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고통이 마음속에 있다(至痛在心)
지통재심(至痛在心)
[요약] (至: 이를지. 痛: 아플 통. 在: 있을 재. 心: 마음 심)
‘커다란 아픔에서 마음이 헤어 나오질 못하고 묶여 있다’는 뜻으로,
아픔은 너무나 큰데 어찌할 길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
[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내용] 조선 인조(仁祖)때, 병자호란(丙子胡亂)에서 청나라에 패하고 조선은 두 왕자를
청에 볼모로 보낸다. 그 중 형인 소현세자가 돌아오자마자 죽고 나서 둘째 왕자(봉림대군)가
왕위에 올라 효종(孝宗)이 됐다.
효종에게는 믿고 의지하던 백강 이경여(李敬輿)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효종이 북벌에 온힘을
기울이다 심신이 피폐해지자 이경여는 ‘나라의 한을 씻어야 함은 마땅하지만 너무 조급해 마십시오.’ 고 위로의 글을 올렸다.
효종이 이에 답글을 썼는데 그 글에 ‘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 라는 글귀가 등장한다. ‘나라와 백성의 수모를 씻지 못해 아픔은 깊이 남아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기만 하구려’…
이런 뜻이다.
이 내용을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 32년 병술(1706,강희 45)6월11일 (정유)의 기사를 보자.
병조 판서 이이명이 세자에게 글씨쓰기를 청한 일로 관직을 파면시키다
임금이,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이명(李頤命)이 서연(書筵)에서 소지(小紙)를 들이고
세자(世子)에게 글씨 쓰기를 청한 것은 사체(事體; 일의 이치와 정황)에 미안한 일이며,
추고(推考)하여 국문(鞫問)하는 것은 일이 중대한 것인데 죄인의 나문(拿問; 죄인을 체포하여
심문하는 것)을 청할 때에 완의(完議; 충분히 의논하여 참석자 전원이 합의한 내용)를 기다리지
않고 경솔하게도 먼저 번거롭게 아뢰었으니, 또한 몹시 놀랄 만한 일이란 이유로써 엄교(嚴敎)를
내려 특별히 그 관직(官職)을 파면시켰다.
【비망기(備忘記)의 한 말은 위에 보인다.】
동궁(東宮)은 다음 임금이고, 빈객(賓客)은 사부(師傅)와는 같지 않다. 또 궁관(宮官)이
심화(心畵; 마음을 나타낸 글씨) 보기를 청하는 자가 예전에도 혹은 있으나, 다행히 얻게 되면
진실로 진귀(珍貴)한 것으로 여겨 간직하여 왔다. 그러나 곧 소지(小紙)를 들이밀고 감히
등본(謄本)을 보이면서 곧 이에 의하여 써서 내려 주기를 청하는 것이 마치 지휘(指揮)하듯
한다는 것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이이명의 처지로써 방자하게도 이렇게 하였으니,
그가 지나치게 교활하여 기탄(忌憚)함이 없는 것이 극도에 달하였다. 그가 마침내 참역(僭逆)에
빠지게 된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날은 저물고 길은 먼데, 지극한 고통이 마음속에 있다.
[日暮途遠 至痛在心]’는 여덟 글자는 곧 효종(孝宗)이 이이명의 조부(祖父)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에게 내려 준 소비(疏批; 상소(上疏)에 대하여 임금이 내리던 대답) 중의 말로서
오로지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스스로 힘쓰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앞서 송시열(宋時烈)이 이이명을 위하여 반(盤)과 같이 큰 글자로 썼는데,
이이명은 거주하는 백마강(白馬江) 석벽(石壁)에다 새겼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그 뜻이
*오자서(伍子胥)에 가까운 것으로써 주장하면서 ‘이이명이 뒤에 화(禍)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반드시 이곳에 쓴 것이 겉으로는 대의(大義)에 우러러 힘쓴 듯하나 속으로는 훗날에 스스로
보전할 계획을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주]오자서(伍子胥) : 춘추 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 사람으로, 그의 부형(父兄)이 초 평왕(楚平王)에게
죽음을 당하자 오(吳)나라로 달아나 오를 도와 초를 쳐서, 이미 죽은 평왕의 묘를 파 그 시신을 3백 번 두들겼고,
뒤에 월(越)나라와 전쟁에서 화친을 반대하다가 왕 부차(夫差)로부터 속루(屬鏤)란 칼을 받고 자결하면서 죽은 뒤
눈을 도려내 동문(東門) 위에 달아서 월나라에 멸망당하는 것을 보게 하였다는 고사(故事).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의 백마강 서쪽 기슭 부산의 동쪽 언덕에 자리한
각서석(刻書石)은 자연 암반에 글씨를 새긴 것으로 현재 대재각(大哉閣)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백강 이경여(李敬輿)가 효종 8년(1657), 북벌에 관련하여 상소를 올리자 왕이 글을
내렸는데, 그 중에
"<북벌을 위하여>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면서 조그마한
진전이라도 있을까 하는 바램이 진정 본령(本領)이 아니라는 것 (지엽적인 일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사무친 원한 풀지 못한 채,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오. ……[
寡人絶嗜欲而夙夜焦身 欲見小利者 非不知其爲末務 而誠以至痛在中有日暮道遠之意故也……]
《효종실록(孝宗實錄) 권18, 8년 정유(丁酉) 5월 정미조(丁未條)》
“誠以至痛在心(성이지통재심), 日暮途遠(일모도원)”이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나중에 우암 송시열이“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
《뜻:지극한 아픔은 마음에 있고,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머네>을 써서 이경여의 아들
이민서에게 주었고, 손자인 이이명이 숙종 26년(1700)에 부산의 자연암반에 새기고
이 건물을 세웠다.
이때 건물 이름을 대재각이라 한 것은 이경여가 효종의 비답(批答)을 읽고 상서(尙書)의
“大哉王言”이라 한데서 따온 것이다.>
자료출처-네이버블로거 긴하루 http://blog.naver.com/hjh044/220808661199
첫댓글 유익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