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행기 223 - 광주(廣州 ) 이소룡 조거(祖居)
2071년2월2일 광죠우(廣州)의 영경방(永慶坊)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이소룡(부루스 리)의 조거(祖居)가 있습니다.
조거는 태어나기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살던곳이고
이소룡이 어렸을때 이곳에서 자라났습니다.
이소룡의 조거(祖居) 앞에서
이소룡의 조거(祖居)
이소룡은 중국계 미국인 영화배우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으며,
중국인 아버지인 유명 경극배우 이해천(李海泉)과 중국계+독일계 혼혈인 어머니인
하애유(何愛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인 하애유가 홍콩의 4대 명문 가족 중
하나인 하동가족(何東家族) 의 자손 중 하나라고 합니다. 명문가의 자손인 셈.
이소룡이 살았던 집에는 각종 이소룡의 포스터와 물건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이소룡도 매우 이른 나이에 데뷔했는데, 갓난아기 시절부터 영화에 나왔을
정도였고 아역배우로도 꾸준히 활동했습니다. 예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소해천이라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친구가 길을 지나다가 길거리 경극 공연에서
, "…대룡이 소룡을 낳으니 곧 이어지는구나!"라는 대사를 듣고, 대룡이 이해천이라면
진번은 소룡이 어떻겠느냐고 권해서 지었다고 합니다.
어릴 적에는 몸이 약해서, 7살 되던 무렵 신체 단련을 위해 태극권을 연마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술에 입문하게 됐다.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이 과거 홍가권(洪家拳)을
배웠던 영향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소룡이 본격적으로 무술 수련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무술의 기본이 된 영춘권(詠春拳)을 엽문에게 배웠으며, 그 외 같은 남권계열로
광동성의 유명한 권법이었던 채리불권(蔡李佛拳)을 익혔습니다. 원래 남권 유파들은
예부터 가족처럼 각별하게 지내던 풍속이 있던 분위기라서, 영춘권과 가까웠던
채리불권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소룡의 하단 공격기술들은
영춘권이 아니라 채리불권의 초식에 가깝다는 말도 있습니다.
다만 쿵후의 고수라는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어렸을 때는 끈기가 없어 금방 싫증을
내곤 하여, 한 무술을 깊이, 오래 배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나마 오래한
무술은 영춘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근시라서 접근전에 유용한 무술을 찾다보니
영춘권을 택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릴 때는 TV 등에서 아역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해서 인기도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골목대장에 가까웠고, 중고등 시절에는 부모조차도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불량아로,
매일같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당시 유행하던 차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싸움질은 더욱 심해졌고, 삼합회 간부의 아들과 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경찰이 찾아와서, “한 번만 더 당신 아들이 싸움을 벌인다면, 녀석을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59년 4월, 부모는 이소룡에게 단돈 100달러를
쥐어주고, 미국 샌 프란시스코에 사는 이해천의 누나, 이추봉(李秋鳳, Agnes Lee)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소룡의 어머니는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의 본처가 아닌,
첩 같은 것이었다가 이후 본처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가 불량아가 된 것엔
이런 이유도 작용한 건 아닐까? 그리고 미국으로 보낸 것엔,
미국은 속지주의(屬地主義)이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미국 시민권이
있었던 점도 작용했습니다.
이후 샌 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로 옮겨가 고등학교 과정을 계속했고, 그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이충침(李忠琛)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 Ruby Chow에서 일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은 듯합니다.
고교과정을 마치고, 1961년, 워싱턴 대학교 연극학과에 들어갑니다. 이때부터 이후 알려진
독서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는지, 철학, 심리학 서적을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영춘권을 비교적 오래 수련했을 뿐, 다른 무술들은 금방 싫증을 내곤 했던 어릴 때와는
좀 다르게 좀 더 본격적으로 복싱, 유도, 사바트, 태권도, 가라테, 말레이시아 권법 등
여러 무술을 접해 나아갔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고, 좋게 말하면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그의 면이 특정 무술의 형태나 한계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신체특성이나 스타일에 맞는 프리 스타일 파이팅을 추구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고, 나중에 절권도의 이념이 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1959년부터, Jun Fan Gung Fu(振藩功夫)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술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인근 가필드 고등학교에 쿵푸[功夫]시범 차 갔는데, 그때 이 학교 여고생들 중
린다 C. 에머리(Linda C. Emery, 1945~)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소룡의 쿵푸 제자가 되었고,
교사가 되려고 이소룡과 같은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1964년 8월 17일에 그와 결혼하면서,
졸업까지 몇 학점만 남겨둔 채로 대학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리고 1988년, 탐 블리커와
재혼했다가 1990년에 이혼, 1991년에는 브루스 캐드웰(Bruce Cadwell)과 결혼,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린다 리 캐드웰(Linda Lee Cadwell)입니다.
이소룡의 20대 초반 시절, 진번쿵푸의 주요 골격은 영춘권을 기반으로 채리불권,
홍가권 등등의 남권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다양한 무술에
비해 건설적인 변화와 발전이 부족했던 중국의 남파권법을 크게 개신(改新)한
인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어 기존의 체계를 없애버리고
새로 절권도를 만들 때는, 펜싱과 복싱, 레슬링을 조합한 뼈대를 바탕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합니다. 태권도를 이준구 사범에게도 배우게 됩니다.
이소룡은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많은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었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연극을 택할 정도로 배우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1959~1964년까지 열심히 노력했으나,
끼니를 걱정하게 될 정도로 난항을 거듭하여, 1964년에는 마침내 포기하고 무술에
전념하자고 결심하고, 자신의 무술을 홍보하려 인맥을 동원해 롱 비치 가라데 선수권대회에
시범자로 초청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무술시범을 본 윌리엄 도지어
(William McElroy Dozier)가 1964년, 그의 기획 《Number One Son》의 배역에 오디션을
보게 해줍니다. 이는 불발되었으나, 밴 윌리엄스(Van Willams)와 함께 TV 시리즈,
《그린 호넷(The Green Hornet)》의 케이토(Kato, 加藤)역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아
배역을 따냅니다. 이는 1966~1967년까지 단 한 시즌만 방영되었을 정도로
반응이 신통찮았으나, 《배트맨》과의 크로스오버 에피소드에 몇 번 더 출연할 수 있었고,
이후 TV의 《아이언사이드(Ironside)》(1967), 《신부들이 온다(Here Come the Brides)》(1969),
《블론디(Blondie)》(1969)의 찬조출연(guest appearance)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소룡의 싸인
영화 당산대형의 포스터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1971) - 이소룡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키는
것에 성공한 첫 번째 작품. 당시 홍콩에서 역대 흥행 1위이던 《사운드 오브 뮤직》을 제치며
319만 홍콩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이소룡 작품치고 상당히 잔인한 묘사가 많고 이해가
안 되는 장면, 코믹스런 장면, 짧지만 이소룡의 베드 신도 있을 정도로 이소룡 작품들 중
희귀한 작품이랄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데, 그의 최초 주연작이었기에
그의 영향력이 클 수가 없었습니다. 감독은 무술영화를 많이 감독한 유명 감독, 라유(羅維)였는데,
그는 당시부터 촬영 도중 경마중계(…)를 듣는 등 태업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이소룡과도,
이후 성룡과도 결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이소룡의 제자들 중 할리우드 각본가, 스털링 실리펀트(Stirling Silliphant)와 배우
제임스 코번(James Coburn)이 있었는데, 이 둘은 이소룡과 함께 1969년,
《소리 없는 피리(The Silent Flute)》 각본을 쓰고, 인도로 촬영지 답사를 가기도 했습니다.
이 각본은 무산됐지만, 1978년, 데이빗 캐러딘 주연의 《서클 오브 아이언(Circle of Iron)》에서
활용되었습니다. 1969년, 이소룡은 스털링이 각본에 참여한 덕에 《말로우(Marlowe)》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이소룡 팬들은 이를 이소룡의 흑역사로 평하기도 합니다.
주인공 필립 말로우(제임스 가너 분)을 협박하기 위해 고용된 부하 역을 맡은 이소룡이
주인공을 상대로 깽판 치다가 결국 주인공의 꾐에 빠져 죽는다는 내용입니다.
정무문의 포스터
《정무문(精武門, Fist Of Fury)》(1972) - 여러 번 리메이크된 작품으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쌍절곤이나 괴조음 등이 등장합니다. 추정제작비 약 10만 달러, 흥행은 홍콩에서 4백4십3만 홍콩달러(HK$ 4,431,423), 미국에서는 3백40만 달러.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경찰이 극장상영을 미뤄달라고
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성룡은 자신이 이 영화에서 이소룡의
발차기를 맞고 집 밖으로 날아가는 스즈키 관장의 대역을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전혀 얼굴이 드러나지 않아 이후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안습한 최후를 맞이하기 전 깽판 치는 장면에서, 영화감독은 이소룡의 재량에 맡겨 적당히
깽판을 부려달라고 주문했고, 이소룡은 앞차기로 전등을 부수는 등, 방 안에 있는 기물들을
온갖 몸놀림으로 박살내며 놀라울 정도로 그 역할을 수행해냈습니다. 이때 감독, 촬영 스탭,
배우들 등등 모두는,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아스트랄하게 과격하게 때려 부수는 모습에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합니다.
맹룡과광의 포스터
《맹룡과강(猛龍過江, The Way of the Dragon)》(1972) - 콜로세움에서 척 노리스와 1대1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게임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패러디되었습니다. 추정 제작비 13만 홍콩달러,
흥행은 홍콩에서 530만 홍콩달러, 미국, 캐나다에서는 520만 달러.
그리고 딘 마틴, 샤론 테이트 주연에, 척 노리스도 잠시 나오는 《The Wrecking Crew》에서,
실리펀트의 도움으로 무술지도를 맡을 수 있었고, 역시 실리펀트가 각본을 쓴 덕에,
잉그리드 버그먼, 안소니 퀸(Anthony Quinn) 주연의 《봄비 속을(A Walk in the Spring Rain)》
(1970)의 격투장면 연출도 맡을 수 있었습니다. 1971년, TV 시리즈 《롱 스트리트(Long Street)》에서,
주연 마이크 롱스트리트(제임스 프랜시스커스 분)의 무술교사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제자인 실리펀트가 각본을 맡았기에,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철학을 일부나마 자신의 대사로
넣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이소룡이나 린다 리 캐드웰에 의하면, 1971년, 이소룡은 《전사(The Warrior)》라는 제목의
TV 시리즈를 구상했고, 이는 워너 브라더스도 확인해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1971년 12월 9일,
《The Pierre Berton Show》에서 이소룡의 주장에 의하면, 파라마운트와 워너 브라더스는,
서구적인 부분이 결여되었으니, 그런 면을 더 넣어서 현대적으로 다듬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소룡의 그 구상은 이후 다듬어져 《쿵푸(Kung-Fu)》로 개명되었지만,
워너 브라더스는 이소룡에게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워너 측의 말은 공식 입장은
이와 다른데, ‘그들이 우리 작품과 동일한 컨셉을 잠시 구상했기는 했지만, 우리 작품은 다른
각본가들과 제작자들, 즉 에드 스파일먼(Ed Spielman)과 하워드 프리들랜더(Howard Friedlander)
에 의해 창작된 것이다’.
용쟁호투의 포스터
《용쟁호투(龍爭虎鬪, Enter The Dragon)》(1973) - 이소룡이라는 배우를 전 세계에 알린 작품으로
워너브라더스사에서 배급. 85만 달러라는 저렴한 제작비를 들여, 홍콩에서 330만 홍콩달러,
미국에서 2,50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는 9,0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흥행기록을 수립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성룡이 엑스트라로 출연한 영화로도 유명하며, 이소룡은 이 영화를 통해서
성룡을 발굴해냈다고도 전해진다《정무문》에서 성룡은 이소룡에게 맞고 날아가 죽는 일본인
관장의 스턴트를 했었는데, 당시 한 사람이 장비 없이 날아간 거리로는 최고였고
《용쟁호투》에서는 경비원 중의 한 명으로 등장했는데, 이소룡의 실수로 실제로 너무 세게 맞아서
부상까지 입자 이소룡이 사과의 의미로 다음 영화에서는 성룡을 꼭 조연이라도 영화에 출연
시켜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을 정도로 성룡은 뛰어난 실력의 스턴트맨으로 유명해지게 됩니다.
여러 증언들과 증거들을 검토해보면, 이소룡이 캐스팅되지 못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가 동아시아인이라는 것도 있긴 했겠지만, 주된 원인은 그의 투박한 영어발음 때문이라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서부시대의 소림승 역할은 데이빗 캐러딘에게 돌아갔다는 것.
《The Pierre Berton Show》에서 이소룡은, 워너 브라더스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사업에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으니, 자신은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고 발언했습니다. 만약 미국인 스타가
홍콩으로 왔고 그가 제작비를 대는 입장이었다면, 그 역시 그런 걱정을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소룡 생가 옆의 골목입니다. 이곳은 영화박물관과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이렇듯 이소룡(李小龍)은 인맥을 동원하고 각본을 쓰는 등 여러 가지로 애썼지만, 조연이나
찬조출연이 다였기에, 실망하고 좌절하던 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작자 프레드
웨인트라웁(Fred Weintraub)이 이소룡에게 충고합니다. 홍콩으로 돌아가서 여기 할리우드
제작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장편 극영화를 찍어보라고. 결국 홍콩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있고 해서, 이소룡은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이소룡의 생가의 거실
당시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는 왕우(王羽) 주연의 《용호투(龍虎鬪, The Chinese Boxer)》(1970)가
대성공하며, 예전의 무협영화, 검술영화가 아닌, 맨손, 맨몸으로 싸우는 무술영화가 뜨고 있었습니다.
친구인 소기린도 이소룡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홍콩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소룡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린 호넷》의 케이토 역이 중국인이라는 것이 홍보되었기에,
인기가 없어 한 시즌 방영에 그친 미국과는 달리, 중국식 제목은 《청봉협(青蜂侠)》이었지만,
홍콩에서 비공식적으로는 《Kato Show》로 알려질 정도로 성공했었습니다. 이소룡은 이후 자신이
막 홍콩에 돌아왔을 때, 홍콩에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봐서 놀랐다고 술회했습니다.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이소룡은 홍콩 최대의 영화사인 쇼 브라더스(Shaw Brothers:
소씨제편창邵氏製片廠)로 가서 면접을 보았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웬 바짝 마른 건달
비슷한 놈이 미국물 먹었답시고 예의도 안 차리고 건들거리면서 들어와서는, 자기를
주연으로 해서 영화 찍으라고 해대니, 사장이 불쾌해 하면서 화를 내며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런 이소룡을 잡은 게 쇼 브라더스에서 독립해 나와, 가화오락유한공사(嘉禾娛樂有限公司),
즉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를 세운 추문회(鄒文懷)였습니다.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와 두 편의 영화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이소룡은 《당산대형》(1971)으로 흥행기록을 세워 대스타가 되었다.
연이어 《정무문》(1972)으로 그 기록을 다시 갱신합니다. 골든 하베스트와의 계약을 마무리한
이소룡은 협화전영공사(協和電影公司, Concord Production Inc.)를 설립하고, 스스로 각본,
감독, 주연, 무술지도, 제작까지 맡은 《맹룡과강》(1972)으로 다시 신기록을 세웁니다.
1972년, 골든 하베스트와 함께 《사망유희》를 기획한다. 그때 워너 브라더스에서 《용쟁호투》를
골든 하베스트와 합작으로 제작하자는 제안이 들어옵니다. 당시 이소룡은 스타시스(Starseas)
영화사와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기린장(麒麟掌, Fist of Unicorn)》 때문이었는데,
이 영화는 그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 소기린이 주연한 영화로, 이소룡은 무술지도를 도와주기로
슬쩍 동의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제작사가 마치 이소룡 주연인 것처럼 홍보한 것.
소기린 역시 이에 분노했다고 합니다.
성룡이도 이소룡 영화에 단역으로 나왔습니다.
《용쟁호투》 촬영을 마무리하고 몇 개월 후, 7월 26일 개봉을 6일 앞둔 1973년 7월 20일,
그의 애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했던 여배우 정패(丁珮 Betty Ting Pei)의 집의 침대 위에서
만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이 때 그녀는 이소룡이 두통을 호소해서 진통제를
주었는데, 이소룡은 그걸 먹은 후 잠든 뒤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의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복용 약품 부작용이지만, 부검의나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등 상당히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복상사라느니 마약중독사라느니
등등 각종 소문이 무지하게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