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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성탄 준비
글 : 이 클라우디아(해인) 수녀
<성 베네딕도 수녀회>
우리의 삶이
아무리 바쁘고 고단하더라도
12월엔 그분을 기다려야 하리,
어린이로 오시는 구세주 예수님을...
죄로 얼룩진 남루한 마음
어둠에 익숙하여 드러내기 싫은 모습
더는 망설이지 말고
빛으로 오시는 아기 앞에
눈물로 무너지는 환희를 맛보아야 하리.
사랑이신 예수님이 사랑으로 태어났기에
집이 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온 인류를 가족으로 힘차게 끌어안으며
우리 모두 하나 되어야 하리.
눈 속에 묻혀서도 일어서는 보리처럼
우리의 언 가슴에 푸른 희망을 키우며
어린이로 어린이로
맑아져야 하리.
얼음 밑에서도 쉬임없이 흐르는 냇물처럼
있는 그대로의 겸허함으로
우리 모두 이웃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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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기도는 성령을 지피는 일 <제2부>
윤 클레멘트(양호) 신부님
<전주교구청 사무처장/홍보국장>
3) 기도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사랑하는 일
항상 기도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늘 기도하며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일터, 생계, 삶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다 짐 지워져 있는데, 어떻게 기도만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어떻게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인간 마음과 영혼, 자신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주신 것 같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이는 다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멍에는 편하며 나의 짐은 가벼우니… 나에게 와서 쉬고 먹으며 나와 함께 할 것이니…’ 그렇게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달려가고, 그분 앞에 무릎 꿇으며, 그분 안에 엎드리는 일일 것입니다.말씀은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나의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으니…’ ‘내가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누구든지 나에게 문을 열면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쉬리라…’우리는 기도의 느낌, 생각, 말들을 통해서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크고 작은 희생, 봉사, 일들의 기도의 행동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기도는 우리 인간 영혼에게 하느님을 느끼고 만나는 사랑, 평화, 은총의 기쁨을 선물해 줍니다. 아울러 우리는 기도 중에 치유의 은총을 만나기도 합니다. 헨리 누우웬 신부님은 말합니다. 기도는 치유의 자리로 모든 슬픔을 이끌어줍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따스한 사랑이 분노와 미움의 차가운 마음의 얼음을 녹게 하는 것이며, 슬픔에는 기쁨을, 쓰디쓴 찬탈(簒奪)에는 자비를, 두려움에는 사랑을, 배신과 서로 다름의 차이를 극복하는 점잖음과 돌봄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느님 사랑의 친교에로까지 모든 사람에게 열린 예수님 선교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Prayer embraces the World)우리는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마음에 어둠과 아픔이 오고 괴로움 중에 기도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영혼의 쓰라림과 고통에서 기도합니다. 기도를 드리는 중에, 기도 안에서,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우리에게로 가까이 오십니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느님, 나의 곁에 계시는 하느님, 나의 손 잡으시는 하느님, 나에게 손 얹어 위로하시는 하느님, 나를 낫게 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서 현존(現存)하시는 분이십니다. [쌍백합, 제16호, 2007년 봄호]
4)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빛을 받는 일
기도한다는 것은 죄, 어둠, 그늘, 고통, 비참으로 얼룩지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거룩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다… 모든 것들은 사라져가도 하느님만이 영원하시지요.… 모든 것들은 없어져 가더라도 하느님은 남습니다.… 영원히 영원히….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는 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와서 배워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나의 짐은 편하다…’ ‘나의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으니….’ 기도는 하느님께 달려가는 것, 다가가는 것, 찾아가는 것, 가져가는 것, 드리는 것, 봉헌하는 것, 아뢰는 것, 말씀드리는 것, 말하는 것, 들음, 바라봄, 응시함, 머무름, 고요함 등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누우웬 신부님은 말씀하십니다.한편 기도는 우리 인간 영혼들의 마음, 의지, 태도를 하느님께 드리는 것 이외에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라는 말씀은 또한 시간을 넘어서서 기도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우웬 신부님은 말씀하십니다.우리 신앙인들의 기도생활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의 시간들에 따라서, 기도의 양에 따라서, 기도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질 것임이 분명합니다. 여러 기도, 묵주기도, 성체조배, 미사, 나눔과 봉사, 정기적인 피정, 세미나 참석 등등… 그렇게들 잘하고 계시지요? … 그렇게들 하시지요? 5) 기도의 힘한때 미국사회를 영적인 이야기로 움직이시던 주교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은 당대의 유명하신 피정 지도자, 강론가, 연설가, 대중 매체를 활용하던 강연가이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풀톤 쉰(1895-1979) 주교님이신데, 그분의 강론 시간이 되면 지나가던 택시들이 한쪽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서 혹은 일제히 라디오 채널을 그분의 강론시간에 맞추어서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어느 날 한 대담프로에서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주교님은 그러한 영적강론에 탁월하시고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십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주교님이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강론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말씀으로부터 오는 묵상을, 성체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각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매일 한 시간씩 성체 앞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제가 살아갈 힘을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지요…”전통과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훌륭하신 성인성녀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말씀과 기도 안에서 살았던 분들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말씀과 기도의 생활로 우리가 변하지 않고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들이 말씀 안에서 살고 성체중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행하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속빈 강정이 될 위험이 많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처럼,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 됩니다.’ 교회안의 영성가들의 말처럼,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은 하느님을 모르는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어떤 제자들이 어느 하루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이시여, 어떻게 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비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스승은 한참이나 제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그대들의 노동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노동하지 않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사도의 말씀을 따르려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대들이 먹고 잠을 잘 때는 누가 그대들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그들은 아무 대답을 못했습니다… 스승이 천천히 말했습니다. “우리는 노동을 하면서도 쉬임없이 기도할 수 있네. 하느님과 함께 노동의 도구를 들거나 잡게. 삽, 괭이, 호미, 혹은 다른 도구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좋으심과 당신 자비의 풍요에 따라, 저의 죄로부터 저를 구하소서…’(Pray without ceasing, The Sower's seeds)”6) 예수의 기도, 기도는 호흡과 같이잠시 같이 해보기로 합니다.“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나를(저를, 저에게) 불쌍히 여기소서(자비를 베푸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저를, 저에게) 불쌍히 여기소서.(자비를 베푸소서.)/ 예수여 나를(저를, 저에게) 불쌍히 여기소서.(자비를 베푸소서.)/ 예수여…”기도는 우리 인간 영혼들의 바람과 아룀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들, 기도는 호흡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먹고 마시며 행동하고 쉬며 가르치고 배우며 놀고 일하는,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현존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두려움 없는 대화 속으로, 두려움의 격리로부터 나와서 하느님과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우리는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 절망과 고통 속에서 힘없이 길을 가던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함께 길을 걸으시면서 새로운 힘과 영혼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던 부활하신 예수님… 때때로 많은 날들 우리 삶에서 겪고 만나는 어려움에서도 기도를 통하여, 기도 안에서 새로운 힘과 용기, 은총을 입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기도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안에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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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일
2013. 12. 1
미태오 24, 37~44
♠ 복음 연구
* 37~39절 : 마태오와 루카는 어록을 옮겨 쓴 것이다. 노아시대와 현재는 매우 비슷하다는 논지를 편다. 미구에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 인자는 온다. 인자 내림에 대비하여 깨어 준비해야 한다. 즉 회개의 결단을 내려야 마땅하다.
* 40~42절 : 이중 상징어는 어록을 옮겨 실은 것이다. 마태오와 루카의 형태가 상당히 다른데 어느 것이 어록을 더 잘 보존했는지 가리기 쉽지 않다. 루카의 형태는 “그 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한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어느 형태를 따르든지 뜻만은 같다. 즉 두 사람 가운데서 회개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구원과 멸망의 판단은 하느님, 또는 인자가 내리는 것 같지만 실은 각자 구원과 멸망을 자초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인자는 가자의‘행실대로’판단하시기 때문이다.
* 43~44절 : 도둑을 지키는 집주인의 비유 역시 어록을 옮겨 쓴 것이다. 이 비유는 이른바 위기 비유류에 속한다. 곧 종말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모르니 늘 대비하고 있으라는 뜻을 지닌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순간이 종말이라고 여기시고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이 되면 인자가 내림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룩한다고 보았다. 즉 하느님 나라와 인자 내림을 거의 동시 사건으로 본 까닭에 ‘하느님의 나라가 옵니다.’를‘인자는 옵니다.’로 고쳐 쓸 수 있었다. 또한 1세기 교회에서는 이 비유의 영향을 받아 예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온다거나, 또는 예수 주님은 도둑마냥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는 표현을 즐겨 썼다.
♠ 복음 요약 : ‘종말의 때에 관해서 아들조차도 모른다’는 말씀은 그분을 전지하신 성자로 섬기는 신앙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님의 한계를 명언한 히브 4/5를 보면 “우리의 대제관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 외에는 모든 일에 있어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느님 홀로 종말 때를 아신다는 사상은 유대교 묵시문학에도 있다. ‘오직 당신 홀로 종말의 때를 아시나이다.’ (시리아어 바룩 21장 8절) 바오로도 50년경에 집필한 ‘테살로니카 1서’ 에서 비슷한 내용을 말한다. “주님의 날은 밤중의 도둑처럼 옵니다. 사람들이‘태평하다, 안전하다’고 할 때 갑작스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터이니, 그것은 임신한 이에게 닥치는 산고와 같아서 결코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 대화 방향 : ① 어릴 적에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려 본 적이 있는지요. 오늘날 나에게 있어서 산타할아버지는 누구이며, 그를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곰곰이 새겨봅시다.
②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누구에게 희망을 준적이 있는지요? 만일 준적이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나눠봅시다.
♠ 참고 문헌 : ▪ 200주년기념 성서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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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일 (인권주일/사회교리주간)
2013. 12. 8
마태오 3, 1~12
♠ 복음 연구
* 1-4: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종말이 가까워지면 엘리아가 나타난다는 것이 유다의 민간신앙이었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죽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사라졌다. (2열왕 2,11). 그리하여 심판하시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민중을 회개시키러 엘리아가 다시 온다고 믿었다. 마태오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아로 묘사하고 있다.
* 5-6: 추종자들은 철저한 참회와 절식으로 그를 따랐다. 예수님게서도 요한을 위대한 예언자로 선언하셨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하셨던것이다. (마태 11,11) 그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면서 신약의 첫 예언자였다.
* 7-10: 많은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한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불속에 던져진다고 경고한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자기가 어던 사람인지 가만히 자기가 하는 말을 스스로 잘 들어 보면 안다. 멀리까지 가서 알아 볼 필요가 없다. 자기가 칭찬을 얼마나 하는지 아니면 험담을 얼마나 하는지 들어 보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누군가를 칭찬하며, 입안에는 긍정적이고 따스함을 지닌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의 내면은 사랑으로 가득차게 된다.
* 11-12: 그는 분명하게 자신을 밝힌다. 자신은 단지 주님이 오심을 예고하는 소리일 뿐이라고, 그리고 주님이 오심을 선언한다.
♠ 복음 요약 : 대림절은 보속보다는 기쁨을 강조하는 시기이다. 즉 축제의 기간이다. 그래서 교회법은 사순절과는 달리 대림절 동안에는 단식과 금육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늦가을이 가기 전에 오시는 그분을 기다리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황지우시인의시“너를 기다리며”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보자. 너를 주님으로 바꿔서 읽어 보자.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 대화방향: 오시는 주님을 깨끗한 모습으로 맞이하기 위해 자신을 들여다 보자. 내 마음속의 방안을 깨끗이 청소해보자 그분이 오시기에 그분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 우리의 정성을 다해보자. 정성은 바로 사랑이며 주님의 열매를 맺는 일이 첫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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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2013. 12. 15
마태오 11, 2~11
♠ 복음 연구
* 2-3절 :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구원과 심판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이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예수님께 세례를 준 사람이다. 그는 사해 동쪽 마케루스 성채 안에 있는 헤르데 안티파스의 감옥에 갇혀 예수님의 구원활동과 열두 제자의 파견에 대해 들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를 투옥시킨 악한 이들이 그때까지도 심판받지 않은 것을 보고서 예수님이 과연 ‘오실 분’, 즉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그분이 영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메시아인지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다.
* 4-5절 :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곧 구원활동에 대해 보고 들은 것, 즉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이, 중풍병자, 나병환자와 말못하는 사람을 치유하고 죽은 이들을 소생시키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세례자 요한에게 전하라고 이르셨다. 예수님이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 6절 :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생각으로 구원활동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당신을 배척할 사람들이 있다고 여기셨다. 그 중 한 사람이 세례자 요한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고 있는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신분에 대해 걸려 넘어질 위험에 있었던 것 같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한 반면, 예수님은 당신이 구원을 베푸는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기대와는 달리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시는 메시아이다.
* 7-10절 :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대답을 전하러 간 사이에, 그분은 군중에게 당신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인물됨, 역할과 신분을 세 가지 질문형식으로 좋게 평가하셨다. 첫째 질문은 ‘군중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인물을 보러 광야에 나갔느냐?’이다. 위의 질문은 세례자 요한이 지조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와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임을 암시한 것이다. 둘째 질문은 ‘군중이 고운 옷을 입은 임금을 보러 나갔느냐?’이다. 군중은 세례자 요한이 사치스럽고 화려한 옷을 입기는커녕 광야에서 엘리야 예언자처럼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르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셋째 질문은 ‘예언자를 보러 나갔느냐?’이다. 군중이 보러 나간 사람은 물론 임금이 아니라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생각 이상으로 그를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인물, 메시아가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로 평가하셨다.
* 11절 :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왕권이 임하기 전에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셨다. 그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의 사명을 이행했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그 어떠한 인물도 구원의 역사에서 세례자 요한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그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 왕국이 실현되는 신약시대가 세례가 요한이 속한 구약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구약시대는 하느님이 구원을 약속하신 시대인 반면, 신약시대는 예수 메시아를 통해 구원을 성취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 복음요약 :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기대하던 바로 그 구세주가 예수님이신가 하는 의문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생각하던 구세주는 세상 종말에 오실 분노에 찬 심판관으로서, 엄하게 죄인들을 벌하고 강력한 태도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영광의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죄의 어린양이셨으며, 사랑의 하느님을 보여 주셨다. 소경과 병자 등의 회복과 죽은 자의 소생은 구약성서에서 언급한 ‘구원의 때’에 일어날 표징들이다. 예수님께서 평소하신 이 일은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밝히고 있다. 해방자이며 구세주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구세주이신 당신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고 증언하신다. 이런 고귀한 사명을 실천하고 있는 그를 구약의 어떤 예언자보다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의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은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을 성취할 것이라고 하신다.
◆ 대화방향 ①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원수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② 우리는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중개자이며 선구자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그 길을 닦고 준비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문헌 - 말씀의 등불 (가톨릭 신문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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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2013. 12. 22
마태오 1, 18~24
♠ 복음 연구
* 18-19절 : 예수님 시대 약혼 연령은 처녀의 경우 12세에서부터 시작되고, 청년의 경우 18세부터 24세였다. 처녀와 총각은 약혼을 하면 이미 법적인 부부로 간주되었으며, 약혼기간 중이더라도 둘 중 하나가 약혼을 깨면 이혼으로 간주되었다. 마리아와 요셉은 혼례식을 올리지 않았는데,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다. 요셉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 즉 하느님의 창조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요셉은 임신을 약혼파기로 여기고 이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법적 절차에 따라 소송을 걸어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지 않고 개인적으로 파혼하기로 했다. 그는 의로우면서도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 20-21절 : 요셉이 마리아와 이혼하려고 생각하는 동안,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은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일렀다. 이어서 천사는 요셉을 ‘다윗의 아들’이라 부르고, 태어나실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이름 지으라고 명했다. 이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인 요셉을 통해 다윗 가문 출신이 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유다인이라 이방인을 망라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다. 이 구원은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기 위해 피를 흘리심으로써 이루실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 22-23절 : 전 인류를 죄의 지배에서 구원하실 예수 메시아의 탄생은 하느님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약속하신 것이 실현된 것이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을 뜻한다. 하느님은 다윗의 후손이요, 당신의 아들인 예수 메시아 안에서 약속하신 대로 온전히 현존하며 구원을 베푸신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은 전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통해 ‘임마누엘’, 즉 그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 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살기 위해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여 부활, 승천하고, 세상 종말까지 그들 가운데 현존하신다.
* 24절 : 꿈을 깬 요셉은 천사의 지시에 따라 더는 무서워하지 않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마리아는 이제 모든 사람이 볼때 결혼한 요셉의 아내가 된다. 마리아는 아기를 낳고 요셉은 그에게 “예수” 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따라서 이 아기는 법적으로 요셉의 아기이며, 다윗에게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에 속하게 된다.
♠ 복음 요약 : ‘주님의 탄생’ 이라는 위대한 신비 앞에 우리는 다가서 있고, 세기를 거쳐 갈망하던 기다림이 이 순간에 집중되어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잉태라는 경탄스러운 방법으로 인간 역사 가운데 들어오신다. 요셉은 이 엄청난 강생의 신비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역할로 참여한다.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다가오며,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다. 요셉은 그것을 알았기에 정혼자의 동거전 임신이라는 뜻밖의 사건 앞에 고민하면서도 신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된다. 사람이 되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한 절대적 요건은 마리아와 요셉과 같은 믿음, 겸손, 순명이다. 옛 예언이 성취되어 오시는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즉 임마누엘이시다.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이 약속은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사야 예언자에게 주셨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 대화 방향 : ①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세상종말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와 동고동락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날마다 만나 뵐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② 나에게 오시어 함께 계시고 힘이 되어 주시는 그분을 나는 어떻게 느끼며 사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 (가톨릭 신문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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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성화주간)
2013. 12. 29
마태오 2, 13~15. 19~23
♠ 복음 연구
* 13절 : 천사가 요셉을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마리아의 잉태 시,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또 이집트에서 돌아오라고 일러준 이도 천사였다. 요셉에게 말하는 천사의 말투는 남편에게가 아니라, 양아버지에게 대한 말투였다. 성가정은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피난길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나라는 4백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파라오의 명예를 메고 괴로운 생활을 하였으나, 강력한 힘에 의해 기적적으로 해방되었다.
* 14절 : 우리는 성가정이 이집트의 어느 도읍에 숨어 살았는지 는 알 수 없다. 코프트 교회의 오랜 전통은 중앙 이집트의 앗숨나인 부근의 코스캄 수도원 소재지를 그 피난처로 지정하고 있다.
* 15절 : 헤로데가 죽은 날짜를 따져볼 때 성가정이 이집트에서 머문 기간은 몇 주간, 길어야 두 달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것으로 예언은 성취되었다. 호세아 예언서 11,1절에서 인용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이 출애급 당시에 이집트에서 구출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은 새로운 출애급을 통해서 구출되게 할 것이다.
* 19절 : 역사가 요세푸스는 과월절을 며칠 앞두고 죽은 이 왕의 저주 받을 모습을 기록하였다. 요셉은 언제나 그러하듯 하느님의 이 새로운 지시에 순종하였다.
* 20절 : 너를 죽이려고 찾던 자들이 다 죽었다는 말로 마태오는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킴으로써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노예 신분으로서의 해방,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라는 중요한 유사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로 돌아갈 때도 어느 마을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없다. 천사는 꼭 실천해야 할 말만 일러주고 있다. 요셉에게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과 일치를 실천할 기회를 주려고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 21절 : 요셉은 일어나 떠났다.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자기 의견을 말할 생각도 않고 기쁜 마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리라 굳게 믿었다.
* 22절 : 돌아가는 길에 아르킬라오가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르킬라오의 평판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 섭리는 알맞은 때에 개입하신다. 성가정은 꿈에 지시된 갈릴레아 지방으로 갔다.
* 23절 : 마태오가 ‘예수님이 나자렛 동네에서 살았다’고 알려주는 것은 ‘예수님이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리리라’고 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 복음 요약 :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낳고 기른 성가정은 얼마나 복된 가정이었는가! 그러나 그 복된 가정도 결코 평안하지는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힘든 피난살이를 해야 했고,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도 아닌, 이름 없는 나자렛 동네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았다. 예수님을 가운데 모시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고개 숙인 성가정은 모든 가정의 모범이다.
♠ 대화 방향 :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극복하는 삶을 살았는지 말씀과 경험을 연관시켜 묵상해봅시다.
♠ 참고문헌 : ▪ 신약성서 주해집 (크리스챤 출판사)
▪ 주석성서 신약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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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공현 대축일
2014. 1. 4
마태오 2, 1~12
♠ 복음 연구
* 1~2절 : 헤로데 임금은 기원전 4년에 에리고에서 병사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헤로데 생존시에 탄생하셨다는 언급이 사실과 부합한다면 예수께서는 적어도 기원전 4년보다 앞서 탄생하셨다. 마태오뿐 아니라 루카도 예수의 탄생지로 베들레헴을 꼽는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는 당연히 여기서 탄생한다는 예언과 속설이 있었다. (미가 5/1-2). 원문에서는 ‘동방에서 마고스들이 예루살렘으로 왔다.’고 한다. 마고스는 점쟁이인데 문맥으로 봐서 별을 보고 점을 친 까닭에 점성가라 하겠다. 점성술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성행했다. 동방에서 찾아온 점성가들의 신분이나 숫자나 이름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사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므로 서기 500년경에 이르러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점성사들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나아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 이 세 가지 예물에 준해서 임금 숫자를 셋으로 한정했다. 마침내 세 임금의 이름을 지어 발타사르, 멜키오르, 가스파르라 하였다.
* 3~12절 :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 유역을 점령할 무렵 모압 왕 발락은 몹시 당황한 나머지 유프라테스지방의 용한 점쟁이 발람을 초빙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퍼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발람은 오히려 여러 가지 축복을 베풀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야곱에게서 별이 떠오르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나리라.”(민수 24/17)는 축복이다. 발람의 이 축복이 마태 2/2, 루카 1/78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는 미가 5/1 인용문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는 2사무 5/2 인용문이다. 이방인들이 황금과 유향을 갖고서 예루살렘으로 조공을 바치러 오리라는 예언이 있었다(이사 60/6). 몰약은 값진 향료의 일종이다.
♠ 복음요약 오늘 복음은 먼 동방의 박사들을 예루살렘을 거쳐 베들레헴 마굿간으로 인도하는 신비한 별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은 것이 아니라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으러 오셨고 당신께로 이끄셨다는 사랑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의 원천인 태양으로 우리가 다가갈 수는 없지만 태양의 빛이 우리를(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즉 오늘 ‘주님의 공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바로 나에게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박사들의 선물 중 황금은 왕께 드리는 선물이며, 유향은 제사장에게, 몰약은 죽은 자를 위한 선물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참된 왕이시고, 완전하신 최고의 제사장이시며, 마침내 인간을 위해 생명을 바친 구세주이신 예수님과 잘 어울리는 선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요람에 가져갈 여러분의 선물을 꾸려 봅시다.우리 주변에는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과 나쁜 영향을 미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주는 사람도 아닌 것 같습니다. 가끔, 때로는 좋은 영향은 주고 있지 않을까 스스로 위로를 해봅니다만 돌이켜보면 저도 한 때 주변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빛이 되는 존재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던 때라든지 묵주기도를 공들여서 하고 있었을 때, 그 때에는 주변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알게 모르게 끼쳤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제 입에서는 늘 주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전교를 하곤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의 저는 전교를 게을리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은 제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도록 제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을 해야 할 것 같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돼야 할 것 같습니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주변인에게 빛을 발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러면 제가 전교하고자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제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절로 생겨날 테니까요. 쉽지 않겠지만 일어나 빛을 비출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한걸음씩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대화방향 : 가족 혹은 이웃과 관계 안에서 언제주님을 느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과거 그때에처럼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주님을 체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1고린토 13장에 보면 지금은 어렴풋이 보이지만, 나중에는 마주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보시기 바랍니다.
♠ 참고문헌 ▪ 신약성서200주년 주해서 ▪ 보득솔 - 청년성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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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콰도르 선교지 방문기 >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로마서 10,15)
이 사비나 (진재)
전주 효자우림성당 파티마 팀 FB
1926년부터 시월 마지막 주일의 앞 주일로 정해진 “전교주일”에 9명이 에콰도르로 10박 11일의 여행을 간다.(2013.10,21-31) 남미의 적도이며 가난한 나라여서 벌레에 물릴까봐 가족들도 걱정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파견되셨듯이, 낯선 선교지로 가신(1980.5,25) FB 창설자 최 규업 바오로 마리아 신부님과 교우들을 만나러 간다. 가족과 새벽미사(5시 30분)를 보면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기쁘게 다녀오겠다고 했다. 오늘 축제에서 연주(피아노, 바이올린)하는 세 딸을 축하해주며 어린 효은(10, 가브리엘라)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하늘빛은 에메랄드 블루에 바다색이 밀려와 철썩대며 부서졌다. ibis호텔에서 일정을 체크한 후 돈 맥클린의 “별이 빛나는 밤”을 떠올리며 빈센트 반 고흐의 엽서를 샀다. 창 안으로 새어 드는 감출 수 없는 달빛에 모두 달려 나가 손잡고 분수를 돌며 동요를 불렀다. “달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고”(영화 신과 인간의 실재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에콰도르의 수도인 키토를 지나 과야낄에 왔다. 마중 나오신 신부님과 수녀님께서는 망고를 두 자루 사서 실었고 다시 2시간 30분 차타고 빨말의 파티마 성모님 산뚜아리오에 도착하니 비행기만 25시간 15분 탔다.(21~22일) 오는 동안 분실했다 찾은 것(여권, 가방, 핸드폰)들과 무게를 맞추기 위해 선물들을 풀고 나누고 묶었던 일, 세관에게 걸린 참깨를 통과시키기 위해 맛보인 아찔했던 순간들을 과거의 추억으로 들려주었다. 안나 수녀님께서는 우리가 머물 파티마 성모님 순례성당이 세계 건축가상을 받게 된 연유와 구조에 대해 말씀하셨다. 도착해서 보니 큰 기둥 72개와 창문 72개(성당의 내부 구조인 8각형(진복팔단)에 창문이 9개씩)는 72제자 파견, 입구의 큰 기둥 네 개는 4복음서, 지붕 위 동그라미 건축 안에 모셔있는 십자가, 감실은 적도와 경도가 만난 세상의 중심, 예수님의 33년의 생애를 뜻하는 천장의 가로와 세로는 33m, 천장의 12개 층은 12지파와 12사도, 좌석배치는 어느 곳에서든 시선이 중앙을 향하도록 하는 등 성경적인 구조이다.(2000.12,8.완공) 이 모든 일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는 신부님과 수녀님의 말씀에 밤이어도 온기가 있는 이 장소부터가 성령이 함께 하심을 느꼈다.
셋째 날(23일), 신부님께서 지으신 10개 공소 순회 방문 중 첫 번째로 세운 마난티알 콜론체 공소(1985)부터 방문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으십시오.”라고 죽음을 앞두고 고백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기념한 곳이다. 치유의 체험들로 신자들이 많았지만 콜롬비아 사제에게 맡긴(2013.2,2) 후, 예전 같지가 않단다. 공소에는 공원이 반드시 있었고 돼지우리가 없어 돼지들이 집에서 살지만 엄마 대하듯 반기는 아이들 눈동자 속에서 내가 보였다. 가도 가도 넓은 이곳에 유치원과 학교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소이름이면서 과야낄의 휴양지로 알려진 아장게(제주도 같은 곳)에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바닷가에서 뛰놀았다. 배까지 달리기, 닭싸움, 꼬리 잇기 등을 하다 고요하게 밤바다를 가르는 꾸르실료의 알맹이 마냐니따가 들리자 콧노래로 음색효과를 넣었다. “먼동 틉니다. 잠을 깨세요. 동녘 하늘에~”
넷째 날(24일), 자다가 침대가 3번 째 주저앉았다. 시계가 없어 아침, 점심, 저녁 외에는 감도 잡히지 않는 시간이건만 푸르른 바다 새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다. 묵주성월이라 매일 성모님 액자를 안고(새벽 6시) 바닷가를 끼고 돌면서 묵주기도를 드리는 교우들과 함께 걸었다. 악보 없이 노래 부르며 누군가를 위해 기도드리는 이분들은 은혜로운 아침에 살아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었다. 빵으로 식사를 마치고 의료혜택을 위해 수녀님께서 꾸려나가는 보건소에 들렀는데 열악해도 ‘수녀님의 약손’이 느껴졌다. 이어서 새우 양식장 때문에 줄어드는 망글라(산소 공급나무)를 썰물이어서 배로 순회하지 못하고 자연과 노는 펠리컨들만 보았다. 오후엔 FB회원들(600여명)과 춤과 노래, 연극으로 만났다. 마을의 수호성인인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리타 성녀를 연출하자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사악 봉헌(창세 22,1-18)을 성극으로 답했다. 새들도 둥지를 찾아 떠나는 어둠이 깔릴 때, 정형화된 틀을 깬 그레고리오성가와 “두려워 말라.”는 떼제 노래를 팬플룻으로 연주하니 뜨거움이 온 몸으로 파고든다. 그 틈에 식물에서 추출한 것으로 엮어 만들었다는 아기 예수 탄생 기념과 박제한 해마를 주며 안아주는 이분들은 동네에서 연도가 나면 밤을 새며 9일기도도 하고 고아를 내 자식처럼 키운단다. 만약에 선량한 이분들이 불행해진다면 ‘우리들 때문이다.’고 뭉클하게 독백했다. 최 신부님께서는 바벨탑을 쌓지 말고 말씀을 육화시켜 “하느님의 헤세드”로 향기를 내라고 하신다. 힘들 땐 “예수님 십자가와 성모님의 마음을 생각하신다.”는 베로니카 수녀님은 신부님을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그림자처럼 뒤에서 따라다니셨다. 이곳이 살기 좋은 나라 1위로 선정되었는데도 선뜻 나서는 봉사자가 없는데 그 옛날 버려진 황무지를 일궈 씨앗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신 두 분은 “사랑하는 것은 봉사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ㄱ)라는 구절의 산증인으로 존경스러워, 우리들의 소소한 고민들은 바다 속의 좁쌀알에 불과했다. 두 분이 심은 씨앗이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였듯이(루카 13,19) 큰일은 작은 일의 실천에서 시작됨을 알고 우리도 주님의 도구로 쓰여 한국의 FB가 큰 나무로 자라기를 바랐다. 또한 이 태석 신부님처럼 한국교회의 자랑이신 신부님의 뒤를 이어 파티마 성모님 순례성당의 2대 사제가 하느님께 뜻을 여쭙는 한국인이기를 기도드렸다.
다섯째 날(25일), 뀅까(Cuenca-에콰도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에 있는 성모님 발현지 국립공원인 라스 까하스를 가니 맞은편에는 자비의 예수님이 계신다. 올해 성령 축제(2013.6,9)때 안수 받고 가족이 쓰러졌는데 그 증상이 미약하게 왔다 사라진다. 이어서 빠우떼(Paute)에 있는 200년 된 집 싼 후안 데 빰바(San juan de Pamba)에서 숙식을 하는데 “딸의 이름으로”라는 영화를 촬영한 장소다. 마당 한쪽에는 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가 있고 창문을 열면 잔디와 꽃들이 보이는 가장 낮고 작은 이 방에서 다시 머물 날을 꿈꿔본다.
여섯째 날(26일), 구알라세오(Gualaceo)에 있는 3600종류의 난 재배지 방문 후 씩씩에 있는 살레시오 신부님이 창설한 마리아 아욱실리아도라 뜨게질 생산지에 갔다. 이곳은 400여명의 부녀자들이 조합을 이루고 있으며 유명한 파나마모자 생산지이다. 우리는 모자와 숄을 어깨에 걸치면서 “참, 참, 참 잘 어울린다.”고 서로 칭찬해 주었다.
일곱째 날(27일)이다. 뀅까 대성당을 들린 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방문하신 많은 계단 위에 있는 비빌리안(Bibilian) 순례성당에서 기도드리고 잉까삘까 지역을 거쳐 알라우시를 갔다. 역대 최고의 장관을 이루는 철로 중 하나이고 기차가 절벽 쪽으로 기울면 놀라 반대편으로 가서 힘을 주었다. 수녀님께서 “악마의 코”라고 가리키는 그 손가락 끝을 이어 내 손가락으로 방향을 따라가 짚어 봐도 코를 모르겠다. ‘혹시, 악마는 코가 거꾸로 있지 않을까?’
여덟째 날(28일), 100년 된 전통 주택 라 낀따(La Quinta) 호텔은 방에 누워서도 산과 들이 보였다. 잠자리에 그대로 있고 싶었는데 식사하러갔더니 더 가까이 보여 커피 맛이 부드러웠다. 싼 후안 데 빰바처럼 음식에 정성을 다했고 산과 들의 맛을 섞은 커피를 물병에 조금 담았다. 꼴따에 있는 호수를 지나 1534년에 건축된 에콰도르에서 가장 오래 된 발바네라(Balbanera) 첫 성당을 방문하여 미사를 드렸다. 윤 신부님께 고백 성사를 보지 않는 이곳 교우들이 보겠다고 하니 수녀님께서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하신다. 시간을 쪼개서 우리도 덤으로 보았다. 오늘의 지향은 “새롭게 깨어나게 하소서.”였는데 내 모습을 울컥 보이는 시간이었다. 3박 4일(25~28일)의 일정을 마치고 해발 4000m인 산맥을 지나 빨말의 파티마 성모님 싼뚜아리오로 가는데 만년설이 보인다. ‘아~’
아홉째 날(29일)이다. 최 신부님이 성서학 교수로 계시는 과야낄 신학교를 갔다. 신학생들이 기타를 치며 우리말로 “고요한밤, 거룩한 밤~”을 부르더니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다.”를 부른다. 교수로 재직 중인 다니엘 신부님이 작곡했다는데 외모가 전혀 아니어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다.’를 혼자서 되뇌었다. 이어서 “사제가 될 때까지 성모님이 함께 해주소서.”를 부르자 코끝이 알싸해진다. 우리는 (필리 4,4-7)의 말씀으로 답하고 이냐시오 성인이 쓰신 기도를 노래로 만든 “Alma de christo”를 신청했다. 어우러지는 분위기는 교정의 망고를 한층 무르익게 했고 “귀요미”를 외치며 볼에 검지를 대고 찰칵했다. 윤 신부님 말씀처럼 “지금부터 내가 사제”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믿음이 뒤뚱거릴 때 흔들리지 않아, 먼 훗날 복음을 노래하는 사제의 모습들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꽃처럼 피어나는 구름 속으로 새 한 마리 날아가니 한 마리가 뒤따르며 조화를 이룬다. 방방 뛰다 넘어진 아이에게 서너 명이 달려가다 또 넘어지고, 잔디 위에 옷을 널어가며 삼삼오오 빨래하는 저 모습은 ‘내 고향의 그리움이 아니던가.’
작은 일부터 실천하시는 신부님, 수녀님.
어린 효은이(10, 가브리엘라)가 보고 싶어 울던 밤에도 지나가는 바람에 엉겁결에 따라온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복음대로 사시는 두 분의 삶을 대변해주는 모든 것들이 기쁨으로 솟고 있어, FB 회원이라는 것이 그지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성당 벽면에 낙서처럼 쓰인 “에콰도르는 삶을 사랑한다.”(ecuador anaia vida)를 보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에서 복음화의 힘을 알았습니다. 최상의 것을 자식에게 주려는 부모의 마음처럼 두 분은 가난 속에서 열정적으로 자유로웠습니다. 저 평화로운 새들의 날개 짓이 주님을 두려워하며 사랑으로 사신 두 분으로 보입니다. 함께 하는 동안 내내 제 마음에 별이 떠있을 수 있었던 것도 두 분이 세상을 비추는 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작은 겨자씨부터 시작되었듯이 윤 신부님께서 말씀은 않지만 눈빛으로 보아 엄청난 일을 소박하게 계획하고 있는 듯 마음으로 보입니다. 어머니가 애지중지 키운 아기가 자라 어머니를 돌 볼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디 영육간의 건강하시고 받은 감동만큼 표현 못하는 한계를 여백으로 둔 채, 우릴 위해 기도해 주신 한국의 FB교우들에게 “믿음속의 하나”라는 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무차스 그라시아스(매우 감사합니다). 신앙의 해에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알고, 주신 사랑 나누러 돌아갑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분들, 많이 생각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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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3년 10월 1일 ~ 30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