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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과 남극이 빅뱅 직전의 그리움으로 서로 열렬히 끌어당기듯
이끌린다는 건 내 안의 대지진, 대빙하야
먹장구름 앞장세우고 소나기가 몰려오듯 이 벅찬 기류를,
홀린 듯 쫓기는 듯 다급한 행보를 부르는 이 미친 페르몬 향은 누가 방사해놓은 것이냐
끝이 없는 행렬의 끝, 구멍 속으로 속속 사라지는
너무 오래 된 책 / 강해림
반월당 하늘북 서점 앞
나무의자에 노인이 잠들어 있다
환한 대낮
수거하다 만 폐휴지를 실은 손수레에 엎드려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듯
꽁꽁 묶은
잠의 입구는 단호하다
임시휴업 안내문이 붙은 유리창 너머
책들이 바리케이드 치는 동안
뛰뛰빵빵 도시의 소음이
잠의 영역을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다
중얼중얼잠꼬대같은잠의문장들이걸어나와손수레에실려가고 꿈결인듯생시인듯잠의풍경들이스쳐지나가고미처건너지못한행과행문장사이졸음겨워라깜박깜박신호등은빨간불켜놓은채 졸며서있고
그가 수거하러 다니느라 누볐을 거리
쩌억 들러붙은 추잉검처럼 요지부동인
잠의 주소
잠의 행방이 묘연하다
문득 그는 없고
금서로 낙인찍힌 지 오래인 듯 깊고 깊은 잠
첫 페이지에 꽂히는
햇살, 햇살!
눈 감으면 보인다 / 강해림
반 고흐, 니진스키,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상화가 나란히 실린 표지, 눈동자들은 왼쪽 사선을 향해 불안하게 열려 있다 허공에 매달린 시계추처럼 고집스러웠으나 구레나룻 콧수염이 그들의 표정을 다소 익살스럽게 만들었다 무게의 중심을 향한, 정 대칭의 슬픈 상징
고흐는 빨강머리 사내, 태양의 아들, 태양이 딸깍딸깍 숨넘어가는 순간의 고통으로 눈멀어 스스로 태양이 되었다 문득, 악마처럼 미친 피가 돌아 질긴 말고기를 씹으며 지중해산 포도주가 먹고 싶다 고흐처럼 고통이 따라주는 포도주를 아무 불평 없이 마시고, 고흐처럼 요절을 꿈꾸었으나 탕탕! 총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검붉은 포도주 빛으로 변해 버릴 태양이 나는 ㅁ ㅜ ㅅ ㅓ ㅇ ㅜ ㅓ
올림픽 경기장 트랙에 금이 그어져 있다 어린 시절 나는 달리기만 하면 눈을 감았다 출발은 좋았으나 늘 꼴찌였다 '실패는 신이 인간에게 인정한 자유다' 그 말의 매혹이 내 눈을 찔렀다 나는 눈멀었다 연애나 종교적인 이해나 반성도 골인지점의 목전에서 나를 이탈시켰다 나는 저주받은 변종의 씨앗, 세상 풍경 밖으로 날아갔다
門 / 강해림
모텔 아테네는 숲 속의 궁전 같다
나무들 수문장처럼 서 있는 그 곳은
스물 네 시간 불빛이 꺼지지 않는다
입구는 신성하다
신의 입김이 아니곤 누구든 통과의례 없이
저 안 스며들 수 없어
문을 열고 나오면 세상은 여전히 안일뿐인데
창들 근엄한 웃음으로
이쪽과 저쪽 경계를 그리며 홀로 두꺼워지지
내 안의 뫼비우스 띠 줄줄
풀어진 숲길
세상의 모든 러브 모텔로 가는 길들이 사라지고
무인출입구의 보이지 않는 눈들이 아흔 아홉 개 욕망의
꼬리를 감춘 계단들이 사라지고
해와 달이 깨진 시간의 유리조각 위에서
하룻밤 통정을 위해
검은 커튼을 드리우는 곳
오늘 밤 여행에서 막 돌아오는가
오래 지치고 피곤한 영혼
음란한 냄새 맡는 순간
열리는
저 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니다
사우나탕 / 강해림
금남의 집 통유리 속 모래시계가
한쪽 구석에서
알몸의 여자들 훔쳐보며 모래알을 흘러내리고 있다
골백번 오르락내리락 해도
꿈쩍도 않을
이브라는 이름의 저울
잠시 기우뚱할,
그 촌극의 무게만큼 가벼워지고 싶었을까
땀 뻘뻘 흘리며 좌선하여 삼매에 들고 있다
부끄러운 곳 가릴 잎사귀 하나면 족했는데
비대해진 욕망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운데
줄줄
흘러내린 자리가 흥건하다
아찔한 엉덩이 곡선 닮은
호리병 속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모래알이 쌓인다
저 모래구릉을 넘어가는
시간의 목이 길어질수록
움켜쥔 손아귀 아직 남은 모래알이 있어
사막은 아름답고
낙타는 돌아오지 않고
킥 보드 타는 아이 /강해림
신작로에서 아이가 킥 보드를 타며 놀고 있네 아이는
킥 보드에 한 쪽 발을 디디는 순간, 세상 풍경 밖으로 멀
어지네 해님 슈퍼, 아미앙 베이커리, 송일 문구, 림스 치
킨, 붕어빵장사 아저씨 손수레 지나 횡단보도로 건너가
네 뛰뛰빵빵 경적소리도 신호등도 없는 나라로 건너가
네 킥 보드는 번쩍번쩍 도깨비 불빛을 달고 가네
찰랑찰랑 하늘강 따라 은하철도 999가 달리네 차창 너
머로 별 아저씨가 손짓을 하네 카시오페아, 안드로메다,
작은 여우, 돌고래, 조랑말, 외뿔소…… 별자리의 이정
표를 따라 가네 동물의 왕국, 바람의 나라 지나 마음은
서쪽나라로 가는데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
어느새 은빛 지느러미 달고 달리는 아이의 얼굴이 햇
살처럼 환하네 순간, 햇살 건반 위로 피라미떼 일제히
튀어 오르네 야호! 눈부신 환호를 따라 마음은 둥당둥당
신이 나는데 어쩌나, 작은 영혼이 홀랑 젖고 말았네 별
하나 별 둘 징검다리 되어 숙제랑 일기 걱정일랑 데려간
지 오래, 아이는 더 이상 속도를 모르네 가 다가 심심하
면 별똥별을 주워 짤랑짤랑 흔들어보기도 하고 빙글빙
글 지구본도 굴려보네
하늘대문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 멀어지네
눈꽃 여자 / 강해림
눈꽃 완행열차를 타고 태백에 가거들랑
눈꽃보다 순정한,
순정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그녀를 만나러 가세요
영주, 봉화, 춘양, 석포, 통리, 오래 잊고 지냈던
그리운 옛 여자의 이름 같은 간이역처럼
불기라곤 없지만 하룻밤 쉬었다 가도 좋을 여자,
피었다가는 속절없이 지는
눈꽃 같은
망경사 찾아 갔다가
눈보라가 앞을 가려 도중에 하산하여
식당에 앉아 소주 한 잔에 언 몸을 녹이는데
마이크 소리가 귀를 찢네요
식당 앞 숯불 위에는
지글지글 삼겹살이 연기를 피워대구요
앞마당 공터에서 여장女裝한 칠칠이
흰 분칠에 어릿광대 같은 분장을 하고 열창을 하네요
엄동설한에 속살까지 훤히 비치는 치마저고리 입고
‘인연’이라 슬픈 노래보다
살소름 돋은 근육이 더욱 슬프구요
‘칠칠이 전국순회공연단’
몰려든 구경꾼들한테 엿을 파네요
한 봉지에 이천 원,
순정을 팔아요
달과 벤치 / 강해림
-제주에서 호텔 H는 밤의 궁전, 하룻밤 사랑으로 길 잃어도 좋아 미로 찾기 같은 산책로의 끝 벤치가 있다 벼랑이다더 이상 물러설 수도 다가갈 수도 없는 아찔한 사랑, 여기 이 벤치에 앉아 영화 속의 남자가 그녀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지 뚜뚜 신호음만 남기고 바다는 통화 중, 아아 너무 고요해 바라볼 순 있지만 아무도 훔칠 수 없는 망망대해 그녀는 해가 뜨지 않는다 영하 45도쯤에서 봄여름가을겨울 가고 맥박이 멈춰 버린 그녀의 심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싸늘한 체온 알몸으로 돌아누워 있다 달빛 섬섬옥수가 몸의 은밀한 골짜기까지 훑으며 천천히 지나간다 우윳빛 엉덩이 꿈틀거리는 듯 요요하다 뚜뚜 뚜우우- 그녀 아득한 수평선에 목 메달 수 있다면, 두 개의 봉긋 솟은 빙하 골짜기로 풍덩 달이 빠져들었다 단 한 번의 정사가 끝나자 달이 몰락하고 있다* *노래 가사에서 인용
사랑, 그 진화의 발자국 / 강해림 손 1 / 강해림 오래된 잡지 흑백 사진 속에서 깡마른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온다 온통 굵은 주름으로 결박해 놓은 고사목 같다 손가락 사이 담배꽁초가 타들어가고 있다 빈 속의 手心歌가 자욱하 마디마다 옹이가 있고 툭툭 불거진 힘줄 버팅기는 힘으로 박혀있는 결박의 시간이 역광이어서 더욱 선명하다
35억년, 장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에 의해
혹은 자연도태 되어
생명의 무대 뒤로 사라져간 것들
공룡, 푸술리나, 삼엽충류……그리고 암모나이트까지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진화되는지 아시는가
시작도 끝도 없었듯이
생성도 번영도
영원도 모른다
투쟁처럼 혹은 단세포 같은
미련한 그리움으로
몸달아본 적 있으신지
공룡은 몸집이 하도 커서
멸종되었을지도 모른다는데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열병이여
사랑의 종점은 공멸이 아닐는지
내 첫사랑이 남기고 간 구멍 하나,
가슴 뻥뚫린 그곳에는
당신도 없고 나도 없고
내 사랑하는 공룡이 산다
다 마른 동굴 같은 저 속이 쓰디쓰겠다
손톱은 흙빛이다
일편단심, 흙의 경건만 파고들다 뭉퉁해진 무지렁이
의 쟁기 닮은
한 모금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온순해지고 사나워
지는 제 몸의 들숨 날숨에 대해 나이테에 대해 골몰하는 손의 표정
KTX / 강해림
나는 세상의 모든 일방통행을 사랑한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흔들리지 않고
시간의 화살표가 지시하지 않는
역방향에 몸을 실어
아주 오래 전 그래왔던 것처럼
커피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듯 통과해 갈 것이다
꿈의 속도가 날 실어 나르느라 멍멍하겠지만
내 꼬리뼈가 퇴화하던 고생대나 신생대 그 어디쯤,
내 아득함이 아득함을 불러
그리운 진원지로
공룡의 아가리 속 같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오지 않는 종말,
캄캄함의 서늘한 진동을 허파 가득 느낄 것이다
아기 공룡의 울음 같은
이명耳鳴을 들을 것이다
어느 환승역에선가
환幻이라는 이름의 그대가 합승해주리라
환상만이 내 엔진 오일이요
연료라 믿으면서
잘 있거라
내 생의 일방통행으로 날 밀어 넣었던 것들아
창밖의 딱 한 번 눈 마주치고 이별했던
들꽃들아
禁書 / 강해림
― 타클라마칸
불모라는 어휘의 어원을 찾아 간다 낙타나 흰목숲쥐가
낙타풀이나 선인장 같은 가시 돋친 것들만 즐겨 먹듯
먹다 뱉은, 붉은 피로 물든 가시의 흔적도 풍사침습의
흔적도 없다 風紋, 바람의 문양만 있다.
읽는 순간 모래글씨가 사라진다
태양이 갈라놓은 명과 암 극명한 각이 흘러내리는
모래구릉은 관능이다 아찔한 죽음의 엉덩이,
시간의 기억마저 후끈거리며 녹아 흘러내리는 열기
속에서 책은 스스로 극한이 되어 무겁고 또한 가볍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동한다
모래무덤 속 미라처럼 바짝 마른 문장은 비틀어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겠다 동의반복의,
가시 돋친 혓바닥에 핀 꽃들은 향기가 없다지
목적지이기를 사양할 것 모래 속에 잠든 왕국 누란도
천막궁전도 내 위에 세우지 말라는 사막의 율법
저 검은 채찍 같은 고요에 홀려 길을 잃고 사막여우라도 만났으면
금방이라도 괴물이나 유령이 나타날 것만 같은
책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모래폭풍을 불러 일으켜 순식간에 천지를 깜깜하게
만들어놓고 내 입을 틀어막자,
아무 일 아닌 듯
껌씹기 / 강해림
개정판 국어사전을 찾다가 껌을 씹는다 천천히 아무 저항 없이 씹히는 껌은, 단물이 다 빠져나간 뒤부터는 껌이 나를 씹는다 무엇이든 오래 질겅거리고 씹고 탐닉하다 보면 말랑말랑해지고 어느 순간 카오스의 붉은 혀가 찾아든다
늦은 밤, 희미한 불빛 아래 야간작업 하던 나는 톱니바퀴가 되어 돌아간다 한 봉지의 쌀과 석유와 맞바꾼 가난한 영혼은 어느 덧 기름냄새가 나고, 자꾸만 달라붙는 잠과 피로도 육체를 녹슬게 할 순 없었던 것 하루를 저당 잡히고, 사과맛 박하맛 톡톡 쏘는 오렌지맛…… 인생이란 장미빛 향기를 찾아 떠난 발걸음들이 보도블록 붙은 껌을 밟으며 돌아온다
썰물처럼 단물이 다 빠져나간 뒤 껌씹기는 이빨이 썩을 염려가 없으므로 안전하고, 후우 풍선껌을 불어날리듯 그가 제공한 짧은 공상도 끝나갈 무렵 껌.껌껌나라.껌정.껌둥이…… 사전 속의 껌은 온통 껌정 투성이다 시간의 검은 활자들이 걸어나와 다시 개정판을 찍을 수 없는 나를 읽다 가고, 사전을 덮자 휴지통 속으로 그가 나를 뱉는다
검은 길 위에서, 껌을 뱉기는 쉬워도 자꾸만 달라붙는 나를 떼어내기란 어렵다
책들 / 강해림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는 오후, 북회귀선은 없다 오랫동안 외설로 낙인찍힌, 금서는 외롭다 어두컴컴한 독방에서 수음하는 문장들
껍질을 벗기고 푹푹 삶은 몸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고행을 묵묵히 견뎌준 나무들 헌신이 없었다면, 그리하여 해탈한 표정 눈부신 지구상의 책들을 모조리 수거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 버린다면
오래 된 책 속에는 시간의 자궁 냄새가 난다 가령, 고서적이나 족보 같은 삭아 한쪽 귀퉁이가 누렇게 변질되거나 만지면 바스러질 듯, 계보를 알 수 없는 시간의 알을 까고 있는 얼룩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좋겠다 서로 등기대고 앉아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심연보다 더 깊은 심연에 낚싯대 하나 달랑 드리워놓고 권태라는 이름의 안경 낀 몽상가들 흉내나 내며 늙어갈 테니까
다시 북회귀선으로 돌아와, 책의 내부에도 지퍼가 있다면 고래뱃속 같은 북회귀선 안에 갇혀 한 사나흘 캄캄해지고 싶다 캄캄해진다는 것만큼 황홀한 성적 묘사가 있을까 세상의 위대한 책들 앞에선 더더욱,
관념이 짜주는 파리한 즙이 흘린 문장을 따라가려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책의 고문, 진리를 살해한 자와 공범이 되고 낙오하지 않으려면 늘 집중력이 문제다
그러고 보니 내 독서목록을 기록하던 만년필도 꽤나 관념적으로 생겼다 이제 막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여인의 복부처럼,
그리운 북회귀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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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림 시인
1954년 대구 출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1991년 <민족과문학> <현대시> 로 등단
2001년 시집 <구름사원> 한국문연
2006년 시집 <환한 폐가> 한국문연
현재 웹진 에스프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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