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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은 평양이 될 수 없고, 옥저는 수양제 침략경로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에 있었다.
◉호동왕자가 낙랑국 왕 최리를 만난 옥저는 어디인가?
낙랑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정사 “삼국사”에는 고구려 초기 당시대 평양에는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이 있었다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 유명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 주인공이 나오는 낙랑국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낙랑국의 최리와 호동왕자의 이야기에 낙랑국이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일본인들이 역사를 왜곡한 것이며, 이후 낙랑국에 대하여는 각종 설명이 있지만, 낙랑국 한반도 내 설치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제4대 대무신왕(재위 18-44)의 아들 호동왕자가 대무신왕 15년(AD32년) 유람 중 옥저(沃沮)에서 낙랑왕 최리를 만나 그의 땅 날강공주와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낙랑이 한반도 내인 지금의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일본인의 최초 주장을 추종하고 있으며, 반박조차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대로 낙랑국이 평양에 있었다면, 평양에 위치한 낙랑왕 최리와 압록강 중류 집안시에 있었다는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 각각 함견도와 연해주에 걸쳐서 있었다는 옥저까지 사냥 가거나, 놀러 가서 기적적으로 만나고 호동왕자를 평양까지 데리고 와서 딸과 결혼시켰다는 불가능한 내용이 낙랑국 평양 존재설이다.
어찌 호동왕자와 낙랑왕이 각각 개마고원이나 낭림산맥을 넘은 곳 옥저까지 가서 기적적으로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낙랑국은 평양에 존재한 사실 자체가 역사적으로 전혀 없고 요서 지방에 존해하고 있었다.
호동왕자(AD32년) 낙랑왕을 만난지 불과 17년 후인 다음 왕인 5댇 모본왕은(AD49년) 후한의 상곡, 어양, 북평(우북평), 태원을 공격하였다가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慕本王 二年, 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건무 25년(AD 49년) 봄에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경계를 회복하였다(建武 二十五年 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위의 삼국사기와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호동왕자와 낙랑와을 만난 AD32년과 모본왕이 상곡, 어양, 북평(우북평), 태원을 공격한 AD49년은 불과 17년의 차이이다. 고구려는 요서지방에서 건국하였기 때문에 주몽이 고루려를 건국하였다는 BC 37보다 불과 20년 후인 전한 말기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요수(遼水)의 상류에 위치한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구려 장수 ”연비“의 목을 베고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비하하였고,
86년 후인 AD 49년 5대 모본왕이 상곡, 어양, 북평, 태원까지 공격할 수 있었다. 이는 고구려가 북평, 어양, 우북평, 태원에서 가까운 지역에서 건국되었고, 고구려가 건국된 지 86년 후인 모본왕 시절에는 이미 막강한 군사력으로 후한과 전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의 2대 유리왕 때 왕망이 요수(遼水)의 상류에 있는 고구려 땅 현도 고구려현을 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공격한 현도 고구려현을 역사학자들은 압록강변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압록강변에는 수경(水經)에서 기록된 요수(遼水) 자체가 없어서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일본인들의 주장을 추종한 억지 주장이다. 요수는 서한군국도나 서진군국도에 표시된 바와 같이 만리장성의 밖에서 발원하여 만리장성의 안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유리왕은 이미 요수의 상류 지역을 점려하고 있었다.
또 고구려 6대 태조왕은요동군 서안평현을 공격하여 대방현령(帶方令)을 참살하고, 낙랑태수와 그 처자를 포로로 잠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서안평은 유주(幽州)의 요동군(遼東郡고 서안평현(西安平縣)이다. 또 3년(AD 55년)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군대에 대비하였다(太祖大王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영토인 요서 10성은 천진시 부근과 하북성 석가장시 부근이라는 설도 있고, 환단고기에는 그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으며, 요서지방이다.
그러므로 호동왕자 당시 고구려는 결코 압록강 주변이 아니다. 위와 같은 여러 역사적 기록에 비추어 호동왕자와 낙랑왕 최기가 만난 옥저(沃沮)는 함경도에서 연해주에 걸쳐서 있던 지역이 이나라, 요서 지방에 있었다.
◉ 사마천 사기의 옥저에 대한 기록
호동왕자와 낙랑국왕 최리가 만났다는 옥저에 애한 사기의 기록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 注[一] 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 注[一]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蓋馬大山)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고, 평양은 곧 촹검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 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 注[一] 【山 : 】 (王儉城)이다.”(『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라고 하였다.
일본인들이나 사학자들은 개마대산을 일본시대 지어진 이름인 지금의 낭림산맥 개마고원이라거나 백두산이라 주장하고 그 개마고원 남쪽의 함경도와 간도 및 연해주 지방까지를 옥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개마대산은 노호아산(老虎兒山)이며 그 동쪽의 개주시(개평) 부근에 왕검성이 있었을 것으로 비정이 된다. 이는 단재 신채호도 조선의 왕검성은 지금의 개평(개주시) 부근이라고 비정하였다.
신채오의 주장대로 지금의 개주시(개평)에 왕검성이 있었다면, 사기(史記)의 기록은 중국에서 가까운 높은 산 중에서 지금의 노호아산(老虎兒山)을 개마대산으로 보고 그 동쪽에 좁고 길게 옥저가 있었고, 개바대산의 돋쪽 바다 근처에는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왕검성(平壤王儉城)이라고 비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마는 현도군에 속한 현의 이름(縣名)이라고 사기의 주해에 설명하고 있다. 이 개마현은 한 대(漢代)에 유주 현도군 서개마현(西蓋馬縣)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양제의 최초 침략 경로이어서 조백하 부근임을 알 수 있다. 당태종의 고구려 공격 시에도 이세적이 요수를 건너 현도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현도 부근의 “개모성을 빼앗은 다음 개모성(蓋牟城)을 개주(蓋州)로 개칭하였다(功蓋牟城 拔之 獲一萬人 糧穀十萬石 以其地 爲 蓋州)”고 하였다. 이를 미루어 개마대산이나 개주 및 현도군 개마현은 요수 부근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필자의 옥저(沃沮) 위치에 대한 추정의 가설(假設)
그러나 필자는 옥저(沃沮)가 만리장성의 안쪽에 위치했을 가능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가설(假設)을 제시한다.
전술한 옥저에 대한 설명 중 옥저의 땅에 고조선의 수도 평양왕검성(평양왕)이있었다는 기록과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 중
좌11군 옥저도(沃沮道)에 우익위장군(右翊衛將軍) 설세웅(薛世雄)의 공격로에 있었다고 수서(隋書)에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도 좌12군 11번 째에 옥저도(沃沮道)로 진격하라는 수양제의 조서를 비추어 볼 때 옥저가 만리장성의 안쪽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후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옥저(沃沮) 개마(蓋馬)가 기록된 점과 당태종의 이세적이 현도를 공격하였다가 실패하고 근처의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이 개모성 지역을 개주(蓋州)라고 개칭하여 부근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치주(治州)로 삼은 점은 이 개마(蓋馬)나 개주(蓋州)나 옥저(沃沮)가 모두 요수(遼水: 지금의 조백하)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던 지역이다.
이 옥저가 한서(漢書)에 나오는 유주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이 후대에 옥저(沃沮)로 바뀌었을 가능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험독현(險瀆縣): 아래 기록이 있다.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왕(王) 위만이 도읍인데 강물의 험한 것을 의지하였기에 험독(險瀆)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는데 험독현(此)은 자연적으로(自) 올바른(是) 험독이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 浿의 음은 배(普大反)이다.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위의 응소(應劭)와 사고(師古)가 말한 조선왕 위만의 수도 험독현이 옥저(沃沮)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다. 옥저는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당시 좌12군 중 11번째의 침략 목표 지점으로 설정된 지역이다. 지금의 개평(開平: 개주시)는 수양제가 최초 침략 경로로 삼기에 너무 동쪽 먼 지역에 있다.
일본인이나 사학자들의 주장인 옥저가 함경도와 연해주에 걸쳐서 있다면,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당시 최초 침략 목표가 어찌 함경도가 되겠는가? 일본인들이나 사학자들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날조된 주장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의 주장대로 함흥 지방에서 간도와 연해주에 옥저가 있었다면, 부여와 읍루는 그 위쪽 시베리아 한대지역 벌판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어찌 이런 역사학자들의 해괴한 논리가 정당하다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을까?
또 역사학자들의 주장대로 함흥 이북의 함경도와 간도 및 연해주에 옥저가 있었다면, 어떻게 이 지역에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 즉 왕검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역사학자들의 주장인 함경도와 간도 및 연해주에 왕검성이 있을 수 없으며, 그 위에 시베리아에 부여나 읍루가 존재할 수 없다. 역사학자들의 함경도와 연해주에 걸친 옥저 존치설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낙랑군 부조현과 옥저에 대한 여러 학설과 논문이 쓰레기인 이유
다음의 <나무위키 ‘옥저’>에 기록된 내용을 비롯하여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옥저가 함경도와 간도 및 연해주에 걸쳐서 있었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https://namu.wiki/w/%EC%98%A5%EC%A0%80
그러나,
중국의 한서(漢書)에서 유주(幽州)에 속했던 10개의 군(郡)은 다음과 같다.
1) 탁군, 2) 발해군, 3) 대군, 4) 상곡군, 5) 어양군, 6) 우북평군, 7) 요서군, 8) 요동군, 9) 현도군, 10) 낙랑군이다.
이중 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마지막 25번 째의 군이 부조군(夫租郡)이다.
이 부조군(夫租郡)이 옛 고조선 때부터 고조선의 영토이었던 옥저군(沃沮郡)과 돌일한 군(郡)이라고 주장하면서, 유주 낙랑군 부조현을 삼국사기나 한국 역사에서 잘못 옥저군(沃沮郡)으로 표기했거나 다른 지방으로 인식했다는 주장이 일본인, 중국인, 외국인 및 한국인을 포함한 18인이 20여 편의 논문과 글을 발표하였다.
일본인 다수와 중국인 다수 및 한국인 다수인 18명의 역사학자가 유주 낙랑군 부조현을 한반도 내 평안도에 있었다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이 발표한 논문은 일본인들이 발굴한 ”금속제 부조예군은인(夫租薉君銀印)“에 근거를 두고 낙랑군 부조현 평안도 존치설이란 논문을 썼다.
《한서》 지리지, 평양 정백동 1호분 출토 〈부조예군〉 인장 등에 적혀 있는 부조(夫租)에서 와전된 것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沃沮'가 '夫租'의 오기 혹은 '夫租'에서 파생된 표기라는 설이 존재한다. (藤田亮策(1936; 1948), 이병도(1976), 임기환(1992), 張博泉(1998), 田中俊明(1999; 2009), 이현혜(2002; 2010), Gardiner(2012), 김선숙(2019), 동북아역사재단(2020), 김성한(2021), 이승호(2021), 박대재(2021), 甘懷眞(2023).)
위 학설과 달리 부조(夫租)가 요조(夭租)의 오기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池內宏(1941), 金元龍(1986), 日野開三郞(1998), 林沄(1999; 2002), 孫慰祖(2008), 윤용구(2024).)
***참고: 위의 논문이나 책자의 발표를 보면,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 속현 25개의 현(縣) 중에서 25번째 마지막으로 기재된 부조현(夫租縣)이 있다. 일본인들은 평양 정백동 1호 무덤(소위 부조예군 묘)에서 <부조예군>이라고 새겨진 인면(印面) 2.05cm 크기의 금속제 부조예군은인(夫租薉君銀印)이 발굴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실제는 낙랑군 부조현(夫租縣)이 평양 부근에 있을 수가 없고, 낙랑군 25개 현 모두가 수양제 침략경로 만리장성의 안쪽에 있었음에도 일본인들은 무덤 발굴시 중국에서 밀수해온 <부조예군>의 인장을 슬쩍 끼워넣고, <부조예군>이 이 무덤에서 발굴되어다고 위조 날조한 것이다.
이후 이 오염된 고고학 유물을 근거로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까지 18인이 2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낙랑이 평양 부근 평안도에 있었다는 낙랑군 평안도설을 논문으로 발표하고 일본인의 날조된 평양 무덤 출토품 <부조예인>을 뒷받침한 것이다.
이 <부조예군> 인장을 근거로,
”실제로 '沃沮'가 '夫租'의 오기 혹은 '夫租'에서 파생된 표기라는 설“과 ”위 학설과 달리 부조(夫租)가 요조(夭租)의 오기(誤記)“라는 견해로 모두 한(漢)나라 낙랑군 부조현의 부조(夫租)는 옥저(沃沮)라고 읽어야 하한다는 주장이다.
”부(夫)“자와 ”옥(沃)자는 전혀 다른 한자임에도 부조와 옥저가 같은 글자라고 한 자가 일본인과 중국인은 물론 외국인과 한국인을 합쳐서 18인이며, 20여 편이 발표되었다. 역사에 대한 기록은 글자 한 자도 중요한데, 전혀 다른 글자인 부(夫)자와 옥(沃)와 같은 글자라고 주장한 역사학자들이 무려 18명에 달한다.
그러나 위의 일본인이나 중국인 또는 한국인의 논문 20여 편은 정말 쓰레기만도 못한 날조 조작된 논문이다. 왜냐하면, 낙랑군 속현 옥저는 수양제의 평양을 향한 침략경로 좌12군 11전째에 옥저도(沃沮道)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양제가 좌12군 11번 째에 있는 옥저가 낙랑군 부노(夫沮)가 아니고 분명히 옥저인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뿐 아니라, 수양제의 수서(隋書)에도 분명히 기록된 사실이어서 전혀 다른 지역이다. 그럼에도 무려 18명이란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하였으며, 현재에도 정부 역사기관 마져 이를 추종하고 있다.
한편, 통감지리석 권 10에는
“진(晉)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後魏) 시기에는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通鑑地理通釋』 권 10.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과 한국 사학자 수십명이 “부조현의 ”부(夫) 자를 “옥(沃)”자로 잘못 썼다고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수서(隋書)의 기록마저 왜곡하고 있다. 그러면서 옥저 땅은 낙랑군 부조현의 땅으로 지금의 함경도와 연해주에 걸쳐서 있었다고 우기는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인이나 한국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1) 옥저가 함경도 함흥과 연해주에 걸쳐서 있을 경우 그곳에 평양 왕검성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과,
2) 평양의 낙랑왕이나 집안시에 있는 호동왕자가 함경도나 연해주 지역의 옥저까지 놀러 갔다가 기적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은 점,
3) 옥저 위의 지도상 시베리아 북부 지역 한대지방에 부여나 읍루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
4) 옥저는 수양제의 고구려 침랴당시 그의 조서에서 “고구려 오랑케가 아름다운 땅 낙랑과 현도 및 요동의 땅을 점령하고 있다”고 한 기록에서 옥저는 수양제의 침략경로 좌12군 11번째의 침략경로에 있어서 명백히 만리장성 안쪽 조백하 부근에 있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수양제의 조서는 일반 역사서와 다른 절대적 역사 기록이다.
정부기관 한국국사편찬위원회는 정부기관으로써 황당하고 날조된 옥저에 대한 기록을 하루 속히 폐기하고 바른 위치를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숭덕시 열하특별구경(熱河特別區境)의 기록에 따른 한사군의 동쪽 끝
열하특별구경(熱河特別區境)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열하특별구경(熱河特別區境)을 보면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산융지(山戎地: 조선의 땅)이었다가 힌니리 초기(漢初)에는 흉노속(匈奴屬: 흉노에 속한 지역) 한무제(武帝) 무렵에는 새경(塞境: 동쪽의 국경지역), 후한(後漢) 시에는 오환(烏丸), 선비지(鮮卑地: 선비의 땅), 동진(東晋) 때는 모용씨(慕容氏)의 지역이라 하였디.
즉, 열하 지역은 지금의 난하 상류에 열하가 있고, 이 지역이 열하특별구이다. 이 기록을 보면 한무제의 한사군 경계(새경塞境)가 지금의 열하, 즉 난하의 서쪽까지 미쳤으며, 그 동쪽은 한사군 지역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만 이 기록은 고구려가 초기에 조백하 북부지역의 현도를 점령하고 있어서 역사적으로 오환이나, 선비 또는 모용씨의 땅이 될 수 없음을 간과하고 있다.
더구나 전술한 한국국사편찬위원회 의 설명은 이 주장 역시 부조현(夫租縣)이 옥저(沃沮)이고, 이 옥저가, 압록강변 현도군(玄菟郡)에 속했다가 얼마후 지금의 무순(撫順: 푸순) 지역인 노성 방면으로 갔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보충해 주고 있다. 옥저는 함경도나 압록강변에 역사적으로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옥저는 수양제의 침략경로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에 있었다.
◉ 수양제가 한탄한 낙랑, 현도, 요동땅과 옥저는 수양제 침략 경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 조서에서
“고구려가 갈발지간(갈석과유주 발해군 지역)을 빼앗아 갔으며(崇取)....요동(遼東), 현도(玄菟), 낙랑(樂浪)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니 이제 모두 오랑케의 땅이 되었다”라고 분개하면서 한탄하였다. 이때의 낙랑과, 현도 및 요동 땅은 모두 고구려 땅임을 그의 조서에서 밝힌 것이다.
또 삼국사기의 영양왕 22년(AD 611년) 수양제는 고구려 침략 시에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출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는 좌12군의 진격로 낙랑 땅이나, 좌12군 7번째에 있는 요동땅이나, 좌12군 8번째에 있던 현도 땅은 모두 만리장성의 안쪽 조백하 부근의 땅인 것이다. 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와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에도 이들의 땅이 모두 만리장성 안쪽에 기록된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한다.
이 기록을 보면 호동왕자와 낙랑국와 최리가 만났다는 옥저가 수양제 침략경로 고구려 국경지대에 있었고, 조백하 부근으로 추정된다.
◉결론
삼국사기를 보면
호동왕자(AD32년)와 낙랑왕이 만난지 불과 17년 후인 다음 왕인 5대 모본왕은(AD49년)이 후한의 상곡, 어양, 북평(우북평), 태원을 공격하였다가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慕本王 二年, 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후한서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된 점을 볼 때 고구려는 압록강변에서 건국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상곡, 어양, 우북평, 태원 등과 가까운 요서지방에서 건국된 것이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또 고구려 초기 낙랑국왕과 호동왕자가 만난 옥저도 결코 함흥에서 간도와 연해주에 이른는 땅에 존재할 수 없고 요서지방에서 조우한 것이다.
사기 동옥저에 대한 기록에 동옥저가 개마대산의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천리에 걸쳐서 있었고, 기름진 평야지대이고, 평양 왕검성이 있는 지역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국사편찬위원회나 역사학자들은 아직까지 계속 개마대산이 백두산과 낭림산맥이고 개마대산 동쪽에 옥저가 있었다고 하여, 평양 왕검성이 백두산 동쪽에 있는 것으로 호도하고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수양제의 침략경로 좌12군 11번 째에 옥저(沃沮)가 기록된 사실을 보아 옥저는 당시 만리장성의 안쪽 고구려 국경지역이며, 수양제 군대의 진격할 목표였음을 알 수 있다. 옥저는 결코 함흥지역에서 간도 및 연해주 지방에 걸쳐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없다.
이 기록에 의거하면 호동왕자와 낙랑국왕 최리가 만난 곳이 요서 지역임이 분명한 것이다. 신라의 서울 경주가 경상북도에 있는 것이지 갑자기 평안남도 평양으로 바뀔 수 없는 것처럼, 옥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구려 서쪽 국경 지역에 있었고, 함흥이나 연해주 지방이 될 수 없다.
이상의 여러 기록을 검토해 볼 때 낙랑국은 옥저와 가까운 땅으로 수양제의 침략 경로를 검토해 볼 때 만리장성의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만리장성의 안쪽 낙랑, 현도, 요동 및 옥저의 땅은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 때 평주 숙군을 점령하였고, 20대 장수왕 때 북연이 고구려에 항복한 이후 계속 고구려 영토에 소속되어 있었다. 옛 고조선의 영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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