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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에도 권징이 필요한가?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교의학 과목으로 개설(2020 가을)된 최덕성 교수의 교회론 강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에도 유익하게 마무리되었다. 교회론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역사적 신학적 교회론적 사실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고, 교회 봉사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과 개혁신학의 유산 그리고 합리적인 이상들로 구성된 강의는 역사와 신학 이해와 교회봉사에 필요한 기초를 다질 수 있게 하였다.
최덕성 교수는 온라인 신학저널 <리포르만다>에 주옥같은 신학관련 글들을 게재하고 있다. 저명한 신학자들의 글들도 다수 싣고 있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여러 신학자들의 관심사들을 살펴 볼 수 있게 한다. 신학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최덕성 교수의 교회론을 배우고 특히 교회의 표지에 관한 강의를 듣으면서 오늘날의 교회에도 과연 권징이 필요한가, 한국교회는 권징을 정당하게 시행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현대 교회에도 권징이 필요한가? 권징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교회의 필수적 구성 요소인가?
최덕성 교수의 신학 요점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그의 명저 <정통신학과 경건>(2006)에 실려 있는 “말씀과 성례”라는 글을 읽었다. 그리고 <리포르만다>에 게재된 교회론 관련 글들도 숙독했다. 가장 흥미로운 글은 “국무총리의 불상배례“였다. 이 글을 읽고서 평소 지녔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나는 평소 한국교회가 권징을 해야 할 성도들에게 왜 그것을 시행하지 않고 침묵하거나 방관하는지에 대하여 늘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최덕성 교수의 위 글은이낙연 씨(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민총리 재직 시 큰 사찰을 찾아 가 불상 앞에서 배례하는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이낙연은 전라남도 영광중앙교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고 서울 신반포중앙교회에 출석하며 집사 직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무총리의 불상배례"는 기독교인 이낙연의 우상숭배를 지적하는 동시에 오늘날의 교회가 우상숭배를 예사롭게 여기고 권징을 무시함을 드러낸다. '집사' 이낙연이 십계명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a)는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행한 것에 주목한다.
이낙연의 '불상배례'는 전 국무총리이며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황교안 씨와 비교된다. 불자들이나 비기독인들은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행보를 비교했을 것이 분명하다. 황교안은 대통령 직무대행 시절에도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에서 불교 의례를 거부했다. 언론들과 불자들과 비기독교인들이 거칠게 그의 '예의 없음'을 비난하였다.
'집사' 이낙연은 대전 광수사, 단양 구안사에서도 대웅전 불상을 향하여 극진한 자세로 절을 하고 불교식 예를 표했다. 불교 언론사들과 방송은 “교회 집사인 이낙연 국무총리가 절에서 절하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하고 목소리 높여 방송했다.
이낙연이 불상의 불상배례는 성경이 금하는 우상숭배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그의 행위를 용납하거나 허용할지 모르나, 그것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 하나님이 크게 진노할 불신앙적 행위이다.
교회의 본질적 속성인 사도성, 보편성, 통일성, 거룩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낙연 이 출석하는 교회는 당연히 그에 대하여 엄격한 권징을 시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떠한 권징도 시행되었다는 소식이 없다.
교회가 권징을 통해 복음과 교리를 순수하게 지키고 성례의 거룩성을 수호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는 중요한 것을 시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많은 교회들이 정치권력자들의 눈치를 보거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갈까 염려하여 권징의 시행에 소극적인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선포가 교회의 표지’라고 한다. 이 표지는 성례와 관계없이 존재하지만 성례는 말씀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참된 선포는 교회를 유지하고 교회로 하여금 신자들의 어머니가 되도록 하는 위대한 방편이다. 또한 성례는 말씀과 분리시켜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성례는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내용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례는 하나님 말씀의 가시적 선포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교회는 성실하고 부지런히 권징을 시행한다고 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부여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설립하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필요한 권세 혹은 권위를 부여하셨다. 예수님은 유기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의미에서도 교회의 머리이다. 예수님께서는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고 말씀하셨다.
열쇠는 권세의 상징이다. 이 권세는 교회에서 금지되어야 할 것과 허용되어야 할 것을 결정하는 영적인 행정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세를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주셨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세를 사도들에게 주셨고 또한 일반 교회에게도 주셨다. 이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에 거하셔서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에 적절한 판단의 표준을 주셨으므로 교회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출교할 권세가 있다. 그러므로 질서 유지와 순결 유지를 위한 교회의 권징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전 14:33)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행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고 하신다. 교회의 문제들을 적절히 규제할 수 있는 규례들을 주셨으므로 교회 안에서 규례들을 시행하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하는 권세와 교회법 또는 교회헌장을 작성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니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성원이 교회가 제정한 규례들을 어기면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과 같은 형벌을 준다. 그러나 개혁신앙을 지향하는 교회는 권위 행사는 하지 않는다. 교회는 교회법 또는 교회헌장이라고 불리는 법규나 규정을 제정해야 할 경우가 빈번하게 있다. 이 경우에도 이것은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단지 율법의 적절한 적용을 위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순결 유지 목적의 치리와 권징은 진리에서 떠났거나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자들을 제외시킴으로써 교회의 성결을 보호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 권세는 특히 권징의 문제에서 행사된다.
구약성경 시대에는 고의적이 아닌 죄들은 희생제사를 통하여 속함을 받을 수 있으나 고의적인 죄는 죽음이라는 벌을 주었다. 헤렘(추방 또는 저주 받은 것)은 교회적인 형벌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형벌이기도 했다. 할례 받은 자, 나병환자, 부정한 자는 성소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레 5장; 겔 44:9).
교회의 권징의 목적은 이중적이다. 첫째는 회원을 받아들이는 것과 축출하는 것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실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교회의 회원들의 영적인 덕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두 가지 목적은 더 높은 목적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일에 이바지한다.
교회의 권징은 필수적인가? 루이스 벌코프는 권징은 교회의 병든 회원들에게 적용 할 때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의학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의 안녕을 위하여 병든 회원들을 도려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수술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권징을 시작할 때 치유효력이 있을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확실하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교회의 권징은 죄인을 회개시키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정당한 권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는 경우, 교회가 그/그녀를 출교시켜야 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정상적인 교회는 권징을 시행할 때 항상 이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고 시행한다. 중요한 것은 권징이 죄인을 바로 서게 하는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거룩성 유지 목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다.
교회 권징의 주체는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권징은 교회의 직원회가 시행한다. 권징이 형벌이 될 경우 오직 직원들이 권징의 시행 주체가 된다. 직원이라 함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치리회를 지칭한다.
장로교회의 경우는 당회가 두 가지 측면에서 권징 수순을 받는다. 첫째, 은밀한 죄에 대하여 은밀하게 회개를 지도하는 권징 방법이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 15~17)고 말씀하셨다. 이 방법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g한 경우 한두 사람의 증인을 대동하여 그를 다시 견책한다. 이렇게 해도 안 될 경우에는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직원들이 이 일을 다룬다. 이와 같은 절차는 오직 은밀한 죄에 대해서만 적용해야 하는 규정이다.
둘째, 공공연한 죄는 은밀하게 제거될 수 없고 공적으로만 처리한다. 공공연한 죄의 경우 당회는 정식적인 고발이 없더라도 사적으로 권고하는 절차 없이 즉각 그 죄인에 대하여 징계 조치를 한다. 공공연한 죄라는 것은 공적으로 범한 죄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죄까지 포함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음행한 자를 용납하고 견책하지 않음을 책망한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을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자를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1~2). 사도 요한은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에게 교회 안에서 이단적인 가르침을 심는 거짓 교사들을 견책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있다(계 2장).
국무총리 이낙연은 전 국민이 알 수 있는 공개적인 형태의 불상배례를 했다. 공공연하게 우상숭배를 하였다. 이와 같은 죄를 범한 자가 교회 안에 있으면 정상적인 교회-당회는, 누군가가 고발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권징을 시행한다.
성경은 올바른 권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마 18:15~18; 고전 5:2, 9~13, 고후 2:5~10; 살후 3:6; 딛 3:10~11).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7:16)고 말씀한다.
요한 사도는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 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 2:2)라고 한다. 요한은 에베소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였다.
루터파 교회의 정치는 에라스투스주의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권징을 정부의 손에 맡기고 교회는 말씀 사역을 통한 권징 즉 교회 전체를 향하여 시행하는 권고와 훈계의 권리만 보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장로회 제도를 취하는 개혁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의 교회에 독립된 정치와 권징을 시행해 왔고 시행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개혁파 교회 곧 장로교회는 권징 시행에 충실하지 않다. 말씀사역이나 죄인과의 개인적 접촉을 통한 개선에만 편중되어 있다. 죄인을 교회의 친교로부터 출교하는 일을 피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교회가 사람을 모으고 회중의 크기를 키우려는 데만 열성적이다. 공공연히 죄를 짓는 신자들에게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는 과제를 망각하거나 소홀히 여기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며 특별히 우상을 만들어 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우상숭배 하는 자와 음행하는 자에 대한 경책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마땅히 행해야 할 사명 즉 선지자적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낙연과 같은 기독인들이 자신의 유익을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공공연히 우상숭배를 해도 침묵하고 방관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고백공동체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급선무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권징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올바른 권징을 통하여 교회를 바로 세워가는 일이다. 올바른 권징이 있는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성과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고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칭찬받는 교회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편집자 주
브니엘신학교 신학원 목회학 석사(Master of Divinity) 과정 (2020 가을) 최덕성 교수의 교의학 <교회론> 과목 과제로 제출한 '학술 에세이'이다. 글쓴이는 하나의 명료한 주장-논지를 천명하고 그것을 뒷바침하는 논거들을 차례 차례 제시한다. 논지는 마지막 문단 서두에 진술되어 있다. 이 글은 브니엘신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학수업, 비평적 사고훈련, 학술 에세이 쓰기, 목사후보생 교육의 단면 보여준다.
신영숙 (브니엘신학교 신학원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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