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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초기의 작품은 교향곡 [클레르보], 관현악곡 [옛 사가(전설)]가 있고, [투오넬라의 백조][레민카이넨의 귀향][불의 기원][칼레발라 Kalevala] 등이 있다. 그의 음악에 넘치는 본질적인 비애와 우수는 북극의 자연 환경과 피정복국으로서의 괴로움을 참고 나가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시벨리우스야말로 진정한 국민적인 특색을 가진 작곡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애와 작품형태 본명은 요한 율리우스 크리스티안 S. Johan Julius Christian S.이다. 법률 공부를 시작한 후 1882년에 마르틴 베겔리우스 Martin Wegelius에 의해서 헬싱키에 설립된 음악원에 입학하였고(1886), 그곳에 3년 정도 재학하는 동안 주로 여러 가지 실내악 작품을 썼고 한때는 바이올린 주자가 되려고 했다. 이때 헬싱키에서 페루치오 부조니를 친구로 얻었다. 1889년부터 1890년에 걸쳐서 베를린에서 음악평론가 알베르트 베커 Albert Becker에게 배웠고, 이어서 1890년부터 1891년에 걸친 겨울에는 빈에서 로베르트 푹스*와 칼 골드마르크*의 밑에서 공부하면서 최초의 관현악곡 발레의 정경과 서곡 E장조를 작곡했으며, 또 핀란드의 신화 칼레발라 Kalevala에 기초하여 그의 최대의 대작인 독창과 합창,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시 쿨레르보* op. 7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892년 4월 28일 헬싱키에서 열린 쿨레르보의 초연은 핀란드에서의 그의 명성을 확립시켰다. 이 최초의 성공의 수주일 후에 시벨리우스는 아이노 야르네펠트 Aino Järnefelt(1871~1969)와 결혼했으며 이로 인해서 핀란드의 가장 오래된 가문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국민주의적 낭만주의자〉라고도 불리는 시벨리우스 최초의 창조적 시기에는 그 외에도 교향시 전설* op. 9(1892, 개정 1901), 유명한 〈투오넬라의 백조〉를 제2곡으로 하는 같은 칼레발라에 기초한 렘민케이넨 모음곡* op. 22, 교향곡 제1번 e단조 op. 39(1899), 교향곡 제2번 D장조 op. 43(1902)이 태어났다.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몇 가지 작품은 핀란드 독립파의 주장과 결부되었다는 사실이다. 핀란드는 당시에 대공국으로서 러시아제국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핀란디아* op. 26(1899)으로서 이것은 원래 역사적 정경 op. 25의 일부였다. 시벨리우스는 오케스트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이전에 오페라에 이름을 남기기를 원했다. 그러나 특히 1894년 베이루트를 방문한 이후 그는 배의 건축(칼레발라에 의한)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작품의 야망에 넘치는 계획을 포기했다. 전주곡은 정정해서 후에 〈투오넬라의 백조〉가 되었다. 그 후에는 1896년에 만든 결국 출판되지 못한 1막의 평범한 탑의 처녀가 뒤를 이었을 뿐이다. 핀란드 밖에서 출판되었고 청중들에게 들려준 시벨리우스 최초의 오케스트라곡은 부수음악 크리스찬* 2세 op. 27(1898)이었다. 1897년에는 국가의 연금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10년 후에는 종신연금이 되었다(그것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그의 국제적인 명성은 독일로부터 퍼져나갔으며 그는 그 이전에 로베르트 카야누스*가 지휘하던 헬싱키 교향악단을 따라서 1900년에 파리 만국박람회에 간 적이 있다. 1901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함께 하이델베르크에서의 독일 음악가협회의 제37회 음악제에 참가했고 1903년에는 6회에 걸친 영국 체류 중 첫번째 체류를 시작했다(마지막 체류는 1921년). 시벨리우스는 1904년에 헬싱키의 북쪽 약 30km의 야르벤파에 거처를 정하고 죽을 때까지 반세기 이상 나무에 둘러싸인 집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는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 op. 47(1903, 개정 1905), 부수음악 죽음* op. 44(여기서 그 유명한 슬픈 왈츠가 발췌된다), 그리고 부수음악 펠레아스와 멜리상드* op. 46(1905)이 만들어지게 되며, 야르벤파의 정착은 양식의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전보다 보편적이고 더 응축된 동시에 고전적이며, 특히 교향시 포히욜라의 처녀* op. 49(1906)와 밤의 기행과 일출* op. 55(1907), 또 시벨리우스의 성숙기의 대표작인 교향곡 제3번 C장조 op. 52(190407)에 의해서 그 특징이 제시되었다. 1909년 영국의 네 번째 여행 때 현악4중주곡 친애하는 음성 op. 56이 완성되었는데 이 곡이 이 작곡가의 유일한 대규모적인 실내악곡이다. 여기에 계속되는 것으로 시벨리우스의 가장 엄격하고 가장 급진적인 일련의 작품이 태어나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의 그가 암으로 인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교향곡 제4번 a단조 op. 63[1910~11], 교향시 음유시인* op. 64[1913],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 대기의 정* op. 70[1910~13] 등). 또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소나티네 op. 67(1912)도 작곡되었는데,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다지 친근감을 느끼지 않았던 피아노라는 악기를 위해 작곡한 곡 가운데 이것이 가장 잘된 작품이다. 또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한 그의 단 한 번뿐인 미국 여행 때(1914)에는 그의 교향시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작품인 대양의 여신* op. 73을 작곡했다. 전쟁 동안에 그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내에서만 여행했다. 그의 50번째 생일인 1915년 12월 8일에는 헬싱키에서 교향곡 제5번 E♭장조 op. 82의 첫번째 원고(4악장으로 이루어졌다)가 초연되었다(개정 1916, 결정판 1919[이것만이 출판되었다]). 러시아혁명 후인 1917년 12월 6일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하였고 그 후에는 1918년 4월까지 내전이 계속되었다. 시벨리우스는 야르벤파를 떠나 헬싱키에 있는 동생이 경영하는 정신병원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평화가 돌아오자 그는 여행과 연주여행을 계속하여 부조니와의 마지막 만남이 된 영국(1921), 노르웨이와 스웨덴(1923), 스웨덴(1924), 이탈리아(1924, 1926) 등지를 여행했다. 이 마지막 시기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6번 op. 104(공식적으로는 d단조, 1923), 교향곡 제7번 C장조 op. 105(초연 1924, 앞의 6개의 교향곡처럼 헬싱키에서 초연하지 않고 스톡홀름에서 초연), 셰익스피어에 기초한 부수음악 템페스트* op. 109(1925~26) 교향시 타피올라* op. 112(1926) 등이 있다. 그 후에는 작품을 작곡하지 못했고 시벨리우스는 말년의 30년간을 침묵 속에서 지냈다. 교향곡 제8번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1932년부터 1933년까지는 순조롭게 작곡을 계속했으나 그 후에는 포기했다. 어쩌면 핀란드의 어딘가에 작품이 묻혀 있을런지 모르지만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이고 이런 풍설은 언제나 부인되어 왔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자 앵글로 색슨계의 나라들에서 시벨리우스의 큰 명성과 위신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세실 그레이 Cecil Gray(시벨리우스 Sibelius[1931 런던])와 콘스탄트 램버트 Constant Lambert(자! 음악이다 Musik Ho![1934 런던]) 및 1938년에 토머스 비첨 경에 의해서 조직된 그의 작품 축제이다. 시벨리우스 자신이 마지막으로 조국을 떠난 것은 1931년의 일인데, 교향곡 제8번에 관한 작업을 위해서 베를린에 갔을 것이다. 그 후에는 1938년의 런던 음악제와 1947년의 에딘버러 음악제의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1939년 1월 1일 그는 은신처를 나와서 1922년에 작곡한 축제풍 안단테를 뉴욕의 만국박람회를 위해서 헬싱키의 라디오 방송에서 지휘한 것 외에는 미국으로 초빙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결코 야르벤파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사위인 지휘자 유시 얄라스 Jussi Jalas에게 셰익스피어의 왕들의 밤에 의한 2개의 노래 op. 60(1905)의 제1곡 〈죽음이여 다가오지 마라 Komnu hit, död!〉를 위한 현악오케스트라에 의한 반주곡을 구술 필기시킨 몇 주일 후에 사망했다. 시벨리우스만큼 서로 모순되는 판단을 야기시키는 대작곡가도 드물다. 확실히 그는 한편으로는 1880년경 무대에 등장한 이래 항상 평판에 올랐고 엄격한 음악적 질서의 주석(7개의 교향곡에 대한 분석은 많다)을 풍부하게 낳은 금세기의 우수한 예술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전위적인 환경에서는 적어도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묵살되고 매우 신뢰할 수 있는 20세기의 음악에서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시벨리우스는 대부분의 경우 회화적이고 신화적인 견지로밖에는 해설되지 않았었다. 핀란드가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벨리우스도 그 시대의 음악과 격리되어 있었다는 잘못된 생각이 여기에서 생기게 된다. 사실 시벨리우스는 활동적인 시기를 통해서 늘 여행하였고 자기 주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들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에게 있어서 고독은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들을 통절하게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은 매우 이질적인 더 흥미로운 차원에서 존재했던 것이다. 그에 대해서 이미 언급한 서로 모순된 판단으로 이야기를 돌린다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3개 정도의 인용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베토벤 이래 가장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세실 그레이, 1931), 영원한 노인, 세계 제1의 서툰 작곡가(르네 레보비츠*, 1955), 쇤베르크와 함께 드뷔시의 사후 유럽 음악의 주요 대표자(콘스탄트 램버트, 1934). 시벨리우스에 대한 반응이 절정에 이른 것은 그가 죽을 무렵이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음열음악의 대유행이 끝나고 동시에 이 유행에 대한 반동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다(영국에서는 1930년 이래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조차도 희생시켜서 시벨리우스를 찬양하는 것에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충분히 시간이 경과했기 때문에 분명하게 사정을 이해할 수 있고 현재의 음악적 문제에 비추어 볼 때 콘스탄트 램버트와 같은 평론가의 정당한 태도가 재평가되고 있다. 그는 자! 음악이다에서 최근의 걸작으로 쇤베르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1928)과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7번(1924) 등 두 곡을 들 만큼 선경지명이 있었다. 국민악파 음악가로서 시벨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야나첵과 바르톡에게 비교되어야 할 존재이다. 즉, 그는 게르만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드뷔시적인 해독제에 도움을 구한 하나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핀란드와의 관계는 민속학적인 질서에 속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에게는 민요에서 인용한 주제를 볼 수 없었고, 종종 지극히 정교하게 선법적이고 조성적이 아닌 음악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바르톡처럼 재창조된 민요도 볼 수 없었다. 시벨리우스는 1909년에 런던에서 드뷔시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야상곡을 듣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잠이 들었고 그때에만 핀란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글은 그가 적어도 얼마간은 관심이 있었을 뿐 아니라 〈동떨어진〉나라 태생이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속에 문제들을 야기시켰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핀란드와 그 사이에 분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위대한 창작자들처럼 시벨리우스는 민족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에 변증법적인 관계를 만들어낸 것이고 부언해야 할 것은 그는 지역성뿐만 아니라 스트라빈스키적 의미의, 즉 〈양차대전중〉이라는 용어의 의미로의 국제성에서도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향시는 영감의 원천으로서 칼레발라를 가진다. 이 75000행 이상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민족적 서사시는 1849년에 출판되었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핀란드 예술가에게 민족적인 동일성을 주장하려고 힘썼던 그 시기에 화가, 조각가, 음악가(시벨리우스도 포함해서)들은 거기에서 많은 것을 얻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기할 것은 시벨리우스의 음악과 핀란드어의 리듬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이다. 핀란드어는 언어의 최초의 음절이나 문장의 서두에 악센트를 두고 나머지는 빠르고 균등하게, 그리고 약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짧게 튄다. 똑같은 것을 교향곡 제2번 제1악장의 종결부의 주제처럼 서두의 지속음과 2개의 음의 규칙적인 교체, 그리고 예리한 5도의 하강에 의한 마지막 도약을 수반하는 전형적인 시벨리우스적 선율에서도 볼 수 있다[악보 1]. 정적인(지속음) 동시에 동적이기도 한(나머지 부분) 이 소우주는, 시벨리우스의 깊은 독창성이 존재해서 그의 작품을 근원적인 문명의 한 현상으로 삼고 있는 정역학과 동역학의 유래없는 종합을 탐색하기 위한 거점으로 사용된다. 가령 교향곡 제5번의 제1악장 또는 교향곡 제7번의 총체 등은 그 곡들의 포괄적인 구조로서, 즉 훨씬 큰 규모로 같은 형태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낭만주의 이래 정역학과 동역학이라는 문제는 결정적인 방법으로 문제시되고 있었다. 19세기에는 자신에게 침착하고 순간적인 것에 감정의 가치를 부여하는 슈만이라는 현상에 의해서 음악적 행위의 리듬에 많은 영향을 가져왔다. 하이든과 베토벤은 소나타형식이라는 측면보다 음악에 독특한 근육적 에너지와 전치(前置)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을 포함하는 운동감각(로버트 심프슨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J. S. 바흐의 세대에서 모든 음악가에게 현기증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이라는 참으로 바르톡적인 차원을 부여하고 있다. 위대한 형식 발명가인 슈베르트 이래 음악적 행위에서 리듬은 늦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이 사실은 특히 바그너에 의한 한 음악형식이 오페라의 1막 전체를 포괄하기에 족할 정도로 확대된다는 사실의 중대한 발견에까지 도달했다. 형식적으로 볼 때,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함께 젊은 시벨리우스에게 깊은 감명을 준 바그너의 작품 파르지팔의 제3막은 B장조에서 A♭장조로 향하는 확대로서 유일한 전조에 불과하다. 이런 완만화는 이와 병행해서 조성의 기능이 약화되어 가는 점만 있었다면 가능하지 못했다. 파르지팔 제3막의 서곡은 처음에 b♭단조와 B장조 사이의 막연한 영역으로서 전개하는 것이고, 큰 규모의 이런 불확정의 덕택으로 바그너는 계속해서 파도에 의해서 음악을 진행시켰으며 지극히 느린 리듬으로 긴장을 제거시킬 수 있었다. 20세기에는 쇤베르크와 함께 조성이 부정되었고 마찬가지로 특히 베베른과 함께 조성이 낳은 운동의 유형이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드뷔시, 바르톡, 그리고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몇 작품과 동시에 빈 고전파에서 유래한 운동의 감각이 청산되었다는 사실은 발레음악에 의해서 표현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것을 발레의 동요와 함께 때로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인상을 주었고 베베른의 작품과 같을 정도의 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고찰은 세밀한 뉘앙스를 추가해야 하며 그 자체는 어떠한 미학상의 단죄까지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시벨리우스의 개성이 독특한 윤곽을 보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리스트와 베를리오즈에게 마음이 쏠렸고 또 러시아 작곡가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던 시벨리우스는 어떤 순간에 자신의 음악이 칼레발라에 대한 여러 가지 음영을 함유한 답변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국 이 영감의 근원에서 적어도 그는 가장 외적인 측면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그는 낭만주의의 망령을 쫓는 데 성공했고 잘 훈련된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전형 그 자체가 되었다. 그의 주요 작품은 가장 환기적인 영향과 가장 강렬한 개인적 감정도 혐오하지 않고, 그런 것을 현미경적 정확성과 유례없는 객관성을 가지고 제시하거나 세계를 그런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광범위한 현실의 전망, 어쨌든 현실이 그려내는 전망 속에 그런 것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다른 사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도 시벨리우스는 동시대인인 구스타프 말러와 대립하게 되는데, 1907년 헬싱키에서 있었던 저 유명한 대화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교향곡의 본질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나는 교향곡의 양식의 엄격성과 모든 동기 사이에 내적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깊은 이론성을 찬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말러의 의견은 이와 정반대였다. 그는 교향곡은 세계와 같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벨리우스는 아주 일찍부터 바그너는 자신의 기호와 맞지 않는다고 공언했으며(그렇다고 일종의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그 기분은 계속 유지했다), 그 사실은 고전파, 특히 베토벤이 달성한 가장 귀중한 것 가운데 하나, 즉 교향곡의 황금시대를 만들어낸 그 운동의 동력학적 감각에서 바그너가 자기 자신의 주위를그의 〈신봉자〉 대다수의 주의를돌게 했다는 것을 시벨리우스가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서 판단한다면 시벨리우스는 곧 이 문제를 비교적 일찍이 파악했으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어쨌든 베토벤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을 특징적으로 잘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베토벤과 그의 음악에 대해서 똑같이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는 하나의 계시이고 거인이다. 모두 그에게 적대적이었는 데도 그는 승리했던 것이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가지는 큰 힘이란 정적인 깊이이며 어쨌든 그것은 결코 완전한 부동성과 같은 뜻이 아니지만 거기에서 대단한 동적인 힘이 나타나고 가장 좋은 경우(교향곡 제7번)에는 이 둘을 굳이 혼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계속해서 나타난 시벨리우스의 7곡의 교향곡에 의해서 그의 움직임의 제어가 서서히 발달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최초의 두 교향곡은 아직 19세기적인 측면을 남기고 있다. 제1번(1899)의 낭만주의는 개인적이고 전설적이며, 제2번(1902)은 집단적이고 민족적이다. 제1번의 네 악장 가운데 최초의 악장에는 전형적인 특징인 68소절에 이르는 F#음의 긴 보속음이 이미 보이고 있지만 그것이 사건의 동적인 흐름을 조금이라도 중단시키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이 보속음에는 자율적 방법으로 큰 동적 활력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2번의 네 악장 가운데 처음 악장은 매우 참신하게 보인다. 그것은 주제적인 면이 아니라 다이내믹한 점과 음향적인 면에서 흩어진 모자이크로서 서두에 나타난 곡의 흐름을 서서히 확고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제3번(1907)이 작곡된 것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와 엘렉트라의 사이로서 쇤베르크가 선뜻 무조성으로 나아가려던 시기이고, 그 단호하게 주장된 C장조라는 조성과 관현악법, 그리고 가볍고 밝은 분위기를 생각해 본다면 이 작품의 제작이 하나의 용감한 행위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 악장 중에서 최초의 악장은 방대한 에너지를 가지며 최초의 몇 소절에서 이미 앞을 향해서 다이내믹하게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특히 주제의 변용에 의해서 지극히 치밀한 소나타 형식과 비교적 느린 코다가 선행하는 부분에 접합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분석하는 방법이 유감스럽게도 되어 있지 않다. g#단조 안단티노에 이어지는 최종악장은 선행하는 어떠한 형식도식과도 관련된 적이 없는 중요한 창조이며 바그너적인 완만한 리듬과 베토벤적인 역동성의 종합이라는 시벨리우스의 최초의 위대한 예를 창조하고 있다. 그 중간 정도에 일정한 가락이 없는 휴지를 위한 짧은 한 절을 제외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장조의 하나의 거대한 보속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 악장에 잠재하는 완만성이 극히 빠른 템포를 방해하고 있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 전체적인 구성이다. 매우 짧은 처음 부분이 서주를 대신하고, 다음 두 부분은 시벨리우스가 그 비결을 쥐고 있던 그 작품의 하나에 의해서 나누어져 스케르쪼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리듬과 선율의 오스티나토를 탄 거역하기 어렵게 나가는 네 번째 부분은 글자 그대로 종곡의 대신인 동시에 교향곡 전체의 종결부의 대신이다. 중요한 것은 이 대부분이 모두 후험적으로 선행하는 하나 또는 복수의 분명한 도입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특기할 것은 네 부분 모두 고유한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따로 들으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네 번째 부분은 금관악기에게 지배를 당하여 누적된 긴장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거의 스트라빈스키적인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격렬한 타격음이 마지막까지 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거기에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절정에 다다르고 모든 것이 끝나면 음악은 갑자기 정지한다. 한편으로는 거의 변함없는 화성적인 기초를,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여러 가지 각도에서 검토한 후 마지막으로 개화하는 장조라는 조성을 가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단편화와 벡터적 방향, 그리고 수축과 확대를 관련짓는 다이내믹한 상부구조를 가진 제3번의 최종악장은 여러 가지 힘의 거대한 교차의 장이고 시벨리우스가 가진 여러 가지의 것을 하나로 모으는(브라이언 퍼니호) 기술의 터무니 없는 증언이다. 이 악장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사건은 겨우 9분 또는 10분으로 응축되고 있다. 갑작스럽게 전개가 순간순간 중단되어서 곡의 흐름의 기복이 심함에도 불구하고 거대하게 단 한 호흡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전위적이 되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1910년부터 1914년까지라고 하면 달에 홀린 피에로와 봄의 제전 등이 만들어진 중요한 시기이며, 이 시기의 시벨리우스의 작품은 몇 가지 측면에서 그 시대의 전위에 가장 접근하고 있다. 금욕적인 제4번(1911)(조적으로 차단한다)의 기본 요소는 3온음(또는 증4도)이고, 제4번은 거의 음열적 방법으로 음정관계를 구성의 원소재로 사용하고 있으며, 교향시 음유시인은 그 간결성과 음향에서 베베른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큐비즘적 음악과 21세기의 음악이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지만 격언적이고 반수사적인 작품인 이 제4번에 대해서 시벨리우스가 다음과 같이 평한 것을 묵인했다. 이 작품은 오늘날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항의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것은 절대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 이 서커스란 페트루슈카보다는 오히려 독일 음악과 그 폭발이라고 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또 하나의 역설은 곧 이 시기에 시벨리우스가 완전히 매료되어 엘렉트라를 연주하고 그의 일기에 말러의 슬픈 노래를 〈훌륭한 음악〉이라고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1914년에 미국에 도착했을 때 당신이 보기에는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가 누구냐는 한 신문기자의 질문에 쇤베르크입니다. 그리고 내자신의 음악도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던 때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 사실은 시벨리우스의 또 다른 글에 의해서도 확실하다. 장기간에 걸친 우리의 시대적 과오는 다성음악에 대한 신앙이었다. 종종 사람들은 하나의 종합체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부분을 차례로 겹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었다. 분명히 그런 의미가 배후에 있는 한 다성음악은 하나의 힘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 점에 관해서 얼마 전부터 작곡가들 사이에 일종의 전염병으로 만연되고 있다. 제6번의 서두와 제7번의 서두에 있어서 사실상 화려한 다성적 짜임새를 제외한다면 시벨리우스의 작품 속에는 전통적인 의미, 즉 〈학습용 푸가〉라는 의미에서 대위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견지명이 있는 행위인 동시에 용기있는 행위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아도르노에 의해서 반동적이라고 단죄당한 이유의 하나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모든 음악을 최종적으로 게르만적 전통의 척도로 측정하고 판단했던 것이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위상적이고 긴장의 변주, 즉 소재와 오케스트라라는 총체를 끊임없이 변형하는 것에 기초하고, 그것을 바레즈 음악의 높이에서와 마찬가지로 길이에 있어서도 한계에 이를 정도로 연장하고 있다. 오늘날 평면의 연구가 유클리트기하학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과거의 다성적인 표현형태에 등을 돌리고 있다. 제4번의 네 악장 가운데 첫 악장에는 겨우 10분 사이에 바그너적인 리듬의 극히 완만한 템포와 베베른의 작품에 필적할 정도로 응축된 풍요한 소나타 형식을 성공시킨 부분이 있으며, 거기에 단성적이고 집약적이면서 수축과 확장면에서 절정에 대응하는 전개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열쇠가 있다. 이 전대 미문의 특징이 진정한 후계자들을 가지게 되는 데는 1960년대를, 특히 리게티를 기다려야 했다. 시벨리우스는 본질적으로 교향곡적이라는 것은 전체를 답파하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고 그것은 회화적이라는 사실과는 정반대의 사실인 것이다라고 공언한 적이 있다. 제5번(1919)의 세 악장 가운데 최초의 악장은 시벨리우스의 7곡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강력하고 바그너적 리듬과 베토벤적 역동성의 새로운 종합이며 이 경우에 이것들은 (제3번의 피날레처럼) 겹치지는 않는다. 어쨌든 그렇지만은 않다. 여기에서는 사람이 이쪽저쪽으로 옮겨 가지만 여러 가지 힘의 거대한 덩어리이고 하나의 큰 호흡인 채 전체적 통일성이 의심스러워지는 일은 결코 없다. 네 부분이 있으며 모두 강한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최초의 (절제있는 템포의) 두 부분은 유사하지만 두 번째는 첫 부분의 보강으로 나타난다. 세 번째는 하나의 도전이다. 여기에서는 일종의 비뚤어짐이 길이에 있어서 소재를 늘리고 사람은 쇠약의 극에 달하고 있으며, 음악은 동적인 에너지가 결여되어 애매함 속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러나 몇 가지 지속음에 의해서 선행하는 부분과 결부된 하나의 거대한 분기, 즉 그 질풍적 표현과 예리한 타격에 의해서 만들어낸 극적인 긴장이 베토벤 유형의 스케르쪼처럼 유일하고 가능한 배출구로서 나타난다. 교향곡의 전역사를 통해서 이 제5번보다 더 훌륭한 이행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바그너를, 이행부를 잘 사용하는 음악가로서 정의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역동성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B장조의 모든 화려함을 가지고 마치 쾌속열차 속에서, 그리고 터널에서 나올 때의 전원풍경처럼 출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것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을 가지는 것이다. 악장의 끝에서 끝까지 끊임없는 변용을 일으키면서 몇 가지 주제가 동일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은 아니다. 그것은 서로 겹쳐지고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며, 어떤 때에는 이 하나가, 어떤 때에는 또 다른 하나가 우위에 서는 몇 가지 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시벨리우스의 서법의 솜씨에 의한 것이다. 시벨리우스의 기술이란 융합의 그것이고 그에게는 주제의 조형성이 글자 그대로의 구획이라기보다는 템포의 변화와 다이내믹한 플랜의 급격한 변화쪽에 훨씬 큰 주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말년의 30년에 걸친 시벨리우스의 침묵과 제8번의 파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이 파기의 이유 중 하나는 실망시킨다는 공포, 그것도 자신과 그 숭배자들을 실망시킨다는 공포였다. 시벨리우스는 그 시대의 자신의 입장에 의해 제어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놀랍도록 무관심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행동과는 전혀 대조적이었다. 음열기법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알반 베르크만이 쇤베르크의 최상의 작품이다라고 한 그의 글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피에르 불레즈가 최근에 베르크를 특히 높히 평가한다고 공언했는데 〈변형으로 지향하는 형식〉, 〈큰 애매성을 동반한 계속적인 전개라는 감각〉 속에서 그는 자기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교향곡 작가로서의 시벨리우스는 말러와 마찬가지로 조성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과정상의 모든 것을 배제하고 우주적이고 신비한 느림에 통합되는 힘찬 연속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가 취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주제와 모아진 절이 생기기 전에 오케스트라의 깊은 내면에서 출현하는 긴 보속음과 지속음은 결과적으로 어떤 조성상의 고착까지 초래했다(그것 자체가 말러에게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시벨리우스의 방법 중 하나는 곧 가볍게 전조를 거부하는 것이고, 이 몇 음부에 조성적인 기능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영웅적인 거절에서 그의 음악의 선법적인 배색이 생기는 것이다. 걸작인 제6번(1923)은 4악장으로 이루어지며 표면상의 고요함은 내부에 강력한 폭풍을 감추고 있고, 조성과 선법이 서로 보완하고 대립하는 이상 그 둘은 분석을 함께 할 필요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d단조이지만 b단조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주로 도리아선법과 리디아선법에 의거하면서 그것들을 종종 조성으로서 다루고 또 C장조를 조성으로서가 아닌 도(C)의 선법으로서 제시하게 된다. 시벨리우스가 에드가 바레즈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바레즈처럼 일시적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재의 고갈이라는 거의 틀림이 없는 같은 이유에 의해서 침묵했다는 사실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이 암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듯이 오케스트라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째서 가능한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발트해와 핀란드만에 산재한 암벽에 대해서 시벨리우스가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벵크트 폰 퇴르네 Bengt von Törne에게 한 말). 이것은 바레즈가 도시와 기계, 그리고 공업문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한편, 시벨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공언한 적이 있었다. 작곡을 위해서는 나에게 광대한 핀란드나 대도시의 포장된 거리가 있으면 된다. 그곳에서만 고독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바레즈의 음악과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전원에 대한 증오와 자연에 대한 사랑을 공유한다. 더욱이 바레즈에게는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여러 가지 물질의 소리였고, 시벨리우스에게는 인간이 부재한 여러 가지 기본적인 힘의 뒤얽힘이었다. 이런 것이 바레즈의 아르카나와 같은 해(1926)에 작곡된 시벨리우스의 타피올라의 근본적인 메시지였던 것이다. 바레즈가 바이올린을 다른 시대의 악기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벨리우스는 결코 현악기를 포기한 적은 없었지만 거기에서 일그러진 소리를, 후에 출현하는 톤 클러스터를 예고하는 땅고르기용 롤러의 효과를 끌어냈다. 또 시벨리우스에게 예리한 타격음과 지속음이 생기는 것은 금관악기로부터이고 그것은 또한 곡의 흐름의 원동력이 되었다(cf. 템페스트의 서곡). 1960년에 들어와서 후기 음열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말러의 내면에서 주요 구성요소와 투명성의 융합, 음향적 오브제라는 관념, 과거에 대한 비판적 시각, 그리고 완전한 주제적 사고를 발견했다(cf. 말러의 교향곡 제6번[1904]). 한편, 시벨리우스는 주제와 주제의 지표에 부여된 중요성을 서서히 적게 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의 주제는 종종 떠있는 듯한 음악을 전반적으로 받쳐주는 리듬과 다른 리듬에 따라서 변하는 양상을 보였다. 거기에서 그의 교향곡의 형식이 가지는 역설적인 진행방법이 생긴다. 그것은 분산과 순수한 계기성 속에, 더욱이 주제의 지표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 속에 시작된다. 이 윤곽의 전체는 되풀이되고 힘찬 통일의 과정에서 흡수될 것이다. 이 단계는 윤곽의 전체를 조금씩 포위하면서 안으로 통합하며 계기성을 심도있게 함으로써 상호의 동맹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이다(위그 뒤푸르*). 물론 시벨리우스는 그 놀랄 만한 효과를 연주자의 수에 있어서는 베토벤의 오케스트라 보다 약간 초과하는 오케스트라에서 끌어냈으며, 불협화음의 해방이라는 점에서는 그의 현악4중주곡을 높이 평가한 바르톡만큼은 철저하지 못했고, 전기 쇤베르크적 대위법의 탐구에서는 말러만큼 철저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통사론적 수준에 대한 그의 기여는 유기적인 음악형식의 쇄신이라는 점에서 달리 유례가 없다. 적어도 드뷔시가 성취한 것을 직접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이 사실은 1970년대와 80년대의 음악의 여러 분야와 직접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제7번(1924)은 쇤베르크가 12음기법에 의한 초기의 작품을 발표했을 즈음에 작곡한 C장조의 범협화적인 달성이고, 쇤베르크의 실내교향곡 op. 9(1906)와 마찬가지로 단 한 블럭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다. 다만 이 op. 9에서는 소절과 각 큰 삽입악절이 주제와 악장, 그리고 전통적으로 나뉜 악장의 각 부분에 대해서 정해진 방법에 따라 스스로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제7번에서는 그런 사실이 전혀 없고 서로 부딪치고 있는 몇 가지 덩어리에 의해서 성립되고 있으며, 순간을 한 조성의 여러 차원으로 확대시키는 동시에 영원에 대해서는 그 고유의 크기와 시간 관념을 부과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몇 가지 다른 템포와 동시에 제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의 막을 여는 완만한 에피소드는 전부 적어도 한 시간은 계속되리라 생각될 정도로 넉넉하지만 수축확장의 변증법의 효과에 의해서 지속시간이 20분 정도로 축소된다. 제7번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쇤베르크의 말을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C장조로 작곡해야 할 걸작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조성적인 배색을 사용하고 있고 특히 마지막에는 작품 전체를 삼켜버릴 것 같은 위풍당당한 장엄성과 위대성을 가지고 몇 차례나 삽입된 트롬본의 주제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중간 정도, 그리고 4분의3을 넘어선 곳 정도까지는 동적 에너지가 지배적이다. 이 에너지는 갑자기 시벨리우스가 그 비결을 쥐고 있던 템포의 양의적인 변주에 의해서 분명히 차단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동적 에너지는 종결부의 절정으로 재고되는 사이에도 잠재적인 위치에서 역시 확연히 존재하고 있다. 끝은 당돌하게 철의 손이 부과한 것 같지만 곧 하나의 선언인 것이다. BC(이끈음으뜸음)라는 진행이 상당히 농밀한 덩어리에서 나타나고 현악뿐이라는 순수성의 뒷받침을 받고 진행되어 간다. 말러의 교향곡 제9번의 제1악장과 대응하는 시벨리우스의 제7번은 연주자와 청중에게 가장 고도의 집중을 요구한다. 뒤에 작곡하게 되는 타피올라와는 반대로, 이 작품을 들을 때 사람들은 시벨리우스의 두 가지 신조의 고백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첫번째 고백은 기묘하게도 인생을 관찰하면 할수록 고전주의만이 미래의 길이라는 확신이 커지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그가 전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적인 힘의 반영인 또 하나의 고백은 유럽대륙의 여러 면모를, 그리고 그들이 견뎌온 것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 그 나라들이 모두 야만상태를 극복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문명을 신봉한다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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