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서울 분산 정책으로 들어선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한적한 농촌이었던 강남고속터미널 일대가 복잡한 도심이 되었는데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아래 이미지는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일대를 촬영한 2022년의 항공사진이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들이 빽빽이 들어섰고 도로망도 잘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운동장을 갖춘 학교들이 보이고
대형 병원도 터미널 건너에 자리했다.
2022년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제공)
이 사진만 본다면 강남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자리한 것은 당연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터미널 건설 계획이
발표된 1975년에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비쳤었다. 당시 서울 시민 대부분은 강북에 살았었고 막 개발되기 시작한 강남은
인구를 유입할 만한 기반 여건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다.
강남으로 서울을 분산하라
1969년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도입된 고속버스는 승객 운송의 혁명이었다.
1970년대에 뻥 뚫린 고속도로를 말 그대로 고속으로 달리는 버스는 산업화로 발전하는 우리나라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데 고속버스 회사마다 종로나 을지로, 혹은 서울역 일대나 동대문 등에서 터미널을 따로 운영했다. 터미널에는 매표소와 승차장 정도만 있었고 대합실이나 화장실 같은 편의 시설이 열악해 승객들의 불편을 샀다. 관계 당국에서 통합 고속버스터미널을 계획하게 된 배경 중 하나다.
여기에 정책 결정권자의 생각과 의지도 한 몫을 차지했다. 1974년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구자춘은
서울 시내의 교통 혼잡과 매연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 원인 중 하나로 서울 시내에 산재한 고속버스터미널을 꼽았다.
그래서 1975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시로 연두 순시를 나왔을 때 구자춘 서울시장은 도심에 산재한 고속버스터미널들을 통합한 후 교통량 분산을 위해 도심과 부도심 여러 곳에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당시 서울시 고위 공무원이었던 손정목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터미널 통합 계획과 강남 이전 계획을 재가하며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을 강조했다고. 강남 개발이 지방 인구를 서울로 유입하는 결과가 되면 안 되고 강북 인구가
강남으로 분산하는 결과를 불러와야한다는 것이다.
즉 포화된 서울을 강남으로 분산하는 것이 최고 권력자의 의중이었다.
여기에 인구는 물론 터미널 같은 제반 시설도 포함된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서울은 강북을 의미했다.
강남의 고속버스터미널을 활성화 하라
결국 강남에 고속버스터미널 건설하는 것은 대통령 관심사항이 되어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대통령은 공무원을 움직이게 한다. 1975년 6월 27일 서울시는 영동 지구 반포동에 고속버스터미널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강남 지역은 개발 중이었다. 서울시는 1970년부터 경부고속도로 주변을 영동1지구로, 압구정, 신사, 논현, 역삼 등을
영동2지구로 지정해 토지구획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반포동의 터미널 부지 5만평을 영동1지구에 포함시켜 일사천리로
공사를 진행했다.
1975년 항공사진. 고속터미널이 들어서게 된 반포동 일대. 빨간 원이 터미널 자리. 노란 원은 경부고속도로.
사진 왼쪽 상단에 비닐하우스가 보이는 등 터미널 부지 주변은 농촌이었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제공)
1977년 항공사진. 고속터미널이 들어선 반포동 일대. 빨간 원이 터미널. 노란 원은 경부고속도로.
주변은 농지가 대부분이고, 현재의 한강 공원 자리는 모래사장이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제공)
터미널 공사가 시작된 날은 1976년 4월 8일이었고 약 5개월 후인 9월 1일에 1차로 준공했다.
이때의 시설은 고속버스터미널이라기엔 열악했다. 승차장 3개와 300평 크기의 정비 시설이 다였다.
가건물과 야외시설 위주라 승객을 위한 편의 시설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당시 신문기사를 검색하면 “콩나물 대기” “고달픈 승하차”와 같은 논조로 강남고속터미널 이용에 불편한 점들을
지적하는 기사를 흔히 볼 수 있다.
강남에 터미널을 설치했어도 고속버스회사들은 강북에 있던 기존 터미널을 계속 운영했다.
반포동의 터미널을 강북 터미널에서 승객을 먼저 태우고 경유하는 중간 정류장 정도로 활용한 것.
과거 기사를 보면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건설 이후에 벌어진 혼란을 다룬 것들이 많다. 강남에서 표를 구매한 승객이 있지만
강북에서 출발한 버스가 강남에 정차하지 않거나, 강남 출발 버스의 승객이 적다며 고속도로 입구에서 하차시켜 강북에서
출발한 자사 고속버스에 태우는 일까지 벌어졌었다.
모든 것이 강남 터미널을 이용하는 승객이 적어서 생긴 일이었다. 그래서 고속버스회사들이 저항했다.
1976년 11월 전국버스사업조합 명의로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 이전 계획을 보류해달라고 관계 당국에 건의한 것.
사업자들은 강남 쪽 승객이 적고, 편의시설이 열악해 암표상이 들끓고, 강남 터미널 연결도로에 교통 체증이 많다는
것 등을 사유로 내세운다.
이에 교통부는 특단의 조치를 처방한다. 1977년 6월까지 강북 터미널을 폐쇄하고 강남 터미널에서만 출발과 도착할
것을 강제하는 ‘행정명령’을 내려버린다. 이행하지 않으면 고속버스 면허를 취소하겠다고 경고까지 한다.
(2022. 08. 31)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전경.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고속버스들이 터미널을 나서고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결국, 고속버스회사들은 강남터미널에서 출발과 도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편의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정식 터미널
건물을 짓게 된다. 그렇게 들어선 건물이 1981년 10월에 준공된 지하 1층과 지상 11층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다.
지금의 경부선 노선 중심의 터미널 건물이다.
현재의 호남선과 영동선 터미널을 있게 한 역사는 조금은 드라마틱하다. 별도 기사로 다룰 예정이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의 나비 효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개장한 1976년에 강북에서 강남의 터미널로 가려면 한남대교나 한강대교를 거쳐야 해서 멀리
돌아가야 하는 형국이었다. 강북에 사는 시민들이나 강북 터미널을 병행 운영하던 버스 회사들의 불편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건설한 것이 76년에 준공된 잠수교와 78년에 준공된 남산 3호 터널이었다. 물론 두 시설 모두 강남을 연결하는
교통망 개선에 목적이 있었지만 고속버스터미널과의 연계를 염두에 두기도 했다.
그럼에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교통이 불편하다는 민원이 오래도록 있었는데 1985년 지하철 3호선이 개통된 후에야
이런 불편이 잦아들었다.
한편, 도심 터미널 폐쇄를 명령한 교통부는 후속 조치에 들어간다. 강북 도심에 산재한 6개의 고속버스터미널 부지를
주차 전용 지역으로 묶는다고 발표했다. 기존 터미널 자리에 빌딩을 짓거나 다른 용도로 개발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만약 옛 터미널 부지에 건물이 들어서거나 다른 시설로 만들면 또 다시 인구 집중의 요인이 돼 터미널을 강남으로 옮기는
목적에 어긋난다고 본 것. 원래 도심 터미널들은 도시계획법 상 '자동차 정류장'으로 인가를 받았었다.
서울역 건너 게이트웨이타워(옛 벽산빌딩). 1970년대에 그레이하운드 터미널 자리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울역 건너 세브란스 빌딩. 1970년대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있던 자리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당시 정부의 발표처럼 강북 도심의 터미널들이 주차 전용 지역으로 운영되었는지는 더 취재가 필요하다.
다만 현재 그 자리에 대형 건물들이 들어선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역 인근의 터미널들만 해도 게이트웨이타워
(옛 벽산빌딩), 세브란스빌딩, 한진빌딩이 되었고, 동대문 터미널에는 호텔이 자리하고 있다.
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도심에 대형 빌딩들이 들어섰어도 사람들은 강남으로 몰렸다.
아무튼 서울을 강남으로 분산하려는 당시의 의도는 크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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