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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빛수레 광륜 스크랩 기획연재☆───── 대승의 적극적인 삶이 다복한 보살의 길이다 - 조용길 교수
윤거사. 추천 0 조회 24 07.03.05 17:3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기획연재



대승의 적극적인 삶이 다복(多福)한 보살의 길이다



조용길 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장 겸 불교대학원장)





무덥던 여름의 찌는 햇살도 입추와 처서가 지나기가 무섭게 그 끝을 보고야 말았다. 한국 24절기는 한국이라는 동북아시아에서 지구의 각종 기후를 사계절과 24절기로 나타내어 어쩌면 그렇게도 인과因果의 법칙처럼 척척 들어맞게 형성되었는지, 대단히 중요한 인연因緣이라는 존재存在의 법칙 중에 빼어난 면이 있다 하겠다.


지구 자체의 지역, 예를 들면, 남극이라든지 북극이나 열대와 태양과의 변화 속에 그 지역의 업성이 기후로 나타나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의 윤회輪廻 속에서 우리나라가 특히 그 중심축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전과 공전은 다른 말로 하면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스스로가 돌면서 공전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소아병적인 측면을 무지무명의 중생세계라 할 수 있고, 이것을 탈피한 끊임없이 자전하고 있는 스스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인격과 품격을 갖추고도 전체 사회중생 세계를 읽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대승이요 대아大我적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한다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를 모르는 중생(衆生많은 존재의 세계)들을 소승적ㆍ소아적이라 한다면, 제행무상을 철저히 알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고정된 세계와 고정된 실체實體가 있지 않음을 알고, 보편적인 보살의 타당한 마음을 내어 사는 모든 이들을 보살의 세계라 명명한다면, 이 세계는 대아적이고 대승적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ㆍ소승불교라는 차별적 용어는 구체적인 부처님의 말씀이나 부처님의 교리 교법敎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후대 불교교단의 분열 때문에 나타났던 것임을 유의하여야 한다.


불교사를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신 100여년 후에 교단에 분열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불멸佛滅 후 400년까지 20부의 부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상좌부라는 보수성향의 부파와 대중부라는 다소 진보 성향의 부파가 계속 분열되어 부파불교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대승ㆍ소승할 것 없이 불교는 ‘우리 인생의 육체에서 생기는 번뇌망상을 어떻게 이겨내고 극복하느냐’하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삼게 되는 것이다. 소승이나 대승이나 결국은 이 번뇌를 극복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육신에서 생겨나는 번뇌를 처리하는데 전력을 다 쏟아 부어, 재와 같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몸을 없애버리고 지혜마저도 없애버린다는 사상이 회신멸지灰身滅智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과 마음을 함께 완전히 무의 상태로 만드는 것, 원래의 무에 귀착을 시켜 번뇌를 없애버리는 차원이나 경지를 일컬어 회신멸지라 하는데, 이 회신멸지가 상좌부 불교의 최종 목적지라는 것이다. 이를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무 것도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대중부 계통의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부파에서는 이들을 허무주의적 사상이 아닌가 비판하지만 상좌부 계통의 불교에서는 이것만이 최고 최상의 열반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계통의 수행자들은 이 무여열반인 회신멸지의 결과에 대만족하므로, 고행苦行을 하거나 계율戒律을 지키는 등의 형식적인 데에 중점을 두어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을 자기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오직 자기 고뇌의 멸진, 자기 번뇌를 없애는 테두리에 얽혀 남을 돌보아 줄 시간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 극단적인 경우를 소승적이라 부르는 것이고 이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만의 만족에 취하고, 소극적인 이기주의에 매달려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남방불교나 상좌부 불교 자체를 소승불교라고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자기의 해탈에만 매달려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앤다는 것은’ 정의 장애, 인정人情의 장애를 넘어 선다는 것으로, 이는 대승이나 소승의 구분없이 똑같다. 이를 일러 번뇌장煩惱障을 끊어서 없앤다고 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이 번뇌장에 대하여 소지장所知障까지 다시 끊어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금욕주의적, 형식적 육체의 장애에 매달려 자리행自利行에만 그치고 말아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를 소승(히나야나)적이다 소아적이다 작은 수레다 사회성이 부족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대승大乘적이라 하는 것은 큰 수레(마하야나)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나까지 포함하여 다 구제하겠다는 자비원력慈悲願力의 대아大我의 마음이요 사상이다. 소승적 불교가 무여열반無餘涅槃을 구경의 목적으로 삼는데 반해 대승적 불교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 목표이며 차원이다. 즉 유여열반이란 보살이 수행을 하여 마음의 해탈을 얻었어도 중생의 고통이 남아 있는 한 중생과 같이 괴로워하면서도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기 위해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차원을 말한다.


소승이 몸의 형식을 중심으로 삼는데 비해 대승은 마음의 형식을 주主로 삼는다. 우리의 마음을 주춧돌로 삼아 몸(身)과 마음(心)의 수행을 꾀하는 것이다. 소승이나 대승이나 육체의 번뇌장을 없애는 입장은 똑같으나 대승은 여기에 소지장의 문제까지 점검하는 것이다. 즉 지혜의 장애까지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소지所知는 진제眞諦와 속제의 두 진리의 차원이다. 진제는 모양을 떠난 진리의 이치인 이 세상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인 불성佛性을 말하며 근본지혜根本智慧의 차원이고, 속제는 후득지혜後得智慧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의 본래 불성적 지혜가 진제라면 본능적 욕구 욕망에서 나타나는 차별적 지혜가 속제라는 것이다. 불성적 지혜와 불성의 진제는 해탈·열반의 극락정토이지만 본능적 지혜인 중생성의 온갖 차별로 인해 습득된 인과업보의 업장의 세계는 6도윤회를 불러일으키는 세계이다.


번뇌장煩惱障은 아집我執을 뿌리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는 번뇌 자체가 장애물이 되는 것이요, 소지장所知障은 법집法執이 뿌리가 되어 생겨나는 장애이다.「능엄경」에 객진번뇌客塵煩惱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객번뇌와 진번뇌를 합한 단어이다. 객번뇌란 큰 덩어리의 번뇌장애를 말하고, 진번뇌는 아주 작고 미세한, 그래서 잘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차원의 번뇌를 이르는 말로 소지장이 이것이다.

소승적 불교는 금욕주의적이고, 지키고만 있는 편이라면, 대승적 불교는 마음으로부터 불성佛性적 측면에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임을 간파하고, 동고동락同苦同樂적 공존共存의 세계를 일컫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살생계不殺生戒에서 소승적으로는 마음속으로는 ‘저놈 죽여 버려야지’하지만 직접 죽이지만 않으면 파계가 아닌데, 대승적 불교로는 ‘저놈 죽여 버려야지’하고 마음만 먹어도 파계하고 불살생계를 어기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윤리·도덕적 양심의 문제라는 근본불성의 세계이다. 소승적 견지에서는 ‘술이 먹고 싶어도’ 마시지만 않으면 파계가 아니지만, 대승적 견지에서는 ‘아! 술’이라는 마음이 일어나면, 즉 유혹의 마음만 있어도 벌써 파계하기 때문에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하지 않으면 참회하여야 죄업이 소멸되는 것이다. 즉 소승적 생활은 형식주의적이라면 대승적 생활은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실한 실천을 하는 부처님의 사상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보살(Bodhisttva)이라 부른다. 즉 ‘자각(自覺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유정중생有情衆生’이 바로 보살인 것이다. 의식意識적으로 ‘일체중생 실유불성’의 기치를 내걸고 나아가는 거대한 군단이 보살이다. 보리菩提를 향해 끊임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다 보살이지만, 어떤 이는 자리自利적으로 스스로만 구하기만 바쁘고, 또 어떤 이는 자기 개발도 열심히 하고 또 남을 위해 열심히 돕고 살아간다면 이는 이타利他인데, 이것이 모든 이들이 바로 소승적이냐 대승적이냐로 분류될 수 있는 잣대인 것이다. 자각自覺 각타覺他의 무량자비無量慈悲를 쓰는 사회가 바로 정토淨土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청정법신淸淨法身의 불보佛寶를 쓰는 세계이기에, 항상 부처님과 함께 하는 세계이고, 밝은 진리의 법보法寶의 세계이기에 선연善緣의 공덕을 짓는 세계이고, 이 세계는 늘 화합和合하고 4무량심을 베푸는 세계이기에 승보僧寶의 세계이기도 하다.


오늘날 21세기 지구환경과 생태환경이 급변하고, 인간의 심성이 삼독심三毒心에 젖어가는 이때 불성佛性을 회복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삼보三寶를 잘 받들어 사회를, 가정을, 국토를, 세계를, 다복多福한 정토로 만들어 가는 보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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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3.08 16:02

    첫댓글 진실을 바탕으로하는 여실지견의 세계인 대승적 생활로.......감사합니다..........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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