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돌아가신지 3년이 더 지났습니다. 이제 어머니 회상을 올립니다. 전에 친구의 부탁으로 <제3의 문학>에 기고했던 글인데, 조금 교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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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회상
2021년 11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929년생이니 향년 92세였다. 비록 한 사람의 작은 이야기이지만, 어머니로부터 들은 얘기, 내가 본 얘기를 적어 보고자 한다. 시대의 한 조각 기록이기를 소망해 본다.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청주 제2고녀(第二高女) 재학 중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되던 날 학생들이 모두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일제 세뇌교육의 효과였다. 전쟁에 졌으니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 때 한인 교사 한 분이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해방의 기쁜 날 웬 울음이냐고... 해방 후 좌우 대립은 학교라고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험악한 분위기에서 시험 날 백지동맹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혼란 속에서 청주여고 사범과를 마친 어머니는 충북 진천 그리고 충남 청양으로 초등교사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곧 6.25가 터지고 인민군은 순식간에 점령해 왔다. 당시 친정 아버지는 전매서장이어서 산 속으로 피신해 갔고, 어머니는 동생 7남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결국 어머니는 피난을 포기하고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 부녀동맹의 완장을 차게 되었다. 어머니는 공산당이 남한 지역 별 행정책임자들을 다 정해 왔더라는 얘기를 해 주셨다. 6.25는 북한의 준비된 남침이었던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민군 퇴각 후 어머니는 적 치하 ‘부역행위자’로 체포되었다. 가혹행위도 당하셨다고 한다. 재판까지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요원들 가운데 ‘방환정 교사’를 알아 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학부형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천만다행으로 풀려났다.
1953년 아직 전쟁 중임에도 결혼하였다. 아버지도 선생, 어머니도 선생이었지만, 어머니는 결혼하면서 교단을 떠났다. 24세 어머니, 당시 여성으로서는 과년한 나이였다. 아버지는 ‘노처녀 구제사업’ 했다고 농담하시곤 했다. 결혼은 웃어른들이 맺어 준 것이었다. 아버지가 처가에 인사드리러 왔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빼빼 마르고 키도 작았다고 한다. 그러나 친정아버지 호령에 별 수 없었다고 한다. 어른들 인식에는 온양(溫陽) 방씨(方氏)보다는 영일(迎日) 정씨(鄭氏)가 좋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댁은 가난했다. 시아버지가 양조장을 했었다고 하는데, 이미 망하였고, 재산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대신 작은 마나님까지 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 두 분을 모시고, 시동생 부양하고, 사촌 시동생들 하숙까지 쳤다. 아버지 교사 월급은 박봉이었다. 친정어머니가 모처럼 찾아 왔는데, 쌀독이 비어 있었다. 친정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고 한다. 어머니는 돈을 모으려고 계를 하였다. 그러나 곗돈을 떼이고 말았다. 땔감 살 돈 아끼느라, 젖은 대팻가루를 얻어다가 불을 피웠다고 한다. 서러운 신세가 매운 연기에 눈물로 복받쳤다고 한다.
어머니 고생은 계속되었다. 첫째 딸이 돌도 되기 전에 죽었다. 이어서 딸 셋을 내리 낳았다. 시아버지는 내 생전 손주를 못 보는구나 하면서 눈을 감으셨고, 아버지도 셋째 딸 이름을 그냥 ‘태순(‘태’자는 돌림자)’이라고 지었다.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은 것이다. 막내 누이는 그 이름을 싫어해서 대학 들어가서는 가명을 쓰고 다녔다. 어머니는 마침내 병에 치였다.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다들 정선생 부인 얼마 살지 못한다고 혀를 찼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35세에 다시 임신을 했다. 죽더라도 아들을 낳고 죽겠다 하였다고 한다. 집안 가통을 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들을 출산하였지만, 곧 입원해야 했다. 당시 마침 공주에 국립 결핵요양원이 생겼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반년을 국가 지원으로 요양할 수 있었다. 천운이었다. 어머니 폐 한 쪽은 완전히 석회화되었지만, 다른 한 쪽은 건질 수 있었다. 물론 결핵 약 ‘아이나’는 그 후로도 수십년 복용하셨다.
막내 외아들이 어머니의 기쁨이었을까. 어머니 건강은 계속 호전되었다. 복식호흡을 익히셨다. 어머니 말씀은 상냥했지만, 소리에는 깊이가 있었다. 성황동 집은 사시사철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부뚜막에 정화수를 떠다 놓고 기도하였다. 봄이면 앞마당에 비름나물을 심었고, 가을이면 배추를 심었다. 비름나물은 우리집 주요 반찬이었고, 배추가 여물면 겨울 김장을 했다. 안방, 웃방, 건넌방 장지문 창호지를 새로 갈았고, 이불 홑청 빨고 풀 먹여 다듬이질도 하였다. 가을 서리가 내리면 감을 따서 연시를 만들었다. 벌레들을 잡아 죽일 때는 ‘발보리심(發菩提心)’을 말하라며 가르쳐 주셨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넷이나 있는 집안 형편 때문에 어머니는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보험외판원을 뛰셨다. 아버지 몰래 시작한 일이었다. 원래 첫 아이를 잃고 교직 복직을 희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댁의 반대로 포기하였다고 한다. 보험 일도 아버지가 알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그만 두라는 말씀이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렇게 종자돈을 모았고, 나중에 새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적 집안일에 바쁜 어머니를 쫒아 다녔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젖꼭지를 만졌다. 첫 돌도 안 되어 어머니를 빼앗겼던 트라우마가 컸을까. 집요하게 만져댔다. 어머니가 ‘이거 떼서 주면 좋겠니?’ 물어보시면, ‘응’이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학을 뗐다. 또 만지려 하자, 부채 손잡이로 내 손을 몇 번 치셨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일한 체벌이었다. 어머니 가슴 만지는 버릇은 초등 5-6년까지 계속되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한 방에서 잤다. 어느 날 밤 어머니 젖가슴을 찾는데, 아버지 손이 잡혔다. 그 후 나는 그 버릇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기도 덕이었을까. 나는 학교 공부를 곧잘하였고, 어머니는 정성으로 뒷바라지 해주셨다. 나는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초등 전교생 앞에서 모범생 표창을 받는 날 어머니에게 새 옷 사달라고 떼를 썼다. 나는 하얀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사 입고 우쭐했다. 그러나 가난한 집 큰 누이와 둘째 누이는 대학 진학을 단념해야 했다. 여고 졸업 후에 바로 취직하였다. 그리고 야간 대학과 방송통신대학을 다녔다. 셋째 누이는 ‘단식투쟁’ 끝에 겨우 대학 진학을 허락받았다. 그래도 누이들은 공부 잘하는 남동생이 이뻤을까. 월급을 기꺼이 할애했다. 세계사상전집, 사서삼경전집, 그리고 세계애창곡집, 세계영화음악집, 한국가곡집을 연이어 선사해 주었다. 1970년대에 나온 전집들인데,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다.
두 분이 동갑이기도 하였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하대하지 않았다. 다투실 때에도 ‘이 여편네’라는 말은 했어도 ‘너’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해외 출장갈 때 엽서를 부치셨다. 그 처음은 ‘보세요’였고, 그 끝은 ‘안심하고 잘 있어요’였다. 이 자식도 동갑내기와 결혼하였고, 메일 보낼 때, 경어체를 쓰고 있다.
어머니 인생은 힘들었지만, 아버지를 흉보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좀 달라졌다. 전에는 아버지가 월급봉투를 어머니에게 모두 주셨는데, 이제 연금 통장을 아버지가 관리한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는 50만원만 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떤 수모와 박탈감을 느끼신 것 같았다. 두 분이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연로하시고 동작이 불편해지면서 요양보호사가 집에 왔다. 여성 요양보호사가 아버지를 부축하고 아버지가 웃으시면,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
이 아들도 서울대를 나오고, 박사학위 받고, 인하대 로스쿨 교수가 되었지만, 어머니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 같다. 교수로서 일가를 이루기는커녕 성취라고 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중년의 나이에 몸이 그만 시들해져버렸다. 어머니는 꿈 속에서 나를 업고 들녘에 벼가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곤 하셨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벼가 익지 못하고 파란 줄기가 무성하게 자란 속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꿈을 꾸셨다고 한다. 좌절하고 심약해진 아들을 보시며 어머니는 늘 걱정이셨고, 상심이 크셨을 것이다.
아버지보다 순하고 아버지보다 무서웠던 우리 어머니, 이 아들이 어머니에게 얼마만큼 기쁨이었을까. 나에게 어머니는 생명이었다. 아마 지금 하늘에서도 이 약한 아들을 걱정하고 계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