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델리
자이뿌르를 떠나던 날 S씨와 헤어져야만 했다. 그녀와 함께 다녀서 여러모로 편리하고 즐거웠다. 그녀는 모대학 교수였고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능통한 영어실력으로 어려움이 없었다. 그녀가 우리 일행과 헤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배낭여행의 고생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혼자서 여행하고 일찍 귀국하겠다며 가버렸다.
우리 나이에 이런 여행은 사실 무리였다. 젊은 아이들도 병이 나서 하나 둘씩 아파서 드러눕는 경우가 자꾸 생기는데 나이 많은 그녀가 힘겨워하는 게 당연했다. 나도 힘들었지만 두가지가 나의 원동력이 돼주었다. 낯선 곳에대한 호기심과 글을 쓰겠다는 열망이 그것이었다. 글만 된다면 거짓말 보태서 불속이라도 뛰어들겠다는 것이 나의 심정이었므로 이 여행이 힘들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무더위에도 견뎌주는 내 체력이 고맙기만 했다.
나와 S씨는 동갑내기여서 의기투합 했다. 우리 둘은 좀 묘한 존재였다. 일행은 거의 20대의 학생이 주류였고 30대가 몇 명, 나와 S씨가 40대 후반이었다. 홍콩 공항에서 배낭여행자들끼리 서로 자기 소개를 했을 때 동갑이어서 나는 내심 '에고, 나같은 또라이 아줌마 또 있네' 하고 생각했는데 그녀 역시 놀랐다고 했다. 그녀는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할 때 동갑 친구가 있다고 했더니 '그 나이에 배낭여행이라니 그 여자도 아마 정상이 아닐꺼야' 했다나.
그녀와 같이 좋은 친구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야 다 젊은 친구들이어서 나는 외톨이가 된 것만 같았다. 혼자서 해야 하는 여행은 쓸쓸하기만 했다. 어깨에 맨 배낭의 무게가 더욱 무겹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델리로 가는 기차를 탔다. 1등석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칸을 타야했다. 일반칸은 에어컨이 없기 때문에 창문을 열어놓고 지독한 더위를 견디며 간다. 창밖으로 인도의 풍경을 보며 가는 기차여행, 그리 나쁘지도 않다. 라자스탄 주는 건조한 사막지대여서 메마른 땅 뿐이다. 열시간 이상을 가는 기차여행인데 줄곧 평야로만 이어져 있다. 우리나라 여름이면 각종 농산물로 들이 푸르른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이나라는 경작을 하는건지 안하는 건지 오랜 시간 지나는데도 들에서 일하는 사람을 두어사람 밖에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예전처럼 소 로 쟁기를 끄는 노인 한명을 보았을 뿐이다.
이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무얼 먹고 사는가. 라는 걱정과 이곳이 과연 옛날에도 이처럼 황폐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저 땅에는 경작이 불가능할까? 척박한 땅이라도 그에 맞는 농작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했다. 저 드넓은 땅에 아무것이라도 경작한다면 굶는 사람은 없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정거장에 멈춰섰을 때였다. 기차레일 위에 얹어놓은 ‘미니 바퀴차’를 보았다. 바퀴 2개에 달랑 좌석 한개를 얹어 놓은 차인데 기차레일 위에 그 차를 올려놓고 끈을 매달아 끌고가는 형태이다. 처음에는 장난감인 줄 알고 들여다보았는데 손님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지 않는 시간에 기차레일을 이용하여 손님을 실어나르는 것 같았다. 아마 나름대로 개발한 운송수단이리라. 늘 연착하는 인도의 기차시간을 어떻게 믿고 저걸 운행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궁금했다. 아마도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리면 손님은 혼비백산 내리고 기사(?)도 자신의 영업용 차량을 후다닥 내려놓으리라. 생각해 보니 좀 우습기도 하고 기발한 아이디어인 것 같았다.
델리가 가까이 오자 차창 밖 풍경은 가난하고 더러운 인도의 생활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저런 곳에 사람이 살까 싶을 정도로 폐허처럼 보이는 집, 천막이라고 이름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누덕누덕 기운 거적떼기들을 어설프게 겨우 걸쳐놓은 빈민촌을 지나고 있었다. 저 정도 되면 인간 이하의 삶이다.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델리에 도착해서 숙소를 정했다. 아! 이놈의 지긋지긋한 무더위, 숙소에서는 에어 쿨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더운 바람을 휘젓고 있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시끄럽다. 선풍기도 성능이 떨어지는 모터라서 그런지 요란하고 에어컨은 더욱 요란하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잠을 설칠 정도이다. 물론 백달라 이상 주는 호텔이라면 다르겠지만.
늦은 시간에 도착했기 때문에 요기를 하고 싶었지만 나가기도 귀찮아서 종업원에게 뜨거운 물을 부탁했다. 점심도 저녁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무언가 요기라도 해야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비상식량, 한 개 남은 컵라면을 먹을 생각이었다. 부탁한지 삼십분이 자나도록 감감 무소식이다. 두어번의 전화를 걸고 나서야 겨우 갖다준다. ‘한국 같았으면 열 번도 더 갖다줬겠다’ 하고 투덜대면서 물을 붓는데 겨우 뜨뜻한 정도였다. 할 수없이 좀 불은 다음에 먹기로 했다. 불어 터진 컵라면의 맛, 룸메이트인 G양과 나눠 먹는 라면의 맛. 아, 컵라면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먹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비가 장대처럼 내린다. 이곳 인도의 비는 특별하다. 비가 오면 앞이 안보이게 쏟아지다가 금방 그친다. 마치 화가 난 신이 양동이로 확 들이붓는 것 같다. 우리나라처럼 하루종일 오거나 며칠씩 오는 경우도 없다. 채찍처럼 내리치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니 죄지은 것 없나 싶기도 하고 꼭 벌 받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비 때문에 미적거리다가 우산을 들고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세상에! 거리는 빗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피해 있거나 그냥 맞고 다닌다. 어느 글에선가 비를 맞고 환호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온통 공해에 찌들은 델리의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환호하기는커녕 맞기도 싫다. 우리가 가진 우산도 부러워하는 걸 보면 쓰고 다닐 우산이 변변치 않은 것 같다.
이곳은 배수시설이 없다고 한다. 아마 비만 좀 많이 오면 수해는 일상처럼 일어날 것 같았다. 나는 운동화를 신었는데 젖는게 싫어서 벗어들었다. 이정도 비에 도로가 이모양이니……. 혀를 차면서 걷는데 뭔가 밟히는 게 있다.
이를 어째! 맞아! 이 거리는 소똥 천지였었어. 내가 그걸 왜 생각 못했다는 말인가!.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더러운 거리를 맨발로 걷고 있는가를 생각해 냈다. 소똥뿐이었던가. 개똥, 염소똥에다 각종 오물과 쓰레기가 범벅이 된 거리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 기가 막혔다. 나는 안되겠다 싶어 운동화를 다시 신고 울상이 된 채 거리를 걸었다. 물은 어느새 불어나서 정강이까지 차오른다. 콸콸 불어나는 흙탕물을 휘저으며 간신히 걸어야 했다.
힘들게 찾아간 한국 음식을 흉내내어 파는 ‘골든카페’는 이른 탓인지 문도 열지 않았다. 할 수없이 호텔로 돌아와서 비오는 소리를 우두커니 듣자니 점차 배가 고파졌다. 같이 나갔던 G양은 다른 동료를 보러 가고 나는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식사를 갖다 줄 것을 부탁했다.
플레인 라이스(그냥 쌀밥)와 그린 샐러드(야채)를 시켰다. 그리고 짜이를 한잔 시켰다. 짜이는 우유에 홍차를 넣은 인도의 차인데 아주 맛이 좋다. 일행중의 H는 한국에 돌아가면 짜이 동호회를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하면서 짜이맨이라고 자처하고 나섰다. 잠꼬대도 원 짜이 플리스!(짜이 한잔 주세요)하고 외쳤다나. 그만큼 짜이는 우리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따끈한 짜이를 한잔 마시고 밥을 가져오면 야채와 함께 만병통치약(?)인 고추장을 넣고 썩썩 비비리라. 그러면 훌륭한 비빔밥이 되겠지. 혼자 즐거워 하며 기다렸다. 인도에서는 뭘 시키면 으례 오래 걸린다. 30분이 넘도록 기다린 끝에 가져온 식사를 보니 실망스러웠다. 밥이야 원래 푸실푸실하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푸짐한 야채를 가져다 줄줄 알았던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 얇게 썰은 양파 몇쪽, 오이 몇쪽, 토마도 몇쪽이 고작이었다. 그릇이라도 좀 우묵해야 비비기가 좋은데 길쭉한 볼에 밥을 소복히 담아오니 비빌 수도 없었다. 게다가 쌀은 찰기라고는 전혀 없어서 숟가락만 들이대도 밥알이 옆으로 다 떨어진다. 일명 알랑미라 불리웠던 쌀을 인도에서는 우리식으로 밥솥에 하지 않고 찜통에다 찐다. 그래서 더욱 푸실할 수밖에 없다.
거짓말 안 보태고 센 입김 한방으로 한 그릇을 몽땅 날려버릴 수 있는 날라리 밥, 그리고 너무나 엉성한 야채 샐러드, 비빔밥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잘난 야채를 반찬 삼아 고추장을 찍어 먹는데 배가 고프니까 그나마도 먹을 수 밖에……. 맛없는 밥을 우물거리는데 그 때 왜 하필 인도의 가난이 생각났을까.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는 많은 가난한 인도인, 이정도의 식사도 할 수 없겠지 라는 생각이 미치자 겁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기차를 타고 오며 보았던 그 비참한 천막촌은 이 비에 어떻게 되었을까.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눈물은 인도의 가난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을까. 내가 먹는 열악한 음식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향수병이었는지 자꾸만 서러웠다. 자신도 잘 모르겠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훌쩍훌쩍 울면서도 그 이상하고 맛없는 밥을 남김없이 다 먹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무엇이든 견디리라. 더위도 고통도 이겨내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