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전 상서 / 오양교 (2022. 3.)
상여가 나갑니다. 요령에 맞춰 ‘에헤, 어하’하는 소리에 젊은 아낙네가 뒤에서 통곡하며 따라갑니다. 행상(行喪)이 산속 깊이 들어갈수록 아낙은 몸부림치고 울음소리는 더욱 처절해졌습니다. 젊은 여인네의 피를 쏟는 통곡 소리는 골짜기의 벽에 부딪쳐 메아리쳐 흩어졌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앞치마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따랐습니다.
그때 네 살이었던 나는 왜 어머니의 그토록 몸부림이 그리도 절절 했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날이 아버지의 유해를 전사하신 곳에서 모셔와 장례를 치르는 날이었고, 세월이 한 참 지난 뒤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푸르디푸른 청춘의 날, “여보! 양교 잘 키워.”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시고 국가의 부름에 낙동강 전투까지 참가하셨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꿈과 희망에 부푼 스물세 살 젊은 나이에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젊음의 꿈을 키워 보고 싶으셨겠지요? 그러나 젊음을 공허하게 날려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아내와 자식을 잊으셨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당신의 부모가 생존해 계시고 처자식이 있는 상황이었지요. 젊은 아내를 보고 또 보고, 만져보고, 안아줘 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드셨습니까?
이때부터 어머니는 남편 없는 세상을 홀로 버티셔야 했습니다. 어느 곳에 의지할 만한 작은 언덕도 없었습니다. 손닿지 않는 곳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갈까’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하셨답니다. 그러자니 핏덩이 같은 자식이 걸렸겠지요. 사는 것이 힘겨워 재혼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행여 자식이 눈칫밥 먹으며 자라게 될까봐 할 수가 없었답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어린 자식이 눈에 밟혀 그렇게 할 수가 없었겠지요. 아버지의 부탁대로 자식 하나 잘 키워 보겠다고 모질게 마음먹고 힘든 삶을 이겨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손바닥만 한 논농사를 지으셨지만 그것으로는 일 년 끼니도 부족했습니다. 농사철이 지나고 나면 산에서 마른 삭정이를 긁어서 머리에 이고 십 리나 떨어진 곳에 팔아 근근이 연명을 했지요. 살기 위해서는 험한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지요.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연민과 당신의 자식 하나 때문에 이런 일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입을 것, 먹을 것을 절약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노력으로 마침내 밭도 마련했습니다.
육신으로만 헤쳐 나가는 생활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어머니는 밤마다 제게, “다리를 밟아라,” “등에 올라가 걸어라,” 하시며 아픈 몸을 달래려 하셨어도 저는 어머니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어떤 날은 자다 보니 밖은 깜깜한데 어머니가 안 계셔서 울면서 논으로 나갔더니, 양동이로 논에 물을 퍼 올리며 가뭄과 싸움을 하고 계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엄마!” 하고 불렀습니다. 어머니는 논에서 나와 나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한참이나 엉엉 우셨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리 하셨을까요.
도둑들은 우리 집에만 왔답니다. 그들 눈엔 젊은 아낙네가 조그마한 아들을 데리고 둘만이 살고 있으니 얼마나 만만해 보였겠습니까. 여차하면 둘이서 일 년 먹을 쌀 단지를 굴뚝 옆으로 끌어가 쌀은 퍼가고 빈 단지만 덩그러니 놓고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는 농사일이 너무 어려워 조그마한 가게를 차리셨을 때는 안에 어머니가 계셔도 가게를 부수고 들어오려는 도둑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밤새 동안 “도둑이야!” 소리를 쳤지만 누구 하나 도움을 주러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젊은 여인네가 가녀린 목소리로 밤새껏 외쳐대는 것이 너무나 측은하고 불쌍해 보였던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만약 도둑이 부수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버지! 아버지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가를 모르셨나요? 아버지가 어머니랑 같이 계셨으면 이런 일 일어날 수 있을까요?
부재가 어머니에게는 형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차라리 제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머니는 새 삶을 찾으셨을 것 아닙니까?
어머니도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셔서 좋은 세상을 구름 위에 얹혀 멀리 떠나보내셨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 사랑 한번 받아 보신 적 없으셨습니다. 자식의 효도도 넉넉하게 받아 보시지도 못하셨습니다. 맘 터놓고 하소연할 곳도 없으셨답니다. 밤마다 낮에 겪은 고통과 서러움으로 베갯잇에 흘리신 눈물이 한 동이도 넘으실 겁니다.
아버지! 보고 계십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지만 두 분이 계셔서 저는 풍요로운 세상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부모님의 성품을 닮은 제 자식들을 보고 계시지요? 치사랑은 없어도 내리사랑은 있다고 합니다. 부모님께 보답은 못 해드렸지만 주신 사랑을 제 자식들에게 주며 잘 키워 왔습니다.
지금은 어머니도 당신 옆에 모셨습니다. 젊어서부터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장수 하지도 못하셨습니다. 아니면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 일찍 아버지 곁으로 가셨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두 살 때 아버지는 전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라 불러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 다시 한번 아버지 어머니 사진을 가슴에 담고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의 눈은 참으로 선해 보입니다. 저를 본 어른들도 “너는 아버지를 많이도 닮았구나”라고 말씀들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핏줄이 어딜 가겠습니까? 부전자전이란 말처럼 저는 아버지의 무언의 가르침을 받고 어머니의 자양분을 받아 선의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또한 제 자식도 아버지의 뜻대로 교육해 왔습니다. 부디 두 분 그때 청춘으로 돌아가시어 못다 한 사랑을 다시 누리십시오. 전국 관광지를 오붓하게 두 분만이 구경도 하시고 드라이브도 하십시오. 그러시다 시장하시면 맛집도 방문하시어 맛난 음식도 잡수십시오. 또 제 가족이 보고 싶으시면 언제라도 방문해 주십시오. 꿈속에서라도 얼굴 좀 보여주시고 어깨도 다독여 주십시오. 또한 사랑스런 아버지의 며느리 얼굴도 쳐다보세요. 저는 평안히 계실 부모님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리고 평생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 다시 한번 크게 불러봅니다.
아버지……!
첫댓글 오양교 선생님,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오릅니다.
신인상 수상을 축하 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