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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의 한명숙 | |
대한민국의 제37대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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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2006년 4월 20일~2007년 3월 7일 |
대통령 | 노무현 |
전임: 이해찬(제36대)
후임: 한덕수(제3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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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44년 3월 24일(1944-03-24) (66세) |
출생지 | 한국 평안남도 평양부 |
종교 | 개신교 |
배우자 | 박성준 |
자녀 | 박한길 |
웹사이트 | http://www.happyhan.kr/ |
한명숙(韓明淑, 1944년 3월 24일 평양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민주화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여성부 장관을 지냈다.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박성준(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평화학 겸임교수)과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박한 길[1]을 두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활동하였으며 남편 박성준의 옥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김대중 집권 이후 여성부 초대 장관으로 정계 입문, 2006년 3월 15일 이해찬 총리가 사임함에 따라 3월 24일 참여정부의 세 번째 총리에 지명되었다. 2006년 4월 19일 대한민국 국회의 총리임명 동의안이 가결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가 되었다. 2007년 3월 7일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2007년 6월 18일, 2007년 12월에 있을 제17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로 올랐다. 그러나 9월 14일 이해찬을 지지선언하며 후보단일화를 위해 경선에 불참했다.[2]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에 출마했으나 백성운에게 패하여 낙선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의 공동장의위원으로서 영결식에서 조사를 낭독했다.[3]
목차 |
한명숙은 1944년 3월 24일 평양시에서 출생하여, 4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모를 따라 월남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마라톤 선수로도 활약했으며, 달리기를 잘해 늘 릴레이 선수로 뽑혔다고 한다.[4]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 재학중에 남편 박성준을 만나 1967년 결혼하였으나, 6개월만에 박성준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수감되어 1981년에 석방될때까지 13년간 남편을 옥바라지 하였다. [5] 남편을 옥바라지 하며 졸업 후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중,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되어 기숙사 사감을 그만두고 한국 크리스천 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겨 한국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다.[6] 여성운동 초창기 소외계층 여성의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며 1974년 한국 크리스천 아카데미 운동에 여성분과의 간사가 된 한명숙은 1977년 한국신학대학교 선교신학대학원 신학석사를 취득한다. 하지만 1979년 체제 비판적인 이념서적을 학습·유포한 혐의로 이우재, 신인령 등 아카데미의 동료 간사들과 함께 구속되어 광주교도소에서 수감되었다. [6] [7] 2년 6개월간의 투옥 뒤 1981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고, 이후 13년째 수감중이던 남편의 석방 운동을 하다가 결국 같은 해 지학순 주교의 도움으로 크리스마스에 특별사면된 남편과 해후하게 되었다. [8]
1985년 한명숙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여성학 석사를 취득한 뒤, 같은 해 10월 28일, 마흔 하나의 나이로 아들 '박한 길'을 낳았다.[1]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강사로 일했으며,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성심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강사로 활동했다. 1987년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결성되었고, 한명숙은 이 단체의 일원으로 6월 민주 항쟁에서 구속자 어머니들과 함께 전경들에게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다. [9] 이후 1989년부터 5년간 한국여성민우회의 회장으로, 1989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가족법 개정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1990년부터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부회장, 공동대표, 지도위원등으로 활동하며 여성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1994년 남편과 일본으로 건너가 오차노미즈 여자 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중, 1997년 미국 유니언 신학교의 객원 연구원으로 이동하며 중단하게 되었다.[10]
1999년 2월, 한명숙은 미국에 체류하면서 참여연대의 공동대표로 활동할 것을 수락한다. 한명숙은 1999년 9월 이재정 당시 성공회대 총장과 김대중의 권유로 새천년민주당 창당 작업에 여성 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참여연대의 중립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참여연대 공동대표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11] 당시 한명숙은 자신의 정치 참여에 대해 "여성의 정치참여,남녀평등 수준은 후진국과 별반 차이가 없다.지난 25년간 재야운동을 해왔지만 역시 가장 효율적인 길은 정치 참여를 통한 것이라고" 느껴 정치에 투신했다고 설명했다. [12]
2000년 한명숙은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제5번)로서 제16대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환경노동위원회 활동을 통해 미군 송유관, 비정규직, 공단들의 국립공원 훼손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성실하고 차분하다는 평가[13]를 얻었던 한명숙은 2001년 초대 여성부장관에 취임하면서 의원직에서 사퇴하게 되었으며, 박양수에게 의원직을 승계하였다.
한명숙은 2000년도의 국정감사에서 환경부에게 "새만금간척지는 2011년 완공때까지 7억여원이 더 드는 사업인데 경제 수익이 보장되지도않는 상황에서 그동안 들인 1조여원이 아깝다며 건설을 강행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새만금 사업의 경제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노사정위원회에 주 5일제를 실시함과 더불어 주 5일 수업제, 여가시설 확충 등을 함께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또 경기도의 남한강 정비사업에 전제된 무딘 환경 의식,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취업을 알선한 장애인들의 높은 이퇴직율, 반월시화공단의 높은 다이옥신 농도, 급증하는 미성년자 불법고용, 산업재해지정병원의 산재환자에 대한 진료비 과다청구, 공공기관의 국립공원 훼손 등을 지적하여 뉴스메이커, 문화일보, 국감연대 등이 각각 선정한 국정감사 베스트 의원으로 거명되었고, 월간 말지에 의해서도 국감스타 5인 중 하나로 뽑히었다. 또 법률연맹 국감모니터단은 한명숙을 국감우수 의원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정부조직법의 개정과 함께 2001년 1월 29일, 한명숙은 여성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초대 여성부장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백경남 여성특위 위원장이 장관으로 유력시 되었으나, 김중권 민주당 대표와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이 민주당내 인사를 중용하고자 한명숙을 임명하게 되었다고 한다.[14] 당시 대부분의 여성단체들은 한명숙의 장관 취임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백경남 여성특위 위원장을 제치고 한명숙이 임명된 것에 유감을 표시하였다. [15]
한명숙은 여성부 장관을 지내면서 자신이 발의한 모성보호법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남녀차별개선위원회를 통해 성희롱에 대한 인식을 넓혔고[16],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17]는 등 원칙이 분명하게 일을 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18]
한명숙은 16대 국회의원이던 2000년 10월, 출산휴가를 90일로 확대하고, 생리휴가, 유.사산 휴가, 태아검진 휴가를 신설하며, 육아 휴직 급여를 도입하는 것을 뼈대로 한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고용보험법에 대한 개정안(약칭 모성보호법)을 발의했다.
하지만 재계와 야당의 반발로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표류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해 민주당과 자민련, 민국당 등 3당은 2001년 4월 24일 국회에서 원내총무ㆍ정책위의장 연석회의를 갖고 시행을 2년 유예하는 조건으로 국회 통과를 합의하였다. [19] 하지만 이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자 3당은 생리휴가와 유.사산 휴가, 태아검진 휴가는 제외하는 조건으로 2001년 11월 1일부터 시행하는 안을 5월 10일에 합의하였으며, 결국 이 법안은 국회에서 7월 18일에 통과하였다.
하지만 개정된 모성보호법에 대해서는 이용률이 저조하고 [20] 현실과 동떨어져있으며, 20만원의 육아 휴직 급여는 사실상 별 도움이 안된다[16]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주무 부처인 노동부는 2003년 30만원, 2004년 40만원으로 육아 휴직 급여를 인상하기도 하였다. [21] 하지만 이에 대해 한국경영자총연합회는 오히려 기업의 여성 고용 기피 현상을 가져올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22]
군가산점폐지의 원흉으로 낙인이 찍혀있다. 그래서 현재 친박계의 주성영, 친이계의 김성회 국회의원 공동으로 군가산점부활을 추진중이다,
2003년 2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과 함께 참여 정부의 초대 내각 발표 전까지 한명숙은 여성부 장관으로 유력시 되었으나[23] 결국 환경부장관으로 발탁된다. 대선 당시 경쟁 후보들 중 환경 공약이 가장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던 노무현 후보의 환경 정책은 정권의 시작부터 우려를 낳았고 [24] 결국 핵 폐기장 논의에 배제되거나,[25] 새만금 사업과 독도 개발 특별법 등을 반대하며 다른 부서와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26] 결국 그는 "국무회의 등에서 환경정책을 지지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며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27]
하지만 이런 중에서도 한명숙 장관이 이끄는 환경부는 수도권대기환경개선에관한특별법안,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 야생동식물 보호법 등의 제정을 위해 앞장섰으며, 정부업무평가 최우수 부처로 선정되기도 했다.[28] 특히 한명숙은 중앙일보의 장관리더쉽평가에서 1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29][30] [31] 한명숙은 방송에 출연하여 상수도와 하수도도 구분하지 못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수질 얘기가 나오자 한 장관은 “식수의경우 정수장 물은 1급수인데 문제는 하수관거가 노후화해서...”라며 뜬금없이 하수관거를 들먹였여, 환경 모르는 환경장관이라는 평을 받았다. 상수도와 하수도를 구분하지 못한 한 장관은 이날 “환경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요즘 열심히 환경공부를 하고 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32]
2004년 2월 15일 한명숙은 17대 총선에 출마하고자 환경부 장관을 사직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3월 4일 경기도 일산갑 선거구에 공천이 확정되어, 탄핵의 주역인 한나라당 5선 중진 홍사덕 총무를 상대로 4월 15일 선거에서 승리하고 17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홍총무는 선거 전 "내가 지면 정계를 은퇴할테니 만일 당선되면 노무현 대통령이 사퇴하라"며 노무현 대통령과 자신의 선거 결과를 연관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33] 한명숙은 당선 직후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국정질서를 바로잡고 경제회생에 주력하라는 주민들의 염원이 나타났다"고 소감을 밝혔다. [33]
한명숙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대한 2005년 5월 국회 표결에서 찬성 당론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과의 협상 과정에서 당초 내용이 후퇴했다며 기권하는 등 과거사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으며, 자신의 홈페이지에 한나라당 박근혜 당시 대표를 '독재자의 딸'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또 2005년 쌀 협상 비준안의 국회 표결 때에는 당론에 따라 찬성표를 던졌다. 2004년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 동의안 표결 때도 찬성했다. [34]
17대 국회 회기 동안 한명숙은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 기간동안 당 내에서는 신행정수도 건설특별위원회 위원장을, 가정법원에서는 가사.소년제도개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국회의원 당선 후 한명숙은 당의장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결국 열린우리당 내에서 청와대의 국정 수행을 지원하는 국정과제수행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35] 고건 국무총리의 후임으로 김혁규 국회의원이 거론되던 중 6월 5일 재보선에서 참패하자 그 대안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6월 8일 이해찬 의원이 먼저 총리 지명이 되었다. 당시 한명숙을 총리에 지명하지 않은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당의 지도부였던 신기남-천정배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당 내에 견제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36]
2005년 1월 2일, 열린우리당 이부영 당의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4대 법안 처리 불발에 책임지고 사퇴하며 한명숙도 함께 상임중앙위원직을 사퇴한다. 이후 새 지도부의 당의장 후보로 문희상 의원과 함께 이름이 거론되다가 갑자기 의장 경선에 불출마를 선언한다. 이 와중에 교육부총리 물망에도 올랐으나 본인의 고사로 제외되기도 한다. [37] 하지만 당의장 경선에서 친정동영측이 지지의사를 밝힌 뒤 다시 경선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이에 따라 박영선, 김희선 의원등 당내의 여성 의원들은 모임을 갖고 한명숙 의원으로 후보를 단일화하기로 결정했다. 4월 3일 전당대회 결과 문희상이 당의장으로, 한명숙은 4명의 중앙상임위원 중 하나로 당선되었으나 "여성의원 1명을 상임중앙위원회에 포함시킨다"는 당규로 인해 배제투표가 행해진 결과 10.7%의 득표에 그쳐 그 의미는 퇴색되었다. [38] 특히 여성 대의원이 30%였다는 점에서 이런 득표율은 여성 표들마저 유일한 여성 후보를 외면했다는 것으로 받아지기도 했다. [39]
2005년 4월 30일 재보선결과 열린우리당은 5곳 모두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했고, 이에 따라 한명숙을 위원장으로, 유시민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당혁신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인선이 이상주의에 대한 지도부의 동조라며 반발한 염동연 의원은 중앙상임위원에서 사퇴했고[40], 이후 염동연의원은 호남홀대론을 주장하며 유시민의원이 주장한 기간당원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41]며 열린우리당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0월 26일 재선거에서 4개의 전 선거구에서 열린우리당이 패배하자, 결국 2005년 10월 28일 문희상 의장과 한명숙 의원 등 지도부는 6개월만에 전격 사퇴하게 되었다.
2006년 3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은 한명숙을 이해찬 전 총리에 이은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이는 장상에 이은 두 번째 여성 총리 지명이었는데, 한나라당은 2006년 5월 31일의 지방선거를 공정하게 치르기 위해서 신임 총리는 당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사청문회 보이콧을 시사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 윤두환은 인사 청문회 이전부터 대정부질문에서 "한명숙 총리 지명자 남편은 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한 공산주의 조직의 핵심이었다"[42]며 공격하기도 했다.
2006년 4월 17일과 4월 18일 양일간 이뤄진 한명숙에 대한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한명숙의 당적 정리 문제와 국정 능력 및 이념적 편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결국 4월 19일 국회의 임명 동의안이 가결되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가 되었다.
임기 중 김병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의 거취 문제, 인터넷 로또 발행 취소 등 각종 현안과 관련해선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냈다는 평을 들었다.[43] 한편으로는 시위대에 대한 탄압을 방관했다는 지적도 있다. [44]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한총리는 “포용정책이 핵실험을 막는 데 실패했다고 자인한다”며 “전반적인 포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에 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한완상 당시 적십자 총재는 "국무총리가 그런 말을 한 것 자체가 국민을 굉장히 불안하게 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2007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에 대해 한명숙 총리는 개헌지원추진단을 구성하며 호응했고, 이에 대한 국회의 비판에 예전과 다르게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한명숙의 달라진 모습에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서기 위한 정치적인 움직임이라며 비난했다. [45]
2007년 3월 7일 한명숙 총리는 퇴임하여 열린우리당으로 돌아가면서 '앞으로 정치인으로서 나라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생각하며 일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후임은 한덕수 총리다.
열린우리당으로 돌아온 뒤 한명숙은 민주당과의 통합작업에 참여하는 동시에 대선 주자로 나서기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2007년 3월 1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한 자리에서 "흩어진 힘을 모으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겠다"는 말을 했으며, 3월 19일 "시대적 요청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회피하지 않겠다"[46] , 4월 12일 여성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선전 뛰어들 확신 생겼다"며[47]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할 것을 시사했다. 이런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한때는 자신이 열심히 옹호했던 연임제 개헌에 대한 제안 철회를노무현 대통령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양대 계파를 이끌 던 정동영, 김근태는 5월 3일 당을 해체하고 민주세력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탈당을 시사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들이 호남의 지역감정에 기대려는 것으로 판단, "지역 정치는 호남의 소외를 고착시킬 것"이라며 이를 비난했다. 이런 와중에 민주당 박상천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총리나 장관을 하면서 정책결정을 한 사람, 당의장을 지내면서 좌편향 노선을 고집한 사람들과는 통합하지 않겠다"며 한명숙을 포함한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전격적인 통합을 거부했고, 5월 21일 유시민 장관이 사퇴를 하고 당으로 돌아오면서 혼란은 더 심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해찬은 3월, 김혁규는 5월 방북하기도 했고, 한명숙은 4월 러시아를 조문사절로 방문하는 등 대선 예비 주자로서의 활동을 보였다.
6월 12일 김근태가 대통합세력의 밀알이 되겠다며 탈당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한명숙 등을 호명하며 경선의 참가를 요구하였고, 6월 14일 손학규를 만나 평화개혁세력의 통합을 요구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6월 18일 한명숙은 대선 경선 참가를 선언한다. 당시 대선 참가를 선언했던 범여권 후보들은 김두관·김영환·김원웅·김혁규·문국현·손학규·신기남·유시민·이인제·이해찬·정동영·추미애·천정배·한명숙 등 14명이었는데, 이 중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김혁규는 친노 계열 대선 주자로 인식되었다. [48] 그러나 한명숙은 "나를 ‘친노’로 분류한 것은 언론"이라며 친노라는 범주화에 이의를 제기했다. [49]
7월 4일 손학규·정동영·이해찬·한명숙·천정배·김혁규의 6인이 김근태의 주도로 6인 연석회의를 가지고 국민경선 참여와 대통합신당창당의 참여를 결의했다. 8월 4일 대통합민주신당은 대표없는 혼란속에 창당하였고, 이 창당대회에 열린우리당쪽 대선 후보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8월 7일 한명숙은 친노주자간 후보단일화를 제안했다. 한명숙은 손학규를 필패카드라 규정하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가급적 예비경선 이전에 한명숙, 이해찬, 유시민 등 세 주자가 여론조사를 통해 ‘3자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 후보는 모두 각각 예비 경선에 등록했고, 예비 경선을 위한 토론회에서 한명숙은 참여정부 실패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며 "소통에 있어선 과(過)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깨끗한 선거를 만들었고, 국가균형발전도 이뤘다. 정경유착의 고리가 없어지고, 권위주의가 해체됐다"고 주장했다. 9월 5일 예비경선에서 한명숙은 9명 중 5위 (9.42%)로 예비 경선을 통과하였으나, 이런 저조한 득표율은 당 안팎의 관심이 이해찬-유시민 경쟁구도로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50]
5명의 후보로 본경선이 시작된 뒤, 각각 예비경선 3, 4, 5위이던 이해찬, 유시민, 한명숙은 각자 자신으로 단일화되야 한다고 주장하며, 1, 2위이던 손학규, 정동영을 토론회를 통해 공격하였다. 9월 14일 한명숙후보는 결국 이해찬후보로 단일화를 선언하면서 "유시민 후보도 결국 단일화를 통해 정통성이 있는 후보가 승리하는 대의에 합류하게 될 것"이라며 유시민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했다. 유시민은 "다른 후보가 이명박 후보를 꺾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돕겠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당내 대세론을 먼저 뒤엎어야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며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9월 15일 결국 유시민 역시 이해찬과 단일화를 선언했고,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누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 아니냐"며 청와대의 개입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일화에도 불구하고 이해찬은 10월 16일 정동영에 대통령 후보 자리를 넘겨주었다.
한명숙은 이후 정동영 후보 진영에서 문국현 후보와의 단일화에 대한 공동협상기구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결국 단일화는 실패했고, 12월 19일 정동영은 이명박에게 대선에서 패배하였다.
대선 패배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은 지도부 구성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2008년 1월 10일 손학규가 대표로 선출되자 친노계열로 분류되던 이해찬, 유시민은 한명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통합민주신당에서 탈당한다.[51] 결국 한명숙은 대통합민주신당에 남았고, 3월 10일 고양 일산 갑에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로 공천을 받게된다.
고양 일산 갑 선거구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인수위 행정실장을 지냈던 백성운과 경쟁하였는데, 이 곳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상징적 대결장으로 비춰졌다.[52] 총선을 19일 앞둔 여론 조사결과 한명숙이 백성운보다 약 10% 높은 지지율을 보였으나[53], 선거 사흘 전 한명숙의 선거운동원이 지역 사회단체장과 저녁식사를 한 뒤 "잘 부탁한다"며 음식값을 낸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43.8%의 지지율을 얻은 한명숙은 47.1%의 지지율을 얻은 백성운에게 패배하였다. 이런 박빙의 승부를 두고 이명박은 백성운에게 "죽다 살아났지"라고 하기도 했다.[54]
이후 2009년 4월 29일 재보선을 앞두고 한명숙은 김근태와 함께 민주당의 홍영표 후보를 지원하기 위한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는다. 선거 운동 중에 한명숙은 김대중 전대통령이 공천 탈락에 반발해 탈당한 정동영과 신건을 가리켜 "이번 선거는 반드시 민주당이 승리해야 한다. 무소속 한두 명이 당선돼 복당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을 전달하였다. 결국 홍영표후보는 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민주당은 전북에서 정동영 후보와 신건 후보에 모두 패배하였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유족들은 국민장을 치르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일했던 한명숙은 정부 측의 한승수 국무총리와 더불어 유족 측의 공동장의위원장을 맡았다. 한명숙은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조사를 낭독했다.[3] [55]
2009년 12월, 한명숙은 지난 2007년 총리 재직 시 이미 구속수감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 인사청탁으로 5만달러(당시 환율로 4500만원 정도)를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으나 무죄로 판결되었다. 그는 검찰의 수사에 대해 부당한 수사라고 주장하면서 소환에 응하지 않던 중 체포 영장이 발부돼 같은 달 18일 노무현 재단에서 체포되었고,[56] 조사과정에서 곽영욱과의 대질신문 등이 이어졌으나 한명숙은 묵비권을 행사하였다. [57]
일부에서는 검찰이 곽영욱의 내부자 정보를 이용한 불법 주식거래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리로 종결한 것과 관련해 일각에서는 한명숙 총리에 대한 진술을 두고 검찰과 곽영욱 간의 거래가 있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58] 한명숙에 대한 공판준비기일에도 변호인단은 곽영욱에 대한 수사와 관련해 검찰이 수사기록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으나, 검찰은 "본 사건과는 관계없는 별건이므로 검찰 내부 문서까지 공개할 수 없다"며 거부의사를 밝혔다.[59]
곽영욱은 2차 공판부터 검찰측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했다. 하지만 검찰에서 한 진술과 달리 5만 달러를 직접 건네지 않고 나오면서 의자에 놓고 나왔다고 증언했으며, 1~2시까지 계속되는 검찰의 수사가 심장병 환자인 자신에게 너무 가혹해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고 말했다. [60] 3차 공판에서 검찰은 2002년 한명숙이 장관 재직 시 곽영욱이 한명숙에게 998만원 상당의 골프채를 선물해주었다는 주장을 펼쳤으나, 재판장은 곽영욱에게 "선물을 건넸다는 날이 수요일인데, 장관이 평일 근무시간에 골프매장에 가서 골프채를 선물 받은 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곽영욱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4차 공판에서 한명숙의 변호인단은 곽영욱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특히 액수와 관련해, 2009년 11월 9일 3만달러를 줬다고 했다가 11월 19일에는 준 적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5만달러로 바뀌게 된 경위를 추궁했다. [61]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는 "매우 졸렬하다", "결과는 나와봐야 하겠지만 선고를 앞두고 검찰이 별건 수사를 발표한 것은 법관의 심증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이라고 의심받기에 충분하다"며 검찰을 비판했다.[62]
4월 9일, 이 사건의 1심 재판 결과 한명숙에 대해 무죄가, 곽영욱에게는 횡령 혐의로 징역 3년형이 선고되었다. 재판부는 곽영욱의 진술의 일관성 부족을 지적하며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만한 신빙성이 결여"되었다고 판단했고, 검사가 제출한 나머지 증거 역시 이런 의심을 해소하기 불충분했다고 판결했다.[63]
무죄 판결 이후 검찰은 또 다른 이유로 수사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무리한 수사라는 비판과 함께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수사 중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였다. 한나라당 김성식 의원은 "검찰이 신뢰를 벌어도 모자랄 판에 매를 버는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라며 "때를 맞추지 못하고 과유불급의 이치를 자각하지 못해 국민들로부터 멀어지는 일들을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하였다.[64]
대한통운 비자금 의혹을 벗고 난 이후, 2010년 4월 21일 선거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65] 2010년 5월 6일, 100% 여론조사로 이루어진 민주당 경선에서 이계안 전 국회의원에게 승리하여 민주당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66]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오세훈 후보와 경쟁하게 되었는데, 5월에 시행한 모든 여론조사에서 20%정도를 뒤지며 오세훈 대세론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실제 선거에서는 여론조사 결과와 달리 선거 다음날 새벽까지 엎치락 뒤치락 개표 끝에 오세훈 후보에 뒤지며 근소한 차이로 낙선됐다.
첫댓글 갑자기 한명숙을 검색을 해봤는데. 여성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다는걸 알게 되었고 저혼자 보기 아까워서 같이 공유 할려고 올린겁니다. 대물에서 여성 최초 대통령이 나옵니다. 여성이 많은일을 행하고 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