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사진설명: 평생 화두를 놓지 않고 오후불식 등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며 수행했던 일현스님. 1940년대 초반 수덕사 정혜사에서 49일 용맹정진을 마친 모습. 사진제공 진공스님. |
많은 사람들이 일현(一玄)스님을 염불과 어산에 뛰어난 어른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일현스님은 참선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계율 호지(護持)를 목숨처럼 지켰던 어른이다. 수덕사 정혜사를 비롯한 제방선원에서 11안거를 지냈으며, 마곡사 주지 소임을 맡은 후에도 결제와 해제철을 구분하지 않고 참선 정진했다. 상좌인 진공스님(논산 황룡사 주지)은 “은사스님께서는 참선과 염불은 둘이 아니다”면서 “새벽예불을 모신 후에는 줄곧 참선을 통해 화두를 드셨다”고 회고한다.
1950년대에는 도봉산 중턱 석굴에서 6년간 묵언참선으로 ‘결사(結社)’를 한 일현스님은 상좌들과 함께 화두를 들면서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는 스승과 제자가 따로 없으니, 공부할 때는 모두가 도반”이라면서 후학들을 하심(下心)으로 대했다. 하지만 불법(佛法)에서 어긋난 행동을 할 때는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어 바른 길로 인도했다.
일현스님이 이처럼 참선을 통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배경에는 은사인 용음스님과 노스님인 만공스님의 영향이 컸다.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은 어른인 만공스님을 비롯해 그 제자들은 늘 간화선 수행으로 정각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덕사에서 어른들의 가르침을 몸소 배우고 익히며 자란 일현스님에게 참선수행은 자연스럽게 훈습(薰習)되었던 것이다.
정진을 거듭하던 일현스님은 어느 날 새벽 쇳송에 나오는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구절을 듣고 마음이 열리는 경지를 맛보았다.
이때부터 스님은 일체 다른 말을 삼가고 오직 “참선과 염불이 둘이 아니니 출가사문의 길을 제대로 걸으려면 이 둘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현스님의 육성이다.
“안다는 것은 아는 밖의 것을 진정 모르는 것이고, 안다면 행동으로 보여줘야 참 중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깨달음의 경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말보다는 행동을 우선 했던 일현스님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말’을 앞세우는 것을 싫어했다. 때문에 스스로도 불필요한 말을 아끼고 몸소 행동으로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님은 1941년 2월10일부터 1946년 9월14일까지 석왕사 강원에서 정진했다. 5년간 강원에 머물며 경학을 연찬했던 스님이 굳이 말을 아낀데는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뜻이 담겨있다.
마곡사 주지 소임을 다섯 차례나 보았지만, 자리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주지 자리를 맡기 싫어 몰래 사중(寺中)을 빠져나온 적도 여러 차례였으며, 도반과 후학들의 ‘강권’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소임을 보았다. 진공스님은 “은사스님께서 하루는 저에게 ‘우리 주지하지 말고 다른 사람 시키고 토굴로 가서 참선이나 하면 어떨까. 나는 주지가 싫어. 정말 싫어’라고 하시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손상좌인 장곡스님(갑사 주지)은 “노스님께서는 절집 법도를 잘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참된 수행자라고 말씀해 주셨다”면서 “백장청규를 한 치도 어기지 않고 사셨던 어른”이라고 회고했다.
일현스님은 1991년 7월28일 새벽 2시 천안 성불사에서 입적했다. 예금통장 하나 없이 평생을 검소하고 청빈하게 살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던 일현스님의 이때 세수는 69세, 법납은 63세였다. 스님의 세상 이름은 김명수(金明洙)이다. “소리 전(前)에 눈썹 말 전하고, 묵연(默然)한 가운데 눈이 미소 짓고, 눈이 마주칠 때 바로 도(道)가 있다.”
다음에는 평생 송광사를 외호하며 정진한 취봉(翠峰)스님의 행장을 소개합니다.
바로잡음 - 지난 1933호 일현스님 기사에서 스님의 생년월일은 1922년 1월15일로, 입산 출가일은 3세로 바로잡습니다. 일현스님은 7세 때 수덕사에서 채공 소임을 보았습니다.
|
|
첫댓글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