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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설악산(雪嶽山)은 강원도 속초시와 양양군, 인제군, 고성군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1,708미터의 산이다. 남한에서는 한라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3번째로 높은 설악산은 주봉인 대청봉(1,708m)을 비롯하여 700여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추석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
설악산은 외설악과 내설악으로 구분한다. 근래에는 오색지구를 추가하여 남설악을 덧붙이기도 한다. 한계령과 미시령을 경계선으로 동해쪽은 외설악, 서쪽은 내설악이라한다. 외설악은 설악산에서 가장 높은 대청봉, 관모산, 천불동 계곡, 울산바위, 권금성, 금강굴, 비룡폭포, 토왕성폭포 등 기암절벽과 큰 폭포들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내설악은 백담계곡, 수렴동계곡, 백운동계곡, 가야동계곡, 와룡, 유달, 쌍폭, 대승 등 폭포, 백담사, 봉정암 등의 사찰들이 있으며 계곡이 아름답고 산세가 빼어나다. 설악산은 봄의 철쭉 등 온갖 꽃, 여름의 맑고 깨끗한 계곡물, 설악제 기간을 전후한 가을 단풍, 눈덮인 겨울 설경 등 사계절이 절경을 이룬다.
가을이면 대청봉 단풍을 시작으로 전국의 산은 옷을 갈아입고 화려하게 치장한다. 대청 중청 소청봉을 필두로 화채봉 한계령 대승령 공룡능선이 그 다음으로 타오르다 용아장성 전불동계곡으로 내려온뒤 장수대와 옥녀탕까지 빠른 속도로 붉게 물들인다.이중 공룡능선은 산악인들이 설악단풍산행의 으뜸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곳. 외설악의 암릉미가 동해와 화채릉의 짙푸른 사면과 어우러진데다 서쪽의 용아장성과 기암도 장관이다.설악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은 화채능선과 한계령, 권금성 일대, 장수대 계곡, 수렴동 계곡을 친다.
설악산의 오색단풍 중 붉은 색은 단풍나무를 비롯 벚나무, 붉나무, 개박달, 박달나무 등이 만들어 내는 장관이다. 또 노란색은 물푸레나무, 피나무, 엄나무, 층층나무가, 주황색은 옻나무, 신갈나무,굴참나무, 떡갈나무 등이 엮어낸다. 여기에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최고의 절경을 만들어 낸다.
또한 설악산은 겨울에 아름다운 산이다. 그 중에서도 탕수동계곡에서 시작하여 대승령과 귀떼기청봉을 거쳐 대청봉에 이르는 서북릉은 설악의 진면목을 두루 감상할 수 있어 으뜸으로 꼽히는 능선길이다. 미시령에서 마등령과 공룡 능선을 거쳐 대청봉에 이르는 북릉 역시 서북릉 못지 않은 장쾌한 멋이 있다.
설악산은 척산온천, 설악워터피아, 오색온천이 있어 산행 후 온천을 즐길 수 있다. 척산온천은 외설악의 초입인 설악동에서 불과 2㎞ 거리. 한화리조트의 워터피아는 파도풀장, 슬라이더풀장, 야외 수영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오색온천은 점봉산 오색약수에서 한계령쪽으로 4㎞쯤 떨어진 온정골에 있다.
겨울의 설악산은 겨울산행과 겨울바다의 운치, 상쾌한 온천욕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1석3조의 명소로 꼽힌다, 인근에 낙산사, 하조대, 주전골 등 명승지가 많다
울산바위 설화
설악산의 울산바위가 '울산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전설은,1983년 뿌리 깊은 나무 출판사가 발행한 ‘한국의 발견’강원도 속초시 편에서,'울산바위’ 전설과 함께 ‘속초 지명의 유래’가 적혀져 있는데,
옛날 조물주가 금강산의 경관을 빼어나게 빚으려고 전국의 잘 생긴 바위는 모두 금강산으로 모이도록 불렀는데, 경상도 울산에 있었던 큰 바위도 그 말을 듣고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으나 워낙 덩치가 크고 몸이 무거워 느림보 걸음걸이다 보니 설악산에 이르렀을 때 이미 금강산은 모두 다 만들어진 후라서 이 바위는 금강산에 가보지도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는 얘기입니다.
한편 설악산 유람길에 나셨던 울산 고을의 원님이 울산바위에 얽힌 전설을 듣고 신흥사 스님에게 울산 바위는 울산 고을의 소유인데 신흥사가 차지했으니 그 대가로 세를 내라고 하여 해마다 세를 받아 갔는데 어느 해인가 신흥사의 동자승이 이제부터는 세를 줄 수 없으니 울산바위를 울산으로 도로 가져 가라고 한 바, 이에 울산 고을 원님이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은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에 많이 자라고 있는 풀(草)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매 새끼를 불로 태워 재로 꼰 새끼로 바위를 묶었지만, 울산 고을의 원님은 이 바위를 가져갈 수 없었으려니와 더 이상 울산바위에 대한 세를 내라는 말도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가 한자로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를 써서 속초(束草)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 속초의 지명 유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이며,
한편으로는 계조암에서 보면 울산바위가 마치 울(울타리 즉 담)같아 보이는데,. 그래서 '울같은 산바위'란 뜻으로 '울산바위'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뒤의 얘기가 더 신빙성이 있지만 재미는 앞의 얘기가 더 재미 있습니다. 이 바위가 실제로 울산에서 자기 혼자서 옮겨져 왔다는 얘기를 믿을 분은 한 사람도 없겠지만 좌우간 재미가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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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嶽山 新興寺(설악산 신흥사) 由來
이 가람은 신라(新羅) 진덕여왕 6년(서기652)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향성사(香城寺) 라고 하였다.이 이름은 불교의 중향성불토국(衆香城佛土國)이라는 글에서 따온 것인데 중향성(衆香城)은 금강산(金剛山) 철위산(鐵圍山)을 의미하며 불토국(佛土國)은 부처님께서 교화 할 대상적 국토라는 의미와 정치적 형태의 국가라고 하는 뜻과 어울린 말이다.
처음 향성사지는 지금의 켄싱턴호텔 자리에 세워져 46년간 존속하다가 효소왕 7년(서기 69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당시 9층이던 향성탑이 현재 켄싱턴호텔 앞에 3층만 남아 있어 옛 향성사의 역사를 말해주듯 옛날을 잊지 않게 하고 있다.
향성사가 화재를 당한지 3년 후 의상조사께서 능인암(현재 내원암)터에 다시 중건하고 사명(寺名)을 선정사(禪定寺)라고 개칭 하였다. 그 후 946년간 수많은 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 정진하여 왔으나 조선 인조20년(서기1642)또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된 것을 2년후 영서(靈瑞), 혜원(惠元), 연옥(蓮玉) 세분의 고승들께서 중창을 서원하고 기도 정진 중 비몽사몽간에 백발신인이 나타나서 지금의 신흥사 터를 점지해 주며 “이곳은 누 만대에 삼재가 미치지 않는 신역(神域)이니라” 말씀 하신 후 홀연히 사라지는 기서(奇瑞)를 얻고 절을 중창하니 지금의 신흥사이다. 절 이름을 신인(神人)이 길지(吉地)를 점지해 주어 흥왕(興旺)하게 되었다 하여 신흥사(神興寺)라 한 것이다. 6·25사변때 고성군 건봉사는 전소되었고 영북지역의 대본산 기능이 마비되었을 무렵 고암, 성준 두 스님의 원력으로 여기 신흥사를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하여 업무를 이관하게 되었다. 이후 신흥사는 영동지역의 불교를 새롭게 일으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불사를 전개해 나갔다. 속초노인복지관을 개관하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춘천에는 불교방송지국을 개국하여 포교에 전념하는 사찰이 되었다. 이렇게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신흥사가 과거의 신흥사가 아니라 새로운 신흥사가 되었다며 신흥사(新興寺)의 귀신 신자(神字)를 시대에 맞게 새로울 신자(新字)로 고쳐 사용하자는 중론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995년부터 영동불교를 새로 일으킨다는 서원을 담아 사명(寺名)을 신흥사(新興寺)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郞). 무림(茂林)의 아들
이다. 무 림은 진골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
)의 관직에 있었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 하여 법해(法 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초파일에 자장을 낳았다.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으며, 어버이를 여읜 뒤부터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 하여 처자를 버리고 홀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조그 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움직이 기만 하 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고, 끈으로 머리 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 미함 을 물리쳤다. 그때 조정의 재상 자리가 비어 그를 기용하려 하였으나 부름 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취임하지 않으면 곧 목을 베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 그는 칙명을 듣고,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 破戒而生)."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출가를 허락하 였다.
그뒤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하였는데, 그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공양하였고, 천인(天人)이 와서 5계를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636년(선덕여왕 5) 승실(僧實)등 제자 10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먼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러 있다는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에 은밀한 감응을 기도하였다. 7일 동안의 기도 후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 사구게(四句偈)를 주었다. 아마도 그는 이 곳에 머무는 동안 화엄사상의 묘지(妙旨)를 터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하여 꿈에 얻은 게송이 비로 화엄의 내용을 천명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뒤, 중국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당나라 태종을 사신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후한 대접을 하였다. 어느날 한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자 곧 눈을 뜨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그를 찾아와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매일 1, 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그가 당에서 한참 활동하는 시기에 선덕여왕은 자장의 귀국을 정식으로 요청한다. 귀국길에 본국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마련하였으며, 7년만에 귀국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홍통(弘通)을 통한 국민교화와 불교교단의 기강확립이 었다. 어느해 여름,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하였고,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 불교는 기강이 세워져 있지 못하였고, 조정에서 대국통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었던 것도 그로 하여금 전국의 승니(僧尼)들을 관장하도록 하기위해서였다. 한편, 일찍이 자기 집을 절로 바꾸었던 원녕사를 다시 증축하고, <화엄경>을 강하여 화엄교법(華嚴敎法)을 천명할때 52명의 여인이 나타나 법을 듣고 깨닫자 문인(門人)들이 그 수만큼의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하였는데,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신라에 화엄사상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을 자장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그는 신라야말로 예로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은 <삼국 유사>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신흥사 통일대불
민족통일의 비원(悲願)을 안은 청동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곳 설악에 나투어 대자비로 비추사 분단의 아픔을 끌어 안았다.속초 설악산 신흥사(주지 度吼)는 10년간의 통일청동대불좌상(統一靑銅大不坐像) 조성불사(佛事)를 마치고 드디어 '97년 10월 25일 점안' 대법회를 봉행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을 형상화한 청동대불은 거불(巨佛)로서 좌대 높이 4.3m, 대불 높이 14.6m, 좌대 직경 13m, 아파트 6층 높이에 1백8t의 청동이 사용되었다. 8면 좌대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십육 나한상(十六羅漢 像)이 섬세하게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화려한 것은 지름 10㎝의 인조 큐빅 1개와 8㎝짜리 8개로된 미간 백호는 중생계의 무명을 밝혀주듯 찬란한 광채를 발광한다. 점안식*에서는 '92년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3과와 다라니경, 칠보등 복장 유물도 봉안되었다.20세기 불상양식으로 기록될 신흥사 통일대불(新興寺統一大不)은 불상의 대가 황수영(전 동국대 총장), 정영호(교원대 박물관장), 고(故) 홍정식(전 동국대 교수), 김정기(한림대 교수)가 자문하였다. 불모(佛母) 김성호(불교미술관장)와 자문위원들은 수시로 만나 청동대불의 석고, 주물, 조립을 비롯한 모든 과정을 점검하며 제작에 헌신하였다.
87년 8월 공사를 시작한 청동대불 법사는 4년 동안 석고로 불상의 원형을 만들었고 '94년에는 주물 작업을 끝냈으며, '95년에는 청동조각조립을 마무리하는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10년간의 조성 기간 동안 전국 각지에서 30만 명이 동참하여 무사하게 봉안될 수 있도록 기원하였다.
인종과 종교, 종파를 떠나 우리 민족의 최대 염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뜻이 불상 조성에 녹아 들었다. 특히 실향민이 많고 북한과 인접한 신흥사에 통일대불이 봉안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강 같은 세월은 청동대불이 봉안되기까지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스님이 세분이나(慧法 · 知洪 · 度吼) 바뀌는 동안 이룬 대역사(大役事)로 종교의 벽을 넘어서는 불교 문화사에 큰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현대를 칠기 시대라고 한다면 철기 시대의 유산으로 후대에 또한 기억될 것이다.
※ 점안 의식(點眼儀式)은 불교 신앙의 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으로 개안 의식(開眼儀式)이라고도 한다.불상(佛像)을 점안할 때에는 팔부신장을 청하여 도량을 옹호하게 하고 시방의 불보살님께 오늘의 불상, 탱화에 대한 내력을 설명한다. 또한 오색실을 사용하여 부처님의 천안통과 천이통, 타심통, 신족통, 숙명통, 누지통, 신통력, 용맹력, 자비력, 여래력이 청정하게 성취되기를 기원한 뒤에 불상의 눈을 붓으로 그리게 되는 의식이다.
향성사지 삼층석탑
신흥사사적(新興寺事蹟)』에 의하면 향성사는 신라 고승 자장(慈藏)이 652년 (진덕여왕6)에 처음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현존 신흥사의 전신이다. 이 석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세운 통일 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다. 각 층 몸돌에는 양쪽으로 모서리 기둥을 지붕돌 아래로는 5단의 지붕돌 받침을 조각하였고, 탑 꼭대기에 있던 상륜부(相輪部)【탑의 맨 위에 놓인 장식】는 모두 없어졌지만 전체적으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다.
처음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석 중앙에서 사리구멍을 확인하였으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석탑의 높이가 4.33m로 장엄하면서도 간결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백담사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로 백담계곡 위에 있어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한용운의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서기 647년 신라 제 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 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783년에 최붕과 운담이 백담사라 개칭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백담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운 데에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백담사는 내설악의 아주 깊은 오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좀처럼 찾기 힘든 수행처였다. 수많은 운수납자가 불원천리하고 이곳을 찾아 백담사 계곡을 찾아 시원하게 흘러가는 계곡의 맑은 물에 객진번뇌를 털어내고 설악영봉의 푸른 구름을 벗을 삼아 출격장부의 기상을 다듬던 선불장이었다.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부속암자로서 유지만 남아있는 곳으로 동암, 원명암, 백련암, 축성암 등 8개의 암자가 있었다.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는 1905년 이 곳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어 [조선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를 집필하고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불교유신과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일제의 민족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운동을 구상하였던 독립운동의 유적지로서도 유명하다.
현재 백담사에는 법당, 법화실, 화엄실, 나한전, 관음전, 산신각 등 기존건물 외에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문학사상과 불교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만해기념관, 만해 교육관, 만해연구관, 만해수련원, 일주문, 금강문, 만복전, 만해도서관, 요사채, 양로실, 만해당, 헌다실, 적선당 등 16개의 건물로 구성된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의 하나이다. 백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기초선원으로 지정되어 갓 득도한 승려들이 참선수행을 하고 있다.
백담사 목불좌상 복장물
백담사의 극락보전안에 주불로 봉안되어 있는 이 목불좌상은 조선 영조24년인 1748년에 조성된 아미타목불좌상(阿彌陀木佛坐像)이다. 머리에는 정상계주(頂上계珠)가 큼직하게 솟아있고 육계(肉 )의 구분이 불분명하며, 나발(螺髮)이 촘촘하게 표현되고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여 당시의 사각형적이고 평판적인 얼굴보다 우수한 편이다. 또한 눈이 가늘고 입이 작으며 코가 돌출하여 독특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다.
상체는 가슴이 넓고 어깨가 둥글어 당당한 인상을 주지만 다소 평판적인 당시의 특징을 따른 것이며, 하체의 앉아있는 형태는 넓고 큼직하며 상체와 조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당시의 목불상 가운데 대표작임을 알려주고 있다. 두손은 시무외 ·여원인에 엄지와 중지(中指)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짓고 있고 두발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는 두꺼운 편인데, 옷주름이 돌출하고 어깨의 Ω형 주름과 무릎사이의 주름들이 곡선적으로 처리된 점, 그리고 가슴은 U자형 중복주름이나 가슴의 내의(內衣)상단주름의 곡선적인 주름들은 조선초기의 특징이 내려온 것으로 이 불상을 좀더 돋보이게 한다.
이처럼 18세기 전반기의 불상가운데 수작으로 평가되는 이 목불상은 복장품(腹藏品)을 갖추고 있어서 특히 주목된다.
복장유물(腹藏遺物)은 만자소화(卍字小花)무늬의 노란색단 삼회장저고리는 1748년(영조 24년) 저고리로서 상태가 매우 아름답고 색상이 선명하며 바느질상태가 고르다. 등길이 37.5㎝, 화장은 75㎝, 품은 41㎝, 저고리 깃은 만자소화문(卍字小花紋)을 한 노란색 호박단이고 깃과 곁마기는 만자운용문(卍字雲龍紋)자색단이다. 끝동은 만자소화문(卍字小花紋) 자색단, 고름은 떨어져 없으나 고름달렸던 자리가 2.5㎝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고름이 있었다(너비 2.5㎝). 일반적으로 삼회장저고리일 경우에 깃과 곁마기와 고름은 같은 옷감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 고름도 깃과 같은 만자운용문(卍字雲龍紋) 자색단이었을 것이다.
만자문(卍字紋)은 길상만복(吉祥萬福)이 모두 모인다는 뜻이다. 이 만자(卍字)는 사단(四端)에서 횡으로 선을 연장하여 만자(卍字)를 서로 연결한 장각만자문(長脚卍字紋)으로 도안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저고리의 만자문(卍字紋)도 장각만자문(長脚卍字紋)이다. 이러한 장각만자문(長脚卍字紋)은 만불도두(滿不到頭), 또는 부귀단두(富貴斷頭)라고도 한다. 그래서 장각만자문양(長脚卍字紋樣)은 무한한 행복을 뜻한다. 대부분의 장각만자문(長脚卍字紋)은 소화문(小花紋)을 섞어서 도안하는데 이 노랑 삼회장저고리에서는 소화문(小花紋)을 국화문의 단순화한 소화(小花)를 사용하여 도안하였다.
저고리 주인공은 깃과 곁마기의 만자운용문(卍字雲龍紋)자단색으로 보아 궁중의 왕족이거나 왕실과 관계된 신분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 저고리는 당대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기타 복장물은 유리와 수정등의 파편 수백점을 보자기에 싼 것으로 복장물로 대체한 것이다.
영시암(永矢庵) ]
영시암이 지금까지 실전(實傳)해 오면서 다른 사찰보다 유명한 것은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함께 했다는 점입니다. 고려(高麗)가 멸망하고 조선(朝鮮)이 건국 된 초기에는 숭유배불(崇儒排佛)정책을 펴서 전국의 사찰들을 폐하고 주(州)․ 군(郡) 단위로 자복시(資福寺)라 하여 복을 비는 사찰을 1개소씩 두기도 하였는데, 당시 인제에는 현고사(玄高寺)가 지정이 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로서는 위치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유교와 불교가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지 않습니까? 호산무진(壺山無盡)이 쓴 <영시암기(永矢庵記)>에 실려 있기를, “유학(儒學)을 배우려는 자는 삼연(三淵)같도록 하여 부처가 부처되는 까닭을 알게 하고, 불교(佛敎)를 배우려는 자는 설정(雪頂)같도록 하여 유자(儒者)가 유자 되는 근거를 알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삼연(三淵)을 아는 자는 설정(雪頂)만한 이가 없었고, 설정(雪頂)을 아는 자는 삼연(三淵)만 한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에서는 선비이면서 불우(佛宇)를 창건하였고, 아래에서는 불자(佛子)이면서 유종(儒踵)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두 분의 이름은 천 년 후까지도 전해져서 전후(前後)가 상응(相應)하고 원근(遠近)이 상조(相助)하는 것이니, 유(儒)와 석(釋)을 막론하고 각각 실(實)을 구(求)할 따름이 아니겠는가?”라고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현재의 영시암은 전해오던 고찰(古刹)이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소실(燒失)된 이후 폐허(廢墟)가 되었던 것을 1992년에 백담사(百潭寺) 주지로 있던 김도윤(金道允) 스님이 다시 복원하여 옛 적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유불(儒佛)이 함께한 이 유명한 영시암을 우리 군민은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며 또한 백담사와 더불어 관광자원으로 널리 홍보에 힘쓰기를 기대해 봅니다.
영시암 도윤스님
버리는 데서 도리어 행복얻어”
“문명의 利器는 수행자에게 독구하려는 마음 포기하세요”
◇출가이후 40년간 산사에서 주경야선 해오며 수행자의 본분사를 묵묵한 실천행으로 보여주고 계시는 도윤 스님.
흙 묻고 낡은 승복 晝耕夜禪 40년 ‘설악산 농부스님’
“세상을 위해 내가 회향할 바가 무엇인지 항상 고민”
검게 그을린 얼굴, 주름투성이의 거친 손, 작업복처럼 군데군데 흙이 묻어있는 승복….
내설악을 찾는 불자들에게 영시암 회주 도윤(71) 스님은 ‘설악산 농부 스님’으로 불린다. 도윤 스님이 모처럼 서울에 왔다.
스님은 겨울철이면 도심 나들이를 한다. 주로 가는 곳은 상좌들이 있는 서울 충정사와 의정부 쌍용사다. 지난달 서울에 온 스님은 현재 서울 중구 한옥마을 바로 옆에 위치한 충정사에 머물고 있다. 스님은 찾아오는 신도들을 반겨 맞으며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고 세상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낸다.
충정사에는 해마다 머무는 스님을 위한 방사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그 방은 정갈하지만, 검소하기 그지없는 스님의 성품 그대로 아무 장식품이 없다. 승복을 걸어두는 옷걸이와 이불만 놓여 있을 뿐이다. 출가 이후 40여 년 간 주경야선(晝耕夜禪)만 해온 스님에겐 외형적인 장식품은 모두 군더더기일 뿐이다.
“문명의 이기는 출가 수행자에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욕망을 자극할 뿐이지요.” 낮에는 채소 키우고 밤에는 좌선에 매진할 뿐인 스님이 관심을 기울일만한 것이 서울엔 거의 없다. 서울이 사람들에게 아무리 편하고 행복을 주는 곳이라 한들 자연을 벗 삼아 정진하는 산 생활과 견줄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문명의 혜택을 뒤로한 채 산에서 사는 스님을 안타까워 하지만 정작 스님은 현대인들을 안타까워한다.
“현대인들은 한없이 구하고 구하는데만 열중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보니 사람이 먼저인지 물질이 먼저인지 분간을 못하고 살아요. 예로부터 선사들은 ‘마음이 도적’이라 경계 했습니다. 행복은 결코 밖에서 얻을 수 없다는 얘기지요. 도리어 버리는 데서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집착하고 구하려는 마음을 포기하세요. 그것이 바로 자기완성의 길이자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도윤 스님은 인제 백담사에서 대청봉 쪽으로 약 1시간 정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영시암에서 생활하신다. 지난 68년 발을 들여놓은 후 지금까지 설악산을 주 거처로 삼고 있다. 30년 넘게 내설악의 여러 암자와 사찰을 거쳤지만 영시암을 마지막 수행처로 정한 이유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법당을 중심으로 텃밭 5천여평, 지금은 임야로 돼 있지만 밭 3만여평이 있어 자급자족을 원하는 스님에겐 더 없이 좋은 도량이다. 88년 영시암을 복원한 스님은 무, 배추 등의 채소 농사를 지어 먹을 거리를 마련해 오고 있다. 당귀, 작약, 만삼, 더덕 등 약초도 재배한다. 스님이 야생 약초의 씨앗을 받아 재배한 약초들은 스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도들을 위한 것이다. 설악산을 찾는 등산객을 비롯해 영시암 참배객들은 따뜻하고 건강에 좋은 약차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스님은 재배한 약초로 차를 끓여 법당 마루에 늘 놓아두기 때문이다.
“설악산을 찾는 불자들이 봉정암만 절이라고 생각하는지 다른 사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더군요. 하루에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이 영시암 마당을 밟고 가는 데도 영시암 부처님께 인사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까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차 공양이었어요. ‘차나 한잔 들게나’가 불교의 인사법 아닙니까.” 스님은 영시암 부처님께 인사를 안해도 그저 그들이 차를 맛있게 들고 가는 것을 보면 기쁘기 그지없다.
4년 전부터 영시암에서 사찰 일을 돕고 있는 무애림 보살은 “봉정암에 기도하러 가던 중에 노스님이 혼자서 법당 청소하는 것을 보고 영시암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촛불아래 참선하는 도윤 스님에게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을 본다”고 말한다. 만선화 보살(58ㆍ경기도 안양시)은 “매번 영시암을 찾을 때마다 스님이 직접 개간한 경작지가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며 “검소하고 수행자 본분에 철저한 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이야말로 산 법문”이라며 흐뭇해했다. 이렇게 스님의 산 법문에 매료돼 영시암을 찾는 불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인제나 강원도내 불자도 아니다. 대부분 서울이나 경기도의 불자들이다.
“농사일을 직접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는 물음에 스님은 “수행자라면 내 먹을 것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고 스님이 일부러 <백장청규>를 의식하신 것은 아니다. <백장청규>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땀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런 생활을 계속 해온 것이다.
도윤스님은 출가하기 전 농촌계몽운동을 한 적이 있다.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농촌의 문맹퇴치와 농로개발 등을 위해 2년 정도 직접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체험하고, 살기 어려운 탓으로 접어둔 학문의 갈증을 풀기 위해 찾아간 곳이 공주 마곡사 복천암이었다. 당시 불교학승으로이름났던 속가 당숙인 김동화 박사가 복천암의 관응(현 직지사 조실) 스님을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관응 스님을 만난 도윤 스님은 스님에게 감화받아 곧바로 머리를 깎고 복천암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행자시절 모든 대중이 나보다 나이가 적었으나 다 스승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어긋남 없는 생활을 보고 있노라면 순수의 상태로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행복했던 것은 농사짓는 일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방학이면 했던 노무자생활과 출가 전에 농사를 지은 경험으로 늘 남보다 서너 배 되는 나뭇짐을 져 나르고, 모 심고 벼 베는 일에도 언제나 일등이었지. 다 떨어진 고무신을 신고 일하고 공부하는 데에서 환희심을 느꼈고 이것이 복 짓는 일이구나 생각했어요.”
스님에게 일과 수행이 둘이 아님을 일깨워준 사람은 복천암 주지 봉인 스님이었다. “어느 날 봉인 스님은 나를 불러 ‘돼지를 보았는가. 그들은 구정물을 먹고 살지만 많은 것을 세상에 회향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공 것이란 결코 없는 법이지요. 얻어먹은 만큼 아니 그보다 몇 배로 갚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어요. 이 때부터 스님의 말씀을 평생 귀감으로 삼아 내가 세상에 회향할 바가 무엇인지를 늘 염두에 두고 살게 되었어요.”
이런 다짐은 출가이후 몸을 담았던 사찰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정선 향적사와 적조암, 설악산 오세암과 봉정암, 화성 신흥사…. 지금은 번듯한 사찰들이지만 60년대만 해도 이 사찰들은 서로들 가지 않으려 하거나 사람들이 살지 않고 비어있는 사찰이 었다. 적조암의 경우 말이 암자지 토굴이었고, 오세암은 기와 조각만 흩어져 있는 폐사지였다. 이런 곳에서 스님은 자급자족을 하면서 정진했다. 최소한 남의 것을 얻어먹지 말자는 각오가 투철했다. 그래서 텃밭에 채소를 심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음식을 얻었고, 농사지을 땅이 없으면 약초를 캐고 잣 등의 열매를 따서 약초꾼과 양식을 교환하기도 했다. 산중 생활을 하면서 스님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서 담담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나름의 진리를 깨달았다.
“도시에서 묵언을 하려고 해봐요.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됩니까. 힘들지요. 산중선정시무난(山中禪定是無難)이요, 대경부동시위난(對境不動是爲難)이라. 즉 산중에서 참선하여 정에 들기는 쉬우나, 세속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 불가에 있어요.”
스님은 이렇게 정진하면서 영시암 봉정암 등 사찰불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칙을 하나 세웠다. 일궈 놓으면 떠나야 한다는 것. “한 곳에 오래 살면 물욕에 빠지기 쉽습니다. 시주가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되면 그동안 지은 좋은 인연들이 한꺼번에 다 없어집니다.”
스님은 한 때 백담사와 의정부 쌍용사 주지를 역임했지만 그 이후엔 주지 소임 권유에 응하지 않고 있다. 수행자가 소임을 맡으면 여러 일에 끄달리고, 대소사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마음 닦는데 소홀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든 탐욕을 끊어버리고 평생 길에서 산 것처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자 한다는 스님은 40여년을 계속해온 자연속에서의 생활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몸의 편안과 물질에서 안락을 구하면 물질의 노예가 될 수 있기에 수행자는 편안함과 물질에의 집착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스님의 말에 의하면 가진 것이 없으면 더 가지려는 마음 또한 없게 된다. 그러므로 부족함 또한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님의 수행생활에 만족할 만한 일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후회도 많았고 아쉬움도 많았다고 토로하신다. 그 중 은사인 관응 스님이 봉정암을 찾았을 때 하신 말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하신다.
“빈대가 들끓었던 방에서 스님을 모시고 자며 여쭈었습니다. ‘스님 무문관에 들어가시지 말고 여기 계시면 어떨까요.’ 가만히 내 말을 들으시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도윤인 여기 육년 있고, 나는 내려가 그곳에 있지.’ 스님께선 다음날 내려가셨고, 나는 결국 여섯 해를 채우지 못하고 불사를 하게 되어 내려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대로 수행에 힘을 쏟을 걸 하는 후회가 남아 있습니다.”
설악산 영시암을 찾는 불자들이 많아지면서 스님을 알아보는 불자들도 많아져 ‘큰스님’이라 부르지만 이 또한 스님에겐 속박으로 여겨진다.
외부에 알려지다 보면 자연히 일과 수행에 게을러지지 않을까 해서다.
산 속 암자에서 평생 주경야선으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도윤 스님에게서 철저한 수행자의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서예 대가인 如初(여초)선생에게 서예를 사사하여 정통서법과 선서예의 대가를 이룸
明珠在掌(명주재장)의 뜻은 손바닥 위 한개의 밝고 영롱한 구슬 색은 빛깔 따라 어김이 없어라 몇차례 친절히 전해 주었건만 어리석은 중생은 밖을 향해 찾도다.
大智似愚(대지사우)의 뜻은 크게 깨우친 사람은 마치 바보 같다
信解行證(신해행증)의 뜻은 불교를 믿어서 깨우침을 얻었거든 보시행을 실천하여 부처님법을 증명한다.
설악산을 세상에 널리 알린 매월당
명산(名山)이 명사(名士)를 낳기도 하고 명사가 명산을 만들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자연은 자연만으로도 그 나름의 뜻이 있겠지만 이 자연에 유명한 사람의 시문(詩文)이 첨가되면 마치 비단에 무늬가 짜인 것 같이 되어 사람의 마음에 젖어들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명산은 금강산이고 옛사람들의 시문 많기로도 금강에 앞설 산은 없다.
금강산이 유명한 것은 산세가 준초하여 범상치 않다는데 있지만 남겨진 시문이 많아 이것을 통해서도 널리 세상에 알려져 그 유명도가 한결 더하게 되었다. 이러한 금강에 비하면 설악산은 금강산의 그늘에 묻혀 빛이 바랬다.
그러나 설악의 산세가 금강에 그리 못 미칠 것이 없었던지 노산은 그의 ‘설악행각’의 마지막 부분에서 “금강이 가진 온갖 것을 다 가진 설악으로 하마터면 동석(動石) 하나를 빠트릴 뻔하였지만 기어이 여기에 와서 동석까지 있고야만 것…”이라고 서술을 하고 있다.
자연 경계에서는 이 두 명산이 큰 차이가 없을는지 몰라도 지난날 탐승객이나 시문 많기로는 설악은 금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금강은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을 한 번 보고 싶다” 할 정도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던 산이다.
그러나 설악은 국내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못하다가 김금원(金錦園)의 기문에 “설악지명 개이이공익저(雪岳之名 盖以二公益著)”라 있는 것으로 보면 이공인 매월당과 김삼연(金三淵) 때문에 알려졌지 이들 이전에는 세상에 그 이름만치 알려진 산이 아니었다. 명사가 명산을 낳는다 했듯이 매월당과 김삼연 같은 당대의 명사가 이 산에 은거하고 있느라 지었던 시문이 세상에 알려졌고 또 그를 찾아왔던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이 설악의 경승에 놀라 돌아가 시문을 유포해 설악은 세상에 낯을 내놓게 되었다.
매월당은 강원도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일생을 거의 유랑하는 생활로 일관했기에 여러 곳을 방랑하였으나 더욱이 강원도 여러 곳에서 오래 머물렀던 탓으로 강원도 지방에서 지은 시문이 많다.유관동록(遊關東錄) 관동일록(關東日錄) 명주일록(溟州日錄) 등이 그 대표적 작품이고 이외에도 설악산과 춘천 등지에서 지은 시문이 그의 문집에 전하고 있다. 더욱이 매월당은 그의 나이 49세 때에 강원도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강원도에 정착하려고 이사를 하였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의 문집인 추강집(秋江集)에 “매월당이 관동으로 돌아간다기에 그를 전송하였다.
매월당이 육경(六經)과 자사(子史) 등의 책을 싣고 강원도 지방에서 겨우 농토를 얻어 스스로 농사를 지어 생활하고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다 하기에 내가 술을 가지고 가 천리를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 길이 없겠구나”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매월당의 관향이 강릉이고 강원도에서 한때 정주도했던 것으로 보이고 강원도에 관한 많은 시문을 남기기도 했으며 또 설악산에도 오래 있었기에 설악산을 세상에 알리는 동기가 되어 김금원이 말한 설악을 알린 두 김 선생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매월당이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였기에 그의 자취가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으나 강원도와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그의 관향이 강릉이라는 점이다. 이는 강릉 김씨 세보의 기록이니 틀림이 없다. 그런데 1889년 일본 사람 오쓰카(大塚)가 도쿄에서 간행한 목판본 발(跋)의 매월당 소전에는 광산(光山) 김씨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매월당이 강원도 지방에 얼마를 머물렀는지 그 연대는 연보에서도 계산하기 어렵다.그러나 앞의 추강의 글에 의하면 한때는 농사할 땅을 얻어 아주 강원도 지방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율곡의 ‘김시습전’에 양양과 강릉 등지에서 즐겨 놀았고 설악 한계 청평 등 산에서 오래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더욱이 당시의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과 여러 편의 편지가 오간 것으로 보면 양양 강릉 등지를 즐겨 찾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자한에게 준 서신 가운데는 자서(自敍)까지 기록하여 지금 우리가 매월당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설악산은 옛날에는 그 상당부분이 양양 땅이고 그가 이곳에서 즐겨 놀았다는 것은 그의 설악산 거주와 무관하지 않다.
노산의 ‘설악행각’ 가운데 설악산 관음암(觀音庵) 오세암(五歲庵)에서 한동안 머물렀다고 있고 노산이 이 행각 때 오세암에서 매월당의 초상 2점을 보았다 하였으니 여기가 오래 머문 암자임이 틀림이 없다.
그가 설악산에 오래 머물렀기에 거기서 지은 시문이 있고 그를 만나러 설악산을 찾은 사람이 많았으며 이 왕래 때에 이들이 남긴 시문이 퍼져 설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을 금원은 설악을 바깥 세상에 알린 것은 두 김 선생에 연유한다고 했던 것이다.
매월당은 승계(僧界)와 속계(俗界)를 오고 갔던 보기 드문 사람으로 유자한에게 준 서신에 의하면 절세의 영재(英才)였다.
그는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떠도는 생활에서도 강원도에 가장 오래 머물렀고 여기에 있는 동안 많은 시문을 남겼고 금강산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설악을 세상에 널리 알렸던 것이다.
명산이 명사를 낳은 강원도의 대표적 예의 하나로 치악산의 원운곡(元耘谷)을 들 수 있겠고 명사가 명산을 선양해 준 예로는 설악산을 세상에 널리 알려준 매월당과 김삼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설악산의 두 김선생(2) 김삼연(金三淵)
동서락기(湖東西洛記)의 저자인 원주 출신의 여류 문인 김금원(金錦園)이 설악산을 세상에 널리 알린 두 김 선생이라 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바로 앞에서 말한 매월당이고 또 한 사람이 김삼연이다.
삼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그 가계(家系)를 잠깐 짚어 보아야 왜 그가 설악산에 은거했는가를 알게 된다.삼연의 관향은 안동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심양으로 잡혀 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의 유명한 시조를 남긴 김상헌(金尙憲)이 그의 증조부이다.
부친은 영의정을 지내고 사사(賜死)된 김수항(金壽恒)이고 맏형은 숙종 때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을 지내고 사사된 김창집(金昌集), 둘째형은 대제학을 지낸 김창협(金昌協), 삼연 김창흡(金昌翕)은 셋째이며 넷째는 김창업(金昌業)으로 학문으로 형 삼연과 일세에 그 이름을 떨쳤던 형제들이다.우리 역사에는 부자 양대가 영의정을 지냈고 모두 사사된 가문은 이 가문밖에 없다.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尙容)은 병자호란 때 강화에 비빈(妃嬪)을 호종(護從)하다가 강화도가 오랑캐의 병사에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필자가 이 가문의 세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세보 첫 장을 넘기니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자결하기 직전에 쓴 ‘일모강도신력무나하(日暮江都臣力無奈何:해가 저무는 강화도에서 저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라는 그의 절필이 있어 보는 사람을 엄숙해지게 하였다.
연은 이러한 명문에서 태어나 영욕(榮辱)의 생애를 보냈다.
삼연이 숙종 15년(1689)에 그 부친 김수항이 사사된 기사화변을 겪은 뒤에 세상에 뜻이 없어 찾아든 곳이 여기 내설악이고 그가 이곳에 세운 정사(精舍)가 영시암(永矢庵)이다.
‘영시암기’에 있는 바와 같이 ‘영불출세위서(永不出世爲誓)’ 즉 ‘다시는 인간세상에 나가지 않기를 맹세하였다’. 정사의 이름도 영시(永矢)로 지어 길이 맹세한다는 뜻을 나타냈고 세상의 영욕과는 절연하였다. 삼연이 영시암을 짓고 여기서 기거하는 동안 그를 만나려 많은 사람이 찾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암기(庵記)’의 ‘혹식심지인만리쟁추 혹양기지사육합운회(或息心之人萬里爭趨 或養氣之士六合雲會:혹 휴양하려는 사람이 먼 곳에서 다투어 몰려왔고 혹 기를 기르려는 선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라는 구절로 보아 선비들의 내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이 다녀간 뒤에 시문으로 세상에 설악을 알렸기에 삼연은 매월당과 함께 설악을 외부에 알린 공로자라고 금원은 말한다.
매월당의 설악에서의 역정은 그의 연보나 문집을 통하여도 상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삼연은 여기서 6년을 있었다.그는 또 설악에서 여러 편의 시문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서도 장편 5언의 앞구절이다.
“오생고무락(五生苦無樂) 어세백불감(於世百不堪)
노투설산중(老投雪山中) 성시영시암(成是永矢庵)”
(내 삶은 괴로워 즐거움이 없고 / 세상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려워라 / 늙어 설악 산중에 들어와 / 여기 영시암을 지었네.)
부친의 사사를 겪은 그의 고뇌가 세속에서는 견디기 어려워 늘그막에 설악을 찾은 심회를 노래하였기에 삼연의 심경이 짐작이 간다.
다시는 세상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입산한 그가 6년 뒤에 여기를 떠나야 할 사건이 생겼다. 그가 들어올 때 식비(食婢)를 데리고 왔는데 그 식비가 범에게 물려가 인정에 그대로 살 수 없어 설악산을 떠났다.
그후 수춘산(壽春山)으로 갔다고 노산의 ‘설악행각’에는 있으나 수춘은 춘천의 옛 이름이니 춘천의 어느 산으로 갔는지 수춘산이 따로 있어 거기에 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강릉에 왔던 것은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서 강릉 선비들에게 붙잡혀 강릉 경포변의 호해정(湖海亭)에서 장기간 두류하면서 글을 가르쳤다.
강릉 선비들이 명문 안동 김문의 가계를 모를 리 없고 만나 본 일은 없으나 그의 학문과 이름은 익히 듣고 있어 멀리서 성화(聲華)를 우러르던 참이었을 것이다.망외(望外)의 분복(分福)으로 공경하던 삼연이 스스로 강릉에 왔으니 이곳 선비들이 다투어 가까이 모시려 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리하여 삼연의 거처는 호해정으로 정하여 졌고 여기에 이 지역의 선비들이 모여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삼연이 머물다 떠나간 뒤에도 삼연의 문인은 물론 삼연을 흠모하던 많은 사람이 호해정을 찾았다고 한다.삼연은 내설악 영시암에서만 있은 것이 아니고 6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느라 설악산의 명소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외설악의 비선대(飛仙臺)에도 들러 지은 ‘비선대’ 오언율시 한 수가 있고 그 가운데 ‘명산을 두루 밟으며 다녔다’는 시구가 있다. 갈역잡영(葛驛雜詠)을 비롯한 인제도중, 합강정 등 설악에서 많은 시문을 남겨 강원도 문화에 기여하였다.
부친과 사백(舍伯) 양대가 영의정을 지냈던 명문에서 태어나 본인도 학문이 깊어 문장과 학문이 일세를 용동(聳動)하던 석학으로 한때 비색한 가운(家運)에 세사에 뜻을 버리고 설악산에 영시암을 짓고 우거하였던 탓으로 그를 찾아왔던 사람들이 처음 설악을 접하고 그 경색에 놀라 돌아가 시문을 통하여 설악을 세상에 알려 천하의 설악이 되었다.
한계사지 3층 석탑(남측탑)
이 탑은 사지(寺址) 서남쪽에 위치한 동부산장(東部山莊) 옆으로 옮겨져 있던 것을 1984년 발굴시 지대석(地臺石)이 발견되어 원래의 자리인 현위치(現位置)로 옮겨 복원하였는데 하대중석(下臺中石) 1매, 상대중석(上臺中石) 1매, 3층 옥개석(屋蓋石)은 신재(新材)로 보완하였으며, 원래의 3층 옥개석은 다른 석물들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新羅石塔)의 양식(樣式)으로 하층기단(下層基壇)에 안상(眼象)이 배치(配置)되어 있고, 상층기단(上層基壇)의 탱주(撑柱)가 1주(柱)로 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의 수가 3층은 4단으로 줄어 있고, 1·2층은 5단이지만 가장 아랫쪽의 받침이 현저히 낮아지고 있는 등 9세기 중엽이후의 석탑에서 보여주는 양식적 특징(樣式的 特徵)을 잘 갖추고 있다. 현재 총 높이는 331.8㎝이다. 이 탑(塔)은 전형적(典型的)인 신라석탑 양식(新羅石塔 樣式)의 일반형 석탑(一般形 石塔)으로, 9세기 중반을 전후(前後)한 시기에 조성(造成)된 것으로 추정되어 강원지역(江原地域)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時期)의 것이다. 탑(塔)의 형식(形式)이 9세기 석탑의 특징(特徵)을 잘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정연한 모습에서 미술사적(美術史的)인 측면(側面)에서도 가치(價値)도 큰 탑(塔)이다. 또한 서북 구릉(西北 丘陵)위의 석탑(石塔)(북3층석탑(北3層石塔))과 같은 사찰(寺刹)에 위치하면서도 기단 면석(基壇 面石)의 안상 배치(眼象 配置), 옥개(屋蓋)받침의 변화 등 부분적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석탑(石塔)의 연구(硏究)에 중요한 자료(資料)이다. 당초에는 쌍탑(雙塔)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동쪽에 치우쳐 세운 점이 특이(特異)하다
특히 통일신라말기의 석탑으로 우리나라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탑으로 건립 위치상으로 보아 북방한계선에 해당되는 점에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역사적, 미술적, 학술적으로 귀중한 자료임.
한계사지 3층 석탑(북측탑)
특히 이 탑(塔)은 오색리 삼층석탑(五色里 三層石塔)(보물(寶物) 제497호)과 양식(樣式)과 규모(規模)가 같으면서도 보존상태(保存狀態)는 더 양호(良好)하다. 또한 금당지(金堂址) 앞의 석탑(石塔)(남3층석탑(南3層石塔))과 같은 사찰(寺刹)에 위치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석탑(石塔)의 연구(硏究)에 중요한 자료(資料)이다. 금당지 앞의 석탑의 배치(配置)로 볼 때 당초에는 쌍탑(雙塔)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 탑(塔)이 어떤 사유(事由)로 서북 구릉(西北 丘陵) 위로 옮겨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교리적(敎理的)인 측면(側面)에서 향후 더 검토(檢討)되어야 할 과제(課題)이다.
한계사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세워져 여러 차례 화재(火災)를 당하여 중건(重建)을 거듭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폐사(廢寺)된 사찰터이다.1984년의 발굴(發掘)로 확인된 금당지(金堂址)의 규모는 동서 9.5m, 남북 6.8m의 크기로 정면(正面) 3칸, 측면(側面) 3칸의 건물이며 이외에도 동서쪽 등지에 부속건물터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현재 이 절터에는 석탑(石塔), 석등(石燈), 석불(石佛) 등의 부재(部材)가 남아 있는데 모두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이러한 유구(遺構)를 통해 볼 때 한계사는 산지가람(山地伽藍)의 일반적인 계단식 배치법(配置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유물(遺物) 및 고려(高麗)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명문와(銘文瓦)가 많이 발견되어, 한계사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유구한 역사를 지닌 사찰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한용운(韓龍雲)선생이 편찬한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의 백담사사적(百潭寺事蹟)에 따르면 신라 진덕왕(新羅 眞德王) 원년(元年)(647)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뒤 신문왕(神文王) 10년(690) 소실(燒失)되어 성덕왕(聖德王) 18년(719)에 중건 하였고, 또 원성왕(元聖王) 원년(元年)(785) 소실되어 동왕(同王) 6년(790)에 한계사 아래 30리 지점으로 이건(移建)하고 운흥사(雲興寺)라 하였으며, 고려 성종(高麗 成宗) 3년(985) 다시 소실되어 고기(古基)의 북쪽 60리 지점으로 이건(移建)하고 심원사(深源寺)라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절이 소실되면 이건(移建)하고 사명(寺名)을 선구사(旋龜寺)(1433), 영취사(靈鷲寺)(1466)등으로 개명(改名)하였고, 조선 세조(朝鮮 世祖) 2년(1457)에 현재의 백담사(百潭寺)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1984년에 강원대 박물관이 실시한 금당지(金堂址)와 석탑지(石塔址) 일부에 대한 발굴조사결과에 의하면 「지정(至正)18년(1358)」,「숭정(崇禎) 13년 기묘(己卯)(1639)」,「순치을미(順治乙未)(1655)」,「강희(康熙) 3년 갑진(甲辰)(1664)」,「강희(康熙) 22년 계해(癸亥)(1683)」등의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어 사적기(事蹟記)에 의한 원성왕(元聖王) 원년(元年)(785)의 소실후에도 여러차례의 중건이 있었으며, 적어도 17세기말까지는 존속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지(寺址)는 초석(礎石)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다수의 건물지(建物址)를 비롯하여 삼층석탑(三層石塔) 2기, 불상(佛像), 불상대좌(佛像臺座), 광배(光背), 석등(石燈), 옥개석(屋蓋石), 배례석(拜禮石), 석사자상(石獅子像), 난간석(欄干石) 등 많은 석조물(石造物)이 남아 있다. 석탑(石塔)은 금당지(金堂址) 앞에 금당지(金堂址)를 중심축(中心軸)으로 할 때 동쪽에 치우쳐서 1기(基)(남3층석탑(南3層石塔))가 있고, 다른 1기(북3층석탑(北3層石塔))는 금당지로부터 서북쪽으로 45m정도 떨어진 구릉 위에 세워져 있다. 2중기단(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형 석탑(石塔)이다. 지대석(地臺石)은 5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構築)하였으며, 하층기단(下層基壇)은 하대저석(下臺低石)과 중석(中石)을 붙여 1석(石)으로 만들고, 각면 1매씩 총 4매의 석재를 사용하였는데 각 면석(面石)에는 3구(軀)씩의 안상(眼象)을 배치하였다. 하대갑석(下臺甲石)은 2매로 만들었는데 상면(上面)에는 상층기단(上層基壇)을 받기 위한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괴임을 두었다. 상층기단(上層基壇)의 중석도 4매의 석재를 사용하였는데 각 면석에는 탱주(撑柱) 1주와 양우주(兩隅柱)를 두었으며, 다른 장식은 없다. 상대갑석(上臺甲石)도 2매로 만들었는데 하면(下面)에는 부연(副緣)을 두었으며, 상면(上面)에는 2단의 각형괴임을 두어 탑신부(塔身部)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각층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각각 1석(石)씩으로 만들었다. 옥신석(屋身石)은 1층에 비해 2·3층의 높이를 1/3정도로 줄여서 만들었으며, 각면에는 양 우주를 각출(刻出)하였다.
만해 한용운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생애 (1879. 8.29~1944. 6.29)
독립운동가·승려·시인
* 본관 청주(淸州)
* 호 만해(萬海·卍海)
* 속명 유천(裕天)
* 자 정옥(貞玉)
* 계명 봉완(奉玩)
충남 홍성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1905년(광무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 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 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 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 (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 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 (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 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 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인제8경
설악산 대청봉
설악산은 1965년 11월 5일 천연기념물 171호인 천연보호구역으로 설정된후, 1970년 3월24일 산중심부 174평방 킬로미터가 국립공원 5호로 지정되었고, 1982년에 설악산 남쪽의 점봉산을 포함한 393평방킬로미터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에 생물권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은 인제군과 양양군 사이에 위치하며 해발 1,708m로서 금강산의 1,638m의 비로봉보다 높다. 등산코스로 가장 유명하며 정상에서 내려 보여지는 천차만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기암괴석과 대자연의 파노라마는 단연 설악의 제일이다.
대청봉은 늦가을부터 늦봄까지 정상에는 백설이 덮여 있고 또한 6, 7월이면 진달래, 철쭉, 벚꽃이 피어 3만여평이나 되는 곳 전체가 화원으로 그 붉은 꽃다리는 고산의 멋을 한층 더 돋구어 주기도 한다.
본격적인 등산은 아님에도 일반관광객들도 정상에 올라서야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관광코스 차원을 넘어서서 전문 등산장비 등 충분한 채비 없이 대청봉을 넘는 등산객이 의외로 많다. 대청봉을 넘어야 설악산을 찾았다는 그동안 잘못된 등산 관행 때문인 듯 하다.
대청봉을 넘는 코스는 보통 오색-대청봉-희운각-양폭-설악동 소공원 코스가 일반적인데, 이 코스는 무박 당일코스로 대청봉을 넘는 코스로 인기가 높다. 무박 당일코스는 전문산악인이 아니면 쉽지 않은 코스이다. 차라리 전날 오후에 오색에서 출발해서 대청봉 정상 인근에 있는 중청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아침에 대청봉에서 일출을 보고 부담없이 하산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짧은 여행 일정등의 여건으로 꼭 무박으로, 당일 대청봉 등산을 해야 한다면 되도록 새벽 일찍(일출 2시간 전부터 입산 허용) 출발하는 게 바람직하며, 오색-대청-비선대코스가 당일 대청봉 등산코스가 그나마 무리가 없다.
대암산 용
인제군 서화면 대암산 정상 해발 1,280m.
민통선 내에 있는 남한 유일의 고층 습원지인 대암산 용늪.
대암산은 커다란 바위 산이란 뜻의 이름처럼 산자락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집채만한 바위들이 펼쳐진 험한 산이다. 하지만 정상 가까이 올라가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동서로 275m, 남북으로 210m나 뻗친 엄청난 크기의 자연 습지가 정상의 산봉우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사초과의 식물들이 바람 때문에 항상 누워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잔디 깔린 축구장처럼 보이는 이 자연 습지의 이름은 용늪이다. 용늪이란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지난 1989년, 자연생태계 보존지역으로 지정된 대암산 용늪은 이처럼 산 정상에 습지가 만들어진 곳으로는 남한에서 유일한 곳이어서 더욱 가치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고층습원인 용늪은 약 4500년전 형성된 것으로 식물체가 완전히 분해되지 않은채 퇴적된 이탄층으로 4천년간의 생물체의 변화를 살펴볼수 있는 자연보고로 97년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람사협약(습지보전국제협약)에 가입하면서 습지1호로 환경부가 자연 생태계보호구역으로 지정하였다.
용늪의 면적은 7,490㎡로 95년 환경부 조사결과 순수습원식물22종을 비롯해 112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서도 세계적으로 진귀한 금강초롱꽃과 비로용담, 제비동자꽃, 기생꽃이 서식하고 있다.
용늪의 바닥에는 채 썩지 않은 식물들이 쌓여 스펀지처럼 물컹한 지층을 이룬 이탄층이 발달해 있다. 보통 식물이 죽으면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땅 속에 묻히게 된다. 그러나 기온이 낮고 습기가 많은 습지에서는 식물이 죽은 뒤에도 썩거나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쌓여 짙은 갈색의 층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탄층이다.
용늪에 만들어진 이탄층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평균 1m 깊이이며, 깊은 곳은 1m 80cm나 되는 곳도 있다. 용늪이 그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습지라는 얘기가 된다.
이탄층 속에 썩지 않고 남아 있는 꽃가루 따위를 분석하면 수천 년에 걸친 그 지역의 기후 변화와 식물의 변천 과정 등을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흔히 고층 습원을 자연의 고문서또는 타임캡슐이라 부르기도 한다.
식물학자들이 용늪의 이탄층에서 꽃가루를 추출하여 분석한 결과, 용늪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자그마치 4천2백 년 전쯤. 용늪 이탄층의 맨 밑바닥에서는 포자가, 그리고 그 뒤 1천 년 동안 더 쌓인 지층에서는 신갈나무가, 다시 2천 년 정도 더 흐른 지층 윗부분에서는 소나무 꽃가루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탄으로 만들어지는 늪은 크게 갈대나 사초처럼 습한 곳을 좋아하는 식물이 분포하는 저층 습원과 예자풀이나 진퍼리새 등 건조한 상태에서도 살 수 있는 식물이 분포하는 중간 습원, 그리고 그보다 더 이탄이 두꺼워지면 오직 빗물만으로 자랄 수 있는 물이끼류 같은 식물만이 사는 고층 습원으로 구분된다. 용늪은 이 가운데서도 고층 습원. 그래서 용늪 전체에서는 물이끼가 뒤덮여 있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십이선녀탕은 북면 용대리에 위치하고 있다.
폭포와 탕이 연속으로 구슬같은 푸른 물과 우뢰와 같은 괴성으로 갖은 변화와 기교를 부리면서 흐르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란 말이 절로 나오게끔 한다.
◇ 십이선녀탕으로 가는 오솔길-남교리 매표소에서 도보로 2시간정도 걸린다
옛말에 12탕 12폭을 흔히 십이선녀탕이라고 불러 왔으며, 탕의 모양이 장구한 세월에 거친 하상작용에 의해 오목하거나 반석이 넓고 깊은 구멍을 형성하는등 신기하고 기막힌 형상을 이룬다.
십이선녀탕을 찾아가는 계곡에는 단풍나무.전나무.박달나무.소나무등 거목이 우거져 있어, 계곡의 모습이 황홀하기 그지없다.
십이선녀탕계곡은 물을 건너는 곳마다 많은 철다리가 놓여있으나, 전형적인 V자 협곡이므로 폭우가 내린 경우에는 상류까지 올라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 계곡은 가을단풍철을 제외하고는 일년내내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계곡 최상류에서 안내판을 따라 대승령까지 가는 경우 길을 혼동하기 쉬운 지형이므로 주의해야 하며 특히 안개가 끼거나 비가 올 경우 길을 잘못 드는 일이 많으므로 나침반과 지도를 준비하는 것도 좋다. 남교리에서 십이선녀탕계곡으로 올라 대승령을 거쳐 장수대로 하산하는 데에는 걷는 시간만 7시간 30분~8시간이 걸린다. 장수대에서 출발하여 대승령을 거쳐 십이선녀탕계곡으로 내려오는 경우에도 비슷하다. 중간에 쉬는 시간과 식사시간을 고려하면 최소 10시간 정도는 걸린다고 보아야 한다.
중간에 산장이나 대피소가 없으므로 대개는 아침 일찍 남교리에서 출발하여 장수대까지 하루 일정으로 산행을 마친다.
십이선녀탕계곡(탕수동)의 입구인 남교리는 원통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한계령쪽으로 가다가 민예단지휴게소 앞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북천(北川) 왼쪽으로 이어진 진부령방향의 46번 국도로 8km를 가면 도착한다. 남교리에는 여러 곳에 음식점과 집단숙박시설이 있지만 큰 다리는 계곡 입구에 놓인 선녀교 하나뿐이므로, 북천을 따라 가다가 보면 다리가 잘 보인다.
차에서 내리면 북천 건너편으로 계곡의 입구가 보인다. 남교리의 46번 국도에서 선녀교쪽으로 걸어가면 마을안의 숙박시설단지를 지나게 되며 선녀교 앞 마을에는 호텔이나 콘도 등의시설은 없고 대개 민박집들이다.
선녀교를 건너면 매표소 앞까지 주차장으로 쓰는 넓은 터가 있는데, 차를 주차시킨후 오토캠핑장처럼 차 바로 옆에 텐트를 치는 사람들이 많다. 여름 휴가철에는 북천(北川)을 가로지르는 선녀교 주변에서 텐트를 치고 물놀이를 겸한 가족나들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내린천
푸른 물줄기와 기암괴석이 한데 어우러진 선경(仙境)!!!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계곡을 꼽는다면, 대번에 강원도 인제군에 자리잡고 있는 내린천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내린천은 강원도의 깊숙한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그 길이가 무려 70km에 이르는 긴 물줄기이다. 그러나 내린천 하면, 인제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상남까지 이어지는 약 52km의 구간이 최근 들어 래프팅의 명소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린천의 참모습을 보려면 상남에서 미산분교를 지나 비포장 도로를 따라 한참 더 들어가야 한다. 상남에서 미산분교까지는 약7km, 미산분교에서 미산리 버스 종점까지는 약 2km이다. 바로 이곳이 내린천 상류의 초입으로, 전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하고 푸른 물줄기가 기암괴석과 한데 어우러져 멋진 선경을 연출한다.
방동약수
방동약수는 기린면 방동리에 위치하고 있다.
물맛도 물맛이지만 강원도 특유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인제를 들른 방문객이라면 한번 찾아가 볼만한 곳이다.
방동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설탕만 넣으면 영낙없이 사이다 맛이 나는데, 탄산이외에도 철, 망간, 불소가 들어 있어서 위장병에 특효가 있고 소화증진에도 좋다고 한다.
방동약수의 유래는 지금부터 약 300년 전 어떤 심마니가 이곳 방동리에서 <육구만달>을 캐어낸 것에서 연유한다. 육구만달은 60년생 의 씨가 달린 산삼을 말하는 것으로, 신비의 명약으로 불리운다. 바로 이 산삼을 캐낸 자리에서 약수가 치솟기 시작했는데 방동약수가 바로 그것으로 산삼을 캐낸 그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적이 없다고 하며 많은 사람들이 이 약수를 마시고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엄나무 아래 깊이 패인 암석 사이에서 나오는 방동약수는 나무뚜껑을 덮게 만들어져 있으며, 주변의 숲이 울창하고 갖가지 모양의 바위와 폭포·계곡이 연이어 있어 무더운 여름 가족단위의 방문객들이 쉬어가기에 좋은곳이다.
대승폭포
장수대 북쪽 1㎞지점에 위치한 대승폭포는 88m의 물기둥이 낙하하여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신라 경순왕의 피서지였던 곳이었다고 전해지며 금강산의 구룡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로 꼽힌다.
이 폭포는 떨어지는 폭포수의 물보라와 이 물보라에 이어지는 무지개가 영롱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폭포 아래쪽에 중간폭포라는 것이 있어 또 다른 자연미를 선사한다.
대승폭포의 유래를 살펴보면,
옛날 부모를 일찍 여윈 대승이라는 총각이 이 고장에 살았는데, 집안이 가난한 대승은 버섯을 따서 팔아 연명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폭포 돌기둥에 동아줄을 매고 버섯을 따고 있었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절벽 위에서 다급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서 정신없이 올라가보니, 어머니는 간데 없고 동아줄에는 커다란 지네가 달라붙어 동아줄을 썰고 있었다.
덕분에 대승은 목숨을 건졌는데, 죽어서도 아들의 생명을 구해준 어머니의 외침이 들리는듯하다해서 대승폭포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담사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자리잡고 있는 백담사는 내설악의 첫 관문으로써 외가평에서 들길을 걸어 공원관리 사무소를 지나 백담계곡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백담사가 나온다.(현재 셔틀버스 운행중)
고찰 백담사의 창건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만해 한용운이 지은「백담사사적」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1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절을 지어 미타상 3위를 조성, 봉안하고 이름을 한계사라고 했는데 한계사는 자장이 창건한지 50여년만인 신문왕 10년인 690년에 실화로 불타 없어졌지만 곧 재건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백담사는 1919년 4월에 당시의 주지 인공선사가 복구한 것으로 백담사의 현존건물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山靈閣) 화엄실법화실 요사채 만해기념관과 함께 3층석탑 1기가 있다.
백담사는 여러 차례 절이름이 바뀌었고 위치도 달라졌기 때문에 그 전모를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화엄학이나 천태(天台) 등 교학계통을 연구하는 사찰이었으리라 짐작되며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오세암 봉정암 등은 모두 유명한 기도 도량이다.
합강정은 인제읍 합강 2리에 위치한 정자로써 인제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으로 소양강 상류인 내린천이 기린방면으로 부터 흘러들고 서화방면 인북천과 용대방면 북천이 합류 후 흘러들어 이 지점에서 합류한다는 것에 연유해 명명된 정자로써 조선시대 중엽부터 합강정으로 불려 내려오고 있다.
특히 우수기에는 내린천 강물이 합강지점에 와서 그 수류방향을 원통방면으로 100m쯤 흘렀다가 합강지점으로 역류하는 수류현상과 어군의 서식 또한 특이하여 조어지(낚시터)로 태공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합강정은 인제지역에 향교가 창건되면서(광해군2년(1610)) 66년이 지난 숙종 2년 병진(1616)에 금부도사를 역임한 바 있는 현감 이세억 재임(1675~1677)시절 지형적으로 전망이 좋은 합강리에 합강정이 세웠으며 이것이 인제지역 누정 건립의 효시이다.
합강정 부근에는 2002년에 만들어진 번지점프장과 합강정휴게소등의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특히 합강정 정자 위에서 바라보는 번지점프장면과 내린천과 인북천의 모습은 관광객에게 시간가는 줄 모르는 즐거움을 준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우리 나라 절 가운데는 불상(佛像)을 전혀 모셔놓지 않은 데가 있다. 법당 안에는 단(壇.戒壇)만 있고 속이 텅 비었으며 법당 밖 뒤편에는 사리탑을 봉안하여 놓은 곳이다. 이러한 곳을 적멸보궁, 또는 보궁이라 하는데 이는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를 모신 보배로운 곳이란 뜻이다.
신라 진덕왕 때 자장(慈藏)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 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받아와 우리 나라의 가장 수승한 땅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여 모셨는데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모시고 금강 계단을 세웠다.
그리고 강원도 설악산 봉정암(鳳程庵),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 각기 사리를 모시고 적멸보궁을 지었다 한다.
또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와 태백산 정암사(淨岩寺)에도 부처님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세웠다. 이로써 이곳을 3대 적멸보궁, 5대 적멸보궁이라 통칭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불전을 지칭하여 적멸보궁이라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하게 된다.
부처님 생존시는 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로, 을 설파한 적멸도량임을 뜻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 부처님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예불의 대상으로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다른 불전과의 차이점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5개의 적멸보궁은 경상남도 양산군 영축산 통도사의 대웅전,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의 적멸보궁,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의 적멸보궁,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의 적멸보궁,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이다.
통도사의 적멸보궁인 대웅전은 특이한 건축 형식과 금강계단의 존재로 가장 주목할 만한 적멸보궁이다. 통도사 대웅전은 1645년에 중건한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평면형식은 이 전각 내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건물 후면에 있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향하여 정면이 위치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섰을 때 마주 보이는 측면에도 합각(合閣)을 만들어 출입상의 정면과 예배상의 정면 양쪽 모두를 강조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의 기단은 건물의 격에 맞추어 격식을 갖춘 가구식기단으로 장식하였으며, 건물 내부의 불단과 천정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단청을 하여 장엄하고 있다..
적멸보궁 _ 설악산 봉정암
봉정암 적멸보궁은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천하의 승경 봉정암 적멸보궁이 있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3.7일 기도를 마치고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해 부처님의 진신 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했으니 더 이상 중국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우선 사리를 봉안할 곳부터 찾았다. 양산 통도사에 보궁을 지어 사리를 봉안한 스님은 경주 황룡사 9층탑에도 사리를 봉안했다. 그러나 스님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다 신령한 장소에 봉안하고 싶었다. 발길을 북으로 돌린 스님은 먼저 금강산을 찾아갔다.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풍광이 과연 사리를 모실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사리를 봉안하려 하니 어느 곳이 신령한 장소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스님은 엎드려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이레 째 되는 날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어디선가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스님의 기도처로 날아왔다.
스님은 기도의 감응으로 나타난 것으로 알고 봉황새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봉황새가 좀처럼 아무곳에도 내려 앉지 않았다. 자꾸만 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려고만 했다. 스님은 할 수 없이 계속 새를 따라 갔더니 새는 드디어 어떤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스님이 봉우리로 올라가자 봉황은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스님은 봉황이 자취를 감춘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바위는 언뜻 보아도 부처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불두암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온 산천을 다 헤매어도 더 이상의 승지는 없을 것 같았다.
자장율사는 바로 이곳이 사리를 봉안 할 곳임을 알고 봉황이 인도한 뜻을 따르기로 했다. 스님은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 밑에 불뇌사리를 봉안하고 5층탐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봉정암(鳳頂庵)’이라 붙였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의 일이었다. 자장율사의 간절한 기도에 의해 절터를 잡은 봉정암은 이후 불자라면 살아 생전에 한 번은 꼭 참배해야 하는 신앙의 성지로 정착되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불연이 깃든 성지를 순례하다가 문무왕 17년(667)경 잠시 이곳에 머물며 암자를 세로 지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도 이곳을 참배했으며,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도 1188년이 이곳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수 많은 고승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을 참배하는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여기에 부처님의 불뇌사리를 봉안돼 있어서 였다.
설악산의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암자가 봉정암(봉정암)이다. 해발 1천 2백 44M로 5월 하순에도 설화(설화)를 볼 수 있는 암자로 백담사에서 대청봉을 향하는 내설악에 최고의 절경을 이룬 용아장성 기암괴석군 속에 있다.
봉정암은 내설악 백담사의 부속 암자로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구해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려고 시창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후 원효대사와 고려 때는 보조국사가, 조선 때는 환적스님과 설정스님이 쓰러진 암자를 다시 중창했던 것이고, 봉정암 가는 길은 그야말로 극기 훈련과 다름없다.
6시간의 산행은 기본이고 산비탈에 설치된 로프를 잡고 수십 번의 곡예를 반복해야 한다. 가장 힘든 코스는 깔딱고개다.누구든 평등하게 두 발과 두 손까지 이용해야만 오를 수 있는 바윗길인 것이다.
봉정암의 중창
봉정암은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중건 중창이 있었다. 신라 문무왕 17년(667년)에 원효대사가 불연이 깃든 성지를 순례하다가 이곳에 잠시 머물며 암자를 새로 지었고, 고려 중기인 1188년에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참배하고 중건하였다.1923년 백담사에 머물던 만해 한용운 선사가 쓴 <백담사사적기>에 따르면 조선 중종 13년(1518) 환적(幻寂)스님이 세 번째 중건불사를 했고, 네번째는 명종 3년(1548)에 등운(騰雲) 선사가 절을 고쳐 지었다. 이어 인조 10년(1632)에는 설정(雪淨) 화상이 다섯번째 중창을 했다. 특히.설정화상의 중창 때는 부처님의 탱화를 새로 봉안하고 배탑대(拜塔台)를 만들었으며 누각까지 지었다고 한다. 여섯 번째 중건은 정조 4년(1780) 계심스님에 의해 여섯 번째 중건이, 고종 7(1870년)에 인공, 수산 두 스님에 의해 일곱 번째 중건이 이루어졌다.
그 후 6.25 동란 때는 설악산 전투로 봉정암의 모든 당우가 전소되고 5층 사리탑만 외롭게 남게되는 비운을 격기도 하였다.
1960년 법련스님이 천일기도 끝에 간신히 법당과 요사를 마련하였으며, 1985년부터는 6년여에 걸쳐 본격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결과, 청기와로 단장한 정면 5칸의 적명보궁을 비롯, 일주문, 해탈문, 산신각, 요사채, 석등 등이 건립 되어 오늘에 이르며, 설악의 장엄을 받는 우리나라 제일의 기도도량이 되었다.
현재의 봉정암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85년부터이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 가장 해발이 높은 봉정암은 기도를 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자장율사의 창건설화도 그렇지만 이 밖에도 신이한 영험과 이적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그 이야기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불법을 믿지 않는 유학자들 몇 사람이 산천유람을 하는 길에 봉정암을 찾아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제법 아는 척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대사. 저 돌덩이에 대고 목탁을 치고 절을 한다고 무슨 영험이 있겠소. 차라리 나한테 사정을 하면 내가 술이라도 한 사발 받아 주겠소”
불뇌사리탑에 기도를 하러 가던 스님은 기막힌 생각이 들었으나 저러다가 떠나면 될 테니 분심을 낼 이유가 없다면서 참았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서 유람객들이 봉정암을 떠날 형편이 못되었다. 그들은 절 뒷방을 하나 빌려 잠을 자면서 술과 고기로 도량을 어지럽혔다. 그날 저녁 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나 ‘저들이 부처님의 도량에서 계속 방자하고 버릇없이 행동하면 개를 보내 혼내주겠다. 스님은 유람 온 유생들을 찾아가 꿈을 얘기하며 보통 도량이 아니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꿈이란 본시 허망한 것’이라며 다음날도 술타령을 그치지 않았다. 날씨는 이틀이 지나자 개었다. 유람객들은 달도 떠오르고 해서 바깥 바람을 쐬기가 좋았던지 밖으로 나와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벼락을 치듯 큰 짐승 울음소리가 나더니 기도하는 스님에게 불손한 행동을 하던 유생을 물고 가버렸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으로 숨어 들어가 벌벌 떨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유생들은 친구를 찾아 나섰다. 절 밑으로 한참을 내려가 보니 불뇌탑을 모독한 그 유람객의 시신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다시 암자로 올라와 닽 앞에 나아가 참회기도를 하고 꽁지가 빠지게 산을 내려갔다. 끔찍한 얘기지만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설화다.
암자의 법당인 적멸보궁에는 일반 법당과 달리 불상이 없다. 산정의 5층석탑에 불사리가 봉안돼 있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니 참례하는 이는 나그네만이 아니다. 산봉우리에 솟구친 거대한 바위들은 천년을 하루같이 탑을 향해 참례하고 있는 것이다.
봉정암에서 1KM를 더 오르면 소청봉에 닿고 계속해서 중청봉과 대청봉에 이른 후 오색약수나 천불동계곡으로 하산 할 수 있다.
당나라 청량산에서 3.7일(21일) 기도를 마치고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받고 귀국한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율사는 처음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사리를 봉인할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찬란한 오색빛과 함계 날아온 봉황새가 스님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따라가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쳐진 곳에 이르렀고, 봉황은 한 바위 꼭대기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이 봉황처럼, 부처님처럼 생긴 바위였다.
"바로 이곳이구나."
자장율사가 그 바위를 가만히 살펴보니 부처님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또한 부처님 모습을 닮은 그 바위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으니, 가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한 길지중의 길지임을 알게 되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실 인연처 임을 깨달은 스님은 탑을 세워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조그마한 암자를 세웠다.이때가 선덕여왕13년, 서기644년의 일이라 전한다. 이에 부처님 형상을 한 그 바위에 부처님 뇌사리를 봉안한 뒤 오층사리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으니, 이곳이 바로 봉정암이다.
봉정암이란 봉황이 부처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봉정암석가사리탑>
설악산의 진수를 봉정암이라고 한다면 봉정암의 진수는 오층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장 율사가 중국에서 가져 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그 탑으로, 현재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여 흔히들 불뇌보탑(佛腦寶塔)이라고도 한다. 다만 시대로 보아서는 자장율사가 활동했던 7세기 탑이 아니라 그 보다 2~3세기 가량 늦지만, 나중에 다시 탑을 세우고 봉안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연암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탑의 몸체 부분에 해당하는 오층의 탑신을 쌓아 올렸고, 맨 위에는 연꽃인 듯 불꽃 모양인 듯한 원뿔형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
설악산 오세암
▲ 오세암 우측 산 위에 우뚝한 불두암(佛頭岩)을 보니 다시금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이 만들어 낸 기암의 하나겠지만 뉘엿뉘엿 석양을 등지고 있는 바위는 영락없는 부처님 형상이기에 두 손을 합장케 한다.
살며 살아가며 겪게되는 온갖 풍상은 심신을 피곤하게 하고 자연스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훌쩍 먹어버린 나이에 아랑곳없이 가끔은 동심의 아가가 되어 따뜻하게 기억되는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파에 지친 몸과 마음을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보듬어 줄 그런 휴식공간과 여유가 필요하다면 설악산 오세암(五歲菴)엘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모시적삼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 같은 백의의 관음보살이 있고 동색의 무구함으로 심신을 넉넉하게 해 줄 오세(五歲)동자가 그곳에 있다.
'어린이는 곧 어른의 스승'이며 '어머니의 사랑은 가이없다'란 말들을 한다.
▲ 멀리보이는 기암의 산하가 오세암을 향하여 다가서는 듯 하다.
아가들은 배고프면 밥 달라 보채고 더러운 것을 보면 거짓없이 더럽다 말한다. 예쁜 것을 보면 예쁘다 말하고 못생긴 것을 보면 못생겼다 말하지 상대방의 비위나 맞추려 거짓으로 예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이런 솔직함은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 순수함은 어른들이 잃어버린 가장 큰 자산이며 꼭 되찾고 다시 배워야 할 덕목중의 하나인 셈이다. 그러기에 어린이의 동심이야말로 부처님 마음이라고 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많고 많은 사랑 중에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만큼 위대하며 무조건적 사랑은 없다. 그리고 남편을 향한 내조만큼 헌신적인 사랑도 없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한국 어머니의 사랑과 내조는 가이 없어 으뜸중의 으뜸이다.
▲ 오세암이란 편액이 마음을 맑게한다.
계곡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봉정암이며 영시암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오세암으로 가는 길이 된다. 어찌 되었던 조금 더 발품을 팔면, 봉정암을 들렸다 오세암으로 오던, 오세암을 들려 봉정암으로 가던 한번의 산행으로 영험 가득한 심산유곡의 세 암자를 전부 참배할 수 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 소요되며 산책로처럼 평탄한 산행 길이다. 영시암에서 곧장 봉정암으로 오르는 행로는 상당히 완만하며 순탄하다. 계곡과 함께 하는 그런 산책로 같은 길이 계속되다 봉정암에 거의 다가가서야 급경사가 시작되는 그런 코스다. 그러나 오세암을 들려 봉정암으로 가는 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산행길로 정말 만만치 않은 코스가 된다.
필자는 당일에 봉정암엘 먼저 들려 참배하고 하산길에 오세암엘 들리는 좀 팍팍한 일정으로 산행을 강행하였다.
▲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한 오세암 전각들이 영험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속초와 동해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기암의 설악 군봉들이 점점 가까워지며 한 폭의 웅장한 산수화로 감명의 울렁임을 만든다. 자연과 조물주의 걸작이라 할 설악의 유곡들이 발아래 즐비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성지에 오르니 주변의 풍광들에 질기도록 함께 하던 마음속 번뇌의 티끌들조차 절로 사그라지는 듯하다.
우뚝한 기암을 양옆으로 고행의 흔적처럼 생겨 난 하산로를 따르면 오세암엘 갈 수 있다. 말이 하산길이지 절벽과 다름없다. 두발 가진 인간이지만 이 절벽을 오를 땐 네발 가진 짐승이 되지 않으면 안될 듯 싶다. 앞발이 된 두 손으로 움켜쥔 코앞의 절벽은 겨우 한 두 뼘 정도로 눈에 바싹 와 닿는다.
이렇게 이어지는 만만치 않은 하산길은 내내 숲 터널을 이루고 있다. 완급이 반복되는 이런 하산길엔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몇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렇게 3시간쯤 내려오니 울창한 나무 사이로 청기와의 오세암이 보인다.
▲ 백의의 관음보살상에서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자애로움이 느껴진다.
보전에 들려 참배하고 종무소엘 들려 스님을 찾으니 영운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여염집 사랑방처럼 아담한 종무소에서 차 한잔을 건네시며 오세암의 창건사와 설화를 이야기하듯 들려 주신다.
오세암은 644년, 신라 선덕여왕 13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장 율사가 절을 창건하고 관음보살이 언제나 상주하는 도량임을 알리기 위해 절 이름을 관음암(觀音庵)이라 부르니 오늘날 오세암이 시작된 것이라 한다.
관음암이라 불리던 절 이름이 오세암으로 바뀐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스님이 중건한 다음부터라 한다. 절 이름이 관음암에서 오세암으로 바뀐 배경에는 정말 전설 같은, 5세 동자에 얽힌 유명한 관음영험설화가 있으며 중창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 순진 무구함으로 성불한 5세동자상이 마음을 혼탁한 마음을 맑게 해 줄듯하다.
오세암에서 양양의 물치 장터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다녀와도 족히 이틀은 걸리는 장도였다. 그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다섯 살 짜리 조카를 위하여 스님은 그 기간 동안 아이가 먹을 만큼 밥을 짖고 반찬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스님은 아이를 불러 무릎에 앉히고 법당 안의 관음보살을 가리키며, "내가 다녀오는 동안 이 밥을 먹고 있으며 저분을 어머니처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 불러라 '그러면 저 분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라고 일렀다.5살의 어린 조카에게 이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설정스님은 관음암을 내려와 물치 장에 들려 겨우살이를 포함하여 이 것 저 것을 구입한 후 신흥사에 들려 하루를 묵게 되었다.
▲ 여신도나 여자등산객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꽤나 넉넉해 보인다.
눈에 생기는 발자국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혼자 있는 조카에 대한 걱정으로 스님의 애간장은 점점 녹아 내릴 듯 간절하다 못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지만 워낙 많이 쌓인 눈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엄동설한 폭설에 혼자 남겨둔 조카가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만이 화두처럼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스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부처님께 조카의 무사를 서원하는 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일 뿐이었다.
이렇게 고통스런 몇 며칠을 보내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관음암으로 돌아 가려하니 사중의 모든 스님들이 말렸다. '이러 폭설에 길을 나서면 죽을 게 뻔한데 왜 가려고 하느냐'며 적극 만류하여 결국 스님은 눈길이 트일 때까지 신흥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도 무정한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어느덧 봄이 오고 눈이 녹아 산길이 트이게 되었다.
서둘러 바랑을 챙긴 스님은 뜀박질을 하듯 달려 암자에 들어섰다. 암자에 들어서니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 갈증을 달래 줄 감로수가 넉넉하게 흐르고 있다.
놀란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 전에 큰절을 올리고 조카를 안아 보려 하자 품에 안기지도 않은 채 조카는 그대로 사그라져 승천을 하였다 한다. 나중에 살펴보니 법당 경상에 놓여 있던 책장이 스님이 집을 비운 딱 그만큼의 날짜만큼 찢겨져 나가있었다.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종이 한 장으로 그날 하루를 지내게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모든 것을 목격한 설정 스님은 다섯 살 어린 조카가 맑고 무구한 마음으로 삼촌인 스님이 시키는 대로 무념무상의 '관세음보살'을 계속하자 관음보살이 감응하고 그 가피로 영생불멸의 길로 접어든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5살 밖에 안된 동자였지만 그 순진 무구한 마음이 동자를 성불케 하였으며 이 도량에 관음보살의 영험이 있음을 길이 전하기 위해 관음암을 중건하고 절 이름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영운스님께서는 이런 설화를 들려주시면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오세암을 찾는다고 한다. 그 중에는 불자도 있으나 산행을 하다 잠시 들리거나 하루를 묵게되는 등산객의 경우도 많다고 한다.
▲ 전각의 처마에 걸리듯 우뚝한 바위에서 설악의 기가 느껴진다.
상수원의 발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에 오세암에선 비누와 샴푸 등의 화학세제를 쓰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스님들의 부탁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학제품을 펑펑 써가며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고 한다.
스님은 말씀하신다. 헝클어지고 겉으로 드러난 먼지나 땀 자국은 물로만 씻어도 충분하니 마음의 때나 열심히 씻으라고. 산세의 좋은 기와 명경수 같은 맑은 물에 세파에 찌들고 잡다한 욕심에 번득이던 마음이나 깨끗하게 씻으라 말씀하신다. 몰래 화학세제로 얼굴 닦고 머리감는 것은 마음에 또 하나의 업을 만들지만 조금 더러워 보여도 환경을 생각하며 화학세제를 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닦는 선이라고 하신다.
도량에서 금하는 화학세제를 몰래몰래 사용하는 사람은 비록 얼굴이 깨끗해 보여도 영혼에서 악취가 나고 비록 얼굴이 거칠고 머리가 푸시시해도 화학세제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들은 맑은 영혼에서 품어져 나오는 향기로운 사람 냄새가 날 것이라 하신다.
어렵고 힘이 들 때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크고 간절한 관음보살의 가피가 머물고 오세동자의 순진 무구함이 서린 오세암을 찾는 것도 좋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집에서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내력을 기르라고 하신다. 부처님께 지성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은 어머니의 내조력 같은 힘과 사랑이 되어 세파를 극복할 힘과 용기를 주실 것이라 하신다.
▲ 오세암에서는 태양열집진기를 이용하여 최소한의 전기를 자급하고 있다.
100리가 조금 못될 산길을 12시간에 걷다보니 여여한 마음으로 뚜벅뚜벅도 하였겠지만 그놈의 조급함을 버리지 못해 잰걸음을 놀리기도 한 듯하다.
마음이 혼잡해 지고 삶의 무게가 무겁다고 느껴지면 다시 찾으려한다. 그리고 오세동자의 맑은 눈으로 자아를 돌이켜 보고 싶다. 정말 방하착(放下着)하려 노력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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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나 갈증해소에 도움 주시는 푸대화상님! 고맙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