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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전과웅)
전태일
출생
1948년 9월 28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
(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사망
1970년 11월 13일 (2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인
분신자살
직업
노동자, 노동 운동가
웹사이트
(재)전태일 재단
전태일(全泰壹, 1948년 9월 28일 대구 (당시 대구부 남산정) 출생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자, 노동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분신 자결하였다.
헌신적으로 노동자 인권운동을 펼쳤기에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1]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진보 진영에서는 전태일을 부를 때 흔히 ‘열사’나 ‘동지’[2]호칭을 붙인다.
Ⅰ. 생애
[유년시절과 평화시장]
대구부 남산동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의 가난한 노동자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재봉사였던 아버지 전상수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1954년 서울로 올라와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초등학교와 고등공민학교 자퇴), 거리에서 삼발이를 만들어서 파는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1965년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 잔 값이던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
이듬해 직장을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 되는 옳지 못한 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자본가들에게 밉보여서 해고된다. 이후 재단보조로 취직하여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당한 뒤 새로 재단사 자리에 올랐다.
[노동운동]
1968년에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3] 그 뒤 해설서를 구입해 그 내용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의로운 분노를 느끼고,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4]를 창립하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고 설문을 통해 현재의 근로실태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자본가들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나고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된 전태일은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한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으며, 자본가들도 삼동회는 사회주의 조직이라고 헐뜯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죽음]
이에 따라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 등을 준비해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경찰의 방해로 플래카드를 빼앗기는 등 시위가 무위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을 때, 전태일은 갑자기 온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5]
현재 전태일의 무덤은 모란공원에 있다.
Ⅱ.영향
1.사회적 반향
[지식인들의 전태일 추모]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고발한 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11월 16일 서울대 법대생 1백여 명은 그의 유해를 인수하여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주장했고, 상대생 4백여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20일에는 서울대생과 이화여대생들이 법과대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공동으로 시위를 벌였으며, 고려대, 연세대생들도 집회를 열었다. 서울대 측은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으나 서울대생들은 계속해서 철야 농성을 벌였다.[6]
[종교계의 반응]
22일 새문안교회(예장통합)대학생부 신도 40여명은 전태일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고 자신들도 공모자라며 속죄를 위한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23일에는 기독교계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 집전으로 추모 예배를 거행하였는데, 고(故) 장공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치계]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7]
[노동계]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죽어간 사건은 당연히 노동계에 큰 영향을 주어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진 계기가 되었다.
자본가들에게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단결하여 투쟁할 생각을 못하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전태일 열사를 보면서 각성한 것이다.
19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음식점)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8월 신진자동차 노조 조합원과 가족 1900여명의 파업투쟁, 한진 상사 파월 노동자 400여명의 대한항공 빌딩 옥상 방화 농성 등이 주요한 사건들이었다.
1971년의 노동자의 단결투쟁은 1600여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도 165건에 비해 10배가 넘는 규모였다.[8]
2009년,2010년 민주노총에서 노동자 집회를 여의도 광장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었는데, 당시 노동자 집회의 이름이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을 위한 노동자 대회"였을 정도로 전태일의 저항적인 죽음은 지금도 노동자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2.의의
[노동인권선언]
전태일의 분신저항으로 각인시킨 노동자의 인간존엄성 선언과 소외, 핍박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사회구조적인 죄에 대한 예언자적 저항은 역사적 의의를 띤다.
당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 현장의 상황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알려졌고 이로 인해 전체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인간이하의 고통에 대해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일기 시작했다.-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감내할 수없는 비인간적 노동조건에서 고통받던 노동자의 가슴에 정당한 분노의 불을 지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노동자와 학생, 지식인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연대는 종전에는 보도조차 하지 않던 노동문제를 사회 이슈화 했다.신문, 방송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되고 이로써 정치계와 정당들도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에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다.
전태일의 항거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민주노동운동의 고양과 훗날 사회 민주화의 시금석이 되었다.― 전태일의 의거로 당시 군사독재기에도 불구하고 제한적이나마 민주적인 노동조합 결성이 급격히 증가하고 노동자의 권익 쟁취를 위한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부활했다.
민주노조의 가열찬 투쟁과 쟁의는 혹독한 군부독재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마침내 독재체제가 붕괴되는 하나의 토대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전태일 의거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YH여성노동자들에 의한 마지막 저항과 투쟁은 박정희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9]
[21세기 노동계의 전태일 열사 정신]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비정규직 노동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김영훈 위원장은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전태일 열사는 그 자신도 어려웠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여성노동자들의 편에서 살다가 죽었다.
노동운동도 가장 고통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특히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것이다.
전태일 열사는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삶을 생각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라고 말했다.[10]
[전태일 관련 작품]
그의 삶은 1983년 출판된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전태일 평전이 개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1990년대에 전태일의 생애를 다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전태일 역을 맡은 배우 홍경인과 내레이션 역할을 맡은 배우 문성근은 이 영화에 무료로 출연하였다.[11]
Ⅲ.가족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이 죽은 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여동생 전순옥도 노동운동가가 되어 2012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아버지 전상수(全相洙)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여동생 전순옥
여동생 전태리 (본명 : 전순덕)
남동생 전태삼
Ⅳ. 어머니, 이소선의 회고
자식들에 대해서:
이소선은 "난 자식들한테 할 말이 없는 사람이야. 내가 미쳐 돌아 다녔는데, 애들이 밥을 먹었는지, 어찌 살았는지 모른다. 해준 것이 없어.
딸 〈순옥〉이 영국 유학갈 때 난 그것도 몰랐어 짐 싸놓고 와서 간다기에 가는가 했지, 학비 한번 대준 적이 없어.〈태삼〉이 그거는,니는 쌍둥이 자식도 있으니 데모하는데 나오지 말라고 해도, 알았다면서 데모가면 나와있어. 엄마가 노동운동 못하게 한다고 원망해.
〈순덕〉이는 우리집 사람들은 전부 가출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 언니도 오빠도 모두 노동운동하러 다니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거야. 그런 순덕이가 시집가서 뒤늦게 집을 장만했다는데도 난 가보지 못했어 그렇게 오라고해도 갈수가 없어. 지들 사는데 무슨 도움을 주었다고...참 난 못난 사람이야"라고 구술했다.
태일에 대해:
"태일이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 같은 노동자를 너무도 사랑했다고. 그러니 열사나 투사보다 그냥 동지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어.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와 함께하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달라고 전해줘. 태일이는 날 참 좋아했어. 아직도 이 옷을 못 버리고 겨울이 오면 꼭 챙겨입는데,태일이가 공장에서 남은 천으로 엄마 준다고 손수 만들어 준 내의야. 누가 새 옷 입으라고 사줘도 안 입고 난 이것만 입어…….그런 태일이 아니냐"
태일의 동무들에 대해:
"나 그대들 없었으면 지금 살아있지도 못했어. 태일이가 죽고 병원에 찾아와서 이제부터 지들이 내 아들이라는 거야. 그리고 지금 40년 가까이 지났어. 변치 않고 엄마 이상으로 잘해줘, 얼마나 챙겨주는지 몰라.
난 정말로 태일이 친구들을 내 아들이라 생각해. 배곯아가며 두들겨 맞아가며 청계노조를 만들고 지켜냈지. 이들이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태일이와의 마지막 약속도 지킬 수 없었을 거야. 난 그냥 미쳐 죽었을테지.. 어머니라고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순덕이 결혼할 때도, 손주들 대학 들어갈 때도 이들이 태일이 노릇 다했어. 열서너살 먹은 여공들, 그 어린 것들이 얼마나 고생했냐.
이들이 없었으면 청계노조를 지탱해올 수도 없었을 거야. 명절때마다 한복 차려입고 세배하고 그랬어. 지금 다 시집가고 애낳고 살지만 그래도 떡이랑 사들고 찾아오고 그래 이 엄마 준다고."[12]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 3일 사망하였다.
Ⅴ.같이 보기
평등권
근로기준법
사회 운동
사회주의
한국의 진보정당
전태일 평전
전순옥 : 전태일의 여동생이자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정치인
[주석]
1.↑ 《인류의 영원한 고전-신약성서》/정승우 지음/아이세움
2.↑ 동지 호칭은 아직 통용되는 건 아니지만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은 유언처럼 남긴 말에서 열사 호칭을 극구 사양하고, 언제나 함께하는 노동자라면서 '동지'로 불러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었다.-오도엽《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후마니타스,287쪽.
ex)“전태일'동지'가 그처럼 장렬하게 죽었고, 그에 뒤이어 우리 모두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무수한 투쟁을 전개했으며”-장기표의 글에서.
3.↑ 위기철이 쓴 전태일 위인전(산하)에 의하면, 노동운동을 했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읽게 되었다고 한다.
4.↑ 바보회라는 이름은 전태일의 노동자로서의 반성이 담긴 이름이다. 노동자도 인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투쟁을 하기보다는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노동환경에 순응한 바보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
5.↑ 〈이소선:아, 우리들의 어머니!〉, 《이야기 여성사 1》 163~4p, 여성신문사, 2000
6.↑ 이광일, 〈우리 시대 지식인의 초상: 권력과 자본의 품에 안긴 지식인들〉, 《당대비평》 제 4호 279쪽, 1998년
7.↑ 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1983년, 개정판 증쇄 1998년, 27쪽
8.↑ 지명관, 《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장면》 98~ 101쪽, 다섯수레, 1996년; 한국정치연구회, 《한국정치사》 352~ 353쪽, 백산서당, 1990년;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347쪽, 풀빛, 1995년
9.↑ 조성오,《우리역사 이야기》돌베개,187,208쪽
10.↑ 《한겨레21》2010년 9월 27일 기사,글:안수찬 기자,사진:김정효 기자,p.82
11.↑ 영화「전태일」주역 확정 문성근 홍경인 무료출연 동아일보 1995년 3월 31일 작성
12.↑ 오도엽《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후마니타스,177,203,273,285쪽
출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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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추모]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
세상 속으로 2008/11/13 02:00 굴렁쇠
오늘(11월 13일)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 사망한 지 38주기가 되는 날이다.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우리 노동현실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이다.
수많은 사업장에서는 아직도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아무리 미국발 금융위기에 짓눌린 실물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허덕인들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몰아서야 되겠는가.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라지만 노동자들이 빠져나갈 희망의 비상구는 좁기만 하다. 더욱 교묘해지고 정교해진 자본의 공세 앞에서 일천만 저임금 노동자가 헤쳐 나가야 할 길에는 푸른 신호등이 없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웹사이트에 들렸다. 38주기 전태일 추도식이 모란공원 묘지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보았다. 아, 벌써 '바보 전태일'이 불꽃으로 산화한지 38년의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그런데 왜 이리 착잡하고 부끄러울까.
전태일 열사 죽음 그 후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거리에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던 청년노동자 전태일. '인간의 인간다운 세상을 위하여 산화한 아름답고 거룩한 영혼'(전태일다리 동판에 새긴 소설가 조정래의 글). 무언가 해야 할 날이다.
숯덩이가 된 전태일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서울대 법대생 조영래와 장기표는 '낮은 곳의 사람들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치자'며 울면서 다짐하지 않았던가. 전태일을 생각한다면, 아니 그를 닮은 이 세상 수많은 전태일을 생각한다면 단 하루만이라도 우리 삶에 헛된 그 무엇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볼 일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우리 노동운동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한국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그날 큰 빚을 떠안은 채 시동을 걸었다. 그의 죽음 이후 노동자들은 청계피복, 동일방직, YH무역 등 많은 사업장에서 갖은 수모와 협박, 폭력을 당하면서도 유신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정말 끈질기게 싸웠다.
군사독재정권의 혹독한 탄압에도 무릎을 꿇지 않고 맞섰던 이 땅의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은 마침내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어두웠던 역사를 허물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이웃들의 삶은 왜 이리 어둡고 쓸쓸한가. 열악한 노동환경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다. 장시간 노동력을 제공해도 임금은 깎이기 일쑤다. 1997년 IMF 한파 이후 가뜩이나 얼어붙었던 노동시장은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없다.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는 노동시장마저 삼켜버렸다. 사회를 갈라놓은 양극화 페달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노동자들은 고급노동자와 저급노동자로 양분되어 또 다른 계급차별을 낳고 있다. 860만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존재는 이제 우리 사회의 커다란 아픔이 돼 버렸다. 이를 조롱하는 자본은 글로벌화 되어 인류가 존재하는 곳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독버섯처럼 자란다. 하지만 노동은 갈수록 지역화·국지화 되어 스스로 위축되고 고립되고 있다.
근성이 튼튼한 것은 노동착취구조다. 여전히 견고하다.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노동부는 '기업부'로 업종을 전환했다. 법과 제도를 아우르는 노동정책은 노동자 개인과 조직을 짓밟고 와해하는 도구로 악명을 떨친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전태일이 우리 사회에 큰 숙제를 남기며 떠난 지 38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민주노동운동의 갈 길은 험난하고 멀기만 하다.
게다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 이주노동자와 자국노동자, 숙련노동자와 미숙련노동자, 고급노동자와 저급노동자의 분리·분열공작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노동운동의 미래는 없다.
단위사업장을 넘어 정규직·대형사업장·조직노동자들이 비정규직·영세사업장 미조직 노동자들과 어깨 겯고 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 한 우리 노동운동의 내일은 없다. 연대, 그것은 막강한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소금꽃나무>의 지은이 진짜노동자 김진숙(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은 5년 전 부산역 광장에서 '김주익 열사 추모사'를 읽으며 북받치는 설움을 쏟아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김주익의 죽음의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이주노동자를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맨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동지 여러분!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는 하종강씨의 책 제목이 떠오른다. 그 말이 맞다면, "불쌍한 형제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던 청년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가 희망을 걸어야 할 곳은 노동운동이다.
노동은 언제나 자본에 우월하다.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자본을 형성하고, 이 사회의 진보를 앞당긴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희망이다. 노동운동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세상을 바꾸자!"는 말이 우리에겐 공허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도 그럴까? 위태롭게 매달려 간신히 일자리를 갖고 있는 수많은 사회의 약자들에게, 아직도 "우리는 동우화인켐(삼성반도체 납품업체) 가족이 아니라 가축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길거리에서, 철탑 위에서, 고공 타워 크레인에서, 공장 주변 담벼락에서, 공장 안에서 목숨을 걸고 1년이고, 2년이고, 3년이고 싸우는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그 말이 과연 공허할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이 세상 철문에 갇혀 몸부림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에 왜 붉은 핏발이 서려 있는지를 안다면, 지금의 세상은 바꾸기 위해 존재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모순과 억압과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는 절망의 컨베이어다. 그것을 바꾸고 깨부수지 않으면 그들은 노동자로 살아갈 수 없다. 노동자가 노동자로 살아갈 수 없다면 인간답게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바라는 세상은 희망으로 가득찬 공장이다. 노동자들이 함께 즐겁게 일하며 생산의 주인이 되는, 역사발전의 동력이 되는 가슴 뛰는 광장이다. 전태일의 마음, 전태일의 꿈, 전태일의 희망이 이와 다르지 않다. 전태일은 우리에게 그런 정신을 남겼다.
우리가 갚아야 할 빚
38년 전, 가난과 굶주림과 멸시와 핍박 속에서 '불꽃 희생'으로 사랑과 연대의 힘을 일깨워준 청년 노동자 전태일. 그의 죽음이 마지막이길 바랐다. 그의 죽음으로 이 지옥 같은 노예노동도 끝나기를 바랐다. 슬프게도 그러지 않았다.
국가권력과 자본은 우리 노동자들을 더욱 사지로 내몰았다. 전태일을 따라 일터에서 버림 받고, 쫓겨나고, 몸부림치다가 죽어간 불쌍한 영혼들. 그 죽음의 행렬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우리 가슴에 아픔을 던져주고 떠났을까. 열 손가락으로 몇 번을 다시 헤아려야 그 죽음의 숫자와 만나게 될까.
젊음, 꿈, 희망...모두 놓아 버리고 그렇게들 떠나면서 전태일과 그 전태일을 닮은 오늘의 전태일인 그들은 산 자들에게 말한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고, 자본의 노예가 되기 싫다고, 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이제, 우리가 그 '전태일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차례다. /굴렁쇠
노동자의 영원한 벗, 전태일 열사를 기리며 듣는 노래 -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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