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성이 발견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태양계의 행성이 여섯 개인 것으로 알았다.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이 그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가 태양계 호적을 정리한 후, 지동설이 발표된 뒤에도 태양계 식구는 변함없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숨겨진 아들이 등장했으니,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주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태양계의 일곱 번째 행성 발견
1781년 3월 13일 밤, 윌리엄 허셜은 오늘도 변함없이 자신이 만든 반사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하고 있었다. 천체망원경으로 바라본 하늘은 늘 아름다웠다. 그 속에서는 매일 밤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었다. 그는 오늘의 밤하늘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자못 궁금하면서도,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일이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을 억누르고, 별과 별이 흐릿했다가 점차 눈앞에서 분명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밤하늘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쌍둥이자리 한쪽 구석에서 파란 빛의 작은 원반 같은 별을 발견했다. 저 별, 분명히 특별한 별인데… 저 별에 대해서는 한번도 얘기된 적이 없는 것 같아… 허셜은 그 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허셜은 조수 역할을 해주는 여동생 캐롤라인과 함께 그 별의 움직임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저 빛이 조금씩 걸어가고 있어.” “그렇네요. 약간씩 움직이네요.” 3월 13일, 낯선 별을 발견한 이래 그들은 매일 밤 그 별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기록했다. 그 기록은 그 별이 큰 궤적을 그리며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저 별은 도대체 무엇일까? 항성은 절대 아니고, 아마도 혜성일 것 같아.” 몇 달 동안 세밀하게 관찰한 기록을 토대로 윌리엄은 왕립학회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이 별을 후원자인 조지 3세를 기념하여 ‘조지의 별(Georgian Star)’이라고 명명했다.
천왕성의 발견은 해왕성이나 명왕성의 발견보다 더 획기적인 일이었다. 해왕성이나 명왕성의 존재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견되었다면, 천왕성의 존재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검토한 그리니치 천문대장인 맥스라인은 윌리엄 허셜이 발견한 별이 토성의 바깥쪽에 있는 행성인 것 같다고 말했다. 2천 년 동안 확고부동했던 토성까지의 태양계가 크게 확장되는 사건이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지금까지는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또 하나의 행성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보이저2호가 촬영한 천왕성(NASA)
천문학계에서는 새로운 행성이 나타났으니 다른 행성 같은 근사한 이름이 붙여져야 한다는 의견이 오갔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행성에 영국 왕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며 발견자 이름을 따서 ‘허셜’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결국 여러 천문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새로운 행성은 ‘우라누스’(Uranus)라는 이름으로 확정되었다. 우라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초의 하늘 우라노스의 영어식 이름이었다. 우라누스는 하늘의 신이니, 한자로는 천왕성(天王星)이었다.
음악 신동이면서도 과학을 좋아한 어린 시절, 영국에 가서 음악의 꿈을 키우다
1738년 11월 15일, 허셜은 독일 하노버에서 군악대의 오보에 연주자 이작 허셜의 아들로 태어났다. 허셜의 부모는 자식을 열 명이나 낳았다. 그러나 넷은 어렸을 때 죽고, 여섯 명만 살아남았다. 그 중 장남 야곱, 차남 윌리엄, 삼남 알렉산더, 사남 디트리히, 막내딸 캐롤라인이 음악가가 되어 음악 일가를 이루었다. 아들들은 군인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모두 다방면에서 뛰어났다. 특히 허셜은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할 정도로 음악신동이었다. 아버지는 야곱과 허셜이 자신이 악장으로 있던 군악대에 들어가기를 원했고, 불과 14세에 허셜은 군악대의 대원이 되었다. 허셜은 음악신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에도 탁월했다. 아버지의 명민한 두뇌를 이어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과학 실력도 상당했다. 허셜은 아버지와 과학에 대해 자주 토론했다. 부자가 함께 적도와 황도를 새겨 넣은 지구의를 만들기도 했다. 허셜은 날마다 새로운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과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갔다. 아이작 뉴턴,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레온하르트 오일러 같은 과학자와 철학자와 천문학자가 허셜에 의해 밤마다 불려 나왔다.
하노버는 영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하노버 수비대는 자주 영국을 방문했다. 군악대에 들어간 지 3년이 된 1756년 아버지와 야곱과 허셜은 군악대의 일원으로 영국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켄트 주의 주도 메이드스톤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것은 허셜과 영국의 첫 인연이었다. 영어를 독학하고 존 로크의 책을 독파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도 허셜의 학구열은 식지 않았다. 그 해 가을, 허셜의 군대는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하노버로 돌아갔다. 1757년 7월 26일 하스덴베크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허셜 가족은 물이 가득 찬 수로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아버지는 허셜에게 도주하라고 권했다. “민가에 가면 음악 개인교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야밤에 탈영한 허셜은 곧 돌아오고 만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욕구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아버지는 야곱과 허셜에게 함께 탈영할 것을 권했다.
1757년 10월 야곱과 허셜은 탈영하여 런던으로 갔다. 군악대원이긴 했지만 소년 허셜의 경우는 탈영이라 볼 수도 없었다. 이렇게 탈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중에 정식 제대허가서를 받는다. 생면부지의 런던에서 야곱과 허셜 형제는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그러나 형제는 용감했다. 형은 바이올린 연주와 음악 가정교사로 일하고, 동생은 악보 베끼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난 속에서 허셜은 점차 성인이 되어가고 있었고, 차츰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1759년 하노버에 평화가 찾아오자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허셜은 형 없이도 영국에서 혼자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는 당시 음악의 왕국이었던 영국에서 활동하고 싶었다.
성공한 연주자이자 작곡자였던 만능 음악가의 열정이 천문학으로
음악가에서 천문학자로 거듭 성공한 허셜.
뜻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오게 마련이었다. 요크셔의 다링턴 백작이 허셜을 초청한 것이다. 리치먼드 수비대의 대장인 다링턴 백작은 작은 군악대를 만들었다. 군악대의 급여가 형편없어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지만, 허셜은 당시 천문학 교수였던 로버트 스미스(1689~1768)의 <화성학, 음악의 철학>을 읽고 음악이론에 깊이 몰입하게 되었다. 음악이론을 접하면서 그는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또한 그는 음악가이자 천문학자인 스미스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에 심취했던 천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형편에 천문학에 도전하기는 힘들었다.
1766년 해리팍스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지명되면서 비로소 허셜은 생활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허셜은 이제 영국에서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그는 연주회 때마다 새로운 곡을 선보이곤 했다. 해리팍스에서 3개월 밖에 머무르지 않았는데, 배스 시의 옥타곤 채플에서 오르간 주자로 초청했다. 배스로 이사한 허셜은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의 연주회는 매번 대성공이었다. 그는 바로크 음악에 종교적인 면을 줄이고 오락성을 가미했다. 그러나 그의 작곡활동은 44세에 끝나게 된다. 생활이 안정되자 그의 열정이 결국 천문학으로 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24개의 교향곡, 7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포함하여 수백 곡을 작곡했다.
천문학자가 된 허셜, 그의 조수가 된 여동생 캐롤라인
30대 중반, 음악가로 크게 성공했음에도 허셜은 만족하지 못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토록 오랜 수련 끝에 이룩한 성과를 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꿈꾸기 힘들 것이다. 위대한 업적을 세운 위인들에게는 과감한 도전정신이 있었다. 혹시 음악으로 크게 성공했음에도 허셜은 자신의 음악이 시대를 넘어 세계에 널리 퍼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까? 그의 음악이 유럽에서 간간이 연주되긴 하지만, 그는 음악가보다는 천문학자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천문학계에서 세운 그의 업적이 그만큼 출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배스에서 생활이 안정되면서 허셜은 고향에서 바로 밑의 남동생 알렉산더와 여동생 캐롤라인을 데려왔다. 캐롤라인은 음악에 소질이 있었지만 무척 못생겨서 혼인 적령기가 되었지만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허셜은 영국에 가면 “너의 소질을 계발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캐롤라인이 가수로서 성공해가는 동안 허셜은 밤마다 하늘을 구경하고 천문학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 그의 머리맡에는 항상 천문학 책이 쌓여 있었다.
허셜이 1789년에 만든 40피트 망원경
처음에 허셜은 시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반사망원경을 빌려서 밤하늘을 관측했지만, 점점 더 자세히 우주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는 먼저 커다란 굴절망원경을 만들었는데, 통이 너무 길어 지탱하는 것마저 곤란했다. 이번에는 목표를 바꾸어 5.5피트 반사망원경을 만들었다. 이제 허셜 남매에게는 새로운 눈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집도 밤하늘을 관측하기 좋은 곳으로 옮겼다. 새로운 집에서 허셜은 개량 망원경을 여러 개 만들어 팔기도 하고 직접 쓰기도 했다. 음악가 윌리엄 허셜이 이제는 완전하게 천문학자 허셜로 바뀐 것이었다. 허셜 남매는 밤마다 우주가 펼치는 쇼에 날이 밝아오는 것도 잊곤 했다. 물론 날이 밝아오면 별이 보이지 않으니 관측은 자연스레 끝나게 되었지만, 그때부터는 이론적인 연구에 매진했다. 허셜은 다만 캐롤라인이 자기 때문에 음악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캐롤라인도 우주의 신비를 캐는 데 이미 빠져 있었다. 허셜의 조수 캐롤라인은 언제나 필기구를 쥐고 관측 내용을 기록했다. 꾸준한 노력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성공은 언제나 우연처럼 찾아오는 법이었다. 1781년 3월 13일, 마침내 우연한 행운처럼 허셜의 눈에 파란 빛을 발하는 천왕성이 들어온 것이다.
거대한 우주를 설명하는 은하에 대한 이론 정립하고 우주로 떠나다
허셜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우주의 모습을 최초로 그린 천문학자였다. 그는 수천억 개의 별이 띠 모양으로 모여 있는 별의 집단을 은하로 보고, 우주가 수많은 은하로 이루어졌음을 밝혀냈다. 우주 탐사가 끊임없이 이루어져 천문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허셜의 은하 이론 틀이 유지되고 있다. 천왕성의 존재는 또 65년 후 해왕성 발견에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업적을 이룩한 허셜에게는 충실한 조수인 여동생 캐롤라인이 있었다. 캐롤라인은 단순히 조수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본격적으로 우주 탐사에 뛰어들어 혜성과 성운, 성단을 찾아냈다. 놀라운 것은 허셜 남매가 학교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천문학 전공자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불리한 조건을 딛고 열정과 의지로 이룩한 성공은 더욱 값진 것이었다.
허셜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천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중년을 보내다가 거의 늙은 나이에 혼인했다. 그러나 워낙에 건강했을 뿐만 아니라 일에 빠져 살았기 때문에 나이를 잊고 살았다. 그는 54세 때 아들 존 프레더릭 윌리엄 허셜을 낳았다. 허셜 집안에 또 한 명의 천문학자가 자라나게 된 것이다. 1822년 8월 어느 날, 여든 살의 허셜은 여전히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신의 연구 결과를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그는 해야 할 일이 태산 같다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 우주는 너무도 막막해! 성운과 성단에 대해 더 알아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노인은 의자에서 쓰러졌다. 열흘이 지나도 의식을 찾지 못한 그는 결국 8월25일, 날마다 자신을 꿈속으로 안내한 하늘로 떠났다. ‘아버지가 못다 한 일을 내가 꼭 해내고야 말리라.’ 장례식장에서 허셜의 아들 존은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우주와 태양계에 관한 책은 크리스타 매콜리프와 클라이드 톰보를 소개하면서 추천했으니, 여기서는 윌리엄 허셜의 삶과 관계된 것만을 추천하도록 한다. 우주에 관한 책은 대단히 많이 나와 있고, 앞으로도 꾸준히 출간될 것이다. 그만큼 우주를 향한 우리들의 열망이 뜨겁다는 것을 말해주는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우리는 가끔 밤하늘마저 볼 시간이 없는 경우가 많다. 우선은 밤하늘을 보자. 그러면 별에 가까이 간 천문학자들의 삶도 보일 것이다.
우리는 이 책에 소개된 천문학자 목록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히파르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등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천문학자에서 갑자기 근대를 연 16세기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로 건너뛰기 때문이다. 이 목차는 고대에 이루어진 서양 천문학의 토대가 천년 동안 전혀 변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윌리엄 허셜뿐만 아니라,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 에드먼드 핼리,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퍼시벌 로웰 등은 모두 망원경을 통해 별나라를 여행한 아름다운 몽상가들이었다. 그들의 생애 속에 이 신비롭고도 광대한 우주가 들어 있다.
사이타 히로시의 <별에 가까이 간 사람들 1,2>(김장호 옮김, 가람기획, 2002) 역시 큰 족적을 남긴 천문학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지만, 저자는 그들의 천문학적인 업적뿐만 아니라 생애 자체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윌리엄 허셜의 경우에도 본격적으로 천문학을 연구하던 시절은 짧게 소개한 반면 음악에 열정을 불사르던 시절은 비교적 상세하게 조명했다. 저자는 천문학의 세계에 빠진 사람들은 괴짜가 많다고 말한다. 천문학은 아무래도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학문이라기보다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뜬구름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꿈은 우리가 끊임없이 갈구하는 우리 자신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험난한 길을 스스로 걸어 들어간 그들의 생애가 어찌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정완상의 <허셜이 들려주는 은하 이야기>(자음과모음, 2005)는 윌리엄 허셜이 정립한 은하 이론을 설명한 어린이책이다. 허셜이 세운 은하 이론은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저자는 허셜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속해 있는 우리은하는 물론 외계 은하와 성운, 성단 등에 대해서 매우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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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창룡 / 시인, 문학 평론가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발행일2009.03.13
함석헌 咸錫憲 1901년 3월 13일 태어남 / 1989년 2월 4일 죽음
"생명의 씨알은 눈이 있고 귀도 있고 입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두려움이 없어야 사실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작은 나 속에 갇혀 있지 않고 큰 나 속에 한 통 치고 들어야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중략)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여는 일인데, 마음을 열지 않고는 천백 번 만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중략) 나는 하나의 우는 씨알입니다. 한 마리가 울어서 백백천천 마리와 같이 우는 민초(民草) 속의 풀벌레입니다. 서풍 속에 떠는 역사의 숲, 그 속의 작은 가지입니다."
- 함석헌
함석헌은 민중계몽운동에 힘쓴 종교인이자 사회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고, 평양고등보통학교,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10여 년 간 교직생활을 했다. 해방 직후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을 지낸 뒤 월남해, 1956년부터 <사상계>를 통해 그의 사상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한일협정을 반대한 단식 투쟁과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 등 종교인으로서 사회운동에 참여했으며 필화사건을 여러 차례 겪었다. 1970년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사회개혁을 위한 글들을 발표하는 한편, 독재반대투쟁과 민권운동을 끊임없이 펴나갔다. 1979년과 1985년 2차례에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었고, 제1회 인촌상을 받았다.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에서 납북되었던 신상옥·최은희가 탈출에 성공했다. 1978년 영화배우 최은희가 납북된 데 이어 영화감독 신상옥도 홍콩 여행 중 납북되었다.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작품에 거의 모두 출연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납북된 신상옥은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실권자인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설립했으며, 최은희와 함께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탈출기>(1984)·<소금>(1985)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1986년 신상옥은 오스트리아에서 최은희와 함께 서방세계로 극적으로 탈출했으며, 이후 칼기 폭파사건을 다룬 영화 <마유미>(1990)를 제작했다.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인류학과 홈페이지에서는 북한영화의 역사와 성격을 분석한 김영훈의 글 북한영화 어떻게 볼 것인가?를 제공한다. 빨간 마후라 홈페이지에서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 <빨간 마후라>의 작품 정보와 최은희가 출연한 영황 장면을 담은 사진 자료를 제공한다. <일간스포츠>(1998. 11. 11)는 신상옥 관련 기사 '신상옥 감독 북한영화 극장서도 본다'를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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