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李相和 1901~1843)
하오명
名 相和, 號 尙火 白啞, 1901년 陰 4월 5일 辛丑生, 當世詩名高, 世稱新詩檀 개척자, 白湖同人, 追慕碑在 花園面 本里松亭, 詩碑在 달성공원, 동상 두류공원, 1943년 陰 2월 21일 卒.
1919년 3․1운동 大邱高普 주모(白基萬․李相和), 15세 서울 중앙학교 야구선수, 금강산 순례(나의 침실로 작품), 1933년 일본유학 외국어학교 불어과 졸업, 귀국 후 교남학교(현 대륜중학교 전신) 교편,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긁어야 한다”면서 교내 권투부 설치, 1926년 (開闢誌)에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왜경 숱한 고문과 옥고 여독으로 광복을 못 본체 1943년 43세를 일기로 통한을 안은 채 長逝하다.
○ 선생의 가훈과 小南 一雨公의 가훈을 비교해 보면 ‘우현서류’정신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一雨는 相和의 伯父
小南公遺戒(譯文)
내가 일찍이 들으니 歐美 사람은 나이가 30이 되면 으레 遺書를 남겨둔다는데, 나의 명은 실로 심상치 아니하며 하물며 나이 70에 가까우므로 기간을 회고한즉, 너희들 자질을 기르고 교육을 시키니 재력을 저축하지 못하여 先府君의 유지를 받들 겨를이 없어 이는 깊이 한이 되므로, 내 평생 베 짜는 經(날)을 삼고 베짜는 緯(씨)를 삼아 誠信과 勤儉으로 마음은 항상 愛物하는 데 두되, 뜻은 세인(世人)을 널리 구제하는 데 두며, 행동은 스스로 상시 조심하고 지내 왔다.
그래서 남의 노력에 의존하여 안락한 생활을 하며 나의 힘으로써 사회에 보답함이 없는 즉 이는 공공윤리에 죄되는 바 실로 크다 하겠다.
그리고 겨우 족친간의 일에 이르니 언제나 부족한 것 같아 생각하나 지금은 또한 늙었으니, 너희들이 각자 勤儉과 誠信으로써 보존하고 수호하면 아쉬움은 거의 면하지 않겠는가. 그 외에 선인의 遺志에 대해서는 너희를 여러 자손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노라.
一.방심하고 타락한 마음을 먹지 말며 근검과 근신을 표본삼아 선인의 덕업을 오욕하게 하지 말 것.
一.자손으로 하여금 技藝를 가르쳐 각자 힘써 먹고 살도록 할 것.
一.온당하게 재력을 저축하여 재단 법인을 설립하여 자작농 같은 것을 설정하여 사회사업 등을 정리할 것.
一.상사에 관한 凡百事는 故 韓圭稷의 言說에 準則하여 행사할 것.
一.通訃書는 행하지 말고 다만 친척에게만 口報할 것.
一.不法禮俗은 喪中喪後를 막론하고 절대 금지 할 것.
一.발인시에 영결식장은 중간에 閒地(빈터)를 택하여 하되, 일반 빈객은 이 곳에 사절하고 다만 가친들 幾人만 매장에 감시할 것.
一.물론 어떤 제축라도 의물은 청수 한 그릇, 시과는 세 가지 껍질째로 쓰고, 魚肉과 乾脯 두 그릇 써서 모두 합하여 6種만 쓰되 그 외는 절대로 쓰지 말 것.
一.현재 세상들이 거개가 노고 중에 빠져 있은 즉, 나 홀로 오락을 하면 신인이 함께 분노함을 면하기 어려우니 까닭 없이 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일이 없도록할 것.
이상화 시인의 일생
이상화(李相和, 1901~1943)는 대구 중구 서문로 2가 12번지에서 아버지 이시우(李時雨) 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인 이일우(李一雨)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일우는 비록 지주이지만 소작료를 적게 받았으며, 우현서류(友弦書樓)를 열어 가난한 선비들을 아껴서 학문연구를 할 수 있도록 많은 후원을 했다. 또한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쓰는 등 대구 지역의 명망 있는 지사였다.
이러한 백부의 영향을 받고 자란 그는 15세에 서울 중앙학교로 전학 하여 계동(桂洞) 전진한(錢鎭漢)의 집에 하숙했다. 1918년 중하교 3학년이 끝나갈 무렵에 갑자기 강원도 여행을 떠나게 한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의 여행에서 나온 작품이 그의 처녀작이며 대표작인 ‘나의 침실로’인데 이는 달성공원의 시비에 새겨져 있다. 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게로
이듬해 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백기만(白基萬)등과 함께 3월 6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그 후 그는 검거를 피해 서울로 가게 된다. 서울에 간 그는 계성학교 출신인 박태원(朴泰元)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여향을 많이 받았다. 그해 10월 공주태생인 서온순(徐溫淳)과 결혼했으나 그리 행복한 생활을 보내지는 못하고 다시 상경하였다. 그곳에서는 그는 <백조(白潮)>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나의 침실로’를 창간호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의 생활은 무질제해져 갔다. 일본으로 건너가 프랑스 유학을 꿈꾸던 그는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듬해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서울 가회동에 거처를 정하게 되엇다. 1826년 <개벽> 6월호에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1927년 대구로 돌아온 그는 의열단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의해 구속당하기도 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28년 순종의 대구방문기념 은사관(恩賜館)인 민단소(民團所)내의 노동야학원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1935년 조선일보 대구총국을 경영하기도하고 이듬해는 교남학교(교남학교)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40년 학교를 그만둘 때까지 권투부를 창설하기도하고 교가를 짓기도 하는 등 왕성하게 후진양성에 매진하였다. 그 후 그는 陸史 이원록(李源綠)등 향토시인들과 자주 아울리며 많은 일들을 하다가 1943년 3월 21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에 있다.
선생이 사랑한 대구
이상화 선생의 詩中 ‘대구행진곡’ ‘지반정경(池畔靜景)’ ‘대륜교가’등에서 그의 애향심을 뜨겁게 느낄 수 있다. 계산동 고택 사랑방을 ‘談交莊’이라 정하고 대구 문화인 우국지사들과의 교우를 꾸준히 이어갔다. 시당국이나 문화계인사들이 고택보존을 추진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대구행진곡
앞으로 비슬산 뒤로는 팔공산
그 복판을 흐르는 금호강 몰아
쓴 눈물 긴 한숨이 얼마나 샜기에
밤에는 밤 낮에는 낮 이리도 우나
반나마 무너진 달구성 옛 터에나
숲 그늘 무너진 도수원(刀水圓) 놀이터에
오고 가는 사람 많기도 하여도
반천 둑 고목처럼 여윈 이 얼마랴
넓다는 대구 감영 아무리 좋대도
웃음도 소망도 빼앗긴 우리로야
님조차 못 가진 외로운 몸이로야
앞뒤를 다 헤매도 가슴이 답답타
가을 밤 별 같이 어여쁜 이 있거든
착하고 귀여운 술이나 부어 다고
숨가쁜 이 한 밤은 잠자지도 말고서
달 지고 해 돋도록 취해나 볼 테다
교남학교 교가
태백산이 높 솟고
낙동강 내달은 곳에
오는 세기 앞잡이들
손에 손을 잡았다.
높은 내 이상 굳은 너의 의지로
나가자 가자 이어 나가자
예서 얻은 빛으로
삼천리 골골에 샛별이 되어라
지반 정경(池畔靜景)
-파계사(把溪寺) 용소(龍沼)에서-
능수버들의 거듭 포개인 잎 사이에서
해는 주등색의 따사로운 웃음을 던지고
깜푸르게 몰골 꾸민, 저편에선
남모르게 하는 바람의 군소리-가만히 오다
나는 아무 빛 갈래도 없는 욕망의 기원으로
어디인지도 모르는 생각의 바닷속에다
원무 추는 영혼을 뜻대로 보내며
여름 우수에 잠긴 풀 사잇길을 오만스럽게 밟고 간다.
우거진 나무 밑에 넋 빠진 내 몸은
속마음 깊게-고요롭게-미끄러우며
생각에 겨운 눈알과 같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빈 꿈을 얽매더라
물위로 죽은 듯 엎디어 있는
끝도 없는 옅푸른 하늘의 영원성 품은 빛이
그리는 애인을 뜻밖에 만난 미친 마음으로
내 가슴에 나도 몰래 숨었던 나라와 어우러지다.
나의 넋은 바람결의 구름보다도 연약하여라
잠자리와 제비 뒤를 따라, 가볍게 돌며
별나라로 오르다 갑자기 흙 속으로 기어오르고
다시는 해묵은 낙엽과 고목의 거미줄과도 헤매이노라
저문 저녁에, 쫓겨난 쇠북소리 하늘 너머로 사라지고 이날의 마지막 놀이로 어린고기들 물놀이할 때
내머리 속에서 단잠 깬 기억은 새로인, 이곳 온 까닭을 생각하노라
이곳이 세상 같고, 내 한 몸이 모든 사람 같기도 하다!
아 너그럽게도 숨 막히는 그윽함일러라, 고요로운 설움일러라
(『개벽』 54호 1924.12)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맛 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위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쁫이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넉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지심매다 : ‘김매다’의 방언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옷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음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70호 1926. 6)
이 시는 1926년『개벽』70호에 발표된 이상화 후기의 대표작이다. 이 시는 저항 의식이 완만하게 표현된 이상화 자신의 선언적 의미까지 담긴 시라고 볼 수 있다.
당(唐)의 시인 두보(杜甫)가 안록산의 난 때 읊었다는 명시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과 비슷하다. 그러나 두보의 시보다 몇 배 대단하면서도 자신의 결단을 명확하게 밝힌 의지는 삶과 죽음을 간단하려는 의지도 함께 깔려 있다.
이 시를 더 읽고 나면 일제의 검열제도에서 어떻게 통과하여 발표될 수 있었는지 자못 궁금한 생각도 든다. 이 시는 많은 평자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표현이나 시 정신면에서도 대단히 성공한 작품이다.
인간 李相和, 민족시인 尙火
“이상정 장군, 이상백 박사는 오늘날 많은 국민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지만, 영원히 사랑과 존경을 받을 분은 자네(이충희-상화시인 차남) 어른 尙火시인 뿐이네!” 미국 버클대학 출신의 白雲出 박사(광케이불 분야의 세계적 석학)의 말이다(30여 년 전). 그때 감동한 이충희 씨는 상화시인의 친필 시를 선사했다. 그러나 백박사는 30여년 소중히 보관했던 유작을 이충희 씨에게 되돌려준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상화 고택 복원, 상화시인 기념 문학관이 선다면 이 육필원고를 만나게 될 것이다. 尙火詩人은 ‘가장 자랑스러운 大邱人’임을 믿고 있다.
참고문헌
想白 李相佰 評傳, 대구의 향기 : 박용규, 이상화 전집-‘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씨뿌린 사람들 : 백기만, 대구역사기행,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사,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이상 "중악지 10호"에 게제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