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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와 번역의 동기
고해는 Charles N. Li 지음 "The Bitter Sea coming of age in China"의 번역 입니다. 작가의 조카인 안과 의사 Dr. Stephen Lin의 소개로 책과 작가를 알게 되었고 작가의 허락을 받아서 이 책의 번역을 시작 했 습니다. 작가는 현재 산타 바바라 캑리포니아 대학의 언어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 습니다. 이 소설은 작가의 21세 까지의 이야기 입니다. 1944-1961년 까지 난징, 상하이, 홍콩, 광주 에서의 험난한 삶을 담은 자서전 적 소설 입니다. 혼란기였던 중국 내전과 중국 공산당 치하의 정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 습니다. 반공 교육에 가려 당시의 중국 역사를 잘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중국을 이해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믿 습니다.
프로로그
새 학교 첫날은 불안한 하루 였다. 무엇 보다도 모두 캔톤말을 썻기 때문에 한마디도 알아 들을 수 가 없었다. 선생님은 전통적인 두루마기를 입고 옷깃을 펄럭이며 교실로 미끌어지듯 들어 왔다. 나는 그저 동급생들 뒤를 따라 다니며 그들이 하는 대로 흉내 낼 수 밖에 없었다.
반장이 “일어서, 경례, 안자” 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구령에 따라 반 전원이 하나 같이 움직였으나 나는 머뭇거리며 조금 늦게 따라 했다. 선생님은 반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고맙다는 답례를 했다. 당시 중국 학교에서 매일 하는 의례 였다. 나와 동료들은 그를 겁먹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우리 선생님은 키가 작고 피부가 검었지만 얼굴은 캔톤사람 같이 매끄럽게 보였고 물개의 눈처럼 약간 튀어 나온 눈은 부드럽게 보였다. 선생님은 7학년 전원을 어떤 놈들인지 알아 보려는 듯 한번 둘러 보더니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점호를 시작 했다.
내 차례가 왔는 데 선생님은 바로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손에 들고 있는 명부를 쳐다 보더니 “레이 랲”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내 이름 “리 나”의 캔톤 사투리 발음이었다. 그러더니 ““랲“ 은 멍청하다는 말인 데..” 하고 중얼 거렸다. 전 반 아이들이 폭소를 터 트렸다.
선생님이 반아이들을 노려 보자 웃음이 그쳤다. 그는 나를 손짓으로 자기책상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선생님은 내가 그제야 캔톤 말을 전혀 알아 듣지도 못 하고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차린 것이었다.
네 이름 “나”는 표준말 발음이지? 그는 내가 겨우 알아 들을 수 있는 만다린을 써가며 애써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내가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아이들은 서로 쑥덕 거렸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엄격한 표정으로 처다 보며 훈계를 시작 했다. 내가 알아 듣게 만다린으로 말 했다. 알아들을 수 있어서 고마왔지만 그의 액센트가 너무나 심해서 웃음을 참느라고 혼 났다.
“너희들은 자신을 낮추는 이름이 우습지? 너희 모두 꽃 같이 화려하고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는 거지?” 그는 이름이 적혀 있는 명부를 훌터 보면서 “어디 보자, 나라의 기둥, 가문의 자부심, 가족의 영광 이라고 하네. 부모가 너희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진짜 나라의 기둥이고 가문의 자존심이고 집안의 영광이라고 생각 하느 냐?” 라고 교실이 떠나가게 외쳤다.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 졌다. 선생님은 눈을 부릅뜨고 아이들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당장 두가지를 꼭 기억하기 바란다. 첫째는 중국 사람들은 영국 악마처럼 아무 의미 없는 정해 진 몇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의미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식들 이름을 지어 준다. 이것은 우리의 중요한 문화적 유산이다.” 그는 아이들이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가 확인하기 위해서 교실 전체를 둘러 보고 계속 했다. “둘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이름을 지어 주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낮추는 이름을 좋아 한다. 겸손을 나타내는 이름은 화려하지 않은 인생을 살게 하고 항상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한다. 자기를 낮추는 이름을 가졌다고 웃을 일이 아니다. 명석함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꼭 명석하지 않은 것 처럼 이름이 멍청함을 뜻하는 글자로 되어 있다고 그 사람이 반드시 멍청 한 사람이 된다는 법은 없다. 이를 꼭 기억 하고 앞으로 조심하기 바란다.”
선생님의 꾸짓음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반 전체를 아주 효과적으로 통제 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가 만다린 발음으로 말해서 나는 정말 고마웠다. 이 담임 선생님과 같이 지내면 나는 무사히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생각 하며 빨라지는 맥박을 가라 않지고 있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뜨거운 햇빛을 피하고 나혼자 있고 싶어서 운동장 한구석 그늘진 곳으로
갔다. 이제 막 새 학교에 왔으니 아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방금 교실에서 본 아이들 몇명이 나에게 다가 왔다. 크고 체격 좋은 13-14세로 보이는 녀석이 앞으로 나오더니 내 앞에 버티고 섰다.
“야, 바보 리” 이상야릇한 만다린 악센트로 인상을 쓰면서 나를 불렀다. 그는 기관총 쏘 듯이 말을 내 벳었다. “벙어리 냐?” 그는 너무나 커서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나는 너무 작았기 때문에 7학년 동료들은 모두다 크게 보였고 무서웠다. 10살이었는 데 키가 겨우 4 피트 밖에 되지 않는 난쟁이 였다. 캔톤 아이들은 학교를 7,8세에 시작 하지만 나는 북부 중국지방의 전통에 따라 6살에 입학 했다. 거기다가 아버지의 명에 따라 6학년을 월반 했다. 그래서 1950년에 홍콩에 도착하여 7학년으로 편입 했다. 내 앞에서 겁주며 떠들 던 여석은 캔톤 7학년 평균 크기에 불과 했다.
나는 그의 거치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그놈의 복부를 강타하고 싶었지만 내머리가 그녀석 복부에 해당하는 처지에 감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비슷한 체격의 아이들 한 열명정도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혹시 선생님이 주위에 있나 살펴 보았지만 나에게 그런 행운은 없었다.
“야 임마, 우리는 너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야”, 네 이름이 바보 리 아니냐, 그렇지? 우리는 그냥 네 이름을 부를 뿐 이야.” 라고 기관총은 말 했다. 말은 그럴듯 했지만 말하는 쪼는 전혀 달랐다. 기관총이 다시 말을 시작하자 아이들은 박장대소 했다.
내 뒤에 있던 약삭빠른 놈이 머라고 지껄 였다. 나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네 뒤에 있는 내 친구가 누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었는 지 알고 싶어 한다”라고 이빨을 내 보이고 웃으면서 친절하게 어설픈 만다린으로 나에게 일러 주었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다음시간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를 빌었다. 심장이 가슴을 치듯 벌떡 벌떡 뛰었다. 기관총은 나의 침묵을 항복으로 인정하고 폭소 속에서 신나게
나를 욕 보였다.
“네 아버지는 개똥임에 틀림 없어, 너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 주다니.”라고 했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니미(네 애미) 씹 할 놈아!” 본능적으로 기관총을 노려보며 만다린으로 소리질렀다. 나는 그와 몸싸움을 할 수는 없었을 지언정 아버지를 모욕하는 놈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효도는 부모님에게 충실하고 복종하는 데 끝나지 않았다. 부모님을 신처럼 받들고 필요하면 위험한 지경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서 보호하고 성인이 되면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효도에 대한 개념은 다른 중국사람 처럼 어렸을 때 부터 내 머릿속에 꼭 밖여 있었다.
“이거봐, 이 난쟁이 벙어리 아니네, 욕할 줄도 알아” 아이들이 소리 질렀다. 운동장에 있던 아이들이 모여 들었다. 나는 도망가려고 앞으로 나갔다. 기관총이 두손으로 밀었다. 내 뒤에 있는 아이가 내등을 밀었다. 옆으로 빠져 나가려 하자 반대편 아이가 밀어 부쳤다. 나는 어느 덧 튀는 공처럼 되었다. 그들은 나를 공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들은 나를 한참 공처럼 이리 밀고 저리 밀다가 멈췄다. 그렇지만 이놈들이 또 다른 방법으로 나를 괴롭 힐 것이 확실 했다. 나는 속으로 “이게 마지막이야, 이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라고 다짐 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기관총의 명치끝을 강타 했다. 그는 즉시 통증과 쇼크로 허리 구부리고 머리를 숙으렸지만 즉시 두손으로 내 어깨를 베토벤의 제5 교향곡 마지막 장면에서 처럼 팀퍼니스트 가 케틀 드럼을 치듯 내려 쳤다. 그의 두 주먹은 나의 승모근(어깨 뒤 등 근육)을 강타 하면서 내 뇌를 흔들어 놓았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사방에서 발길질이 들어 왔다. 나는 내 얼굴을 두 팔로 가려서 발길질 로부터 보호 했다.
갑자기 발길질이 멈췄다. 아이들이 흩어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내 팔을 얼굴에서 떼고 눈을 뜨니 큰 어른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선생님이 나를 구하러 왔다고 어렴풋이 생각 했다. 그러나 누워서 보는 시야가 점점 분명해 지면서 그 어른이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곧장 알게 되었다. 이분은 좀 길고 엄격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담임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고 키가 커 보였으며 더 사무적인 인상이었다.
그는 크게 뭐라고 소리질렀다. 나는 무슨 말하는 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의 말투와 얼굴 표정으로 부터 그가 몹시 화 가 났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곧장 만다린으로 바꾸어 “왜 이렇게 됐어? 일어나!” 엄격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저놈들이 나를 때렸어요” 라고 대답 했다. “저 놈들이 누구야?” 일어서는 나에게 다구처 물었다.
“전부 다요”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며 대답했다. 발에 차인 팔과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반 학생 모두가 너를 때렸는 데 어떻게 네발로 일어 설 수 있어. 내가 이학교 교장으로 있는 동안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본다.” 그는 벌컥 화를 내면서 큰소리로 말 했다. “예, 모두 다요”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야, 새학기 시작하는 날에 싸움질이라니! 내가 자세히 알아 볼거야. 너 정말이지?” 둘째 시간 시작 종이 울림과 동시에 교장은 엄포를 놓고 허리를 꽂꽂히 세우고 뒷짐을 진 채로 화가 난 듯한 빠른 걸음으로 사라 졌다.
나는 상처를 어루만지며 상처받은 마음을 가라 않지면서 둘째 시간 수업에 앉아 있었다.이번에는 다른 선생님이 다른 주제로 수업을 하고 있었지만 상관 없는 일이었다. 무슨 소리 하는 지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선생님도 캔톤 말을 쓰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난징이나 상하이에 살고 있지 않았다. 나는 모두다 캔톤 말을 쓰는 홍콩에 불과 사흘 전에 왔다.
원래 나는 오랜동안 한자리에 앉아 있지 못 했다. 그러나 둘째 시간에는 그저 멍청히 앉아 있었다. 나만의 세상으로 들어가서 인지 가만히 앉아 있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다음 쉬는 시간에 어떻게 살아 남을 가를 궁리 하고 있었다. 선생님을 따라 그의 사무실로 갈가? 화장실로 갈 까? 아프다고 할 까? 뒤에서 나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모퉁이에 서 있을 까? 나는 열심히 하나하나 다른 방법의 장단점을 따져 보고 있었다. 선생님의 알아들을 수 없는 강의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수업 시작한 지 한 20분 되었을 때 였다. 교실 문 앞에 메신저가 나타났다. 나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메신저는 선생님에게 목쉰 소리로 뭐라고 하더니 봉투 하나를 주고 갔다. 선생님은 나에게 손짓으로 그와 같이 교실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는 나에게 만다린으로 “너 가방 챙겨서 집에 가거라. 그리고 이편지를 네 아버지에게 보여 주거라.” 라고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이렇게 문제가 해결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다음 휴식시간에 모욕 당할 공포에서 이렇게 해방 되었다. 나는 소지품을 챙겨 들고 나를 듯이 학교를 달려 나왔다.
나는 원래 상하이에서 이모 헬렌과 같이 살 았었다. 나의 가족은 홍콩에 살고 있었다. 새 학년이 시작하기 사흘 전 인 1950년9월1일 이모 헬렌은 나를 남쪽에 있는 영국 식민지 홍콩으로 보냈다. 만다린은 나의 첫번째 말이고 상하이 말은 나의 두번째, 그리고 캔톤말은 나의 세번째 말이 된다. 홍콩에 오기전에 나는 캔톤 말을 들어본적이 없었다. (만다린 말을 쓰는 사람과 상하이 말을 쓰는 사람들도 서로 통하지 않는 다.)
말 뿐만아니라 홍콩은 여러가지로 상하이와는 달랐다. 열대성 기후였다. 습 하고 항상 바람이 불었다. 어디를 가나 바다가 주위에서 출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바다가 보이지 않더라도 파도소리가 들리거나 염분섞인 바다물 냄세를 맛을 수 있었다.
바닷가, 평지나 산에 빈땅 만 있으면 나무나 풀들이 파랐게 자라고 있었다. 대부분이 키가 작았고 검푸른 색깔을 보여 북부지방(북경근처)과 상하이의 풍경과 다른 인상을 주었다. 홍콩은 사람들도 북부 지방과 상하이와 달랐다. 대체로 키가 작고 피부가 검었다. 얼굴 모양도 좀 달랐다. 홍콩사람들은 반달에 가까운 눈을 가지고 있었고 코는 납작한 편이고 두꺼운 입술과 비교적 마른 듯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홍콩어디를 가나 검붉게 탄 얼굴을 가진 영국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홍콩사람들은 이들을 “외국 악마(foreign devil)”라고 불렀다. 그들은 중국 노동자들이 숨을 몰아 쉬며 끄는 인력거 속에 거드름을 피우고 앉아서 타고 다니거나 왕처럼 거만하게 길거리를 활보 했다. 영국인들은 홍콩의 주인처럼 행세 했다. 사실 그들이 주인이었다.
집에 가기는 말같이 쉽지 않았다. 학교는 구룡(Kowloon)에 있었다. 구룡은 빅토리아 해협을 중간에 두고 홍콩섬 마즌 편에 위치한 반도이다. 우리집은 구룡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신계(New Territories)에 있었다. *구룡과 홍콩 섬을 합쳐서 일반적으로 홍콩이라고 한다. 구룡이 홍콩보다 더 넓은 면적을 차지 하고 있다.
1950년의 신계는 자연그대로의 미개발 지역이었다. 산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었고 강물은 산골자기에 작은 폭포를 만들며 바다로 흘러 들어 왔다. 강하구는 해산물이 넘쳐 낫고 이것을 먹으려는 백로와 갈매기가 떼로 몰려 들었다. 이 활기 넘치는 풍경 속에 작은 마을이 점 처럼 섞여 있었다. 대부분이 몇 백년된 집들이었다. 호랑이가 가끔 산속 마을 사람들이 키우는 몰소를 잡아먹기도 했다.
편도 기차길이 구룡과 신계를 연결 하고 있었다. 석탄으로 움직이는 구식 증기 기관차는 석탄재를 비오듯 뿌리고 큰소리를 내며 길게 매달린 열차를 힘들게 끌고 천천히 움직였다. 기차는 구룡을 출발하여 여러 작은 마을 역에 정차 하며 신계를 향 했다. 기차는 그림같이 푸른 계곡을 지나 바닥이 보일 것 같이 맑은 물이 쫄쫄 흐르는 바위 사이의 협곡을 건너 평화스러운 푸른 벼로 덮인 논을 옆에 두고 천천히 달렸다.
학교에 가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역에 도착 하면 나는 2시간을 기다려야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나는 역 주위를 어슬렁 거렸다. 거리에는 이것 저것 파는 장사들이 많았다. 음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껍질 벗긴 땅콩, 솜 사탕, 절인 채소, 보존 된 올리브, 구운 고기, 찐 생선, 기름에 지글지글 끓는 군만두, 고기들은 찐빵 등등 없는 것이 없었다. 길거리 장사들은 행인들이 볼 수 있게 여러 색갈의 맛있게 보이는 과일을 바닥이 깊지 않은 고리(wicker) 바구니에 가득 담아 어깨에 매고 다녔다. 양념과 함께 지글지글 끓는 고기와 생선에서 나는 감질나게 하는 냄새는 행인들의 입맛을 돗구었다. 갈색의 군만두와 하얀 고기들은 찐빵은 입안에 침을 흘리게 했다.
나는 오징어 파는 행상 앞에 섰다. 내 눈은 먹고 싶은 오징어 조각에 꽂혔다. 작은 오징어 조각은 이쑤시개에 꽂혀 있었다. 하나에 오전이었다. 하나 집어서 입안에 넣으면 됐다. 빈 뱃속에서 꾸룩 꾸룩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나는 오전이 없었다.
우리 가족이 난징 빈민가에 살때 배고픔에서 오는 경련 같은 고통에 익숙 했지만 그날 오징어 대한 집착은 나를 미치게 했다. 그 행상 앞에 서서 달콤한 냄새를 맡으며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하나 집어서 도망가는 것이었다.
“이 봐, 젊은이, 내 가족 먹여 살리기 위해서 쌀을 사지 않아도 된 다면, 내 오징어 한조각 너에게 주었지. 알았서?” 멍청한 행상은 벌써 내 마음을 알 고 있었다. 나는 번쩍 정신이 나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나를 똑 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머리를 숙이고 걸어 갔다. 오늘 또 하나의 재수 없는 일을 저지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집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너무 일찍 집에 온 나를 보고 놀랐다. “왜 이렇게 일찍 왔니?” 아버지는
예의 저음의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학교에서 집에 가라고 했어요. 이게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요.”하면서 두번째 시간에 가르치던 선생님이 준 봉투를 아버지에게 건내 주었다.
아버지는 손에 영어 책을 들고 등나무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의자는 아버지만 앉을 수 있었다.
등과 바닥에 부드러운 쿠션이 있었고 열대 꽃 무늬가 있는 가바로 씌워 놓아서 방 세개짜리 우리 아파트에서 가장 편안 하고 월등히 비싼 가구 였다. 나는 가끔 왕자나 앉는 것 같은 의자에 않으면 어떤 기분일 까? 궁금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외출 중이라도 나는 그의자에 앉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큰 머리와 양쪽 대칭이 완벽한 잘생긴 적어도 나를 대할 때 마다 무표정하고 엄격한 얼굴을 쳐다 보았다. 내가 10살 먹을 때 까지 내가 그와 거의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며칠 전에 이모가 상하이에서 홍콩에 사는 부모님에게 나를 데려 왔을 때 그녀는 나에게 이 무표정한 남자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인사하라고 했다. 그 때 그는 화가난 듯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허리 굽혀 인사 하면서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마치 그가 우리 아버지가 아닌 것처럼 어색 했다.
나는 이차 대전이 끝난 직후 내가 다섯살이 되던 해 부터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2차 대전 동안에는 먼 발치에서 그가 검고 긴 리무진을 타고 집에 도착 하는 것을 가끔 본적이 있었다. 그 때 우리는 난징시에 있는 맨션에서 살았다.
그가 탄 리무진이 드라이브웨이에 들어오면 바디가드가 차안에서 뛰어 나와 아버지가 내리도록 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 아버지는 항상 유명한 테일러에게 맞춘 쓰리피스 양복을 입고 다녔다. 이 테일러는 이차 대전 후에 일본에서 맥아더 장군이 불러 양복을 맞추어 입었을 정도로 유명 했다. 아버지의 보통이 아닌 키, 거대한 머리통 그리고 우아한 옷차림이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버지가 맨션에 도착 할 때 마다 나를 매혹 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나와 거리가 먼 것 처럼 느껴 졌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나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경호원이 옆에 차고 있는 무기가 내 혼을 빼 갔다.
가죽 총집에서 반 쯤 보이게 튀어 나온 무기는 권총의 두배 쯤 크게 보였다. 총알 30개가 장진 된 연발 피스톨이었다. 나는 일본군이 기관총을 쏘는 것은 본적이 있지만 총구에서 불을 뿜는 연발 피스톨을 본적이 없다. 나는 이 무기가 얼마나 위력이 있는 지 궁금 했다.
그 때는 아버지가 생애 가장 높은 지위와 가장 많은 부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새로 건국한 중국 인민공화국(중공)에서 홍콩으로 피난 나와 살 고 있다. 아버지는 공산주의 자들을 비난 했다. 그는 영어 책을 중국말로 번역 하고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선동적인 논문을 쓰고 있다.
잘나가다가 추락 하면 살기가 힘들다. 사흘전 내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아버지와 나는 이전과 별 다름 없이 서로 교류가 없었다. 사실 나에게 잊혀 지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달걀 먹는 버릇이 었다.
우리집에서 아침에 달걀을 먹는 사람은 아버지 뿐 이었다. 그는 섬세하게 만들어진 작은 컵에 달걀을 세웠다. 한손으로 달걀을 잡고 다른손으로는 작은 칼을 능숙하게 달걀의 위 쪽 반을 향해 휘둘렀다. 그가 칼로 잘린 위 쪽 반을 들어 올리면 아래 쪽 반의 노른자위가 흰자위로 둘러 싸이게되는 데 그 모양이 마치 떠오르는 태양 처럼 보였다. 나는 홍콩에 오기 전에 아버지와 아침 밥을 먹어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영국 유학 시절에 배운 달걀 먹는 방식을 본적 이 없다. 그의 달걀 다루는 재주가 하도 나를 매료 시켜서 내 아침은 두 조각의 힌 빵에 불과 했는 데도 별로 속 상해 하지 않았다.
그는 역시 아버지 였다. 그는 항상 뭐든지 먼저 차지 했다. 음식은 물론 이었다. 나는 이런 집안의 법칙을 내가 기억 할 수 있는 가장 어린나이 때부터 배웠다. 우리 조상은 나와 우리 아버지 보다 높 았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살아있는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이었다. 따라서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나는 그를 잘 모르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너 퇴학 당했어” 아버지는 나를 화난 얼굴로 쳐다보았다.
깜짝 놀라서 “뭐라구요, 나한테는 말 안했는데요.” 라고 대답했다. “왜 너한 테 말하겠어, 그는 의자에서 일어 나면서 말 했다. “쓸 데 없는 놈, 내가 월사금 까지 내 주었 는 데”라고.
“이 바보 야” 나는 속으로 중얼 거렸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적어도 클때 까지는”
“너 싸움 시작 했지, 그렇지?” 아버지는 내가 잘못 했다는 쪼로 말 했다. “아니오, 싸움 걸지 않았어요.” 반사적으로 대답 했지만 사실이었다.
“안 그랬다고? 그러면 교장이 이 편지에 거짓말을 했다고?” 아버지는 편지를 흔들며 묵직한 목소리로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 했다. 무서웠다. 말다툼을 하지 않는 편이 유리 하다고 생각 했다. “너는 네 반 아이들의 조상을 모욕 하는 쌍욕을 했지 않아!”
나는 그가 말끝에 되묻는 식으로 다그치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머리를 숙여 내 발을 쳐다 보면서도 나는 그의 칼날 같은 눈초리가 내 몸을 파고 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남의 조상을 모욕하는 것이 가장 나쁜 욕설 이야”, 너는 너희 반아이들의 조상 뿐만 아니라 너 자신의 조상 까지 모욕 했 잖아, 등교 첫날 퇴학 맞았으니” 그는 내 얼굴에 대고 크게 소리 질렀다.
이건 불공평 했다. 어떻게 아버지가 나를 때리던 놈들 편을 들을 수가 있단 말인 가? 나는 몹시 속이 상 했다. 나는 그놈들이 아버지를 개똥이라고 할 때 아버지를 방어 하려고 하지 않았 던 가? 나는 내 발을 쳐다 보며 이 누명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몇초 쯤 지나서 나는 겨우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볼 용기를 모았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과 이빨을 악 불고 있는 모습은 하도 무서워서 내 혼을 빼앗아 갈 정도 였다. 나는 겨우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을 꺼 냈다.
“그 놈들이 싸움을 먼저 시작 했어요. 그놈들이 아버지를 개똥이라고 불렀어요. 그말에 화가 나서 덤벼들었을 뿐이에요.” 아버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깡 마른 그의 오른손등이 나의 오른쪽 볼을 후려 쳤다. 나는 손이 날아오는 지도 몰랐다. 나는 비틀 비틀 벽쪽으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겨우 넘어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입안에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개자식 데리고 나가. 이놈은 내 이름을 수치스럽게 만든 놈이야!”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어머니가 나를 끌고 나갈 때 아버지가 못마땅해서 고개를 설래 설래 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가 말없이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일도 아닌 것 처럼 나를 마당으로 밀어 내는 동안 아버지는 나가는 우리 뒷통수에 대고 “오늘 그 놈 저녁 밥 주지마” 라고 소리 질렀다.
열대 꽃과 식물에서 나는 촉촉하고 상쾌 한 냄새가 멍청한 기분에서 깨어나게 했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쫓아 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가 나를 더 이상 때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원을 아무 목적 없이 걸어 다니며 나는 방금 생긴 사건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골치가 아프고 얻어 맞은 몸 여기저기가 쑤 셔서 도무지 생각 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기관총이 그를 개똥이라고 불러서 나를 때렸을 까 아니면 내가 학교에서 쫓겨 나서 그랬을 까?
나는 분명히 내가 무엇인가를 잘 못 하기는 했는 데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놈들이 아버지를 욕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그놈들을 혼내 주려고 했다. 나는 너무나 화가 나서 무조건 덤벼 들었었다.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너무나 복잡 해서 그만 두었다.
정원이 훨씬 더 재미 있었다. 정원은 우리집 만이 아니고 아파트 전체에 속 해 있었다. 상당히 강 하구와 접하는 상당히 큰 면적을 차지 하고 있었다. 홍콩의 열대성 기후는 식물에게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여 무성하게 자라게 했다. 어떤 식물은 커다란 잎을 가지고 있고 어떤 잎사귀는 무지개 색깔, 약간의 자주색, 빨강, 노란, 초록, 흰색의 폴카 닽(점)으로 번쩍 거렸다. 동양 마그놀리아 나무는 손가락 만한 콘 모양의 꽃이 피어 강한 유혹적인 향기를 내 뿜고 있었다.
집 건물 입구에는 자스민 부시가 있었는데 티 나무 같이 작지만 튼튼 했다. 이 자스민 나무들은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구아바나무 가 있었 는 데, 노란 색과 초록색이 섞인 분홍 빛의 열매가 열렸다. 그 냄새는 미각을 자극 해서 침이 질질 흐르게 했다.
그리고 대나무 숲이 있었다. 깨끗하고 질서 있게 서 있는 대나무는 열대 햇볕을 가려 주는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대나무 잎이 살랑 거리는 소리는 매끈 하고 마디로 갈라 져 있는 초록 색의 대나무 줄기들 사이에 숨어 있는 나의 상처난 마음을 쓰다듬어 주기에 안성 마춤이었다. 열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대나무 꼭대기는 튼튼함과 내구성을 자랑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 운명의 오후에 나는 수많은 대나무 중 하늘 높이 똑바로 자란 대나무를 골라 기대 섰다.
나는 평화롭고 한산한 곳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이기를 바랐다. 배고픔과 왕따 그리고 부모에 대해서 걱정 할 필요 도 없고 그냥 바람을 피하고 비를 마시며 땅에 뿌리를 내리면 그만이 아닌 가?
한참 후에 나는 대나무 숲에서 나와 옆에 있는 강가 언덕으로 갔다. 9월은 벼를 수확하는 계절이었다.
약 3 키로 정도 걸어 오니 볏짚을 쌓아 놓은 곳이 있었다. 볏짚 덤이 중간 쯤에서 한 두 개 볏짚 묶음을 빼 냈다. 마치 동굴 같은 공간이 생겼다. 나는 그속으로 기어 들어 갔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았다.
나는 하루 종 일 시달림에 지쳐서 순식간에 잠이 들어 버렸다.
잠에서 깨어보니 달도 없는 깜깜 한 밤이었다. 몹시 배가 고팠다. 안절부절 해지고 신음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수 많은 별이 반짝거리는 하늘은 나를 향해 환히 웃고 있었다. 별들은 사람이 만든 전등불의 방해 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고 상상 했다.
나는 아버지는 왜 그렇게 나에게 함부로 대할 까? 아버지는 왜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을 까?
그는 나의 진짜 아버지가 아닐 까? 나는 악질적이고 아들을 학대하는 계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아버지를 찾아 멀고 먼 길을 떠나서 끝에는 아버지와 만나는 이야기를 상상 했다. 그는 나를 반기며 웃고 나를 항상 보살펴 주고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그는 내가 아는 거치른 아버지와는 왼전히 달랐다. 멜로 드라마 같은 환상과 나 자신에 대한 동정에 쌓여서 울다가 잠이 들었다.
*번역자 주;
중국 내전은 1945년 9월에 시작해서 1949년10월에 끝 났다. 1937년에 일본은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 했다. 이전에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은 모택동을 수령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과 싸우고 있다가 중일전쟁이 시작할 무렵 서로 합작을 하고 장개석 주도로 일본과 싸웠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 하고 맥아터의 명령으로 9월5일에 일본은 중국(장개석)에게 항복 했다. 그후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4년동안 중국 천하를 구고 싸웠다. 이것이 중국 내전이다. 미국이 지지 했던 국민당이 패퇴하여 대만에 중화민국을 세우고 중국 대륙은 공산당 손에 넘어 갔다. 모택동은 1949년10월1일 중국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중공)를 선언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중국을 중공이라고 불렀는 데 나는 중공이 중국 공산국의 약자로 생각 했었다. 1950년10월, 그러니까 중공이 건국한지 일년 조금 지나서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 한반전쟁에 개입 한다. 이 책의 저자가 홍콩에 온지 한달 후에 중공은 한국전쟁을 도 맡아서 미국과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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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