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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홍은 인터뷰 장소로 압구정동의 한 카페를 콕 집었다. 유행에 민감한 트렌드세터들이 선호하고, 사람은 많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도록 좌석을 배치한 도회적인 카페. 인터뷰 날짜를 잘못 기억해 한 시간 늦게 도착한 작가는 미안해서 쩔쩔맸다. 어찌나 미안해하던지 기다리던 일행이 오히려 위로해야 할 지경이었다. 작가는 예뻤다. 20대 초반에는 한 방송사로부터 “VJ로 데뷔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 《걸프렌즈》는 한채영, 강혜정, 허이재 주연의 동명영화 〈걸프렌즈〉의 원작이 됐다. 이 작품으로 작가는 2007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차기작이자 세계일보에 연재했던 소설을 엮어서 만든 《성탄 피크닉》은 2009 한국일보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올랐다. 《걸프렌즈》는 한 남자를 동시에 사랑한 세 여자 이야기, 《성탄 피크닉》은 삼남매가 함께 살해한 시체를 나눠 가지고 다니는 이야기가 주축이다. ‘공유(共有)’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 집착이 드러난다. 외로움과 고독을 달래기 위해 ‘나눔’에 집착하지만 그럴수록 공허감은 커진다. 온전한 내 것, 내 존재를 완전히 이해해줄 사람이 없는 현실을 역설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책은 술술 읽힌다. 요즘 세태를 영상으로 촬영해 보여주는 듯하다. 가벼운 소재를 가볍게 다루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겁다. 작가는 젊은 여성의 욕망을 기막히게 잘 집어내는데, 작가가 집중하는 건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욕망을 갖는 과정이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식이다. 《성탄 피크닉》의 서사는 압구정동에 사는 세 청춘 남녀를 중심으로 성탄절을 전후해서 펼쳐진다. ‘압구정동’은 자본주의의 물성이 극대화된 공간이고, ‘청춘’은 인간 삶의 정점이며, ‘성탄절’은 1년 중 가장 흥분된 시간이다. 이 세 극점이 만나면서 발생하는 사건은? 작가의 선택은 행복의 정점이 아니라 불행의 정점이다. 위태롭던 삼남매의 삶에 한 남자가 찾아오고, 세 사람은 ‘공모 아닌 공모’로 살인을 저지른다. 소설은 삼남매가 시체를 삼등분하여 트렁크에 싣고 각자의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압구정동 이너서클’이 되지 못한 성실한 장녀 은영은 원하던 대로 취직하는지, 명품을 두르고 돈 많은 남자들을 유혹하다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른 은비의 범죄는 발각되지 않는지, 옆집 젊은 유부녀와 바람난 게임 중독 은재의 삶은 어떻게 펼쳐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가장 슬픈 결말은 비극이나 희극이 아니라 지리멸렬한 삶이잖아요. 아주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일상의 지리멸렬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삶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시체를 트렁크 안에 싣고 다니면서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처럼 쳇바퀴 같은 생활에 갇혀 있는 삶. 그게 인간의 가장 슬프고 공허한 현실 아닌가요?”
첫 아이 낳은 후 작가 되기로 결심했죠
작가의 고향은 서울 문정동이다. 할아버지 대부터 문정동에서 터를 잡아 친척들과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한다. 중학교 때 이사한 압구정동. 작가에게 두 공간은 모두 살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재개발되기 전 문정동은 가족과 친척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간섭하고 침해해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는 공간이었고, 압구정동은 자본주의의 물성이 극도로 화려하게 포장된, 껍데기뿐인 공간이었다. “문정동에서 살 때는 김장을 하거나 누구 생일 때면 어김없이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였어요. 가족 체육대회도 했다니까요(웃음). 어릴 땐 그게 너무 싫었어요. 연애편지를 받으면 온 동네에 소문이 좍 났죠. 압구정동이 타인과의 관계가 극도로 단절된 공간이라면, 문정동은 늘 지인들이 들끓는 공간이었어요.” 사춘기에 이사와서 지금까지 죽 생활의 터전이 된 압구정동. 작가의 눈에 비친 압구정동의 모습은 어떨까. “이중적이에요. 가끔은 떠나고 싶다가도 떠나 있으면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강남이라는 공간이 자본주의의 결정체를 이룬 상징적 공간이잖아요. 문화, 교육, 편의시설, 의료시설 등이 집약된 공간이라 이곳의 혜택을 누려본 사람은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혜택에서 소외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죠.” 작가는 스물여섯에 결혼해서 스물일곱에 아들을 하나 낳았다. 일곱 살 된 아들은 그에게 친구 같고 연인 같은 존재다. 휴대폰을 열어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자기가 리틀 비래요” 하는데, 정말 가수 비를 꼭 빼닮았다. 작가는 중학교 때 무용을 배웠다. 부모는 그가 무용을 계속하기 바랐지만, 고집 센 작가는 자신의 다리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부모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리고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작가가 본격적으로 소설을 쓴 건 아이를 낳고 나서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자신감이 없었어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남보다 특출하게 잘하는 것도 없었죠. 일찍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를 기르는 게 그렇게 어려운지 몰랐어요. 잠이 많은 게 콤플렉스였는데, 아이 때문에 잠이 확 줄었죠. 자신감이 생겼어요. ‘아, 나도 잠을 줄이면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 하고요. 그리고 생각했죠. ‘일상에 파묻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더 힘든 시간이 올 수 있겠구나’ 하고요.”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잠을 줄였다. 아이가 낮잠 자는 시간, 새벽 시간을 쪼개서 쓴 책이 바로 《걸프렌즈》다. 그 소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스물아홉 나이에 등단했다. 소설가가 되고도 그는 ‘강남 출신, 미모의 작가’라는 이미지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 압구정동 한복판에서 자라 명품족일 것 같다, 여성스러운 외모 때문에 마음이 여릴 것 같다는 오해. 정작 자신은 물건에 대한 욕망에서 초연하다며, 이날 입은 검은색 조끼는 10년이 넘은 것이라고 한다.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을 정도로 냉정해지니 마음이 여린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최근 문학과지성사 웹진에 자전적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나는 왜 소설을 쓰게 됐는가’를 화두로, 자신 안의 결핍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이 소설을 마치면 그는 한층 더 성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세태를 들여다보고 그 세태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태를 반영하면서도 인간 심리를 기막히게 묘파해내는 불후의 작가로 성장하기를 기대해본다. 사진 : 이창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