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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부어짐으로 얻는 유익-
시간 : 1935년 11월 19일 오후 3시
장소 천주(泉州)
성령의 역사
성경 신 · 구약에서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는 오직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첫째는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하며 둘째는 사람 안에 생명으로 거하며, 셋째는 사람 몸에 임하여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성령의 모든 역사를 포함한다.
성령의 역사는 첫째, 생명을 주며 둘째, 사람 안에 거하여 사람의 생명이 되며 셋째, 사람의 몸에 임하여 사람에게 능력을 준다. 이 세 가지가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의 모든 방면이다.
구약에는 첫째와 셋째만 있을 뿐 두 번째 즉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는 일은 없다. 신약과 구약의 다른 점이 바로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느냐에 있다.
구약에서도 생명을 얻는 일이 있었는데 다윗 같은 이는 생명을 얻은 사람이다. 구약에서 성령은 첫 번째의 역사 이외에도 성령을 붓는 일이 있다.
그러나 소수 사람의 몸에만 부어졌었는데 예를 들면, 성령이 회막을 건축하는 오홀리압과 브살렐 몸에 임해서 그들로 지혜롭고 공교하게 회막을 건축케 했다(출 31:1~11).
모세의 몸에 영이 임했으며 또한 모세는 영을 70장로에게 나누어 주었다(민 11:17,25). 그밖의 많은 선지자들의 몸에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 하나님의 영이 선지자들의 몸에 임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엘리사에게 많은 제자가 있었던 것처럼 많은 사람이 선지자의 제자가 되었으나 그들의 몸에는 하나님의 영이 강림하지 않았다.
선지자를 헤아려 볼 때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몸에 임한 사람은 매우 적다. 사사기는 사람이 영을 얻은 일을 기록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했으며 그 인수는 매우 적었다(삿 3:10, 6:34, 11:29, 13:25 참조).
구약에서 사사기 6장 34절 한 곳에서만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한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예외이다. 사실 이 구절의 성경 원문은 결코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한다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 사사 기드온을 입었다는 말이다.
기드온은 옷과 같고 성령은 안에서 그를 입은 것이다. 그 외에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신약에 이르러서 주님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에도 성령이 사람 몸에 임했는데 마리아, 사가랴, 침례자 요한과 주님 자신이다. 그러나 그때도 성령이 아직 사람 안에 거하지 않았고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았었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령의 새로운 역사가 있다. 17절의 마지막을 주의해 보면 '계시겠음이라' 이지 '이미 거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일인데, 사람 안에 '거하는' 것은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첫 번째와 세 번째 역사만 있는 구약과 같지 않다. 여기서 성령은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데 그분은 사람 몸에 강림하거나 사람에게 생명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사람 안에 거하신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두 가지 큰 약속을 주셨는데, 첫 번째 약속은 죽기 전에 주셨고, 두 번째 약속은 승천이 가까워졌을 때 주셨다. 첫 번째 약속은 성령이 사람의 마음 안에 거하리라는 약속이다(요 14:17).
두 번째 약속은 성령이 사람의 몸에 부어지리라는 것이었다(행 1:8). 이렇게 성령의 역사에는 세 종류가 있었다.
당신이 중국인이기 때문에 이 일의 귀함을 알 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유대인이었다면 성경 안에서 '안에 거하다' 라는 몇 글자가 매우 기이함을 알았을 것이다. 아브라함, 야곱, 이삭, 다윗, 솔로몬 예레미아 등은 다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지 않았다.
구약에서는 다만 여호와의 영이 내 몸에 있다고 말하고 창세기 6장에서 '안에'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나의 영이 영원히 그와 다투지 아니하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6장에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한다는 것이 아니며 성령이 사람과 다투어 그로 괴롭게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구약에서 성령을 말할 때 다 '몸에'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신약에서 성령을 말할 때는 '안에' 라는 단어를 말한다. 성령이 사람의 몸 안에 거한다는 것은 너무나 기이한 약속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기묘한 일이다. 이것은 주님의 몸에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우리 믿는이의 몸에서는 영이 육신이 된 것인데 이것은 더 기묘한 것이다.
성령이 언제부터 사람 안에 거하기 시작했는가?
요한복음 14장 17절에서 주님은 성령이 제자들 안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 후의 일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성령이 임했고 제자들은 주님의 호흡을 받아들였다.
성령은 곧 주님의 생명의 호흡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의 육신을 지으신 후에 생명의 호흡을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아담이 산 혼이 되었다(창 2:7).
오늘날 우리도 이같이 주님이 성령의 생명의 호흡을 우리 안에 불어넣으셨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 안에 이러한 호흡을 불어넣지 않으셨다면 사람은 죽은 것이고, 만일 주님이 교회 안에 이러한 호흡을 불어넣지 않으신다면 교회도 죽은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의 두 번째 방면이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일하시는 역사(歷史)를 알았는데 이렇게 해야 우리는 비로소 오늘날의 체험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성령이 제자들 안에 내주하겠다는 약속은 주님이 부활하신 그날 이루어졌다. 주님이 부활하고 40일 이후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고 주님은 오순절에 이르러서 이 약속을 이루셨다.
이 두 가지 약속들을 비교할 때 어느 것이 좋은가? 구약에서 성령의 부어짐은 특별한 권리가 있는 제사장, 선지자, 사사등이나 온 이스라엘 나라에서 단 한 사람이나 혹은 왕이나 특별한 인물이라야 이러한 복을 얻을 수 있었다. 기타 모든 사람은 다 그에게 가서 말을 들어야 했다.
구약의 역사를 볼 때 이러한 사람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에 한 명 정도였다. 이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약에서 모든 사람이 다 이러한 체험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가져야 한다.
이 약속은 매우 특별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는 다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은혜로 특별히 대하시는 것이다. 얼마나 기쁜가! 우리는 다 우리 몸에 성령의 강림하심을 얻을 수 있다.
주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길 예루살렘성에서 이 약속을 기다리라고 하셨다(눅 24:49). 그때 제자들은 이미 내주하는 생명이 있었고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서 기도하며 기다렸다.
10일 후에 오순절이 이르렀고 그들은 다 성령이 충만했다(행 2:4). 사도행전 2장을 읽는 사람은 그것이 성령이 사람의 몸에서 역사하는 장(章)임을 다 아는데 이것은 외적인 것이다.
누가복음도 성령이 사람의 몸 밖에서 역사하는 것을 말하지만, 성령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두 노선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첫째는 사람 안에서의 역사이고, 둘째는 사람 밖에서의 역사이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부어짐의 차이
사람 안에 있는 성령은 생명을 위한 것이고, 사람 밖에 있는 성령은 능력을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지 역사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면 구약과 신약에 있는 성령의 역사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성령이 사람 안에 내주하리라는 약속은 신약의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기 전에 하신 약속이다.
성령의 이 방면의 역사는 주님의 죽으심과 관계가 있으며 이 약속은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이루어졌다.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며 역사한 결과는 믿는 이의 생명을 위한 것이며, 또한 믿는이들의 생활을 위한 것으로 성령의 열매인 성결, 공의, 인내, 희락 등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이 사람의 몸에 임하리라는 약속은 아버지가 구약에서 한 약속으로 주님이 승천하기 전에 재삼 이 약속을 견고히 하셨다.
성령의 이 방면의 역사는 주님의 승천과 관계가 있으며 이 약속은 주님이 승천하여 높이 들려지셨을 때 이루어졌다.
성령이 사람의 몸에 임하여 역사한 결과는 믿는이의 능력을 위한 것이며 또한 믿는 이의 간증을 위한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능력 삼아 성령의 은사를 산출하고 주님을 위해 힘차게 일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신 ·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 사람 안에서 행하신 역사와 사람 밖에서 행하신 역사를 분명히 구분해야만 한다.
그래야 성경의 많은 곳에서 언급한 성령의 역사가 충돌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많은 충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거듭난 모든 사람은 성령이 안에 거하며 또한 믿는 이라면 누구나 다 성령의 부어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한 면에서는 '반드시' 라고 하고 한 면에서는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 성령이 '반드시' 이 사람 안에 거하며, 다른 한 면에서 그는 성령의 부어짐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이 만일 이러한 말의 뜻을 분명히 구별한다면 얼마나 기묘한 일이 발생하는지를 알 것이다.
내가 한 가지 예를 들겠다. 어느 날 사마리아 사람이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는데 성경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부어짐이 모두 그들에게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8장의 기록은 한 무리의 사람이 비록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고 성령이 아직 그들의 몸에 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그들의 몸에 안수하여 그들로 성령을 받게 했다.
당신이 만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강림하심의 차이를 알 지 못한다면 사마리아 사람이 믿고 침례를 받았는데 성령을 받지 못한 일에 대하여 매우 해석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신은 로마서 8장, 요한일서 4장, 고린도전서 6장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모를 것이다. 이곳에는 일단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 성령이 그의 안에 거한다고 말한다.
사실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사람 안에 거하는 성령이 부족한 것이 결코 아니라 사람의 몸에 임하는 성령이 부족했던 것이다.
성령의 사람에 대한 두 방면의 역사
사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생명과 생활을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한다. 사람 밖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간증과 일을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은사를 준다.
만일 어떤 사람 안에 성령이 충만하고 밖에도 성령의 임하심이 있다면, 그는 큰 능력으로 주님을 위해 일할 것이다. 만일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단지 밖에 성령의 부어짐만을 얻었다며,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는데 이는 교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이김의 관문을 통과한 적이 없다면 비록 외적인 성령의 부어짐을 얻었다 할지라도 몇 개월이나 몇 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이 우리 몸에서 행하시는 이 두 가지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하는 것임
성령은 자신을 위해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하는 것이요(요 15:16). 어떤 사람은, 당신이 십자가의 구속을 볼 때 성령이 당신을 도와 믿게 해 달라고 구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당신을 이끌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말할 때, 결코 성령 자신을 말하지 않고 성령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하는가를 말한다.
요 몇일 동안 우리는 이기는 생명을 말하고 성령을 말하지 않았으며 주님이 이미 부활하여 우리의 생명이 되셨음을 말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와 직접 연합되게 하는 것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보면 성령의 역사를 얻고, 주님의 죽음을 보면 성령의 거듭남을 얻으며, 사람이 주님의 부활을 보면 성령이 생명된 것을 얻는다. 오늘 승천한 그리스도 곧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본 사람은 성령의 부어짐을 얻는다.
성령의 부어짐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한 면에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로 이기게 하시며, 또 한 면에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임을 증거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갈 5:22~23), 이 열매는 다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것은 조그마한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예를 들면 조금의 사랑, 조금의 희락, 조금의 인내 등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전체를 당신에게 주신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열매는 오직 하나로 원문에서 '열매'는 단수이다.
이는 마치 감자 아홉 알이 한 열매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만일 성령의 열매가 있다면 이 모두가 다 있는 것이다. 결코 사랑은 있는데 희락이 없고 희락은 있는데 인내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도매를 하시며 소매를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당신에게 주신다. 만일 당신에게 사랑이 있는데 희락이 없다면, 그것이 당신 자신의 열매이며 성령의 열매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경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까지 세 개의 장이 특별히 성령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은 성령의 부어짐을 말하고 외적인 성령을 말한다. 13장은 사랑을 말하고 안에 있는 성령을 말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갈라디아서 5장에 있는 성령의 열매를 대신함을 통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 안에 있는 성령의 일을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이 맺는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만일 사랑이 없다면 희락, 화평, 인내 등은 아무 것도 아니다. 바울은 사랑을 추구하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사랑이 있으면 이상에서 말한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안의 성령이 밖의 성령보다 더욱 중요함
밖의 성령과 안의 성령은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성령의 부어짐과 성령의 내주하심은 이기는 생명 만큼 중요하지 않으며, 또한 성령의 부어짐은 성령의 내주하심이나 이기는 생명보다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은혜로 대하셔서 사역자로 삼으신 것은 이기는 생명을 위한 것이지 결코 성령의 부어짐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도 성령의 부어짐에 관한 일을 말하였다.
안의 성령에 외적인 성령의 부어짐이 더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밖의 성령의 부어짐이 있으나 안의 성령이 줄어드는 것도 놀라운 일로서 양 극단의 놀라운 일이다.
안밖의 성령이 다 있는 것이 최상이다. 안에 성령이 있으면 밖의 성령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안에 성령이 없다면 잠시 밖의 성령의 일을 한쪽에 제쳐두는 것도 무방하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나서 기름으로 덧발랐다(레 14:14~17).
반드시 먼저 피를 바르고 나중에 그 위에 기름을 발랐다. 이 뜻은 반드시 먼저 십자가의 역사가 당신의 귀와 손과 발에 행하여진 후에야 당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길을 가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당신의 자아를 제하는 것이며 성령은 당신을 대신해 당신의 귀와 손과 발이 된다는 뜻이다.
먼저 승리의 생활이 있은 후에 성령의 부어지는 일이 있는 것이다. 주님의 피의 바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을 표시하며, 다른 면에서 주님의 생명은 곧 기름의 역사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름이 머리에 부어지기를 바라지만, 만일 피의 역사가 없이 기름이 당신 머리에 부어진다면 당신은 교만해질 것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밖에 성령이 있었으나 안에 성령의 충만이 없는 육체에 속한 믿는 이들이었다.
밖의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사람은 많지만 안에 충만한 생명을 갖은 사람은 적다. 이러한 사람은 생명의 변화가 적으며 생활이 모호하여 세상 사람과 분별이 없다.
밖의 성령의 부어짐과 내적인 생명이 서로 관계가 발생하지 않는 한 은사가 많은 사람도 안에 승리의 이기는 생명이 없을 가능성이 있다.
사람의 생명은 깨끗하지 못하며 밖의 성령의 부어짐으로는 결코 당신 안을 정결케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안에 생명이 있고 밖에 성령의 부어짐이 더해진다면 당신은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신약에 있는 모든 교회들 가운데 고린도 교회보다 더 나쁜 교회는 없었다. 비록 이러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이 내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해서 그들의 성령의 부어짐에 대한 체험을 부정하지 않았다.
바울은 집회 중에 성령의 부어짐에 대해서도 좋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외적인 은사가 혼란스럽기 때문에 안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록 그들의 안배가 좋지 않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상황이 악령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고린도인들이 어떻게 안배해야 하는가를 알려 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반드시 동일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만일 형제나 자매에게 비정상적인 표현이 있다면 안배나 시험이 필요하며, 태도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다른 사람이 내 방에 와서 옷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 나의 옷장이 옷장이 아니고 옷은 옷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는 단지 옷을 가지런히 정리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흐트러져 있는 옷은 잘 정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것을 잘 안배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그는 방언을 말하는 질서를 언급할 때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전 14:28).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는 것도 한 사람 한 사람 해야 한다. 말하려는 선지자가 너무 많으면 혼란스럽기 때문에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두세 명이면 족하다고 바울은 말한다.
방언을 말하는 것도 두세 사람인데 이 숫자를 초과하면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29절). 고린도전서 14장은 안배를 말하며 밖의 성령이 부어짐 이후에 어떻게 안배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오늘 이후로 우리는 반드시 고린도전서 14장을 주의하여, 사람들에 의해 어떤 지방의 교회라고 불리는 모든 사람은 성령이 부어짐의 실행면의 일을 주의해야만 한다.
우리는 한 면에서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다른 한 면에서 영적인 은사를 구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균형 잡힌 생명을 가진다.
성령의 부어짐의 유익
성령의 부어짐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안의 성령이 더욱 중요한데 왜 밖의 성령의 부어짐이 필요한가?
우리는 이러한 인식 안에 위격의 성령이 있으며, 또한 거룩한 생활이 있는 사람이 만일 성령의 부어짐을 얻으면 안의 거룩함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좋은 것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려고 하지만 공급할 수는 없다. 비록 다른 사람이 그에게 탄복하고 존경하지만 그에게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은 성령의 부어짐이 부족한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부어짐을 얻는 것이 어떤 실제적인 유익이 있는가를 보기로 하자.
1.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
성령의 부어짐을 얻으면 먼저 당신에게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게 되고 당신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안으로 전달해 줄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얻은 것이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능력이 없는데, 사람이 일단 성령의 부어짐을 얻으면 안에 있는 것을 나누어 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밖에 있는 힘이 그를 대신해서 안에 있는 것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마치 발전소와 같다. 발전소 안에는 많은 빛이 있다. 반면 온 도시는 어둡다. 이것이 반드시 전선으로 발전소와 시내를 연결해야 비로소 빛을 도시에 전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발전소 안에 아무 것도 없다면 전혀 쓸모가 없지만, 발전소 안에 무엇이 있다 해도 전선이 없으면 쓸모 없는 것이다. 전선을 통해 흘려보내는 것이 곧 성령의 부어짐의 용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전선은 있지만 저녁에 오히려 촛불을 켜야 하고, 안에 아무 것도 없는데 오히려 사람에게 흘려보내려고 하는 것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안밖으로 다 있어야만 한다. 당신 자신이 참으로 이김의 관문을 통과하고, 안에 그 무엇이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능력이 있는 성령의 부어짐도 구할 수 있다.
2. 담대함이 있음
어떤 사람들은 속에는 좋으나 담력이 없다. 그들이 간증할 때 반드시 몇 번 결심을 해야 비로소 일어나서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은 있지만 전도지를 나누어 주라고 하면 두려워 한다. 오늘 아직 이 자리에 성령의 부어짐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는 성령의 부어짐을 원하느냐 혹은 성령의 부어짐을 얻는 것이 두려운가 두렵지 않은가를 묻지 않고 나는 당신이 이미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형제들과 같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만 묻겠다.
당신은 아마도 무엇이 있지만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두려워한다.
나는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행하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첫 번째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대대적으로 간증을 해야 하는데 그에게 담대함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미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형제자매는 두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한다. 다른 부류는 두려워하지 않고 체면을 주의하지 않는다.
내가 성령의 부어짐을 얻기 전에 한번은 복음 전하는 친구를 1~2리 정도 떨어져서 따라가게 되었다. 나는 감히 입을 열어 간증하지 못했다. 기차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할 힘은 있었으나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것은 반드시 많은 힘을 내는 것이 필요했다. 내가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후에는 옷을 잘 입었나 못 입었나에 상관하지 않고 아주 담대했는데, 이것은 얼굴이 두꺼울 뿐만 아니라 체면을 주의하지 않는 것이었다.
3. 자의식이 없음
자의식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나쁜 것이다. 자의식이 있는 사람은 입은 옷이 좋고 나쁨이나 다른 사람의 반응이 어떤가를 주의한다.
다른 사람이 그를 식사에 초대하면 그는 해방되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으며 새로운 사람과 말을 하지 못하고 반드시 많은 것을 준비해야 말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계속 자기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또한 혼자 방 안에서는 기도할 수 있지만 대중이 있는 곳에서는 방에서 했던 그런 기도를 할 수 없으며, 어조와 말과 태도를 바꾸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이상히 여길가봐 두려워한다.
이러한 것은 다 자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영이 있으나 혼에 둘러싸여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언젠가 한 형제 집의 응접실에서 집회가 있었는데 나중에 성령이 부어져서 모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이러한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영 안의 해방이다. 어떤 때 집회 가운데서 사람들이 너무 신중한데 일단 신중해지면 감히 말할 사람이 없다.
이반 로버츠(Evan roberts)는 일생에 가장 많은 영혼을 구원시켰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그 한 사람만이 자의식이 없었다고 간증한다. 그는 웃고 싶으면 웃었고 다른 사람을 보려고 하면 즉시 보았다. 자의식이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자의식에서 벗어나고 오직 성령의 부어짐만 있어야 한다. 오직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사람만이 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5. 일하는 능력이 있음
성령의 부어짐을 얻으면 영적인 은사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인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부어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일하는 능력이 없고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사람은 큰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 이것은 너무나 큰 차이 이다. 우리가 힘 있게 일하려면 성령의 부어짐을 반드시 얻어야 한다.
질문과 답변
질문 : 성령이 사람의 몸에 임하는 것을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도 사람이 볼 수 있습니까?
답변 : 당신이 주님을 믿을 때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한다. 이 일은 당신 자신은 알지만 다른 사람은 모른다.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므로 사람이 볼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이 사람의 몸에 임하는 일은 사람이 볼 수 있다.
질문 : 사도행전 8장에는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한다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변 : 없다. 단지 성령이 사람의 몸에 임한 것만 말했다.
질문 : 사도행전 19장은 에베소서 성도 12명이 요한의 침례를 받았으나 일찍이 성령받은 것을 듣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거기에 도착하여 그들에게 믿었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멸망받게 됩니까?
답변 : 신학생은 아마도 "멸망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령에 대해 들어 보지 못했고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잃어버린 바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멸망받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아마 당신은 성령이 없는 사람이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미 믿음이 있었다. 바울은 단지 그들이 받은 침례가 요한의 회개의 침례이므로 옳지 않음을 지적하고 그들에게 그 이후에 오는 분인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한 것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다. 바울은 결코 그들에게 믿음의 문제를 말하지 않았는데,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믿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에베소 사람은 성령의 부어짐이 부족했을 뿐 로마서 8장의 내주하는 영이 부족한 것이 결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은 이 12명을 제자로 여긴다. 당시에 믿는 이는 제자였고 제자는 믿는 이였으며 곧 구원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강림하심이 없었지만 그들 안에 성령의 거하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십여 년 전에 일단 믿었다면 안에 성령이 거한다. 나중에 예언과 방언 등이 있음을 알게 되고 성령의 강림함도 알게 된다.
그러나 방언 예언 등으로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을 증거로 삼을 필요는 없다. 당신은 성령이 사람의 몸에 임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 성령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이 주님을 믿고 영접할 때 성령이 사람 안에 있게 된다.
평양 형제의 질문 : 성령의 안팎의 역사를 구별하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답변 : 안에 성령이 있고 밖에 성령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들을 쉽게 분별해 낼 수 없지만, 밖에 성령이 있고 안에 성령이 부족한 사람은 사람이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형제가 나와 악수를 한 후에 말했다.
"당신은 몇 사람을 구원시켰습니까? 나는 00 지방에서 몇 명의 사람을 구원시켰습니다. 나는 사람을 구원시킬 수 있으므로 당신은 나에게 어떠한 권면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말인데, 이러한 말은 밖의 성령의 부어짐은 있지만 안에 성령이 적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내적 역사를 성령의 밖의 역사보다 중시해야 한다.
부록 : 거듭남과 충만의 차이
1. 거듭남은 구원의 문제를 위한 것이며, 충만은 승리의 이김을 위한 것이다.
2. 거듭남은 생명의 문제를 위한 것이며, 충만은 생활의 문제를 위한 것이다.
3. 거듭날 때 의롭다 함을 얻고 충만할 때 거룩함을 얻는다.
4. 거듭남은 성령이 옛 아담의 생명 이외의 다른 생명을 주는 것이며, 충만은 성령이 어떤 사람을 충만케 하여 이미 얻은 새로운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5. 거듭남은 성령이 십자가의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이룬 역사이고, 충만은 성령이 사람의 영을 충만케 하여 십자가의 모든 의미를 이루는 것이다.
6. 거듭남은 생명의 시작이고, 충만은 생명의 성숙이다.
-W.N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