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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골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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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고양이, 인간을 위로하다 / 그림으로 읽는 동물의 왕국
ysoo 추천 0 조회 88 15.05.11 23: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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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25마리의 고양이 샘과 한 마리의 파란색 고양이(25 cats named Sam and one blue pussy), 1954

 

그림으로 읽는 동물의 왕국


고양이, 인간을 위로하다

 

그림 1.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의 작품은 예쁘다.

예쁘고 쉬우니 보는 재미가 커서 대중들은 팝아트에 환호했다. 실크 스크린은 앤디 워홀이 개발한 기법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과 하나가 되었다. 워홀의 실크 스크린 위에서 콜라, 수프 캔 등이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와 똑같은 대접을 받으며 예술작품으로 탈바꿈됐다.

그에게는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예술의 소재였고, 독창적인 스타일로 쉽고 간단하게 작품을 만들어냈다. 해설 없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질 때, 워홀은 홀연히 등장하여 ‘예술이 뭐 별 거야?’라는 듯 세련되고 감각적인 세계를 선보였다. 이렇듯 자연을 떠나 캔버스를 우선시했던 세잔과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든 변기에 자신의 이름을 사인하고 미술관에서 전시해 스캔들을 일으켰던 마르셀 뒤샹처럼, 워홀도 예술의 흐름을 바꾼 혁신적인 예술가였다.

 

알록 달록한 워홀의 고양이들은 모두 사랑스럽다. 초록 고양이, 빨간 고양이, 보라 고양이 등 현실에 없는 털 색깔을 가져서 더욱 신기하고 사랑스럽다. 아마도 워홀의 고양이 초상화를 보며 전 세계 모든 고양이들은 즐거워하지 않을까? 이처럼 현대인들은 고양이를 극진히 사랑하고 대접하고, 심지어 신이라도 된 듯 떠받든다.

대체 무슨 이유로 현대인들은 고양이를 숭배하게 되었을까?

대답의 시작은 산업혁명으로 사회가 급변하던 무렵의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 그림이 담고 있다.

 

 

그림 2. 우유를 저어 버터를 만드는 여인(Woman churning butter), 1866-68

 

그림 2. 자연과 농촌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밀레 그림에서 고양이는 노동에 집중하는 여인에게 몸을 비비고 있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가 머리와 등, 꼬리를 비벼서 자신의 냄새와 주인의 냄새를 교환하는 ‘내 냄새를 좀 묻혀주겠어’ 식의 행위는 단순한 영역 표시가 아니다. 이 냄새를 통해 주인이 자신의 사회적 그룹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며 이런 공동의 냄새를 가진 사람들이 주위에 있을 때 더욱 안정감을 갖는다.

그래서 몸을 스윽 비비는 고양이에게서 애정이 배어나오고, 밀레의 파스텔과 크레용은 그 마음을 포근하게 잡아둔다. 저 고양이에게 사랑받는 여인은 남루하거나 초라하지 않다. 소박한 살림이지만 위엄이 풍긴다.

집 밖에서 쌓인 피로는 집 안으로 들어가면 버터 녹 듯 스르륵 없어질 듯하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사랑이 흐
르는 가정이 소중하다. 이렇듯 당시 떠오르던 새로운 유파인 인상주의를 비롯한 여러 유파들에게 고양이는 가정의 사랑과 평화를 표현하는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고갱의 고양이도 그러했다.

 

 

그림 3. 아이아 오히파(Eiaha Ohipa (Not working)), 1896. Gaugin - Nicht arbeiten - 1896

 

 

그림 3. 인상파 화가들에게 여행은 새로운 빛을 찾는 중요한 여정이었다.

빛은 어디에나 있으나 자신을 잡아끄는 빛을 찾으러 화가들은 어디로든 떠났다.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으로 떠난 에밀 베르나르, 남불에서 불 붙 듯 타오르는 태양을 만난 고흐, 타히티에서 원시의 빛을 찾은 고갱까지 목적지는 달랐으나 목적은 같았다. 열대의 빛은 매우 습했고 화살처럼 내리 꽂히며 작렬했다.

그 빛을 온몸으로 마주하자 남성적인 고갱의 감각은 활짝 열리면서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원시성을 흠뻑 받아들였다. 천국 같은 이국의 풍경을 고갱은 거대한 캔버스에 원초적이며 동물적인 색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색은 강렬하나 풍경의 내용은 평온하다. 강렬함은 불안하기 마련인데 고갱은 그것을 야수적 생기로 잘 조련해냈다. 여기에서 고갱 그림의 아름다움이 태어났다.
타히티 사람들 곁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 자는 중인 하얀 고양이는 평화롭다. 목에 줄이 묶여 있지 않으니 유럽의 고양이들과 달리 자유롭다. 열대의 빛은 살아있는 육체를 쉬이 잠들게 한다. 고양이가 깊게 잠들 수 있는 풍경의 안온함이 그립다. 저 멀리 문 앞에서 실루엣으로 앉아있는 개가 지켜주니 안온함은 지속될 것이다.

이런 고양이의 자족하는 모습은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현대인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여기서 고양이를 향한 현대인들의 애정을 읽을수 있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흐름을 주도했던 파울라 모더존-베커(Paula Modersohn-Becker, 1876~1907)의 작품에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4. 고양이와 소녀(Girl with a cat), 1905, ‘cat’p. 286

 

그림 4. 고양이가 등장하는 고전적인 소재인 ‘고양이를 안고 있는 소녀’ 를 담은 이 그림은 소녀의 붉은 옷과 검은 신발, 갈색 의자와 하얀 고양이 등의 구체적인 생김을 묘사하지 않고 색이 면을 만들며 캔버스를 주도하고 있다. 눈동자가 파인 듯 퀭한 소녀의 목과 신발은 검고 무겁다. 심지어 의자에 앉아있다기보다 갇혀 있는 듯 답답해보인다. 소녀의 내면과 그림 모두 그러한데, 고양이로 인해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구도적인 측면에서는 고양이가 흰색으로 처리되어 무겁고 칙칙한 화면에 밝은 빛이 되어주고 있고, 내용 면에서는 억눌린 듯한 소녀의 슬픔이 고양이를 안고 쓰다듬는 행위를 통해 사그라지는 듯하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양 꼭 끌어안은 고양이를 통해 소녀는 삭막하고 칙칙한 현실에 온기와 평화를 얻는다.

 

이렇듯 고양이는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인간과 감정을 교환하고 위안을 주는 꼭 필요한 존재로 사랑받는 마음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없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소녀의 외로움과 불안은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줄 수 없으나 고양이는 대답을 찾아가는 동안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때로는 동물이 사람보다 좋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고양이에게는 인간보다 새와 개가 더 재미난 상대이다. 클레와 미로는 그 점을 개성있게 표현했다.

 

 

그림 5. 고양이와 새(Katze und Vogel), 1928, ‘cat’p.298

 

그림 5. 옆모습의 새는 도망가는 듯하고, 정면의 고양이는 그 새를 노리며 쫓는 듯하다. 자신의 먹이를 이마에
새기고 있고, 새의 몸통과 하트 모양의 코를 빨간색으로 칠해 새를 향한 고양이의 마음을 유머러스하게 표현
했다. 고양이의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미루어 사냥이 여의치 않은 듯하다.

어린이의 시선으로 그리고 어른의 실력으로 초록, 빨강, 오렌지색을 배치하여 질서를 잡아 균형을 갖추고 있다. 내 고양이 구름이도 이 그림에 관심을 보이는 걸로 봐서, 클레의 대표작이라 부를 만하다.

 

 

그림 6. <고양이와 노는 아이들 Children playing with a cat>, 1908

 

 

그림 6. 고양이의 꼬리와 엉덩이를 손으로 받친 소녀는 나이 들어 제 엄마처럼 아기의 엉덩이를 손으로 받치며 자애로운 엄마가 될 것이다. 고양이에게 가닿으려는 호기심 어린 아기의 손은 머지않아 누나(언니)처럼 고양이를 품안에 안고 쓰다듬을 것이다. 자신을 품어주는 품이 이리도 많은 흰 장화고양이는 참으로 복되다.

소녀의 품안에서 고양이는 귀를 세우고 편히 잠들어있다. 따사로이 내리는 빛이 형성하는 장면의 온화함을 메리 캐세트는 노랑과 파랑의 파스텔톤의 변주로 그림의 아름다움으로 이뤄냈다. 옷이나 배경 등에서 사실적이지 않은 묘사로 정보는 줄었으나 정서는 커졌다.

이런 면에서 인상파는 눈의 시각적 인상이 아닌 눈으로 볼 때 몸이 느낀 기분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그림을 보며 저 가족의 온기어린 풍경 속으로 속하고 싶지만, 이미 그려져 완성된 풍경 속으로 스며들 방법은 없다. 풍경은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림 7. 잠자는 고양이(Sleeping cat), 1956, ‘cat’p.302 . leonard foujita

 

그림 7. 옷을 뜯고, 화장실 모래를 파헤치고,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잠자는 고양이는 아기 같다. 새근새근 숨을 고르게 내쉬며 잠들었을 때 아기 젖비린내가 눈으로 보이는 듯하다. 제 몸으로 온기를 말아 덮고 잠드는 모습을 보노라면, 더욱 따스하게 잘 수 있도록 품에 안아 온기를 보태주고 싶다. 동시에 고양이의 따스한 품안에서 나도 잠들고 싶어진다. 그 잠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포근하고 깊어서 일체의 피곤과 스트레스를 말끔히 없애 줄 것 같다.


파리에서 활동한 일본계 화가 후지타가 동양화적 기법으로 그린 고양이는 나의 잊힌 포근한 잠에 대한 욕망을 일깨웠다. 가는 붓으로 그려낸 세세한 털에서 나는 삶에 대한 조용하고 부드러운 고양이의 태도를 느낀다.

고양이는 하루에 12~14시간을 잔다. 나머지 시간도 졸면서 보낸다. 하지만 매사에 도도하고 당당하다. 따라서 성공과 상승의 욕망이 강한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대한 이기적이고 여유로운 고양이는 매우 부러운 대상이다. 고양이를 닮아 인간도 고양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서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자족하며 살고 싶지만, 주변 상황은 이런 마음을 쉬이 어지럽힌다.
절이나 성당에 들어가서 세상을 등질 수 없으니, 대부분은 바람과 현실 사이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까지 버리지는 못한다. 마치 시끄러운 도시를 떠나 조용한 시골에서 여유롭게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도시 사람들이 텃밭을 가꾸는 것과 같다.

이 지점에서 고양이에 대한 현대인들의 열광을 읽을 수 있다. 즉, 고양이는 현대인들에게 슬로우 라이프를
충동질한다. 그들을 쓰다듬고 안고 바라보면서 우리는 잠시나마 느린 삶을 체험한다. 참 고마운 어린아이다.

 

 

 

글·사진 제공 _ 이동섭
이동섭은 파리 8대학에서 예술과 공연 박사논문을 쓰다가 서울로 왔다. 예술작품들을 통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기록한‘당신에게 러브레터’외에도‘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 ‘뮤지컬토크2.0’등을 썼다. 현대예술을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책을 계속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출처 :

SEOUL ARTS CENTER

JUNE 2012 BEAUTIFU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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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Gauguin 107

 

Gauguin - Les pourceaux noirs 1891

 

 

Reclining Mother and Child / Paula Modersohn-Becker

 

Leonard Fujita Nu ? la toile de Jouy. 1922 canvas. 130 x 195

 

Leonard Fujita Yuki, the goddess of snow, 1924 canvas. 126 x 173

 

 

Tsuguharu Foujita (1886-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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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perform art authentications, art appraisals, art research and provide Certificates of Authenticity (COA) as well as consultations, for all paintings by Tsuguharu Foujita.

 

Foujita Tsuguharu (Leonard) was born in Edogawa, Tokyo.

He received full formal training at the Imperial School of Fine Arts. Success came quickly for Foujita, and he was commissioned to paint a portrait of the Emperor of Korea, and subsequently, the Japanese Emperor bought one of his pictures.

In 1913 at the age of 27 he traveled to Paris, immediately making the acquaintance of the leading painters of the day. Several artists became his close friends, sharing models, lovers, and the tribulations of impecunious artists in the metropolis, among them, his friends included Picasso, Soutine, Rivera and Cocteau and many others such as the Sculptor Ossip Zadkine. He struck up a particularly close friendship with the famous Italian artist Modigliani.

 

Japan in WWI was an ally of France and Belgium, and Foujita's loyalty and sociability endeared him to the establishment as much as the avant-garde. In the 1920's he was awarded state honors by both France and Belgium. In fact, he was far more popular than many of the luminaries of Paris who are now far better known. Foujita was also commercially more successful in the 1920's than most of his contemporaries. He was to most people a loveable eccentric; exotic, but unthreatening.

His name in Japanese means 'field of Wisteria and Peace', yet, the life he led was certainly not quiet and peaceful. In fact he was one of the more eccentric artists of the time in Paris. His hair was cut in the style of an Egyptian statue; he wore earrings, dressed in tunics and had a tattoo around his wrist. He even wore a lampshade sometimes rather than a hat!

 

The enormous influence of Meiji Japan on late 19th century Europe continued right through to the 1930's, wrecked only by the rise of Japanese fascism and of course WWII.

Foujita blended traditional Japanese art with European Modernism in a unique manner, especially in his works on paper. He is best known for his nudes and cats, and he was in fact was an accomplished landscapist, poster artist and muralist as well.

 

In 1931 he headed for Latin America, where he spent the next six years. Enormously popular there, he was one of their first art superstars. Ever open to new influences, his work in this period takes on something of the palette and style of Mexican artists such as Diego Rivera, which no doubt endeared him further to the Latin Americans.

In 1937 he returned to Japan where he was again acclaimed, not least as a European success story: local boy matches the metropolitan greats. By 1939 he was back in Europe.

Later, his war art showed compassion for the suffering Japanese as they were crushed by the advancing allies. He was criticized both for being too patriotic and not patriotic enough.

Disillusioned, he never visited Japan again after 1950.

Foujita became a naturalized Frenchman in 1955 and converted to Catholicism in 1959.

 

 

일본은 이 사람 조국이다. 평화의 상징인양 뽐내다가, 전쟁이 나고 이길 때는 국가를 위한다고 전쟁을 부추기고 지니까 고통받은 예술가인가?

아베보다 더 나쁜놈.

 

국적바꾸고 창씨개명했나? '레오나드로'?

 

 

 

 

http://commons.wikimedia.org/wiki/Paula_Modersohn-Becker

http://www.museen-boettcherstrasse.de/ausstellungen/paula-modersohn-becker-berlin-worpswede-paris/

http://www.wikiart.org/en/paula-modersohn-becker/reclining-mother-and-child-1906

http://www.fondation-foujita.org/maitre-leonard-foujita/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59] 레오나르도 후지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의 파리의 화단은 그야말로 새로운 전성기를 누렸다. 여러 나라에서 온 미술가들이 파리에서 저마다 개성 있는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온 후지타 쓰구하루(1886~1968)도 그중의 하나였다. 동경미술학교(현재의 동경예대)를 졸업하고 1913년에 27세의 나이로 파리에 온 후지타는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드로잉 실력으로 유백색 바탕에 누드 여인과 고양이를 그려 유명해졌다.

 

후지타의 1947년 작‘나의 꿈’

 

그는 일본 전통미술을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금박을 사용하기도 하고 유화에 먹을 사용하는 등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다.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러시아의 수틴, 스페인의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후지타는 소위 '에콜 드 파리'의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1933년 일본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일약 일본화단의 스타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초창기 서양화가 김환기나 김병기도 자신들이 드나들던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서 앞머리를 단발로 한 후지타를 통해 파리 화단의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일본은 전쟁화 전담기구를 설립하고 전쟁기록화, 또는 일본군의 전쟁을 영웅화한 성전화(聖戰畵)를 220여점 제작하였으며, 이 작품들은 군에 헌납되어 순회 전시되었다.

유명한 스타 후지타는 군부가 가장 눈독들이던 화가였다. 그는 전쟁화가로 위촉되어 16점의 대작을 제작했다. '앗츠 섬 옥쇄(玉碎)' 같은 작품에서 그는 치열한 전투의 장면을 웅장한 구성과 뛰어난 사실적인 묘사로 재현했다.

 

후일 자신의 행위는 전시하(戰時下)의 국민으로서 의무를 행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전 이후 전쟁화가들은 전범으로 몰렸고 가장 규탄을 받은 화가는 후지타였다.

 

1949년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존경했던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이름을 따서 레오나르도 후지타로 개명했다.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후 그는 대부분의 작품을 프랑스의 미술관에 기증했으며, 다시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다.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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