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
이 글은 칼 바르트가 1911년 자펜빌 노동자들에게 행한 연설이다. 바르트는 이 연설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사회주의이론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예수는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이다. 그리고 현재 사회 정의를 위한 운동은 예수이다”(12쪽). “예수 인격의 참된 내용은 사실상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13쪽). 여기서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이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회정의 운동을 지칭하는 총괄개념이다. “자본주의란 프롤레타리아를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다시 말해서 그의 존재를 끊임없이 불안정한 의존적 임금 노동자로 만드는 생산양식이다. … 한편은 구별된 사람으로서 자본을 점점 더 많이 축적하여 아름다운 저택에서 살며 삶의 모든 기쁨을 누리는 반면에, 다른 한편은 그날 벌어 그날 먹으며 기껏해야 몇푼을 저축할 뿐, 그것마저 이런 저런 이유로 불가능할 경우엔 급기야 자선의 대상으로 전락되는 ‘불쌍한 악마’(poor devil)로 남게 된다. 이러한 계급모순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일상적인 범죄라고 사회주의는 말한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생산양식은 해소되어야 한다. 특히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원리인 사적소유 - 일반적인 사적 소유가 아니라 생산수단으로서의 사적 소유는 해소되어야 한다”(25쪽).
이 강연에서 바르트는 부르주와 교회출석자들이 예수를 사회민주주의자로 만들지 말라, 예수의 인격은 비당파적이고 사회적 갈등을 초월하여 그런 것들에 무관심하다, 예수의 의미는 영원한 것이지, 사회민주당과 같이 역사적으로 제한된 것이 아니라는 비판에 해명을 하고 있다. 바르트는 사회정의 운동과 예수 그리스도를 관련시키는 것이 신성모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15쪽). 즉 그는 현대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에 있어서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그 무엇과 예수 안에서 육신이 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존재하는 내적 연관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말한다, “교회는 여러분을 섬기기 위해 거기에 있다. 여러분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라”(16쪽). “예수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사상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사람은 하느님과 세계, 또는 사람과 그의 구원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지지만, 그것들을 모두 가지고서도 완전히 이교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신론자, 유물론자, 다원주의자로서도 참된 예수의 추종자나 제자가 될 수 있다.”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운동이다(17쪽). 바르트에게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이다. 그것은 외적, 도덕적, 문화적 삶의 모든 국면에 있어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독립시키려고 한다. 예수는 노동자였다. 그는 가난한 자를 위해 보냄 받은 자였고, 이것은 “순수하게 사회적인 영성의 열정”(18쪽)이었다. 그가 가져온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기쁜 소식이었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낮아서 안 되는 사람은 없었다. … 그것은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값싼 동정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로의 화산의 폭발같은 것이었다.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부자이지 가난한 사람이 아니며, 경건한 자이지 소위 하느님이 없다는 사람은 아니다”(19쪽).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했다.
바르트는 영과 물질, 하늘과 땅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비판한다. 그는 그동안 교회는 하늘나라, 내적 생명을 강조하면서 사회적 불행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끔 교육했던 점을 강도높게 비판한다. 이와 같은 행위는 배교행위다(21쪽). 예수는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영에서 육으로 오신 분이다. 따라서 그 분 안에서는 영혼과 물질, 하늘과 땅이 통합되는, “단 하나의 실재가 있을 뿐이다”(22쪽). 복음이란 인간편에서 보면 아래로부터 위로의 운동이고, 하느님 편에서 보면 위에서 아래로의 운동이다. 우리가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22쪽).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던 양과 염소, 오른편과 왼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등은 모두가 물질과 관련된다. “예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었다”(24쪽). “사회민주주의와 예수가 동일하다.” “하느님의 길의 최후 목적은 육체에 대한 긍정이다”(24쪽). 바르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대안이다. 그렇기에 사적 소유를 다루는 일은 불가피했다. 교회와 국가는 그동안 사적 소유의 개념을 놀랍게도 신성시하고 미화해 왔다. 바르트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를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 사회주의가 한계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이것은 하느님의 사회주의로 향하는 과정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사회주의는 인간적 사회주의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사회주의는 지금 하나님에 반대되는 사회의 질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여 하나님의 사회주의에 더 좋게 사응하게 되는 사회질서를 위한 투쟁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바르트는 인식했다“(오영석, ‘칼 바르트의 정치신학 연구’, 34쪽).
누구보다 정직하게 성경을 읽은 바르트에게 예수는 “사회주의자들 보다더 더 철저한 사회주의자”(26쪽)였다. 그는 사유재산의 개념을 거부하였고, 우리 인간은 청지기일 따름이다. 청지기는 사유재산을 소유하는 자가 아니라 “충실해야” 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 또한 그 재물의 공동 소유자가 되게 해야 한다. 사유재산으로서의 재물은 정확하게 말해서 불의한 재물”이기에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쪽). 따라서 바르트는 원죄를 “이기주의”(self-seeking)라고 이해했다(29쪽). 사유재산에 집착하는 이기주의는 전쟁, 경쟁을 유발해 왔기 때문이다. 반면 원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즉 참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빈부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저항해야 하는데, 이러한 저항은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산당 선언 마지막 문장을 언급한다. “세계의 플롤레타리아는 단결하라!”(30쪽) 개별 노동자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 연대는 자회주의의 율법이요 복음이다(30쪽).
바르트에게 하느님은 사회적 하느님이자 연대의 하느님이며, 사회적 종교, 연대의 종교만이 있을 뿐이었다(31-2쪽). “집단적, 연대적, 공공적 그리고 사회적인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행동규칙은 저절로 다음과 같이 세워진다. 즉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7:12).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33쪽).
바르트는 이 연설문 마무리 부분에서 다시 한번 사회주의를 긍정한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기독교이다”(35쪽).
이러한 바르트의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 태도는 그의 생애 마지막 해인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는 말한다. “기독교인과 신학자로서(목사와 신학교수) 나는 분명하게 정치 속에서 살았다. 신학자로서 우리는 천사처럼 공중을 떠돌지 않는다”(오영석, 26쪽). 오영석 교수는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제2판이 “초월적 하나님, 전적인 타자로서 하나님,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타자성의 강조, 역사와 사회에 대한 심판만을 강조했다고 오인되어 왔다”(오영석, 26쪽)고 말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인 사건인 인간과 만나는 하나님, 하나님과 만나는 인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