라고 하였다. 세종시절에는 각도의 초면(初面)하는 곳에 연대(煙臺)를 높이 쌓고 가까이 사는 백성 10여명을 모아 봉졸로 하고, 3명씩 兵器를 휴대, 연대위에서 주야로 정탐케 하였고, 5일마다 교체하였다.
봉수(烽燧)...........
고대(古代)에 있어서 국가 방어체계의 하나인 봉수(烽燧)는 원거리 통신수단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봉수는 전파 등을 활용할 수 없었던 前近代의 기술적 수준에 있어서는 매우 우수한 통신수단의 하나이었던 것이다.
봉수는 "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 구성되어 있으며,봉(烽)은 야간에 횃불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는 형태이고, 수(燧)는 낮에 연기를 올려 통신을 하는 형태인 것이다.봉수는 대략 수십 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후망(後望)의 요지가 되는 산정(山頂)에 연재(煙臺), 봉수대(烽燧臺)를 두고 소위 주연야화(晝煙夜火)의 방법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山이 많아서 봉수는 가장 효율적인 통신수단이었으며, 남쪽지방에서의 빈번한 왜구의 침략과 西北지방에서의 지속적인 野人들의 침략이라는 정치적 상황이었으므로, 이 봉수제도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만리장성의 봉화,아메리카 인디언의 단거리 신호방법..처럼 변방에서 일어난 위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하는 통신제도로서 국방상 중요한 임무를 띤 속보(速報), 경비(警備), 전신(電信)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봉수는 변방의 위급상황을 중앙에 알려주는 기능 외에도 1회의 봉수 신호는 아무 일도 없다는 의미이었으며, 백성들은 1회의 봉수 신호가 오른 것을 매일매일 관찰하며 안심하고 生業에 종사하였으므로, 생업 안정에 있어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기도 한 조상들의 호국의 얼이 살아 숨쉬는 호국(護國)의 문화 유적이며, 통신문화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 수원화성의 기획과 시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항을 총망라하여 기록하였다.
이 의궤는 조선 왕조가 편찬한 책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기록문서이다. 화성 축조를 기획하고 지시하는 임금은 실무적인 치밀함을 끝까지 유지한다.
화성 축조에 있 어 임금의 지휘 방침은 서두르지 말 것...기초를 튼튼히 할 것...사치스런 치장을 하지 말 것...일을 합리적이고 능률적으로 조직하고 관리할 것...첨단 과학기술을 총동원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성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성을 쌓기 전, 水路를 정비하고 도로를 개설할 때 도로 연변의 농가들을 수용했다. 의궤는 수용된 농가들의 주인 이름, 위치, 수용 가격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북리(北里)에 살던 김용강의 집은 흙방 한칸으로 수용가는 7전이며 5전을 추가로 지급하였다...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의궤는 수로와 도로로 편입된 구간에서 국비로 수용한 논과 밭의 일련번호와 그 값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고, 축성 공사에 동원된 모든 장인들의 명단과 그들의 전문 분야, 노임,출신지와 소속을 기록하였고, 못 한개, 벽돌 한장의 수급사항을 세밀히 기록해 놓았다.
석수, 못수,기와쟁이,대장장이,화공 등 22개 전문분야의 장인 1,800명이 이 공사에 기술직으로 참여하였고, 그 밖에 자재 운반이나 땅 다지기 등의 노역에 수 많은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물론 국가의 명령에 따라 동원된 인력들이었지만, 기술 숙련도와 노동의 강도, 노동시간에 따라서 정확하고도 차등있는 노임의 지급을 받았고, 축성에 필요한 모든자재는 백성의 것을 징발하지 않고 모두 정확한 값을 쳐주고 사들였다.
장막쇠,고돌쇠,차언노미,임작은노미,김순노미,홍귀노미,박삼쇠,김쇠고치,정큰노미,최큰노미 같은 천민들의 이름이 장인 명단에 등재되어 있다.
의궤에 기록된 정조의 지시사항은 대충 다음과 같다.
성벽을 쌓는 일로 말하자면 올해 쌓아도 될 일이고, 내년에 쌓아도 될 일이고, 10년을 걸려서 쌓아도 될 일이지만.. 백성은 하루를 굶겨도 안되고, 이틀을 굶겨도 안될 것이며, 한달을 참고 지내라고 말 할수는 없는노릇이다......
혹심한 더위가 이 같은데, 성 쌓는 현장에서 공사를 감독하는 사람,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헐떡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어찌 잠이 편안하겠느냐. 척서단(더위 먹은데 먹는 알약) 4천알을 보내니 한알이나 반알을 정화수에 타서 먹어라. 병을 치료하는 방편에 각별히 유의하고, 더위를 씻을 수 있는 약재를 넉넉히 마련하여 한 사람이 기술자나 일꾼이라도 더위 먹는 일이 없도록 하라...
동지가 내일이라 추위가 심하다. 일하는 저들을 생각하니 저들의 추위가 나의 추위이다. 솜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한사람 한사람의 고통을 일일이 물어서 그 연유를 보고하라. 석수들에게 옷감과 모자를 보내 주겠다...
어제 듣자 하니, 여장의 용마루에 사용할 벽돌을 아직 구워내지 못 해서 내달 20일후에나 비로소 구워 낼 수 있다하니 그렇다면 내달 10일께 공사를 마치겠다던 경들의 말은나를 기만한 것이냐!
어찌하여 이같은 해괘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경들은 다시 복명하라.....
성 밖에서 본 봉돈
동이포루....성 밖에서의 모습
동이포루
동북각루...높은 위치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공간...화성에 총 4개의 각루가 있다.
팔달문의 반대편 끝...여기서 화성 일주는 끝난다.
화성은 여기서 유일하게 단절되어 있다.
융건능, 화성 행궁, 지지대, 수원화성 등...정조대왕의 효도관광 시리즈는 일단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