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사 일요법회 법문 –2023년4월24일
<향기 나는 시간을 살기 위해서>
1. 삶이 가속화된다는 느낌은 실제로는 방향 없이 날아 가버리는 시간에서 오는 감정이다.
우리 삶이 흘러가는 강물이라면 그 밑바닥을 바쳐주는 든든한 강바닥, 즉 토대가 꺼져버린 것 같다. 마치 삶이 송두리째 싱크홀에 빠진 듯하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좌표는 공중에 붕 뜬 채 떠돌고 있다. 손을 뻗어 무엇 하나라도 붙들어둘 만한 걸 잡아보려 하지만 금세 부스러져 증발해버린다. 그리하여 인간은 극단적으로 무상해지고 허무해진다. 삶의 허무는 원자적 정체성에 기인한다.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을, 세계를, 공동의 삶을 상실해간다. 세계의 결핍은 반시간적 현상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작은 육체로 쪼그라들며, 그 작은 육체를 건강하게 지키려고 악착같이 애쓰게 된다. 그것밖에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육체의 건강이 세계와 신을 대신한다.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은 그토록 죽기 힘들어한다. 인간은 나이만 먹을 뿐 늙지 않는다. 늙지 않는다는 것은 평생에 복과 지혜를 쌓지 못해서 노욕과 老忿노분, 老痴노치만 늘어날 뿐이라는 말이다.
2. 어떻게 해야 시간의 위기를 넘어 향기 나는 시간의 삶으로 바꿀 것인가?
피로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은 점-시간 point instant로 삶을 경험한다. 점-시간이란 자기 삶이 의미로 일관된 게 아니라 욕망 충족을 위한 돈벌이를 위해 몸과 마음을 소모할 때 경험되는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한점, 한점, 뚝뚝 떨어져 나가 모래알처럼 부서져 날아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Dust in the wind.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바람 속의 먼지에요. 우리 모두 바람 속의 먼지일 뿐이죠.
Dust in the wind.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바람 속의 먼지이죠. 모든 것이 바람 속의 먼지에요. -그룹 Kansas의 노래
https://youtu.be/SNI86TZkrwc
점-시간으로 느껴지는 시간은 서사와 의미가 없는 까닭에 사람들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한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마음에 차지 않는 ‘지금 여기’에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욕구불만인 채 현재를 건너뛰어 좀 더 나은 다음 순간으로 달아난다.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 즐거운 것, 무료함을 달래줄 것, 즐거운 것, 또는 노골적인 것을 찾아 다음 순간으로 달아난다. 버리고 떠난 현재-점-시간! 기대하면서 달려가 잡은 미래-점-시간. 그러나 또 다시 실망하는 현재-점-시간. 점-시간은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 불만족과 불안, 그리고 조바심이다. 더구나 오늘날 연속성과 지속을 보장해주던 사회 문화적 구조가 허물어졌다. 이야기는 시간에 향기를 불어넣는다. 반면 점-시간은 향기가 없다. 시간은 지속성을 지닐 때 서사적 긴장이나 심층적 긴장을 획득하여 깊이와 넓이를 즉, 공간을 확보할 때 향기를 내기 시작한다. 시간에서 모든 의미 구조와 심층 구조가 떨어져 나간다면 시간이 원자화 되어 평면화되고 화석화되어 시간의 향기가 사라진다. 시간을 흘려보내면서도 시간이 없다고 불평한다. 돈벌이와 욕망 놀이에 시간을 빼앗긴 사람의 위기는 관조적 자세를 다시 자기 안에 받아들일 때 극복될 것이다.
3. 관조적 태도, 사색적 삶은 8정도와 6바라밀이다. 사색적 삶 vita contemplativa 비타 콘템플라티바(관조적 삶)은 부처님께서 가르친 여덟 가지 바른길이다.
삶의 시간을 늦추고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페이스를 확보해야 한다. 자기 시간을 살아야 한다. 세계에 내맡긴(혹은 세계에 빼앗긴) 시간을 회수하라. 세상에 종속된 시간, 노예의 시간, 노동의 시간이 아닌 자기를 위한 시간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질서 있는 삶(戒), 평화로운 삶(定), 관조하는 삶(慧)을 살아야 한다. 바른말(정어), 바른 생활(정업), 바른 직업(정명)은 질서 잡힌 삶을 살게 해준다. 바른 정진(정정진), 바른 집중(정정)은 평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바른 견해(정견)와 바른 사유(정사)는 관조하는 삶의 중심을 잡아준다.
4. 교실 안의 야크: 행복지수(GNH)가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도 이민 가려는 사람이 있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부탄에서 많이 배우고 견문이 넓은 사람일수록 자기 나라를 떠나 서양으로 나가려 한다. 그렇다면 교육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정보를 많이 축적하면 그에 따라서 욕망의 수준도 높아진다. 욕망의 수준은 높아지는데 그를 충족시켜줄 수단이 없다면 욕구불만은 증폭한다. 욕구불만과 욕구좌절은 분노와 울분을 일으킨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귀의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를 <교실 안의 야크>라는 영화에서 배울 수 있다.
<교실 안의 야크(Lunana: A Yak in the Classroom, 2019년 작)>는 파오 최잉 도르지( Pawo Choying Dorji)라는 감독이 제작한 영화이다. 2020.9.30에 개봉하여 부탄 영화로서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2022)에 후보로 올랐는데, 이로 인해 부탄 국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메시지는 ‘교육이란 한 사람의 미래를 만지는 일이다.’라는 대사이다. 영화에 나오는 몇 가지를 함께 공감하고자 소개합니다.
①부탄 민요:
도자기 잔에 담긴 하얀 우유와 같이 순수한 내 마음
그 순수함은 잔이 깨어져도 늘 우윳빛이라네
병에 담긴 물처럼 맑은 내 마음
너무 맑고 아름다워서 바닥까지 훤히 보이네
바람 속 대나무처럼 겸허한 내 마음
바람에 굽힐지언정 부러지지 않네
순수하고 맑고 겸허한 마음은
행복이 그림자처럼 따라오게 된다네, 행복이 그림자처럼 따라오게 된다네
②살돈의 세상에 바치는 노래: 야크의 노래(목동이 야크에게 불러주는 노래):
높은 산 속 풀과 샘물의 소중함을 야크는 알지
목동이 찬미하는 건 순수한 마음이에요
깨끗함을 잃지 않은 채 만년설로 뒤덮인 땅이 우리 마음과 같기를 바라죠
(야크가 목동에게 들려주는 노래):
우리 인연은 끝나지 않으리. 이번 생 아니면 다음 생에 늘 그랬듯 집으로 돌아가리.
5. 자신에 물어볼 질문: 나에게 돌아갈 마음의 고향이 있는가? 다시 태어나도 돌아오고 싶은 고향이 있는가? 당신에게는 세세생생 다시 반복된다 해도 기꺼이 살고 싶은 삶이 있는가? 여기에서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를 보살의 원력과 연관 지어 해석해보려 한다.
<지금의 인생과 똑같은 삶을 백만 번 반복하더라도 그런 삶을 기꺼이 살겠느냐?>
고독지옥에서 방금 나온 니체는 깊은 밤 한 악마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껏 살아온 삶을 반복해서 수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그 삶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고통과 기쁨과 생각과 한숨, 네 인생의 크고 작은 일 하나하나가 전부 똑같은 순서로 되돌아온다. 이 거미도, 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이 순간도, 나 자신도 전부 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끝없이 다시 뒤집힐것이다. 그 안에 있는 모래알 중 하나인 너 자신도!”
네가 살아온 삶을 백만 번에 다시 백만 번을 더 반복해서 산다면 너는 어떻겠는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맴도는 길은 탈출구가 없는 무간지옥일까, 아니면 축복받은 삶일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아침을 맞는 것이 무료하고 권태로운 일인가?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으니 억지로 살아야 하는가?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삶, 다가오는 그대로의 삶’을 크게 받아들이는 아모르 파티 Amor Fati, 운명애가 니체의 깨달음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너의 세계를 사랑하라. 네 삶을 사랑하라. 지금 주어진 네 인생을 사랑하라.
니체는 영겁토록 회귀하는 삶을 기꺼이 살아낼 의미를 발견했다. 수메다 선인도 그랬고, 모든 보리심의 행자들도 그러했다. 위대한 선사들은 짐승 가죽과 털을 뒤집어쓰고 당당하게 윤회를 활보한다. 생의 전장에 뛰어들어 풀잎처럼 눕고 물안개처럼 스며든다. 이 땅 어느 구석 어느 모퉁이라도 보살의 피와 땀이 적시지 않은 곳 있으랴? 세계 자체가 바로 보살이 영겁토록 버렸던 몸이요, 앞으로 버릴 몸이며, 지금 버리고 있는 몸이다. 그래서 세계는 사랑으로, 희생으로, 빛으로, 은혜로 가득하지 않은가?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자. 수없는 생 동안 나고 죽고, 죽고 날 때마다 인간의 비극적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원력(願力, 이것이 바로 ‘권력의지’가 승화된 형태이다)을 성숙시키는 기회로 삼자. 그러면 길고 긴 윤회의 세월이 고해에서 해탈하는 지혜를 닦으며, 타인에게 봉사하는 자비를 실천하는 수행이지 않겠는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일러 보살(Bodhisattva, 보디사트바, 줄여서 보살)이라한다. 오늘 우리도 싯다르타가 가신 길, 보디삿타의 길을 간다.
<보살의 아모르 파티>
오늘 같은 아침을 백만 번을 반복하더라도 난 매일 그런 아침을 맞으리라.
오늘 같은 날을 백만 번을 반복하더라도 난 매일 그런 날을 살리라.
금생과 같은 삶을 백만 번을 반복하더라도 난 기꺼이 그런 삶을 살리라.
<보리심의 기도>
나와 허공에 가득한 모든 중생이 지금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삼세일체불의 공덕을 한 몸에 구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팔만사천 다르마에 귀의합니다. 성스러운 승가에 귀의합니다
나는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하여 부처를 이루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법을 전하여 깨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행복으로 인도하겠습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과 번뇌가 다할 때까지
나는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과 함께하면서 보살의 원행을 완성하겠습니다. <끝>
*원담스님 법문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BH8UuBjklXk?feature=share
*불광사 일요법회 유투브 동영상 가운데 스님 법문 부분은 37:00:00~1:26:00(약 50분)입니다.
첫댓글 [불광사 사무국장 법성행] [오후 8:50] https://www.youtube.com/live/BH8UuBjklXk?feature=share
불광사 일요법회 유투브 동영상 가운데 스님 법문 부분은 37:00:00~1:26:00(약 50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