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불러 축복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세례의 표징과 은혜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7-9)
7. 예수님과 어린이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자신이 오신 것은 아버지의 자비를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확대하기 위해서란 것을 세상에 알리시려고 자신에게 데려온 유아들을 다정하게 안으셨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제자들을 하늘나라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을 자기에게서 빼앗는 것이라고 책망하셨다(마 19 : 13-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안으신 것과 세례에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그들을 들어 안으시고 축복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유아들에게 세례를 줄 것이 아니라 기도로 보살펴 주자고 말한다.9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도의 행동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 : 14)고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유아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을 안으시고 기도와 축복으로 그들을 하나님께 드리심으로써 그의 뜻을 행동으로 확증하셨다. 유아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왜 세례도 받게 하지 않는가? 세례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친교의 상징이 아닌가? 천국이 유아들의 것이라면 왜 표징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가? 표징은 그들에게 교회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며 교회에 가입된 그들을 천국의 상속자들 가운데 가입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유아들을 우리가 쫓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로 장식하시는 유아들에게서 그 은사를 빼앗으며 그가 기꺼이 영접하시는 어린이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와 그리스도의 이 행동은 아주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받으시고 안으시며 안수하시고 기도하심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것이며 그들을 성별케 하셨음을 선언하신 그 행동보다 얼마나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인가?
이 구절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다른 옹졸한 이유를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무지를 폭로할 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이들이 내게 오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아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자라서 혼자 올 수 있었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버린 아기들과 어린아이들"10이라고 부른다(눅 18 : 15, 마 19 : 14, 막 10 : 13 참조). 이 두 마디의 희랍 말은 젖먹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온다" 라는 말은 "접근한다"11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진리를 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은 결국 기만의 거미집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고 "이런 자의 것"이라고12 하셨으므로, 천국은 유아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유아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그들의 말에는 아무런 건전한 논점도 없다. 만일 이런 생각이 인정된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이 나이 때문에 자신에게 외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셨을까? 유아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실제로 젖먹이들을 의미하신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하다. 사람들이 이 일을 어리석게 생각하지 않도록 그는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첨가하셨다(마 19 : 14). 유아들이 천국에 포함되어야 한다면 "이런 자" 라는 말은 유아 자신들과 유아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할 것이다.
8.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의 침묵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성경의 확고한 승인을 받은 것이며 결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사도들이 유아세례를 주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하는 그들의 미련한 항의는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 비록 복음서 기자들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한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에는 유아들을 빼놓는 것이 아니므로, 올바른 정신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런 기사를 근거로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겠는가? 이런 논리가 옳다면, 사도시대에 여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했다는 기사가 없으므로 주의 성찬에서 여자들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행 16 : 15,32).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법칙으로 만족한다. 성찬의 제정 정신을 숙고할 때에 어떤 사람에게 성찬을 베풀 것인가 하는 것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세례에서도 이 원칙을 지킨다. 참으로 세례의 제정 목적에 주의만 하면 세례는 큰 사람들과 똑같이 유아들에게도 합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서 세례를 빼앗는 것은 곧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후 오랫동안 유아세례는 사람들이 몰랐던 일이 없다는 생각을 단순한 사람들 사이에 퍼뜨린다.13 이 점에서 그들의 부정직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고대의 저술가라도 유아세례가 사도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14
9.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
유아세례를 무가치하며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이 행사에서 오는 유익을-어린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부모들과 세례를 받는 유아 자신들에게15 오는 유익을-간단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 만일 무익하다는 구실로 유아세례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께서 명령하신 할례를 조롱하는 것이 되는데, 그들이 유아세례에 반대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 중 할례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육적인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곧 정죄하는 사람들의 교만을 주께서는 벌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미련한 생각을 압도하는 다른 무기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의 이 거룩한 제도는 우리의 믿음에 특별한 위로를16 주며 무익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인과 같이 어린이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표징은 경건한 부모에게 주신 약속을 확인하며, 주께서는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의 인애와 은총을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천 대에 이르기까지 주고자 하신다는 것이(출 20 : 6)17 확인되었다고 선언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 때문에 자기들의 후손까지 생각해 주시는 것을 볼 때에,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에 깊이 감동되어, 먼저는 주의 영광을 찬양하며 다음에는 비상한 행복감이 마음에 넘쳐 인애하신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겠다는 충만함을 품는다.
주의 약속만으로도 우리의 자녀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는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이의를 무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다르게 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이 문제에서 우리를 부드럽게 다루려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가 자녀들에게 미치리라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자녀를 교회에 바쳐 자비의 상징으로 인침을 받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확신을 얻도록 분발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주의 언약이 자녀들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더욱 확신이 생긴다. 동시에 어린이들도 세례에서 유익을 얻는다. 교회에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얼마만큼은 더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열의가 더욱 고무된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깨달을 나이가 되기 전에 엄숙한 상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 영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자기 자식에게 언약의 상징으로 표를 하는 것을 멸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다고 한 그 위협을 우리는 깊이 두려워해야 한다. 이렇게 멸시하는 자에게는 주시겠다고 한 은혜를 거부하시며 취소하시기 때문이다(창 17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