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시각장애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선 씨
“모두가 꿈 앞에 당당할 수 있기를 바라요.”
활이 현을 스칠 때마다 풍부한 음색이 귓가로 스민다. 때로는 들꽃처럼 소박하고, 때로는 붉은 단풍인 듯 화려하다. 네 개의 현으로만 소리를 낸다는 것이 신기할 만큼 감성이 풍성하다. 다양한 음향으로 인해 ‘악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바이올린. 그 악기를 섬세하게 연주하는 손의 주인은 김지선 바이올리니스트다. 미국 맨해튼 음대 대학원 합격으로 주목을 받은 그는 “지금 이 순간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맨해튼 음대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새로운 출발선에 자리하게 된 시각장애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선 씨를 만났다.
Q. 맨해튼 음대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그 과정이 드라마틱하네요.
A. 많은 선생님들의 지도와 가르침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어요. 음악적 이론부터 악기를 연주하는 기술, 협주, 곡을 대하는 자세까지 배운 게 참 많습니다. 제 연주에는 그런 무수한 가르침이 함께 녹아 있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맨해튼 음대 입학도 가능했던 거죠. 저 혼자가 아닌 다 함께 이룬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카네기홀에서 연주를 했던 당시 한 관객분이 제게 관심을 보이며 “미국에서 공부할 의향이 있느냐” 물었던 순간이 생생해요. 줄리어드 음대 박사신데, 우연히 제 연주회에 왔다가 소리가 너무 좋다면서 제의를 하셨어요. 마침 저도 미국 유학을 고민하고 있던 참이라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죠. 만약 국악을 전공했다면, 한국에서 배우는 게 더 나았을 거-예요. 하지만 클래식의 발상지는 외국이잖아요. 그들만의 정서와 문화를 더 깊이 체감하고 싶었어요. 제 음악 세계도 넓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1년 동안 차분히 준비해 원서를 넣었고, 다행히 지금의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Q. 주변 반응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A. 같이 음악하는 선후배와 동료, 그리고 선생님들까지 모두 잘됐다고 축하해줬어요. 격려와 덕담도 함께 들었죠.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제 결정을 지지하는 만큼 걱정도 크세요. 미국은 사회적․제도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잘 되어 있으니, 혼자 잘 지낼 수 있다고 어필해도 마음을 놓지 못하십니다. 딸을 믿는 문제 이전에 어쩔 수 없이 걱정하고 마는 게 ‘부모님의 마음’일 거-예요. 특히 아버지가 염려하세요. 초등학교 3학년 때 KBS교향악단 바이올리니스트 선생님께서 아버지가 인터넷에 올린 제 연주 영상을 보시고 저를 가르쳐보고 싶다고 하셔서 대구에서 서울 한빛맹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는데, 그때 엄마랑 저만 왔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대구에 남아 계셨거든요. 그때가 생각나서 더 울쩍해하시는 것 같아요. 집에 있는 동안 부모님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늘 응원해주고 지지해주어 감사드린다”고 “아빠 엄마가 키워낸 딸은 생각보다 더 강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Q. 코로나19 여파로 학기가 미루어졌습니다.
A. 원래는 9월부터 신입생이 되어야 했죠. 그런데 감염이 확산되면서 내년 1월로 일정이 변경되었어요. 솔직히 어떤 음악적 교류를 나눌 수 있을까 기대하며 들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조금 맥이 빠지기도 했어요. 입학이 결정되면서 장학금도 지원받기로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될까 염려도 됐죠. 다행이 학교에 문의해본 결과, 제 걱정은 기우로 끝났습니다. 그에 더해 미국에서의 학업과 일상생활 전반에 도움을 줄 친구도 알아봐주겠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기왕 늦춘 걸음, 저를 더 가다듬는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그동안 과제며 연주회 등으로 바빠서 제가 좋아하는 곡을 개인적으로 연습할 여유가 없었는데, 요즘은 제가 선호하는 곡들을 하나하나 연주하는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하는 전화 영어해화 수업도 신청해 어학 능력도 더 개발 중입니다.
Q. 음악의 시작은 바이올린이 아니었다고요.
A. 어릴 때부터 동요, 가요, 클래식 등 음악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했어요. 사촌과 부모님, 이웃분들에게 신청곡을 받아 장난감 피아노를 치며 놀곤 했죠. 놀이로 인한 관심은 자연스레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다는 욕구로 이어졌어요. 처음에는 시각장애인이라 피아노 학원 원장님이 난색을 표하셨는데, 제가 열심히 조르고 피아노 연주도 곧잘 하는 모습에 저를 받아들여주셨어요. 그때만 해도 제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죠. 그런데 제 손이 문제로 다가왔어요. 피아니스트가 되기에는 크기가 좀 부족했거든요. 어린 마음에 인정하기 싫었고, 정말 좋아하는데, 잘할 자신도 있는데, 왜 안 된다고 하나 싶어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죠. 피아노 레슨실에서 우울해 하고 있을 때 옆방에서 처음 듣는 악기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반짝반짝 작은별’이었는데, 저를 감싸안는 듯한 음색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게 ‘바이올린’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마침 원장님이 피아노와 바이올린 둘 다 다루실 수 있었거든요. 지금도 ‘반짝반짝 작은별’은 제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Q. 좋아하는 일이라도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A.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슬프다거나 이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단지 시각장애인 음악가라면 으레 겪는 문제가 저한테도 있었죠. 악보 구하기 말이에요. 차차 개선되어 가는 요즘보다는 확실히 악보 마련이 어려웠거든요. 나중에는 어머니가 음악 점자를 익혀 직접 악보 점역을 해주셨습니다. 그런 물질적인 어려움 외에도 시각장애에서 비롯된 인식의 장벽이 존재했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제학 중 실내악 연주에서 번번이 제외되었던 일이 대표적이었죠. 보통 합주할 때 자신의 연주 파트에서 다른 연주자들과 눈을 마주치고 들어갑니다. 일종의 신호인데 저는 아이 컨택트가 안 되니까 실력 문제 이전에 그냥 열외가 되었던 거-예요. ‘내가 이러려고 이 학교에 들어온 게 아닌데!’ 억울하고 화도 났었죠. 결국 용기를 내서 총장실에 찾아가 면담을 한 뒤, 실내악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어요. 사중주단 연주에서 피아노 솔로가 박자를 놓친 일이 있었는데, 바이올린 타이밍을 잡아 위기를 넘긴 적도 있었어요. 그렇게 시각장애인도 충분히 협주가 가능하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었고, 그 선례로 인해 다른 시각장애인 후배들은 저와 같은 장벽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해요. 그때 낸 용기는 지금 돌이켜도 잘한 일이었습니다.
Q. 앞으로의 포부와 함께 꿈을 꾸고 있을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한마디 부탁드려요.
A. 처음 제 꿈은 스타가 되는 거였어요. 커다란 무대 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이제 그 꿈은 달라졌습니다. 인정받는 스타, 유명해지고 싶다는 마음보다 더 큰 목표가 생겼거든요. 제 바이올린 연주로 지친 누군가에게 격려를,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주고 싶어요. 제가 바이올린 소리를 통해 꿈을 꾸게 되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제 연주로 다시 일어나 걸어갈 용기를 갖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생각이 반영된 건지 브람스의 콘체르토 등 사람들의 감성을 울리는 서정적인 음악을 선호하게 된 것 같아요. 저는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겪으며 노력할 겁니다. 경험이 풍부해야 연주가 한층 더 깊어질 수 있고, 제 ‘꿈’에 한 발작 더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자신의 미래의 모습, 스스로 그리는 꿈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이 될 미래의 ‘나’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때때로 사회적 인식에 갇혀 꿈을 꾸기도 전에, ‘그건 장애 때문에 안 된다’는 장벽을 만날 수도 있을 거-예요. 점점 위축이 되고 옛날의 저와 같이 어깨를 움츠리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꿈은 내가 꾸는 것이지, 장애 때문에 어렵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이 꾸는 게 아니잖아요. 아나운서든 조향사든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있다면, 미래의 자기 자신의 앞까지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내길 바랍니다. 그 길을 걷다 외로울 때, 상처받았을 때 제 바이올린 소리가 여러분의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신혜령 기자
* 이 기사는 '손끝으로 읽는 국정 156호'를 위해 작성한 원고입니다. 초고기 때문에 가필첨삭이 되지 않아 실제 월간지에 실린 글과는 다릅니다. 특히 서문은 확실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냥 지우기 아까워 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