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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이 왜 현충일인가?
103년전 6월 5일 봉오동전투
오늘은 6월 5일.
지금으로부터 103년전 만주 봉오동에서는
우리 독립군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일본군의 진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6월 6일 새벽 5시 20분.
6월 6일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서 대승한 날.
저도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현충일은 왜 6월 6일인지 아십니까?
기억하기 좋으라고??
6월달이 호국보훈의달이기 때문에???
뭔가 의미있는일..
봉오동전투때 독립군이 승리했기 때문일까..?
현충일은 1956년 4월16일 이승만 이기붕이 정함.
이승만 이기붕이 봉오동전투를 기념했을리도 없고 기록도 없다.
56년 1월달에 권총 암살당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나라 군인들을 용공조작사건으로 모함에서 총살시킨 장본인 김창룡
숙군이라고 하는데 대한민국 내에 있는 공산당 간첩을 색출하라는 군대내 자체 정화작업.
군대내 서로 감시. 김창룡에게 걸리면 싹 죽음.
새벽의 방문으로 유명한 1938년~1952년까지 14년간 소련 스탈린 치하의 KGB소련 정보국 산하의 라브렌티 베리아라고 하는 정보국장.
새벽에 문을 두드리면 무조건 죽는다.
700만명 죽임 당함.
스탈린의 악명높은 대 숙청작전
이것을 이승만이 본딴 것.
법무특보 장경근, 숙국작업의 행동대장 김창용
장경근과 김창용이 독립운동가들을 간첩으로 몰음.
초창기에 노덕술도 가세.
박마리아가 조정하고 이 셋이 사냥개가 되어
반민족행위자 특별처벌위원회를 없앰.
1949년6월6일 반민특위가 없어진 날.
우리나라의 어떤 역사 선생님도 이 사실을 교과시간에 설명해주지 않음.
이거를 우리나라의 어떤 역사 선생님들도 설명을 안 해 주세요
이 김창룡 이라는 사람이 죽음으로써 그날 새벽에 이승만이 잠옷 바람에 슬리퍼 차림으로 뛰어 갑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나 몽양 여운형선생 돌아가셨을 때도 한 달이 넘도록 방문 안했던 게 이승만!
김창룡을 보고 이승만이 엉엉울며
김창용은 나 대신에 죽었다.
공산좌빨의 획책에 의해 이 사람이 죽었으니 나는 이 사람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겠다.
김창용을 대전 현충원에 묻음.
국군묘지였던 곳을 김창용때문에 현충원으로 바꿈.
반공산주의(반좌파척결)을 했다는 이유로 30대 중반에 죽었는데 중장으로 죽음.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은 극우인사들이 현충원에 함께 묻혀있음.
진짜에요? 믿을수가 없어요.
기록에는 없는데 누가봐도 그런 이유에요.
그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1010-1018년에 고려 현종이 제 2차 대거란전쟁
제 3차 대거란전쟁(강감찬장군). 1018년 6월6일 합동제사를 올렸다 이기붕이 얘기함.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
반민특위 분쇄해버린 자들이 자기네들의 잘못을 덮기 위하여 다른것으로 대체한것이 아닌가.. 강한 의심을 거둘수가 없습니다.
김창룡묘비석 백성들이 파서 버림.
지금 벌레들이 꽉찬 곳에 비석에 처박혀있음.
묘비석에 보면 민족정기를 제대로 세웠고 공산당을 척결하고 오만말 다 써놓음
서울대 국사학과 설립했던 식민사학자 두계 이병도라는 사람이 씀.
(두계 이병도 7대문교부장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됨)
우리나라에서 가장 악날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하고 스라소호키치의 수제자.
이러한 식민사학자의 눈에는 김창용이 영웅.
김구선생이 지금 국립묘지에 있습니까?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묘가 어디있습니까?
여운형선생묘 도봉구 우이동에 있다.
첫단추가 잘못되었다.
이완용을 칼로 찔러 죽음 직전까지 몰고갔던 이재명이란 사람이 있음. 진안군에 묘 전혀 관리안함.
진안군에가서 서울의소리 초심님이 호통을 침.
진안군수가 도망다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조작했던사람들의 묘는 이따위로 관리하고..
김창룡이 잡으로 다닌 사람을 하나 소개하겠다.
몽양 여운형, 센터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사람인데 자발적으로 가운데 자리를 양보.
검거를 피하기 위해서 이름을 8차례나 바꿨기때문에
보훈처에서 계속 확인중.
최운산 장군 친손녀 최성주여사님이 책을 냄.
이분이 배기성님을 찾아오심. 이때까지 배기성님도 최운산장군의 존재를 몰랐음.
유튜브에 이 책을 가지고 강의했다.
봉오동의기억.
1920년 6월 6일날 봉오동에서 전투
10월 21~26일 사이 어랑촌에서부터 청산리까지 김좌진장군이 이끔.
최운산 장군의 아버지는 고종황제가 임명한 간도 담당관. 간도가 원래 우리땅이라는 반증
청산리 부터 십리평까지 하나의 간도 땅. 거기 총독역할로 다스리고있었음.
최우삼이라는 최운산의 아버지가 다스리던 지점
최운산 장군 및 최씨 3형제가 만주의 저 땅을 받아서 봉오동을 6년동안 하나의 군사기지로 만들었음
우리 독립군은 오합지졸이 아니라 잘 정비된 군사조직이었음.
조직이 다 준비됬는데 일본군하고 싸울 만한 무기가 없어 고민하고 있음.
러시아에서 혁명 일어남
러시아 왕정이 무너지자 적러시아와 왕정을 중심으로 하는 백러시아가 싸움.
왕당파 백러시아를 지지하는 나라들이 많았음.
동유럽의 체코가 1만 여명의 용병을 보냄 러시아 황제 정치 지지함.
백군대장 콜챠크 체포, 대장을 넘겨주는 대가로 체코군대가 블라디보스톡까지 무사히 갈수있게 보장해달라 요구함.
블라디보스톡에서 무장해제를 해야하기 때문에 가져온 총 대포를 연합국중의 하나는 일본군에 넘기려 함.
최운산이 일본인이 얼마를 달라하던 두배를 줄테니 나한테 팔아라.
그리하여 모신나강이라는 소총. 기관총, 수류탄, 대포, 군복 등을 팔게 된다.
협상하러 간 사람이 몽양 여운형 선생
뒤에서 돈을 지원해준 사람이 최운산 잔군
최운산장군은 만주와 연해주를 통틀어 최고의 부자, 재벌이었다.
연해주의 최재형 장군 두사람이 주축.
친일파들이 일본을 다녀오면 생각이 달라진다 두사람을 꼬득임. 두사람이 일본을 같이 다녀옴
이들이 일본을 다녀온 후에 난 독립운동을 해야될 것 같아, 일본처럼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 결심
일본에게 김옥균과 같은 접대를 받았지만 두사람은 다른 결과를 가져옴.
1917년 5만원이 현재가치로 약 150억원, 봉오동에 다 지원.
최재형은 일본군에 학살당했지만 그 돈으로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들 안중근, 독립운동가 이강, 철기 이범석,
이범석의 아내 김마리아 여사 등을 키워냈다.
최운산, 최재형 이 두분이야말로 우리나라 최고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최재형은 노비 출신. 연해주로 넘어가 평생 바쳐 번 돈을 독립운동에 지원.
최운산장군도 1932년도에 자기 재산을 다 쏟아부은 결과 33년부터 빈털터리가 되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아들을 시켜 계속 후원하게 만들다가 끝내 광복을 보지못하고 45년 4월에 고문 휴우증을 이기지 못하고 평양에서 돌아가심.
유골함을 가지고 최씨 가문이 부산항으로 피난감.
1962년 박정희가 건국훈장 남발할 때, 독립군하셨던 분들 대통령훈장을 주겠다고 최봉우님을 오라 함.
갔더니 훈장받으려면 돈봉투도 가져오라 함.
열받은 최봉우 선생님이 주사를 폭행. 결국 독립운동의 공훈자로 인정받지 못함.
살아서는 김창룡같은 사람한테 온갖 핍박을 당하고 돌아가셔서도 보훈처 일개 주사한테 그렇게 당하고
이제까지 이름이 8개라서 인정을 못한다 하고
이래서 최운형 선생님이 일반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음.
봉오동 전투는 우발적 전투가 아니다. 독립군이 그쪽으로 끌어들인것.
이런 분들의 희생으로 잘 조직된 자랑스러운 우리 독립운동군이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총 사령관,
최운산 장군의 친형 최진동 장군.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
최운산 총 참모장 모든 물류와 병참을 담당.
지금 사진한장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최진동장군 큰형 그 다운 최운산 장군
막내 동생이 하나 더 있음 최치흥장군님 전련병의 역할을 함. 말도 잘타고 달리기를 잘했다. 연락병.
신출귀몰하게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연락함,
이 세 사람을 다 잡으러다닌 사람이 특무대장 김창룡.
김창룡이 만주에다가 이 사람들을 몽땅 빨갱이로 등록하여 아직까지 우리나라 보훈처에서도 말도 안되는 소리만하며 인정안하고 악인 김창룡은 국립묘지에 묻혀있고 독립운동가 최운산장군은 어디 묻혀있는지도 모름.
최진동장군, 최운산장군, 최치흥 장군. 민족의 영웅이다.
1956년 4월 16일 국무회의 이승만 이기붕 6월6일 현충일로 정함
1956년 1월 권총 암살인물 : 특무대장 김창용(이기붕 다음가는 악인) -이승만의 엄지손가락 최측근
-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던 70~80%가 독립운동가
- 너무 많은 군인들을 용공조작 총살 사형 :1938 ~ 1952(14년)
- 소련 스탈린 KGB : 새벽의 방문 베뢰아 / 700만명 숙청
◈ 김창용 반민특위 해체 : 1949년 6월 6일(반민특위 분쇄의 날 - 새벽5시~7시)
※ 이승망 김창용 사망시 엉엉 울면서 공산좌파 빨겡이들의 획책에의해서 이 사람은 나 대신에 죽었다.
이 사람을 영원토록 기억하게 하겠다.
- 1938년부터 일본헌병대 소좌로서 만주 독립운동가를 때려 잡기 위해 일본군에 충성했던 김창용이를
대전 현충원에 묻었다(국립 현충원을 만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