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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스님도 모르는 반야심경>의 저자 김종수님께서 이 논문에 대하여 짚어주신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퍼왔습니다.
性徹 스님의 故意 아닌 거짓말
강병조
경북의대 정신의학교실
The words that Korean buddhist monk Soungchŏul preached - "The spirit exists, and a representation of the cycle of existence also exists. Believing in Bodhisattava faith and being enlightened by Sön meditation is the Buddhism." - are thought to be the skillful means to console the foolish buddhists who have small capacities and fear death. If not, and if he preached the teaching of a Dharma that way with confidence, it is far from the teaching of Sakyamuni and is thought to be an unintentional lie too different from the scientific truth.
차례
I. 서론
II. 성철스님 법어 중 문제되는 몇 가지
1. 영혼은 있다.
2. 윤회는 있다.
3. 보살신앙
4. 깨달음
III. 결론
1. 서론
저자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어머니의 염불을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면서 몇 몇 불교 모임에도 가입해서 많은 스님들로부터 수 없이 많은 설법도 들었다. 그리하여 스님들의 설법에 洗腦되어 그 것이 佛法인줄 알고 믿어 왔다.
그러나 최근 불교 공부를 좀 하여 보니 현 우리나라의 많은 스님들이 설법하시는 내용 중 많은 부분이 불교가 아니라 힌두교의 내용임을 알게 되었다. 인도에서 불교를 힌두교의 한 종파로 생각한다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특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정까지 지내신 性徹스님의 법어집을 읽어보니, 中道의 원리 등 훌륭한 법문들이 많았으나,
<반론>성철스님께서 중도와 연기를 제대로 아셨다면 윤회니 영혼등을 있다고 상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도연기란 상견과 단견을 끊는 것이다. 영원히 존재한다고 하는 아트만사상 즉 힌두교 사상이 있는 한 성철스님의 법어집에는 부처님의 말씀하신 중도연기는 찾을 수가 없다. 다시말해 처음이 어긋나면 끝도 어긋나듯이 애초에 성철스님의 법어집에는 부처님의 중도연기라는 것은 없다.
소수의 법문에서는 불교가 아니라 힌두교이며, 너무나 시대에 뒤 떨어진 비과학적인 내용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물론 불교에서는 方便으로 根機가 낮은 어리석은 자에게는 어리석은 말을 해서 마음의 위로를 삼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반론>방편이라 함은 법다움에 바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모든 부처님의 말씀을 다 방편이라 한다.
-단지 나는 저들의 주장(主張)에 맞서 연기법(緣起法)을 주장하고 그것을 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ㆍ오온(五蘊)ㆍ 십이연기(十二緣起)ㆍ사성제(四聖諦)로 가르치고 있다.<중아함경>-
이것 외에는 어떠한 방편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타의 것은 법도 아니고 방편도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우리나라 불교 신도 모두가 어리석은 자들만은 아닐 터 인데, 어리석은 설법만 하신 것을 보면 성철스님 본인도 根機가 낮은 어리석은 자이거나,
불교와 힌두교를 혼동하였거나, 아니면 현대의 과학교육을 받지 못 하여 비과학적인 어리석은 우를 범하셨거나, 과학과 종교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셨거나,
<반론>
부처님은 과학으로 교리를 설법하지 않았다. 성철스님이 과학교육을 못 받아 어리석은 설법을 하였다는 것은 과학맹신자들의 논리이다. 모든 것이 과학으로 논증되는 것이 진리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논문에서 밝힌 몇 가지의 얄팍한 과학상식으로 불법을 재단하고 있지나 않은지 묻고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나라 불교의 교리나 시스템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혼자 힘으로는 이를 바로잡을 힘이 없어서 다수와 같이 생각하고 설법하셨다고 생각된다.
만일 지금까지 성철스님이 살아계셔서 최근에 발달한 腦科學의 최신지식을 받아 드리셨다면 아마 생각을 바꾸어 이런 설법은 하지 않으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달라이라마께서도 최근 하버드대 교수 분들과의 대화에서 최신 신경과학의 지식을 받아드려 ‘영혼은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반론>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들에게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자 정치적 결정권을 갖는 통치권자이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자비의 부처가 티베트 역사 내내 달라이 라마로 환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티베트인들은 이에 따라 달라이 라마를 선택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면 다시 환생한다고 믿기 때문에 환생한 달라이 라마를 찾아 후대 달라이 라마로 결정한다. 달라이 라마가 죽기 전 그가 환생할 장소를 예시하기도 하지만 예시가 없을 경우 신탁에 의해 새로 탄생할 달라이 라마의 집, 땅, 그 지방의 모습을 자세히 예시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찾은 아이에게 전대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기 전에 사용하던 염주와 유품들을 섞어 놓고 물건을 고르게 해서 달라이 라마인지 아닌지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최종 결정은 라싸의 조캉사원에서 행하는 의식을 통하여 선택한다. 이렇게 선택된 아이는 달라이 라마로서의 자질을 갖출 교육을 받고 18세가 되면 정식으로 달라이 라마에 즉위한다. 전대 달라이 라마 입적 후와 다음 달라이 라마가 즉위하기까지의 기간동안은 티베트 승려 중에서 가장 덕이 높은 사람이 섭정이 되어 달라이 라마의 역할을 대행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사전>
달라이라마를 인용한 이 부분은 논문을 격을 상당히 실추시키고 있다. 논문의 주제는 ‘힌두교를 배제하고 제대로인 불교를 세우자’인 것 같으나 이와는 반대로 영혼이 있어 환생한 (힌두교의 핵심 논리)티벳의 승려 달라이라마의 말을 인용하여 논문의 신뢰를 높히려 하고 있다.
여기에 필자의 심각한 논리부재가 발생된다.
과연 필자가 불교와 힌두교의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논문을 썼는가와 과학자인 필자가 검증이 없이 달라이라마라는 권위와 명성에만 착하여 검증없이 주제와는 반대인 그를 끌어다 놓았다면 -여기에 대한 확연한 답이 없다면- 과학을 외치는 그의 과학정신에도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또한 힌두교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힌두사상으로 무장한 달라이라마를 불교의 승려로 보는 것은 힌두교의 불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성철스님만 비판하고 스스로가 영혼이 없다고 인정한 달라이라마가 - 지금의 달라이 라마는 달라이 라마가 아닌 것이라고 스스로도 인정한 것인데 - 왜 아직도 세계 각 곳을 누리며 성하라는 칭호를 받고 다니는지, 그를 왜 사기꾼이라고 비판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여기에 대해 필자가 반론할 논거와 역량이 안돼서 그대로 이 문제를 묻는 것 아닌가 싶다.
성철스님의 소수의 어리석은 설법을 여기서 논하려는 것은, 단지 성철스님 한 분의 어리석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 유사한 생각을 가진 스님들이 많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교리는 빨리 버리고 과학의 진리에 맞는 과학시대의 불교 교리를 개발하자는 하나의 자극제로서 이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이다.
최근 초기불교를 연구하시는 각묵 스님을 위시한 소수의 스님들로부터, 힌두교화 된 비과학적인 한국 대승 불교를 벗어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과학적인 불교(임원택. 붓다의 과학사상. 2001)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있다. 또한 해인사 승가대학에서는 전통적인 커리큐럼을 바꾸어 교양과목 뿐 아니라 과학과목도 공부하려고 문호를 개방하고 있어서, 필자는 21세기 과학의 시대에도 한국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반론>단지 과학을 한다해서 한국불교가 살아남는 다는 것은 필자만의 신념이 아닌가 한다. 부처님의 중도연기와 사성제 무상고무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과학이 발전되고, 교양을 아무리 넓힌다고 해도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하신 것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질 뿐이다.
II. 성철스님 법어 중 문제되는 몇 가지
성철스님 법어집 1집 6권 <영원한 자유>(장정각, 1988년 7월 20일 발행)에서 문제점 몇 가지만 뽑아보았다.
1. 靈魂은 있다 (86쪽)
1). 불교의 제 8식(識) (86쪽)
[인간이 살아 있을 때는 정신이라 하고 죽어서는 영혼이라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논란과 시비를 거듭해 왔지만, 아직도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나 종교가는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영혼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싸움이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대승이나 소승이나 어느 경론이나 할 것 없이, 팔만대장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생사윤회를 말씀하셨습니다. 곧 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지은 업에 따라 몸을 바꾸어 가며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윤회는 불교의 핵심이 되는 원리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윤회를 하는 실체를 말할 때 그것을 영혼이라고 이름 하지 않고 제 8 아뢰야식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나눌 때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을 제 6식이라 하고, 그 안의 잠재의식은 제 7말라식이라 하고, 무의식 상태의 마음은 제 8아뢰야식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호흡이 끊어지고 혈맥이 끊어지고 목숨이 끊어져버리면 의식은 완전히 없어지고 오로지 제 8아뢰야식만이 남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몰식(無沒識) 곧 죽지 않는 식, 없어지지 않는 식이라고 합니다.
또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는데 과거, 현재, 할 것 없이 모든 기억을 마치 곳간에 물건을 간수해 놓듯 전부 기억해 두고 있다가, 어떤 기회만 되면, 녹음기에서 녹음이 재생되듯이 기억이 전부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말할 때에는 무몰식이라 하고,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뜻에서 말할 때에는 장식이라 합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미래겁이 다하도록 윤회를 하는 동시에 무엇이든 한번 스쳐간 것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해탈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서야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데에서, 또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서나 불교를 포교하는 데에서, 또는 수행하여 성불하는 데에서 꼭 갖추어야 할 흔들림 없는 근본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믿어야만 바른 행동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께서는 無我와 緣起를 말씀하셨다. 영혼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은 힌두교 사상이다.
초기불교를 연구하시는 각묵스님이 <수미산정>(불교신문. 2007.6.20)에서 힌두교화 된 한국불교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여기 그 전문을 옮긴다.
[불교는 연기와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다. 불교 2600년사를 통해 전개되어온 불교주류의 가르침은 이를 근본으로 하여 전개되어 왔다. 초기불교는 오온무아와 제법무아를 천명하였으며, 아비담마도 제법의 보편적 성질(共相)로 무상.고.무아를 강조하였고, 반야중관은 아공법공을 외쳤으며, 유식도 인무아와 법무아를 주창하였다. 이렇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조건발생(緣起生)이요, 그래서 무아라고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설하였다. 무엇보다도 무아의 가르침은 오온, 12처, 18계로 정리되는 존재의 배후에 자아니 절대아니 참나니 순수이성이니 이데아니 창조주니 하는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대사자후이며 불교만대의 표준이다.
‘여래장’ 불교교학 혼란 야기
그런데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불교의 주류가 되어 스스로를 대승 중의 대승이라고 자처하게 된 여래장 계열의 경론에서는 연기와 무아를 설하기는 하였지만 아울러 마치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의 배후에 있는 양 일심을 천명하였고, 여래장이나 불성이 상주하는 듯한 언어표현을 즐겨 구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여래장에는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이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여래장이 불공(不空)이라 한다면, 평천창 교수의 말처럼 이것은 공을 무아와 연기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적멸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만일 불성이나 여래장이 불공이요, 존재의 배후에 일심이 상주불변한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면,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스스로가 불교이기를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불교이해가 수승한 것이라 외친다.
물론 특정 교파의 주장이 특정한 시대에 등장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성향이나 시대정신을 고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래장 사상이 나타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특히 이것이 중국불교의 주류가 된 데는 이 사상이 그 시대 중국의 통치자들과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에 더 어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문화적,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지대한 영향 하에 놓여온 한국불교도 그러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과학을 시대정신으로 하는 현대에는 오히려 연기와 무아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는 초기불교 등 불교주류의 가르침이 더 적합할 것이다. 불교사 전체로 보면 방계일 수밖에 없었으며, 비불교적 언어표현을 즐겨 사용하여 불교교학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온 여래장 사상에 더 이상 우리 불교가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양머리 걸고 개고기 파는 격
현양매구(懸羊賣狗)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 고전 〈안자춘추(晏子春秋)〉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양두매구육(懸羊頭賣狗肉)의 준말이요, 직역하면 ‘양의 머리를 매달아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다. 좋은 물건을 간판으로 내세우고 나쁜 물건을 팔거나, 표면으로는 그럴 듯한 대의명분을 내걸고 이면으로는 좋지 않은 본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 고사성어는 〈벽암록〉등의 아주 많은 중국불교 선어록에서 잘못된 견해를 질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은 수승한 불교라는 양 머리를 내걸었지만 존재론적 실체를 찬양해마지 않는 외도의 개고기를 파는 것은 혹시 아닐까?
(불교신문 2336호/ 2007년 6월20일자)]
<반론>이부분도 달라이라마를 인용한 것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철스님을 내리기 위한 고의성이 아닐까하는 의심도 든다.
각묵스님의 말을 인용한 부분은 언급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다 확인해서 그분의 글을 인용했는가 묻고 싶다. 각묵스님이 카페지기인 초기불전연구원이나 그가 역해한 저서 (금강경등)에서는 그의 말들이 일관성이 없음이 드러나는데 성철스님을 내리기 위해 반대급부적으로 각묵스님을 올려놓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위의 달라이라마처럼 말이다. 과학정신으로 무장하신 교수님께서 이렇다 할 검증없이 각묵스님의 일부분의 글을 부처님의 법에 대한 확정적인 논거로 내놓은 것은 필자의 과학적 정신에도 문제가 있는 듯하다
성철스님은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二元論者이다. 성철스님의 唯識사상에서는 마음이니 유식이니 8식(Alaya)이니 하는 것이 하나의 자기동일성(identity)을 갖는 실체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에서 각묵 스님도 지적한 것처럼 석가모니 자신은 윤회의 주체인 영혼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는 힌두교의 자아(Atman)를 인정하지 않았고, 無我를 말씀하셨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緣起로 되어있다고 말씀하셨다. 인연 따라 생겼다가 인연 따라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는 삼법인을 말씀하셨다. 諸法無我, 諸行無常, 一切皆苦라고 하셨다.
영혼의 문제는 수 천 년 전부터 철학의 주제가 되어왔으나, 뇌의 기능을 간접적이나마 볼 수 있게 된 최근 약 10-20년 사이에 결론을 내어버렸다. 그리하여 현대의학 (특히 정신의학) 뿐만 아니라 현대 철학에서도 <마음이니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뇌의 기능이다>고 말 한다 (Gerald M Edelman 황희숙 역 :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1998). 다시 말하면 마음, 정신, 영혼은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기능으로서 사용되는 ‘기능적 單語’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필자가 唯識論과 神經科學 (지구촌 시대의 한국문화와 불교. 2005)이란 논문에서 상세히 밝혔다.
2600년 전에 석가모니가 현대의학과 일치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통찰력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2006년 봄 KBS1 TV에서 방영한 <마음> 프로를 다시 보시든지 아니면 언제든지 필자와 토론하여도 좋다.
<반론>단지 <마음>이라는 프로를 볼 것을 권장할 것이 아니라-맹목적인 과학자로서의 단면을 보는 듯한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잘 살펴보라고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法)이란 단지 이름을 빌린 것에 불과하다. 단지 명칭(名稱)과 문자(文字)에 의지해서 법(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표현할 수 있는 말을 떠나서는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갖가지의 명칭으로 갖가지의 개념(槪念)을 표현하지만 명칭이나 개념에 실체(實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이 모든 개념(槪念)의 본바탕이다. 어떤 개념은 명칭(名稱)에서 비롯되지만 그 명칭의 바탕도 실체가 없으니 명칭에서 명칭의 실체를 찾을 수는 없다.
모든 개념의 명칭은 본래 실체(實體)가 없는 것이나 어쩔 수 없이 명칭으로 명칭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法)은 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허망(虛妄)하다. 그러나 허망하 다는 생각마저도 분별을 따라 생길 뿐이다. 그와 같은 분별 역시 실체(實體)가 없는 것인데 실체가 없는 곳에서 공연히 분별을 일으킨다. 내가 갖가지 세간(世間)을 말하지만 그것은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또한 모두가 삿된 헤아림이요, 망상(妄想)이기 때문에 속제(俗諦)라고 말한다. 내가 일체법(一切法)을 말하지만 그 모두가 조건(緣)을 빌어서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안다면 승의(勝義)에 가깝다고 말할 것이니 마땅히 그렇게 살펴라. 눈으로 사물을 보지 않으면 마음에 분별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아는 것이 참된 진리(眞理)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알 수가 없다.” <대방등수다라왕경>
2). 근사(近死)경험 (88쪽)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세계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그 궁금증과 신비가 차차 벗겨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지금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레이몬드 무디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대학에서 철학을 배울 때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교수는 무디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수년 전에 두 번이나 죽었다가 깨어난 경험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의사가 와서 사망을 확인하고 장사를 치를 준비를 하는 도중에 깨어난 것인데, 깨어나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죽어 있는 동안이 깜깜한 것이 아니었다. 내 영혼이 죽어 있는 육체를 빠져나와 그것을 바라보고, 또 여러 가지 활동을 한 것을 기억한다."
그 정신과 교수는 죽었다가 깨어나는 순간까지의 자기가 경험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는데,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너무나 허황된 꿈 이야기나 거짓말 같아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디는 그때에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웃고 말았지만, 뒤에 자신이 철학교수가 되어 강의를 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서부터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무디 교수에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이므로 영생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며칠 전에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가 깨어났다고 하면서 그 때 할머니가 경험한 것을 들은 대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디 교수가 학생 시절에 앞의 정신과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똑같았습니다. 무디 교수는 이러한 경험담이 단순히 웃어넘기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롭게 의학을 공부하여 환자들을 상대로 이런 경험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해 뒤에 무디 교수는 150명의 사례를 수집하여 그것을 1975년에 책으로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례를 보면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음과 같은 공통되는 경험을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죽었을 때는 캄캄한 어떤 터널 같은 곳을 빠져나간다. 그곳을 빠져 나오면 자신의 신체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이상하다. 내가 왜 이렇게 누워 있을까? 내가 죽었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아주 밝은 광명이 나타난다. 그 광명 속에서 자기가 지나간 한 평생에 걸쳐 겪은 모든 일들이 잠깐 동안에 나타난다. 그 순간 자기가 아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서로 위로도 하고 소식도 묻고 이야기도 나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혼은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의사들이 자기를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라든지 가족들이 장사 지낼 의논을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다른 방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모두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눈앞에 보이는 그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을 할 수가 없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만났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가 없지만, 죽은 뒤에 그의 가족들이 한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들었으니 유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의사에 의해 죽었다고 판정되면 그 육신은 한갓 물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시신은 머리끝까지 흰 천으로 덮어 놓았으니, 설령 거짓으로 죽었다고 하여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은 자기가 죽어 있는 동안에 가족들이 한 이야기와 그들이 어디에 있었으며, 무슨 행동을 했는지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실지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사람이 죽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는 죽었어도 무엇인가 활동하는 활동체가 있어서 보고 듣는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깨어났다고 해서 누구나 이런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캄캄하여 아무 기억이 없다고도 합니다.
무디 교수는 이런 사례를 가진 사람들의 사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이 처음 출판되자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각 나라 말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 또는 [죽음의 세계] 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레이몬드 무디 교수의 연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그동안 영혼이나 죽음의 세계에 대해 연구를 해 오면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결과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여 여러 사람들이 새롭게 조사에 착수하였습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근사경험이라고 하고, 또 영어로는 약자를 써서 NDE(Near Death Experience)라고 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근사연구라고 합니다.
무디 교수는 1977년 두 번째 책인 [사후생에 대한 회고]를 출판하여 좀더 자세하게 근사경험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죽음 뒤에도 삶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근사경험을 영혼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뇌의 기능의 변화로 현대의학은 설명한다. 필자는 근사경험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한 가지 논문만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Dr. Karl L.R. Jansen이 Journal of Near-Death Studies 16(1): 5-26 Fall 1997에 게재한 논문이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근사경험을 경험하였던 사람이며, 또한 ketamine(반감기가 짧은 환각제이며, 인격을 해리시키는 마취약)을 주사 맞아 ketamine에 의한 의식의 변화가 근사경험과 같았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다.
Dr. Karl Jansen은 뉴질랜드에서 태어나서 Otago대학에서 내과 수련을 받았다. 그 후 그는 Auckland 대학에서 뇌 연구 research fellow로 활동하였다. 이 당시 ketamine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논문도 썼다. 그러고 나서 영국으로 가서 Oxford대학에서 임상약물학으로 Ph.D학위를 받았다. 그 후 런던의 Maudsley병원과 런던 정신과 병원에서 정신과 수련을 받았다. 그는 지금 Royal College of Psychiatrists의 회원이다. 그는 현재 근사경험의 ketamine model과 환각제인 Ecstasy (NMDA)의 過量 장기 사용의 결과에 대하여 흥미를 갖고 연구를 하고 있다.
Ketamine을 사용하여 생기는 근사경험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근사경험은 인격을 해리시키는 약인 ketamine을 사용해서 유도되어질 수 있다. 신경과학(neuro- science)의 발전은 뇌-마음 중간 영역에 관여하는 기작에 관하여 최근 새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뇌????쪽에서 볼 때, 근사경험이란 신경전달물질인 glutamate에 대한 뇌 수용체(약이 결합되는 장소)의 차단에 의한다는 것은 지금 명백하게 밝혀졌다. 이들 결합 장소가 N-methyl-D- aspartate (NMDA) 수용체이다. 근사경험을 촉진시키는 조건들 (저산소, 저혈류, 저혈당. 측두엽 간질 등)이 glutamate를 대량 방출시키고, NMDA 수용체를 과활성화(overactivation)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활성이 뇌 세포를 죽일 수 있다 (흥분성 독성, excitotoxicity). ketamine은 흥분성 독성을 예방한다. glutamate 방출을 유발시키는 조건들이 또한 뇌 세포를 보호하기 위하여 NMDA 수용체에 결합하는 ketamine과 유사한 뇌 화학물질들의 방출도 유발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ketamine에 의해서 생기는 변형된 의식 상태(altered state of consciousness)를 가져오게 된다.
소위 ????마음????이란 뇌신경의 활동(neuronal activity)으로부터 나온다. 뇌의 결과가 정신상태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수천의 연구 결과들이 지금 발표되고 있다. 이 연구들은 뇌를 전극으로 직접 자극하여 관찰한 연구(예를 들면 신경외과 의사인 Wilder Penfield의 개척자적 연구로부터), 최근 뇌 활동을 관찰 할 수 있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 연구 (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 fMRI)까지 다양하게 있다. fMRI 연구에 의하면, 정신분열병 환자가 환청을 경험하는 동안 측두엽의 활동을 관찰할 수 있었다 (McGuire et al., 1995). 마음에 관한 극적인 효과는 환각제의 작용으로부터 왔다. 이 약의 효과는 심한 종교적인 경험을 하게 하였으며, 마음이란 신경화학 물질과 신경전기적 사건들에 의존한다는 증거들을 제공하여 주었다(Grinspoon and Bakalar, 1981).
과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영혼(the spirit)이 신체인 뇌로부터 빠져나가서도, 보고, 듣고, 自己자극(刺戟)에 감응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신경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Morse, 1989).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근사경험: 전형적인 양상
근사경험이 하나의 정신과적 질환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정의할 수 있는 국제적인 기준은 아직 없다. 신경생물학적 모델이 근사경험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신경생물학적인 모델이 현재는 설명할 수 없는 불명확하고 예외적인 사례들 때문에 버려질 수는 없다.
고전적인 근사경험의 전형적인 양상은 경험되어진 것이 ????진짜????경험이고, 진정으로 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 (즉 경험되어진 것은 말로서 설명되어질 수 없는, ????언어를 초월한beyond words‘ 감각)이며, 시간이 없고(timelessness), 통각이 없으며(analgesia), 명백한 생각과 조용하고 평화로운 느낌 (비록 어떤 근사경험은 혼란스럽고 무서운 느낌이라고 하나)을 포함한다. 신체로부터 분리되는 지각 (out-of-body experiences)이 있을 수 있다. 흔한 환각은 풍경, 배우자, 양친, 선생님들, 그리고 친구들 (그 당시에 살아 있을 수도 있는)을 포함한다. 그리고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천사와 같은 사람들과 빛과 같은 神의 대변자도 환각으로 나타난다.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상태가 흔하다. 기억은 흔히 의식계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비록 이 기억들이 ????자기 인생의 재검토????를 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고 하더라도.
근사경험의 초기에 어떤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Ring(1980)은 근사경험을 연속되는 5단계로 분류하였다.
1. 평화와 만족감을 느낀다; 2. 신체로부터 떨어져나가는 느낌을 느낀다; 3. 과도적인 어두움의 세계로 들어간다 (터널을 통한 빠른 움직임: ????터널 경험????); 4. 밝은 빛이 나타난다; 그리고 5.????그 빛 속으로 들어간다.????
60%는 1단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단지 10%만이 5단계까지 경험한다. 신경생물학적인 원인을 가진 정신상태에서 예견되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의미가 약한 세속적인 이야기들이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린이들은 신과 천사보다도 그들의 학교친구들을 보았다는 등 (Morse, 1985).
50-100mg의 ketamine을 혈관주사하면 근사경험과 흔히 관계되는 모든 양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약을 근육 주사하면 또한 근사경험이 일어나나, 그 속도가 느리고 더 오래 지속된다 (Domino et al., 1965).
ketamine을 사용하여 근사경험을 재생하거나 유도하는 것은 단지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많다. NMDA 수용체의 phencyclidine (PCP) 부착 부위로 알려진 장소가 ketamine이 부착하는 장소라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Thomson et al., 1985). 대뇌피질(특히 측두엽과 전두엽에서)에서 NMDA 수용체의 중요성과 인지과정 (cognitive processing), 기억 그리고 知覺(perception)에서 이들 장소의 주된 역할의 발견은 정말 흥분시키는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NMDA 수용체는 간질과 정신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Jansen and Faull, 1991), 산소 결핍, 혈류 결핍, 그리고 간질 발작(흥분성 독성)으로부터 뇌 세포의 사망을 초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형태의 뇌세포 손상은 ketamine의 투여에 의하여 예방되어질 수 있다. 다른 중요한 발견은 ????내인성 정신병인자(endopsychosins)'라고 불리는 화학물질의 발견이다. 이 물질은 ketamine과 같은 장소에 결합되고, 이 장소에서 마그네슘 이온과 아연이온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 (Anis et al., 1983).
정맥주사로 투여된 ketamine은 근사경험의 모든 양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Domino et al., 1965).
불행하게도, 비록 ketamine의 심리적 효과가 마취과 의사들에 의해서 많은 임상적 연구가 발표되었지만(Domino, 1992), 근사경험을 가졌던 사람에게 ketamine을 투여하여 두 경험 사이를 비교한 실험은 아직까지 발표된 바 없다. ketamine과 근사경험에 관한 정보들은 주로 일화적이고, 이 정보들의 얼마는 이차적 정보이다. 본 저자는 근사경험을 직접 경험하였고, 또한 하나의 마취약으로서 그리고 실험적인 차원에서 ketamine을 투여도 받았다. 근사경험과 ketamine 경험은 명백하게 같은 형태의 변형된 의식 상태였다. ketamine은 Moody(1975)에 의해서 기술된 근사경험과 같은 경험들을 반복해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ketamine은 터널을 통해서 여행하는 경험을 [때로는 '세계가 수직으로 서있는 것처럼 (the plumbing of the world)‘ 또는 '세계가 지하철 안에 타고 있는 것 같은 (like being on a subway train)’] 말로 묘사하여 재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빛 속으로 나아가서, 소위 ‘神 God’이라고 묘사되어질 수 있는 어떤 실체와 '텔레파시적 교환 telepathic exchange‘을 할 수 있었다. 근사경험이나 ketamine 경험 어느 것도, dimethyltryptamine (DMT; 실험적 차원에서 저자에게 또한 투여되었다) 과 lysergic acid diethylamide (LSD) 같은 환각제의 효과와는 유사하지 않았다.
3). 영혼 사진 (93쪽)
[다음의 사건은 1848년 3월 31일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미국의 뉴욕주 하인즈 빌이라는 촌락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마을에 독일계 사람으로 폭스라는 이가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폭스가 이사 온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때 폭스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가족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냥 들어오라고 소리쳤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가만히 있노라니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가 보면 아무도 없고 해서 나중에는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기는 사람이 아니고 영혼이라고 말하면서, 이름이 로스이고 이 집에서 죽었는데 자기의 시신이 지하실에 묻혀 있으니 그것을 파내서 장례를 치러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폭스의 가족들은 놀라서 경찰을 불러 지하실을 파 보니 과연 시신이 나왔습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재임 시에 네델란드의 유리아나 여왕이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여왕은 백악관에서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자기의 시녀인 줄 알고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 앞에는 링컨 대통령이 서 있는 것입니다. ... 영혼 사진을 찍어 보자고 해서 시진을 찍어 신문에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진은 나도 본 적이 있는데 링컨 대통령이 살아 있던 때의 모습과 완전히 똑 같았습니다.
이렇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 갈수록 뚜렷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영혼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 특징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1). 영혼은 모양을 드러냅니다. 그것을 여러 사람이 봅니다.
(2). 영혼은 말을 합니다. 이 말하는 것도 여러 사람이 듣습니다.
(3). 영혼은 사람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눈에도 보입니다.
(4). 영혼은 물체를 이동시킵니다.
(5). 영혼은 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합니다.]
필자로서는 영혼 사진을 찍었다고 하는 것을 믿기 어렵다. 이야기(소문)와 사실을 우리들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4). 영혼의 물질화 (99쪽)
[우리나라에도 옛날이야기에 보면 영혼이 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옵니다. 이를테면 어떤 선비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되어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함께 살던 어느 날, 그 아가씨가 친정에 간다고 해서 따라가 보면 집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해 들어가서 물어보면 그 아가씨는 이미 죽은 사람인데 그 날이 바로 그 여자의 제삿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산 사람이 영혼과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것을 ‘영혼의 물질화’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輪廻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때는 학자들이 윤회설은 인간들에게 勸善懲惡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 합니다. 6도란 地獄, 餓鬼, 阿修羅, 人間, 天上의 여섯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윤회사상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부처님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것이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믿는 것입니다. 결국 이 윤회사상에 의하면 영혼은 따로 거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생을 거듭하면서 몸을 바꾸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옛날이야기(傳說)일 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5). 死者의 書 (102쪽)
[티벳 지방에 전하는 경전 중에 Bardo Thödol 곧 <死者의 書>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과 죽음에 대한 안내서로서, 죽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영혼은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은 죽음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고, 둘째 부분은 죽음 직후에 잇달아 일어나는 꿈과 같은 상태를 설명하며, 셋째 부분은 출생 충동과 출생 이전의 과정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죽음에서 출생에 이르기까지는 보통 49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자의 서>에 나오는 죽음의 순간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근래의 연구인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의 증언, 곧, 근사경험과 너무 비슷합니다. <사자의 서>에 보면 숨이 끊어질 때에 밝은 광명을 경험할 것이라 하면서 그것은 마음의 본래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死者의 영혼은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이 그들을 부르는 소리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므로 마침내 사자는 실망을 하고서 사라져간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영혼을 中陰神 곧 Bardo라고 합니다.]
필자도 이 책을 읽어 보았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덮어버렸다.
2. 輪廻는 있다 (105쪽)
1). 전생기억 (105쪽)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는 대개 두 서너 살 되는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데, 이들은 말을 배우게 되면서 전생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곧 “나는 전생에 어느 곳에 살던 누구인데 이러이러한 생활을 했다”하는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성철스님은 여러 사례를 들어서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한 때 흘려 다녔던 傳說에 불과하다.
2). 차시환생(借屍還生) 9119쪽)
[사람이 죽어서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나는 것이 아니고 제 몸뚱이는 아주 죽어버리고 남의 송장을 의지해서, 곧, 몸을 바꾸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입니다. 다음은 1916년 2월 26일 중국 神州日報에 보도된 사실입니다.
중국 산동성에 崔天選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무식한 석공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서른 두 살 되던 해에 그만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장사 지낼 준비를 다 마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사람 기척이 났습니다. 부랴부랴 관을 깨고 풀어보니 관 속의 사람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신문에 난 것은 사실일지 모르나 신문에 났다고 모두 진실이라고 믿어서는 곤란하다. 신문기사는 기자가 직접 확인하고 보도하는 것이 원칙이나 그렇지 못하고 들리는 소문을 그대로 보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1910년대의 중국 신문은 믿기 어렵다.
3). 연령역행 (121쪽)
[심리학에서는 최면술을 이용하여 그 사람의 전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年齡逆行이라고 합니다.
무의식 상태에 대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영국의 Sir Alexander Cannon박사입니다. 그는 최면술을 이용한 무의식 상태에서 전생회귀를 시켜보니 사람들에게서 전생이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대하게 되었습니다. 실험 대상자들이 한 말을 역사의 기록과 대조하여 조사해 보면 모두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1,382명에 대한 전생자료를 수집하여 1952년에 <잠재력 The Power Within>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최면술을 통한 전생요법은 사기라고 현재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금하고 있다.
4). 전생투시(前生透視) (130쪽)
[인과 문제에 대해 가장 큰 업적을 쌓은 사람은 미국의 Edgar Cayce입니다. 환자의 주소와 이름만 가르쳐 주면 수 천리나 떨어져 있어도 그 사람의 병을 모두 진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찰하여 처방을 내고 병을 치료해주면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1947년에 죽었습니다.]
이런 ‘기적인’이 자기 병도 못 고쳐서 죽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나?
이 윤회사상은 불교의 고유한 사상이 아니다. 이 사상은 인도의 인더스 강 서북지방에 살았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문명의 사상이었던 것이 힌두교의 사상으로 흡수 되었다 (오강남. 세계종교 둘러보기. 2003). 힌두교는 이 윤회사상을 카스트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힌두교를 믿는 인도의 하층 계급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생의 업 때문에 천민계급으로 태어났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석가모니 생존 당시에도 물론 영혼을 주체로 한 윤회개념이 지적 엘리트들인 사상가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사실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명상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이 기능하는 모습을 관찰하여 원리이자 사실인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석가모니는 그가 깨달은 이후 이 윤회사상을 거부하였다 (임원택 : 붓다의 과학사상. 2001). 다음 간단히 석가모니의 윤회관을 살펴보겠다.
바차고타라는 수행승은 ‘인간이 죽고 나서는 어디로 가는가?’를 석가모니에게 물었다. <아함경>에서 석가모니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불타는 땔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즉 “사람이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땔감이 다 타서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꺼진 불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따라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이와 같으니, 죽은 자가 어디로 간다느니 가지 않는다느니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임원택: 붓다의 과학사상. 2001. 373-374쪽).
그러나 우리나라를 위시한 현대 불교에서도 이러한 윤회사상을 믿고 있는 것은, 석가모니 사망 후 400-500년 지나서 생긴 대승불교에서 다시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윤회를 실체가 윤회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윤회는 心理的 윤회라고 생각한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괴롭다. 이것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죄를 지으면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에너지의 흐름으로서의 윤회를 생각한다.
<반론>이 말은 맞지 않다. 에너지의 흐름에는 윤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에너지는 그냥 에너지일 뿐이다. 몸이 죽으면 에너지도 소멸된다. 에너지가 흘러 윤회한다는 것은 이 또한 힌두교의 사상일 뿐이다. 또한 모든 것이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유물론자의 추론일 뿐이다.
나를 이루고 있던 많은 요소들, 예를 들면, 나의 시체를 개가 뜯어 먹으면 나를 이루고 있던 에너지는 개의 에너지로 바뀐다.
<반론>에너지는 이 몸이 생하는 동안 의지작용에서 일어나는 활력적인 것을 에너지라고 표현할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체에서 무슨 에너지를 찾을 수 있겠는가?
위에서 필자가 인용한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인용한다..
“사람이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땔감이 다 타서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꺼진 불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따라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이와 같으니, 죽은 자가 어디로 간다느니 가지 않는다느니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임원택: 붓다의 과학사상. 2001. 373-374쪽).
몸이 죽은 뒤에 색수상행식의 화합이 소멸되는데 그 관계성으로 인해 인연화합으로 나왔던 에너지는 당연히 소멸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앞에선 잘 인용을 해놓고 뒤에선 몸이 죽은 뒤에 에너지가 있어 윤회한다는 말을 하니 앞뒤가 모순이 되고 있다.
에너지가 생성되려면 관련성이 있어야 에너지가 나온다. 만약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에너지가 나온다면 에너지가 있기 전에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성립된다. 에너지가 에너지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에너지를 구성하는 구성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추론해 나가면 끝이 존재할 수 없다. 지금 밝힐 수 있는 단계가 에너지까지이다. 결국은 추론이다. 에너지가 시작이자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추론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상의 불변하는 공식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죽어서 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윤회이다.
<반론>
내가 죽어 개가 나의 사체를 먹으면 내가 개의 에너지를 바뀐 것이 아니고 개라고 이름 짓는 개의 구성요소를 살려 놓은 것이다. 인간의 에너지가 개의 몸에 흡수된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인간이 소를 먹으면 소의 에너지를 먹은 것이 아니고 소라고 구성되어진 것을 먹고 자기 몸화 된 것이다.
또한 무상고무아인데 내가 어디에 있다고 죽어서 개가 되는 것인지. 이것도 잘못된 추측이다. 부처님의 중도연기를 개념이라도 잘 이해 했다면 지금 에너지가 윤회한 다는 말은 나올수가 없다. 에너지가 윤회한다는 것은 에너지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제행무상의 진리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논리는 인도의 힌두논리이다 영원불멸한 것이 존재한다는 또한 유물론자의 의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윤회론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도 맞을 뿐 아니라, 生死一如라는 불교의 생사관과도 일치한다. 즉 生也一片孚雲起하고 死也一片孚雲滅이라.
<반론>정작 필자는 힌두교가 배제된 불교를 논하다고 하면서 결국은 무엇인가 -에너지-가 윤회한다는 힌두교적 사상을 등에 업고 가는 것은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다.
생사일여라는 말은 부처님이 한 소리도 아니고 무상고무아인데 생이 어디에 있고, 죽음이 어디에 있는가. 다시 밝히면 단지 깨달음은 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멸(죽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현상에서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한다는 것을 보고 자아취착으로 가지 않음으로 갈뿐이다. 필자는 자기개념과 타협을 본 것 뿐이다..
3. 菩薩신앙
성철스님은 그의 설법집(제4편 영원한 자유 제 3장 信心이 聖地다. 170-181쪽)에서 관음보살과 문수보살을 설법하고 계신다. 불교신자들은 대부분 신앙의 대상으로 무슨 菩薩을 믿건 보살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철스님이 설법하신 긴 내용을 여기에 옮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석가모니 자신은 <菩薩>에 관하여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불자들은 보살신앙을 믿고 있다. 소원성취를 위해서는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죽어서 극락 가기 위해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병의 쾌유를 위해서는 약사여래불을 염송한다. 지장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등등 보살들도 많다.
이 보살신앙도 대승불교에서 생긴 신앙이다.
대승불교의 누가 이 보살신앙을 만들어 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 개인이 추측컨대, 석가모니가 돌아가시고 4-500년이 흐르면서 인도의 불교신자들은 무엇엔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막상 의지할 대상이 석가모니의 사리탑이나 불상 가지고는 되지 않음을 느낀 것 같다. 특히 석가모니는 돌아가시면서, <나에게 의지하지 말고, 진리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으니, 근기가 약하고 의지심이 많은 일반 신도들은 당황하고 방황하였을 것이다. 어느 선각자가 이런 신도들의 마음상태를 달래주는 하나의 방편으로 <보살>이라는 依支處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닌 가 추측된다.
인간은 종교의 본능이 있다. 종교유전자도 있다 (강병조. 종교와 뇌 그리고 유전자. 2006).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소원성취를 바란다. Ludwig Feuerbach가 종교의 기원이라고 말한 <소원 성취적 투사 wish-fulfillment projection>가 보살, 神 등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된다.
이런 불교의 보살신앙은 힌두교의 여러 神들에 의지하는 것과 닮은 점이 많다. 창조의 신 Brahma, 죽음과 파괴의 신 Shiva, 보존의 신 Vishnu 등 기능에 따라 많은 神들이 있는 것과 같이, 불교의 보살들도 기능에 따라 많이 있음이 서로 닮았다.
4. 깨달음(覺)
성철스님은 그의 설법집 (제4편 영원한 자유 제 1장 오매일여 1. 永劫不忘 140-144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도를 닦아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영혼이 있어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苦가 따릅니다. 미래 겁이 다하도록 나고 죽는 것이 계속되며 무한한 고가 항상 따라 다니는 이것이 이른바 生死苦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해야 벗어나며 해결할 수가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굳이 천당에 갈 필요도 없고 극락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능력, 곡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활용하면 이 현실에서 대해탈의, 대자유의, 무애 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원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佛性’이니 ‘法性’이니 또는 ‘如來藏’이니 ‘眞如’니 등등으로 말하고 있으며, 누구든 이것을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개발하면 곧 부처가 되므로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대자유에 이르는 길, 곧 永劫不忘인 생사해탈의 경계를 성취함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話頭가 근본이며,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될 라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대승불교는 모든 생명체에는 다 불성이 있으며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우울증에 빠진 환자에게 모두 다 완쾌될 수 있다고 희망을 주는 것과 같다. 그 희망을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일부는 인생을 멋지게 살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과학적인 두뇌를 가진 현대인에게 믿기지 않는 비과학적인 설법을 하면 아무리 오래 절에 다녀도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휘황한 상태가 되어 다른 종교에서 이해하기 쉬운 교리문답으로 개종을 권하면 다 넘어가 버린다. 이것이 오늘 한국 불교의 문제점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禪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중시한다. 무엇을 깨달을 것이며 깨닫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선사들은 참선하는 동안에 생기는 시공간 개념을 초월한 몸의 상태나, 작은 물소리도 크게 들리는 지각의 변화나, 화두의 의문이 풀리는 어떤 해답을 깨달음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은 오랜 참선 후에 생길 수 있는 뇌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라고 현대의학은 말한다.
필자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을 우리 불자들이 깨달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즉 욕심에 의해 생기는 고통을 없애려면, 자연이 기능하는 원리(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원리, 空, 無我, 緣起)를 깨달아 욕심을 적게 부리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통찰하지 못한 말들이다.
모태에 들 때도 부모의 피를 받았는데 어디에 빈손이며, 그동안 몸을 유지 하기 위해서 무수히 취한 것은 어떻게 하고 그런 허무맹랑한 말들을 하는지 모르겠다.
또한 부처님 말씀은 욕심을 적게 부리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욕심을 떨쳐버리라고 라고 했다.
적당한 자아와의 타협, 게다가 편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마음역시 뇌 작용일 뿐이다’라고 필자가 위에서 밝혔듯이 편안한 마음도 단지 뇌 작용의 느낌일 뿐인데 거기에 취하고 있다는 것은 편안함에 취하고 있는 것이지 깨달음은 아니다.
깨달음이란 자연법칙을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하고,
<반론>
깨달음이란 자연법칙과 관계없다. 자연법칙이란 것이 절대적으로 상정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개념화한 것이다.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부상고무아와 중도연기를 설하시면서 모든 것은 개념일뿐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시지 않았는가? 게다가 깨달음은 탐진치를 내려놓고 무상고무아를 현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어디에 자연법칙을 안다고 해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있는가? 그럼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모두다 깨달은 사람인가? 허망한 탐진치의 행위를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무엇인가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연법칙이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힌두교의 논리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무지에 의한 고통에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며, 죽음을 편안히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해탈이요 열반이며, 이런 상태가 깨달은 상태인 것이다.
<반론>
해탈해서 죽음을 편안하게 맞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맞는 것을 말한다. 편안하다는 것은 이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도 즐겁지도 괴롭지 않은 느낌을 말하셨다. 이 세 느낌에 취착하지 않음이 열반을 향한 길이라고 하셨다. 편안함은 이미 즐거운 느낌에 취한 것이다.
즉 <生者必滅>의 진리를 미리알고,
<반론>
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해탈이다. 따라서 멸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생을 벗어났다는 것은 자아를 취착함으로써 생이 생기므로 자아취착에서 벗어남을 생을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르게 살아서, 편안히 자기 죽음을 받아드리는 마음이, 죽음의 불안, 죽음의 공포를 벗어난 해탈이요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종교인 동시에 철학이요, 과학이며, 심리학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반론>불교는 철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심리학도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이며 그것을 개념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개념을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여 현상에서 고를 벗어나는 길인 것이다.
III. 결론
필자는 성철 스님이 설법하신 영혼은 있고, 윤회도 있으며, 보살신앙을 믿고, 그리고 이러한 원리를 참선을 통해서 깨치는 것이 불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근기가 낮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불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진정 확신에 차서 그렇게 설법하셨다면, 그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도 거리가 멀고, 과학적인 진실과는 너무나 다른 고의 아닌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반론>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그것은 고의도 아니고 단지 어리석음을 뿐이라고 말해야 되지 않나 싶다.
참고문헌
각묵스님: 현양매구. 불교신문. 수미산정. 2007.6.20.
강병조 : 唯識論과 神經科學. 지구촌 시대의 한국문화와 불교. 오성컴. 서울. 2005. 439-457쪽
강병조 : 종교와 뇌 그리고 유전인자. 한국불교와 세계불교와의 대화. 오성. 서울. 2006. 347-366쪽.
오강남 : 세계종교 둘러보기. 현암사. 서울 2003. 36쪽
임원택 : 붓다의 과학사상. 삶과 꿈. 서울. 2001. 435-542쪽
성철스님: 영원한 자유. 성철스님 법어집 1집 6권. 장정각, 서울. 1988년 7월 20일 발행
Gerald M Edelman(황희숙 역) :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범양출판사. 1998. 19-308쪽.
Karl L.R. Jansen: Ketamine model of near death experience. Journal of Near-Death
3.‘바라문이여, 성내고 성냄에 사로잡히고 성냄에 압도된 자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한다.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한다. 성냄을 버렸을 때 그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이렇게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4.“바라문이여, 어리석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어리석음에 압도된 자는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한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한다. 어리석음을 버렸을 때 그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이렇게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5. ‘바라문이여, 그는 욕망이 남김없이 다한 것을 경험하고 성냄이 다한 것을 경험하고 어리석음이 남김없이 다한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6.“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방향을]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듯, 눈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취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 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 합니다.고따마 존자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붙어 있는 그 말까지 귀의하옵니다.” <앙굿따라니까야1권 , 대림스님역, 초기불전연구원>발췌
이제 마무리 합니다 경전을 인용하여 토론에 임해야 마땅하지만 차후로 미룹니다 인연이 도래할때에 또 뵙시다 참고로 제가 추구하는 한국불교의 방향에 대하여서는 제 카페 염화미소 경전나눔터에 모두 있습니다 제가 걸어오면서 체험한 보살의 자취도 남아 있습니다 이 곳에 오시면 저의 모든 것을 알수 있을 겁니다 알아달라고 해서가 아니라 일체중생 번뇌를 여의고 편안해지길 빌기에 가야할길에서 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더 많이 공부해서 만나뵙는때의 시절을 기다리면서 부처님 가피로써 안락해지시고 행복해지길 빕니다
저는 님과의 법담을 통하여 더많은 것을 공부했는데 님은 법담따로 공부따로이신가봅니다. 저와는 이러한 면에서도 생각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스스로 증험을 외치시면서 부처님가피로 안락해지고 행복해지길 비신다니 여기서도 님의 말씀의 논리모순을 짚게 되는군요. 좋은게 좋은거다 하고 넘어가지 못하고 자꾸 치는 소리를 해드려서 죄송하지만 불법을 공부하는 이의 자세는 순간순간 닥쳐오는 모든 경계에 대하여 깨어있는 것 아닌지요?
어리석은 중생들이 사고하여 스스로의 고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대승경전이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님께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감히 말하려면 초기불교의 경전, 대승의 경전, 선불교의 화두 모두를 통달하고 떠들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도대체 깨달음과 부처의 가르침에 대하여 떠들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 수 있습니까? 어리석은 재가 신자들은 당연히 깨달음은 나와는 상관도 없는 일이니 나는 부처님 법력의 가피나 빌어 오는 세상 복락이나 구하자 하고 어리석은 탐진치의 갈망을 구하고 채우는 행위로 나서게 됨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닙니까? 지금 현재의 불교의 문제점을 말하면 남의 탓한다고 너나 잘하라시니 더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님께서 말씀하시는 유식학이니 하는 논장들은 일반 대중과 얼마나 유리된 언어로 부처님법을 풀어놓고 있는지 님께서도 잘 알지 않으십니까? 그러한 현학적인 논설이 과연 나자신과 님자신의 고의 소멸에 얼마나 훌륭하게 도움을 주고 있는지요? 그런것을 공부하셨다면서도 정작 뿌리가 되는 부처님법에 대하여는 앞뒤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시니 그 공부가 과연 재가신자들의 의식을 올바르게 일깨워주고 있다 하시겠습니까? 학교공부도 핵심을 알고 꿰버리면 그다음은 원리로 파악하고 이해해버리고 쉬워지는거
세상이치 아닙니까? 어려운거 산더미만하게 외우고 읽어서 짊어지고 있은들 그것이 자신의 고의 소멸에 아무 도움도 못된다면 그것자체가 번뇌덩어리 아닌지요? 부처님께서 번뇌덩어리를 짊어지고 있으라고 가르쳤습니까? 상견과 단견을 타파하여 중도연기법으로 현상을 통찰하여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를 실현하라는 가르침아닙니까? 저도 여기서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