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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힘, 시인 이문재
-시집『산책시편』감상
나팔꽃처럼 나는 아침에
피어나지 못한다
엊저녁 젖은 길 바지에 매달려
흔들린다 아침에게 늘
미안하다
게으른 사람은 힘이 세다
아프도록 게을러져야 한다
아침 지하철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의 명령과……
점심에 먹을 개소주가 흘러나온다
두 눈 부릅뜨면 해를 볼 수 없다
병이 날 만큼 게을러 보고 싶다
-「게으른 사람이 아름답다」 일부
게을러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병이 날만큼’ 게을러 질 수 없는 현대인의 삶이다. 그동안 시인은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서어제와 내일이 잘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바쁜 나와 바쁜 세상이 맞물려’ 너무 바쁘게 쫒기듯 살아왔다. ‘나를 둘러보고, 내다볼수가 없는’ 지경이였다.
「나는 바빠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서, 세상의 어제와 내일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바쁜 나와 바쁜 세상이 맞물려 대단히 바빴다. 바빠서 나를 돌아보고, 둘러보고, 내다볼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 비슷한 그 무엇(들)이 정신없이 살았다. 내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나는 게을러 터져있었고, 이런 게으름은 부도덕했다. 아름답지 않았다.」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서문 일부
‘게으름’을 ‘부도덕’하게 보는 세상이 과연 바람직한 세상일까? ‘아름다운 게으름’이 판치는 세상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이제 시인은 게으르게 움직이려고 한다. 거미처럼 한 올의 실을 뽑아 조금씩 거미줄을 치는 자세로 살아가려고 한다.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은 그리움을 기다린다고 나는 본다. 그리움이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시간을 기다린다. 기다릴 줄 알 때 진정한 그리움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 ‘기다림의 힘’이 넘쳐오를 때, 게으름이 완성된다. 그 기다림의 미학을 시인은 거미에게서 발견한다. ‘거미줄’이라는 시이다.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는 기다림은 벌써
기다림에 진 것, 져 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 「거미줄」 전문
기다리되 ‘팽팽하게 기다림’을 유지한다는 것은 집중하는 정신을 필요로 한다. 분주한 움직임이 없지만, 많은 정신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조금만 ‘거미줄’을 놓치면 추락하고 말 상황인 것이다. 몸 속에서 끝없이 기다림의 줄을 뽑아내면서 그리움의 거미줄을 완성하고자 하는 시인의 치열한 정신세계가 엿보이는 시이다. 비슷한 소재의 시 ‘거미 여인의 춤’을 보자.
이 그리움은 전방위이다
이 거미줄에 닿지 말아라
거미보다 외롭다
그대는 공기의 한 켠 무관심처럼 내다 건
이 기다림 보지 못한다 그대는
언젠가 지나가리라
캄캄한 다짐 한 가닥
바람에 걸어 놓고 눈물도 아껴
거미줄 만드는
이 푸른 도화선의 순간들
거미처럼 기다려 왔다
이 외로움에 닿지 말아라
그대 기쁨의 처마에서 툭
떨어지면서 그날부터 파랗게 고여
거미줄 만들었거늘, 이제
소리쳐 부르지 않으리라
- 「거미 여인의 춤」 전문
기다림은 ‘터질듯한 적막’이어서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다. 누구도 곁에 머물러 달라고 ‘소리쳐 부르지 않으리라’는 시인의 다짐처럼 기다림은 혼자서 감당할 몫이다. 이 기다림의 끝에 올 새로운 시작, ‘푸른 도화선’을 시인은 믿고 있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기다림은 침묵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전쟁터일 수도 있고 울음바다일 수도 있다. 넓은 강이란 시를 살펴본다.
넓은 강이 운다
긴 밤 내내 얼음장 쩌렁쩌렁
흐르지 못하고 언 강은 소리 내어 운다
우는 강은 흐르지 않고
깊은 산자락 뒤척거리며
강 울음 듣는다
우는 것은 강이 아니다 두어 뼘
강물이 내어 준 강의 거죽만 꽝꽝
얼었을 뿐이다 날카로운 능선
핏발처럼 곤두선 나무들도 깊은 뿌리로
견디고 있는 것, 이 강산 깊은 밤
흐르고 있는 것을
강 울음 듣는 저녁
동산을 향해 눈 뜬 밤
끄르릉 우는 강 울음 아래
더운 지열을, 등성이 깊은 속
맑은 물을 더듬거리는 새벽
나의 믿음은 살얼음처럼 불안하다
- 「넓은 강」 전문
기다림의 끝에는 ‘푸른 도화선’이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지만 이 믿음은 확고하기 보다 ‘살얼음처럼 불안’한 것이다. ‘맑은 물을 더듬거리’며 ‘새벽에도 깨어있는 시인은 외롭다. 산의 ’나무들도 깊은 뿌리로 견디고 있는 것‘이다. 강의 ’거죽만 꽝꽝‘ 얼었을 뿐 강은 여전히 흐른다. 얼어가는 강과 흐르려는 강의 ’쩌렁쩌렁‘ 외치는 소음와 ’끄르릉 우는‘ 울음이 있는 곳이 ’넓은 강‘인 것이다. 크고 깊은 강이더라도 그렇게 기다림속에서 울고 소리치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넓은 강‘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움을 향해 기다리던 ’땅 끝‘에 닿으면 시인은 다시 되돌아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을 기다렸는지 알게 되는 날, 다시 걸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기다림이 필요한 이유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땅끝 마을에 가 본 적이 있다. ……땅끝에서 돌아서면, 돌아선 그 자리가 땅의 처음, 땅의 시작이었다. 길의 시작이었다. 이 산만한 산문들이, 문명의 급소는 건드리지 못하는 이 어수룩한 글들이 제발 글의 끝, ‘글끝’이면 좋겠다. 나는 이 책에서 돌아서고 싶은 것이다.」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서문 일부
기다림을 통해 시인은 통찰의 경지를 얻는다. 자신과 이 우주가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그물망’을 본다. 그렇게 볼 때 인간은 생명의 그물코를 끓어내는 존재로서 ‘공해 유출 업체’이다. ‘염통에서 낡은 엔진 음’ 소리를 내는 소음덩어리이다. 생각들은 거침없이 ‘낙엽처럼’ 떨어져 다니는 쓰레기인 경우가 많다. ‘방부제’로 연명해오면서 ‘방사능’이나 ‘흘리고’ 다니는 ‘역마살’덩어리가 인간이었다고 시인은 깨닫는다. ‘내 삶은 이미 환경문제’였고 ‘내 삶은 공해 배출 업소였’음을 아프게 통찰하고 있다.
나는 공해 유출 업체,
염통에서 낡은 엔진 음 들리고
머리카락은 푸른 광합성을
일으키지 않는다 낙엽처럼
후두둑 기억들 떨어져 나간다
관절에서 쓰다 만 윤활유가 새 나간다
나, 좋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하나의 환경 내 안팎에 있으나
내 스스로 이바지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짧은 생은
방사능 흘리며 역마살을
풀어 대는 것이었다
사랑이라고 한때 말했던 관계들아
약속들아, 아직도 그리움으로
미지근한 것들아 미안하다 아, 나는
방부제로 연명해 온 것이었으니
썩은 땅 위 구멍 뚫린 오존층 아래
묘비명처럼 천천히
그러나 깊이 새겨지는 한마디
내 삶은 이미 환경문제였다
나는 공해 배출 업소였다
- 「고비사막」 전문
이 통찰에 이른 문제의식을 일컬어 ‘생태학적 문제의식’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식탁 위에 지구가 올라온다.” 집 앞 슈퍼마켓에 갔다 오는 길에 퍼뜩 떠오는 문장이다. 빨간색 채소와 과일이 몸에 좋다기에 페트병에 든 토마토 주스를 사 오다가 상표를 보았다. ‘원산지: 포르투갈,’ 아주 멀리서 온 토마토였다. 식탁에 올라온 음식들의 ‘고향’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누가,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생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에세이「식탁위에 올라 온 지구」일부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보리를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 실상사 공양간 배식대에 붙어 있는 게송-
‘고비사막’이란 시에서 “아, 나는 방부제로 연명해 온 것이었으니”라는 시인의 깨달음과 한탄으로 나타난다. 오염된 공기 뿐 아니라 먼 곳의 음식을 탐하는 육신에 방부제(음식의 보존기한을 연장시켜주는 화학첨가물의 일종)가 들어가 쌓이고 있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식량이나 연료는 생태학적 문제의식이다. 나는 문학의 근황이 생태학적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녹색평론」에 실린 기사나 녹색평론사에서 나오는 단행본을 보라. 문학보다 훨씬 앞서 가 있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더글라스 러미스의 책 제목) 또는 “소농-누가 지구를 지켰는가”(쓰노유킨도의 책 제목)와 같은 질문을, 문학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문학이 생명을 옹호하기 위한 질문하기라면, 문학이 반인간·반생명과 싸우는 부정의 정신이라면, 문학은 지금 대단히 게을러져 있다. 나는 나의 이 산만하고 하찮은 관찰이 평화를 희구하는 뭇 생명의 편에 서서 던지는 작은 질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서문 일부
‘반인간, 반생명’과 ‘맞설 수 있는 ’부정의 정신‘이 문학의 정신이라고 시인은 보고 있다. 그런데 문학의 근황이 ’부정의 질문‘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이 ’생태학적 상상력‘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쫒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몽촌토성‘이란 시이다.
소음의 갑옷, 공해의 방독면, 믿음의 방패를 무너뜨리
며……
내 신분증.
맑은 눈물을 보여 주었다
-「몽촌토성」일부
시인은 꿈꾸는 존재가 되야 한다고 시인은 이야기 한다. 이문재 시인은 ‘꿈꿀 권리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인 몽촌(夢村)에 살고자 하는 시인이다. 많은 시인들이 ‘몽촌’에 입성하길 권유하는 부동산업자이다. 이 몽촌에 입성하는 비용은 ‘기다림’이고 그 기다림이 완성되었다는 증표는 ‘그리움’이 있는 사람의 ‘맑은 눈물’이다.
네가 길이라면 나는 길
밖이다 헝겊 같은 바람 치렁거리고
마음은 한컨으로 불려 다닌다
부드럽다고 중얼대며
길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푸른 잎새들이 있다 햇살이
비치는 헝겊에 붙어 말라 가는
기억들 가벼워라
너는 한때 날 가로수라고
말했었다 길가 가로수
그래 그리하여 전군가도의 벚꽃쯤은
됐던 것이었을가 그래서 봄날의
한나절 꽃들의 투신 앞에서
소스라치는 절망과 절망의 그 다음만 같은
화사함을 어쩌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길의 밖일 때
너는 길이었다
내가 꽃을 퍼부어 대는 가로수일 때
너는 내달려 가는 길 아니
그 위의 바퀴 같은 것이었으니
오히려 길 밖이 넓다
길 아인 것이
오히려 더 깊고 넓다
-「길 밖에서」전문
‘몽촌’으로의 떠남은 ‘자발적 망명’이다.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기다림은 선택하는 것도 ‘자발적 망명’이다. 이 소음의 도시에서 침묵을 찾는 것도, 이 속도감중시의 사회에서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도, 인플러그드된 세상에서 ‘언플러그드’하는 생활도 모두 ‘자발적 망명’이다. 시인이 자발적 망명을 체험한 경험에 대해 적어놓은 에세이를 본다.
「나는 도보 순례를 ‘자발적 망명’이라고 명명했다. 지리산의 오월을 바라보며 나는 서서히 내 몸으로 돌아갔다. 사흘째가 되어서야 걷기에 리듬이 생겼다. 길과 나는 화해했다. 이레째던가. 산청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던 오전, 내 몸과 오월의 세상은 혼례를 치르고 있었다. 모든 세포들이 깨어나 오월의 햇빛과 바람을 쬐었다. 나는 신랄하게 살아 있어서 아팠다. 병든 땅, 더러워진 물, 잘려 나간 산허리, 삭막해진 인심 따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서울과 두절되어 있었다. 산청에서 야영할 때, 그 곳은 전원이 없었다. 휴대전화기의 배터리를 충전할 수가 없었다. 완벽한 언플러그드였다. 그 때 깨달았다. 자발적 망명은 전원으로부터 멀어질 때 완성된다는 사실을. 내 일상은 전력의 하수인이었다. 내 일상적 삶은 플러그를 꽂은 상태에서만 유지되는 삶이었다. 플러그를 뽑아버려라. 그것이 자발적 망명이다. 이제 망명은 공간의 개념이 아니다. 자발적 망명은 전원으로부터의 망명이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나로 돌아왔던 몸은 이내 잊혀지고 말았다. 내 몸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생체 시계, 자연의 시계를 도시적 일상의 시계로 교체하고 말았다. 나는 곳곳에서 플러그를 꽂았고, 곳곳에서 배터리를 충전했다. 나는 늘 온라인 상태였다. 」
-에세이 「걷기에 대한 명상」일부
깜박이는 것들은, 위험하다
엘리베이터 표시등, 은행의 번호판
횡단보도 신호등, 카드 공중전화의
액정화면, 컴퓨터의 커서……
-「저 깜박이는 것들」-산책시5 일부
항상 시간이 없다고 주의를 주는 ‘저 깜박이는 것들’의 세상과 ‘날씨가 사라’지고 ‘날씨는 기상청 예보에만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발적 망명’이다. 이렇게 감전되어있어야 하는 ‘감전수용소’에서 탈출하려는 것은 ‘감각의 회복’을 위함이고 ‘주체적 자아’를 찾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과거로 회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 속에 있던 ‘미래’를 찾자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의 모습을 망각하고 속도와 시각이 주인이 된 ‘마비 공화국’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어떻게 ‘자발적 망명’은 가능할까? 시인은 그 방법을 ‘산책’에서 찾았다.
‘게으른 걷기’인 산책을 하자고 한다.
이 곳에선 아무도 걷지를 않습니다
내쳐 달리거나 길바닥 위에서
쓰러질 뿐입니다
이 도시는 느슨한 산책을 아주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산책은 아니
산책만이 두 눈과 귀를 열어 준다는 비밀을
이 도시는 알고 있는 것이겠지요
도시는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 반짝이는
유토피아의 초대장들로 길 안팎에서
산책을 훼방하는 것이지요
도시는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느림보는
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
도시에게 당하고 말지요
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
-「마지막 느림보」 전문
시인은 왜 산책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걷지 않을 때, 그러니까 플러그를 꽂아 놓고 있을 때, 내 감각들은 극심하게 왜곡된다. 나는 다섯 개의 감각 가운데 시각만을 집중적으로 혹사시킨다. 후각은 ‘위생 관념’에 의해 극도로 위축되어 있다. 촉감도 거의 마비되어 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내 손 대신에 각종 버튼과 스위치들 같은 도구와 매체가 있다. 플러그가 연결되어 있는 한, 나는 주체가 아니었다. 도구이고 대상이었다. 일주일에 최소한 사흘은 걸어서 출퇴근하려고 한다. 걷는 동안. 나는 온전한 나의 몸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동차와 컴퓨터전송 속도로 대표되는 이 속도 지상주의 문명의 틈과 그늘을 엿보는 한편, 내 몸에 깃든 오래 된 신성과 만나게 될 것이다. 천천히 걷는 동안, 나는 이른 바 ‘오래된 미래’를 사는 것이다.」
-에세이<걷기에 대한 명상> 일부
이렇게 ‘느림보 산책’을 하면서 시인은 우체국에 들러가고자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가슴의 편지를 회복하자고 한다. 그 편지가 바로 시라고 생각된다. 그리움을 담은 희망의 편지는 기다림 속에서 만들어지고 기다림속에서 열어보게 된다. 시인이 우체통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역사의 첫 시작은 이십대였다.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이수익 ‘우울한 샹송’ 제 1연
시인은 위 시를 ‘1970년대 후반, 습작기의 입구에서 만난 시’ 라고 소개하고 있다. 아래의 인용 글은 모두 에세이「‘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에서 발췌한 글이다.
「 ‘우체국에서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사태는 매우 시적이지만,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나의 상상은 산문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와 더불어 살던 내 이십대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이 시를 암송하고 다닐 때 나는 우체국에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죽어라고 편지를 썼고, 이 시의 첫 구절만 겨우 기억하고 있던 시절에는 죽지 않으려고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나의 이십대는 편지 쓰기로 채워졌다.」
시인은 이십대에 우체통을 사랑했지만, 삼십대가 되어서는 전화통을 붙들고 생활을 견디어갔다고 한다. 한 개인의 연령대별 생활양식의 변화는 우리 시대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편지에서 전화기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삼십대로 접어들었고, 나의 직업은 학생에서 시인(일찍이 나는 전업 시인이었다)으로, 다시 시인에서 잡지 기자로 바뀌어 있었다. 편지로 사랑을 얻었다면, 나는 전화기로 취재원과 약속을 했고, 전화기로 취재를 했으며, 술에 취해 전화기를 붙잡고 옛 친구며 글판 친구들에게 넋두리를 늘여놓았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달라지면서, 커뮤니케이션의 내용도 급변한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달라지고 그 내용도 달라져왔다. 이제 구겨서 버리고 다시 쓰고 다시 쓰는 편지가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전화기로 수시로 안부를 묻고,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시대에서 기다림 속에서 절제되어 가는 ‘언어의 수사학’인 시는 대중들에게 외면당하기 일쑤이다.
「편지에서 전화기로 이동하면서, 나에게는 기다림/ 그리움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전화기로 대표되는 ‘말하기-듣기’의 형식은 호출기와 휴대전화, 그리고 이메일로 ‘진화’를 거듭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전화를 걸고 받는 위치의 제약이 사라지면서, 거리, 즉 기다림/그리움은 그야말로 멸종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라는 첫 문장도 아슴해질 무렵, 나는 시인으로서 이 상스러운 도시 문명을 견뎌내기 위해 ‘산책’이라는 시적 전략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산책 연작의 첫머리에 편지를 내세웠다.」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푸른 곰팡이」-산책시1 전문
시인은 이 우체통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 우체통의 시인으로 남고자 하는 것이다. 천천히 가는 사람, 천천히 깊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자 하는 것이다.
「디지털 문명의 최종 목표는 기다림/ 그리움과 관련된 유전자를 제거하는 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편지에서 전화기와 팩시밀리로, 다시 호출기와 이동통신, 그리고 컴퓨터 통신으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속도에 길들여졌고, 느린 것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 속도 지상주의, 속도 패권주의 앞에서편지로 대표되는 종이 위헤 글 쓰기는 골동화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종이 위에 글쓰기가 갖고 있는 위력을 신앙하고자 한다. 손(촉감)과 눈(읽는 방식)으로 대표되는 몸의 기억력을 나는 믿고자 한다. 속도를 상품화하고, 마침내는 기다림/그리움을 멸종시키려는 이 디지털 문명의 그늘을 감시하고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종이의 감촉을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시인은 ‘순백의 종이’위해 좋은 만년필로 글을 쓰고 싶어 한다.
「잉크를 넣고, 촉에 묻은 잉크를 닦아 낸 다음, 순백의 종이 위에 ‘기다림 혹은 그리움’이라고 쓸 때, 나는 디지털 문명을 거슬러 오르는 내 몸 속의 유전자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곧, 이 무지막지한 속도의 시대가 가고,느림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가로막고 있는 디지털 문명의 모니터가 사라지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직접 만나는 맑은 몸의 문명이 올 것이라는.」
이 문재 시인의 시는 그러나 편지처럼 산문으로만 늘어지는 시는 아니다. 그 이어짐이 자연스러운 문장이라고 해서 산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시의 간결성은 짧은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비약된 의미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시의 행과 행간에 있는 더 큰 비유와 축약이 위 시인의 시에는 존재한다. 시인은 언어의 단순함, 담담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맹물같은 느낌이지만, 천천히 입 속에서 굴리다 보면 느껴지는 시원하고 달콤한 ‘샘물’같은 문체가 이문재 시인의 문체같다.
「언어의 극심한 인플레이션 탓이리라. 홀로 서지 못하는 의미들이 너무 많아졌다. 사랑은 참사랑으로, 천연은 100퍼센트 순수 자연산으로, 원조는 진짜 원조로, 자유는 자유로운 자유로, 느림은 정말 느린 느림으로…. 의미가 중첩될수록 원래 의미가 사라지고 마는 ‘강조의 역설’이 글쓰기를 무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언어는 비만인데, 정작 의미는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 아마 나의 글쓰기도 이 강조의 역설에 수시로, 습관적으로 동참했을 것이다.」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서문 일부
항상 조심스럽게 초심으로 돌아가서, 진지한 성찰로 하나하나의 시를 경전처럼 편지 부쳐주는 시인! 시인의 시는 오래 두고 보고 또 다시 꺼내볼 수록 나를 이끌어 주는 나침반이다. 이 방향 상실의 시대에……
나도 이문재 시인을 따라 게으르게 말하고, 게으르게 읽고, 게으르게 공부하고, 게으르게 사랑하면서, 게으른 세상을 위한 ‘느림보산책’에 나서고 싶다.
귀보다 먼저 세치 혀가
더러워지는 구나 어디
세설천(洗舌川)이 있는가
송사리도 역겨워 결코 얼씬대지
않는다는 커다란 개울
그 물에는 새빨간 혀가 제 몸보다
수천 배나 기다란 뱀장어들이
수만 년 동안 우글댄다 한다
귀보다 먼저 지저분해지는
내 혀를 참을 수 없는 날
세설천에 모가지까지 처박고
으아아아아아아아 소리치다가
그 시커먼 구정물로
오장과 육부를 씻어야 하리
-「세설천」일부
시 한편을 쓰기 전에 혀를 정화하는 자세로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을 배우고 싶다. 혀를 신중하고 깨끗하게 놀리면서 살아야 하리. 글 쓰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리. 첫 사랑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어설픈 글 한 줄을 다듬고, 고치면서 서서히 느림보처럼 깨끗한 몸과 혀에서 나오는 글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글쟁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넋두리가 있다. 글쓰기는 언제나 처음이라고, 백편의 글을 쓰면, 그만큼 글을 쓰는 노하우가 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시든, 산문이든, 일기든 글은 매번 첫사랑처럼 다가온다. 도무지 알은체를 하지 않는다. 매번 통사정을 해야한다. 첫 문장 쓰기가 첫 사랑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힘들다. 그것도 갈수록 힘들어진다. 내가 제대로 게으르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서문 일부
나는 아직도 충분히 게으르지 못하다.
[출처] 도시의 산책자, 이문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