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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 제2주입니다. 교회력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로부터 시작됩니다. 강림절이 지나고 나면 성탄절이고, 이어서 주현절이 이어집니다. 주현절은 성탄절 후로부터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어지는데, 오늘이 주현절 두 번째 주일인 것입니다. 주현절은 Epiphany라고 하는데, 이 말은 희랍어의 ‘에피파네이아’에서 온 말입니다. ‘에피파네이아’는 본래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이 말이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의 도시들을 방문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위대하고 존귀한 왕이 우리 성읍에 그 모습을 나타낸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의미로, 신적인 존재가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 바로 이것이 ‘에피파네이아’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단어를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를 묘사하는데 적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과 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를 본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할 위대한 왕이 탄생하였음을 알려주는 신비한 별을 보고, 그 별의 인도를 따라 베들레헴 말구유에 찾아와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경배는, 이 아기가 누구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님이 가나에서 열린 혼인 잔치에 참여하셨을 때,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난처한 상황을 보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2장 11절에어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기적 사건 속에서 예수님은 그가 누구이신지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병자를 치유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예수님의 용모가 하얗게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하셨는데,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당신의 영광과 계시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주현절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성육신, 동방박사들의 방문, 예수님의 세례, 그리고 가난의 혼인잔치를 비롯해서 예수님 행하신 여러 기적들과 변화산에서의 변모 사건들을 묵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시는 그의 영광을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좀 더 확실하게 깨닫고 새로운 믿음과 헌신의 자리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현절의 의미요 주현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 1장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익숙한 처음 성탄절의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라든지, 동방박사와 베들레헴의 목자들의 방문, 베들레헴 들판에 울려퍼진 천사들의 합창 같은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대신, 그의 나심은 곧 성육신 사건이라는 사실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1장 첫머리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선언합니다. 원어 헬라어에서는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 희랍 사람들에게 익숙한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말‘ 혹은 어떤 ’법칙이나 의미‘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은 ’말씀‘으로 번역했는데, 한자 성경에서는 길 도(道)자를 써서, ’도‘(道)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도‘라고 하는 글자는 ’이치‘라고 하는 뜻도 있고 ’근원‘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요한은 이 '로고스'라고 하는 단어를 가져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로고스이신 그리스도는 단순한 이치나 혹은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인격이시고 하나님이시며 영원부터 살아계시고 역사하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로고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빛’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연 현상으로서의 빛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를 창세기 1장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 가운데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처음 창조의 출발입니다. 우주 만물과 생명의 역사가 ‘빛이 있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도, 로고스, 즉 그리스도는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 빛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는데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연약하기 짝이 없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한낱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권세입니다. 그런데 그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혈통’은 육체적인 혈연관계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선민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 안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혈통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연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육정’으로 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육체적인 욕망'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의 만족만 추구합니다. 더 많은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을 먼저 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와 같은 탐욕과 정욕으로붙 자유할 수 없기에, 사람은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선한 뜻을 세우고 율법을 준수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을 다짐하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사람의 의지로 완전에 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육체를 따라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스스로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몸부림을 쳐 보지만, 그럴수록 더 비참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뿐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끗하고 정의롭고 완전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고상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육정을 따라 자기만족을 목표로 삼고 쾌락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뜻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절망입니다. 실패하고 실수하고 죄를 범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은 지금 어둠 속에서 절망하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두움과 절망 속에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 빛을 발견한 바울은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울은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행이나 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슨 공로를 세우고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생명의 말씀으로, 구원의 빛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함으로 그 권세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권세는 에수를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이 나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합니까? 스스로 교만하여 스스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곤고하고 가련한지, 얼마나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영혼인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믿음 생활 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내가 말씀에 대한 지식도 많고, 세상을 보는 눈도 있고, 충분히 비난받지 않을 만큼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네가 신앙적으로 좀 더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먹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합니다. 내 안에 모셔와 그와 함께 먹고, 그와 함께 교제하며,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빛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이제는 그 생명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 땅에 살고있는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추었는데도, 그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보았다 해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살면서 예수와 함께 동행하기 보다는, 스스로 주인이 되고, 자기 만족만 구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라고 하는 뱀의 유혹에 아담과 하와는 아주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선악은 하나님이 분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기준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선악을 내 마음대로 규정하며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진리라고 내세우지만, 사실은 자기 기준입니다. 자기 욕심입니다. 내로남불이 바로 거기서 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그 근거나 논리는 나에게 적용할 때는 왜곡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가 나의 왕이고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욕심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영접하였습니까?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고 나와 함께 거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어서 14절에서 요한복음은 아주 중요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곧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가 성육신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보고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과연 하나님의 독생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그의 삶이 증거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이 주현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행하신 일들과 교훈들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또한 요한은 증언합니다. 우리가 보니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성경에서 나란히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즉,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장에 보면 다윗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울에게 쫓겨서 이방 땅에 머물던 다윗이 헤브론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다윗을 찾아와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 드렸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다윗에게 사울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토록 다윗을 미워하고 견제하고 끊임없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그를 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원수와 같은 인물이 사울입니다. 하지만 사울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를 지내준 사람들을 그는 결코 적폐세력이라고 몰지 않았습니다. 은헤와 진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한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을 믿었던 다윗의 신앙이 이렇게 그의 삶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란 긍휼이고 자비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품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진리는 ‘참’이고, 영원한 진실이고, 변하지 않는 신실함입니다. 진리는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그의 삶이요 인격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그의 삶이 곧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본 것도 바로 은혜와 진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그에게 충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육신을 입고 이 낮고 어두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한 구속의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우리가 보았다”고 요한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충만하였다는 말은 ‘가득차서 흘러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와 진리는 그냥 고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차고 넘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은혜와 진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차고 넘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우리들인데, 그렇다면 우리 또한 은혜 진리가 충만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자꾸만 쌓아두고 자기 혼자 누리려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이웃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깨달은 진리, 내 안에 영접한 진리가 충만하여 흘러 넘쳐야 합니다. 이웃이 볼 수 있고, 이웃이 또한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우리의 이웃들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나의 구주로, 나의 친구로,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와 함께 먹으며 그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 자리를 내어드리고, 우리 또한 은혜와 진리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