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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궁궁통1
물리학계의 거장인
장회익(서울대 천체물리학과) 명예교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물리학을 계속 연구하다가
갈림길을 만났습니다.
물리학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인으로 살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선택의 갈림길이었습니다.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는 천체물리학을 깊이 공부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신앙이 더 깊어졌다고 고백했다. 중앙포토
당시
그에게
둘의 공존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었습니다.
그는 고민했습니다.
고뇌를 거듭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과학자의 삶,
물리학자의 삶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궁궁통2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오랜 시간
그는
물리학자로서,
과학자로서
깊이 궁리하고
파고들며
이 우주의 이치를
탐구했습니다.
진리는 하나다. 그러니 과학이든 종교든 깊이, 아주 깊이 들어가다 보면 결국 만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과학의 이치와 종교의 이치가 본질적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그러던 어느 날
장 교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크리스천이 돼 있는 걸
말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꽤 있더군요.
“그것 봐,
역시 기독교가 맞잖아.
그분도
과학자의 삶을 살면서
기독교에서 나갔다가
결국 다시 돌아왔잖아.
돌아온 탕아처럼.
그러니까
기독교가 진리야.”
저는
이런 답을 들으면서
참 답답했습니다.
왜냐고요?
이런 대답에서는
‘깊이’가 읽히지
않으니까요.
물리학자의 삶이냐,
기독교인의 삶이냐라는
갈림길에 섰을 때
장 교수는
왜 전자를 택했을까요.
당시
그가 알던 기독교는
지금 그가 아는 기독교보다
깊이가 훨씬 얕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을 해야 하고,
이것의 바깥에는
진리도 없고
구원도 없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기독교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양립할 수가 없었겠지요.
과학과
기독교가 말입니다.
#궁궁통3
종교를 내려놓고
물리학만 줄곧 파고들던
장 교수는
나중에 깨닫습니다.
물리학을 바라보는
안목이 깊어진 만큼,
종교를 바라보는
안목 역시 깊어진 겁니다.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는 과학에 대한 안목이 깊어지면, 종교에 대한 안목도 깊어지더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과학도
이치를 탐구하고
종교도
이치를 탐구하는
영역입니다.
본질적으로
둘은 서로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한쪽에 대한 통찰이
깊어지면
다른 쪽에 대한 통찰은
저절로 깊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깨닫는 겁니다.
깊은 눈을 가진
물리학자가 된 그는,
어느새
깊은 눈을 가진
기독교인이 돼 있음을
깨닫는 겁니다.
장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정말 이 우주에
엄청나고 놀라운 질서가
있음을 느낀다.
그건 알아나갈수록
더 높아지고
더 심오해진다.
그래서
궁극적 결과에 대해
미리 단정 짓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계속 찾아갈 뿐이다.”
이 말끝에
장 교수는
성경의 한 구절을
꺼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내 형상을 함부로 만들지 마라.’
이 말이
그 뜻이 아닌가 싶다.
우주는 계속 변화하고,
무언가를 향해 나가고 있다.”
불교의 『금강경』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상(相)이 상(相)이 아닐 때
여래를 보리라.”
불교에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패러다임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리를 만난다고 말한다. 백성호 기자
형상에 갇히지 않고,
형상의 바탕인
본질을 볼 때
진리를 본다는 뜻입니다.
#궁궁통4
그러니
기독교도
불교도
과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떠한 틀이나
패러다임,
종교적 교리의 테두리에
갇힌다면
진리와 통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고요?
진리 자체에
틀이 없기 때문입니다.
테두리도 없고
특정한 패러다임도
없습니다.
진리는 무한으로
열려 있고,
모든 상대를 향해
녹아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진리의 속성이니까요.
우리가
그 속성과 닮아갈 때
우리도
진리와 통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과 물이 통하고,
바람과 바람이 하나가
되는 이치입니다.
장회익 교수는 천체물리학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과학자이자 구도자다. 중앙포토
만약 우리가
물과 하나가 되길
바라면서도
스스로
기름의 태도를 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과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진리와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선택의 갈림길에서
과학자로 살 것인가,
기독교인으로 살 것인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과학자든,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기름으로 살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장회익 교수가
과학자의 삶에서도
기독교인의 삶에서도
여전히
깊은 안목과 통찰을
보여주는 건,
그가
진리의 속성인
물에 더 가까워지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걸 위해
자신의 패러다임을
내려놓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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