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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기자: 스님 만남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스님: 기사로 가는 거예요? 소리로 가지는 않죠?
기자: 녹취를 한 다음 글로 미국에 보냅니다.
스님께서 법고를 치신다고요? 법고란 무엇입니까?
스님: 법고는 인간이 가야할 깨달음의 길이, 모든 미물과 축생 마저도 함께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이라 보고, 법고! 즉, 북 소리가 당다당 당다당 이렇게 나잖아요. 이 소리를 인간은 소리로 인지를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들, 안.이.비.설.신.의를 못 갖춘 기운들은 그걸 촉식으로 듣는다고 하니, 소리를 바꾸어 취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바세계로 나쁜 기운들이 침범을 할 때 법고를 치면 촉식으로 변화되서 들리니까, 사바 세계로 들어갔다가는 죽겠구나라는 위협의 의미로도 법고를 치니까, 나쁜 기운을 없애는 의미로 법고를 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종은 좋은 기운이 한 하늘이 하나씩 열려서 들어오라는 의미니까, 결국은 나쁜 기운을 막는 방어의 의미와 다른 존재들에게도 깨달음으로 가게 하는 념원이 담기고 다른 존재들의 실상을 꿰뚫어 깨달음일게 하려는 평안을 느끼게 하려는 지혜를 바탕으로 한 대자비심의 실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물 더 설명 했습니다.
정원스님 추모 1주기 행사에서 법고를 치는 하유스님
기자: 설명을 듣다보니, 절에 사물이라는 것이 있다 하셨는데, 그리고 스님께서 법고와 종을 설명해주셨는데 나머지 두개도 좀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스님: 네 그러니까 우리 불교에서 사생의 자비로운 아버지라고 할 때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일 때 태생은 태중일 때 법고가 태생을 깨달음의 길로 가는 장치라면, 태난습 할 때 난은 알 난자니까, 결국은 날짐승을 얘기하는거고 그러면 사물 중에서 구름모양으로 생긴 납작한 동판으로, 운판이 있잖아요. 그것은 이제 난생의 깨달음의 장치, 습생은 습도만 맞으면 생명이 잉태되는거니까, 물짐승들, 물고기는 다 습생에 해당되고, 그래서 습생이 깨달음의 길로 가게하는 장치가 목어라면, 그 다음에 화생 분명히 존재하지만 변화되서 보이지 않는 존재, 그 보이지 않는 존재의 깨달음을 이루게 하기위한 장치가 범종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또 복합적으로는 인간만 가야될 깨달음의 길이 아니고 네 발 달린 짐승도 다 함께 극락가자는게 법고라면 그 다음에 운판이 날짐승을 깨달음의 길로 가는 장치라면 인간만 가야될 깨달음의 길이 아니고 날짐승도 다 함께 극락가자면 결국은 불교에서 말하는 구천이 동서남북 사천 동남동북 서남서북 팔천 정중앙까지 구천이라는 의미인데 우리 불교에서 저승과 이승의 사이를 중음계라고 하잖아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허공 중에 떠도는 영가들을 좋은 곳으로 천도하는 의미가 또 운판의 의미가 있고 물짐승은 목어가 물짐승을 깨달음의 길로 가는 장치를 한다면 물고기가 유일하게 보이는 모습이 눈을 뜨고 자는 모습의 형국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너무 나태했구나, 해이했구나, 게을렀구나 하는 의미를 물고기의 눈 뜬 모습으로 깨달음의 장치를 삼아가지고 그 풍경소리 울릴 때마다 목탁소리 울릴 때마다 (왜냐하면 목탁도 결국 물고기의 변형이잖아요).정신차려 깨달음에 이르라는 뜻이 깃들어 있지요. 목탁을 설명하면 두 개의 구멍은 눈으로 뚫려있고, 뚫려있는 선은 물고기의 아가미의 표시이고, 잡고 치는 손잡이가 지느러미 꼬리 부분이니까, 결국은 목어와 목탁은 같은 의미인데, (목어는) 법당 내에서 치기 거추장스러우니까 변형시킨게 목탁이고 그 다음에 풍경소리 딸랑딸랑거릴 때 거기에도 달려있는 축생의 모습이 물고기니까 모두 목탁이나 목어나 풍경소리가 날 때마다 우리 수행자가 너무 게을렀구나, 나태했구나, 해이했구나 늘 물고기는 눈 뜨고 사는 각성의 삶을 살라는 뜻으로 생겨 났다고도 봅니다. 또 깨어있는 삶을 살라는 장치가 목어라면 그 다음에 우리 불교에서는 하늘이 33천이니까, 동서남북에 하늘 선신들이 여덟 분이 계시니까, 4곱하기8이 32, 정중앙까지 제석천이니까, 한 범종을 울
릴 때마다 하늘 선신들이 사바세계로 내려와 달라는 적극적 의미가 범종, 나쁜 기운은 들어오지 말라는 장치가 법고, 이렇게 보신다면 사생의 자비로운 어버이, 태난습화의 모든 생명의 모습에 깨달음의 장치와 천도의 모습이 사물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봉인사 한길 예술제
기자: 설명이 아주 구체적이어 알기 쉽습니다. 초기경전의 자애경을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Loving-Kindness 라는 자애 명상의 내용이 사물의 뜻에도 특히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부분을 포함해 들어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스님께서 법고를 하실 때 특히 어떤 해설이나, 설명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듣는 분들이나, 보는 분들이 이런 의미를 체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님: 그래서 제가 공연 때마다 법고만 쳐달라고 하는데도 있지만 시간이 있으면 마이크를 좀 줄 수 있냐고 주최 측에 요청을 해서 이 설명을 하고 오늘 이 공연은 소리로 듣는 악기의 소리가 아닌,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제 법고 소리에 불편한 기분이 있다면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기를 발원하는 시간, 집안에 안좋은 일이 있다면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는 시간, 그리고 이 도량에 안 좋은 기운이 있다면 이 법고소리에 멀리 달아나게 하는 발원의 시간이니까, 제 법고소리를 소리로만 감상하지 마시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주시면 큰 인연을 만나는 시간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의미를 알고 듣는 법고와 모르고 법고는 확 달라지기 때문에 그 때는 더 간절하게 듣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립박물관에서 출간한 비매품인 책을 부탁해 국립박물관으로부터 한 권 얻었는데, 조선 시대 때도 법고를, 스님들이 작은 법고를 등에 메고 다니면서 각 집집마다 가면서 북을 쳐주면 그 마당에 있는 안좋은 기운을 내쫓아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쌀을 시주해준 기록이 있더라구요. 그랬을 때 옛날의 불교 안에는 벌써 법고 소리가 방어의 의미라는 것을 다 알고, 나쁜 기운을, 악령들이나 잡신들을 쫓는 의미가 있다는게 벌써 역사적으로 있고 우리 불교만 그런 게 아니고 동양 3국은 북소리 자체가 의미가 부여되는게 일본은 축제를 마쯔리라고 하는데 마쯔리의 첫 머리가 꼭 눕혀있는 북을 옷 벗은 남자들 서른명씩, 마흔 명씩 올라가서 때리는 이유가 축제에 나쁜 기운이다 물러가기를 발원한다는 의미가 있구요. 한국은 불교적 의미로 북을 치고 그리고 홍콩이나 중국은 이영애나, 이효리가
쇼케이스를 가니까 꼭 행사장 무대 위에 작은 북을 올려두더라구요. 그러면 행사의 주체인 당사자인 연예인들이 그 북소리를 울리게 하는 것을 제가 여러 번을 TV를 통해서 봤는데, 결국은 이 쇼케이스가 안 좋은 기운이 다 달아나서 성공하기를 발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고 동양의 모든 사상에는 북소리가 악귀, 부정적인 것들을 쫓는 위미가 다 부여되어 있더라구요.
기자: 미국의 원주민인 인디언들, 그 분들도 북을 소중하게 생각을 합니다. 사무량심 명상에 연민명상이 있는데요.연민명상은 고통과 슬픔이나 괴로움에서 벗어나거나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통과 슬픔을 겪고 사니까요. 그런 면에서 스님께서도 악귀나 안좋은 기운이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스님: 네. 가르침에도 분명히 있고 모든 기성종교는 사탄이라는 부류, 지옥이라는 자체, 교리체계로 다 만들어져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음양의 이치가, 우주의 법칙에서 안좋은 게 있으면 좋은 게 있고, 좋은 게 있으면 안좋은 게 있고, 분명히 수행을 통한 선한 에너지가 있다면 악한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선한 에너지가 계발 되는 것으로 악한 에너지가 없는데 굳이 수행을 필요로 할 것 같지는 않구요. 그래서 저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대신에 눈에 보이질 않으니까 근기가 약한 분들은 없는 세계라고 부정하겠지만 수행을 통한 분들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겠죠. 죽음 자체가 보이지 않는 세계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잖아요. 죽음 이후의 세계가, 그런 것처럼, 저는 100% 그 존재들을 믿고 있습니다.
기자: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좀 더 설명을 부탁합니다.
스님: 선과 악에 대해서 아니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기자: 악귀가 있다는 것을요.
스님: 악귀가 없다면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세상이 있다는 것은 설명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묻지마 범죄를 보자고요? 자기가 참 바르게 살았어요. 누가 와서 찔렀어요. 그러면 악귀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런 개념이죠. 묻지마 범죄가 없다고 묻는 것과 똑같다고 저는 봐요. 왜냐면 상식으로 바르게 살았는데 왜 나쁜 일이 벌어졌는가라는 개념이, 왜냐면 자기는 잘못한게 없는데 누가 와서 찔렀잖아요. 악귀도 그런 거라고 봐요. 분명히 우리가 바르게 살지만 분명히 나쁜 현상이 벌어지고 어떤 사고가 났을 때 그거는 어떤 기운에, 나쁜 기운의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상식만 이야기 한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설명되지 못할 일은 너무 많은 거에요.
기자: 법고는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스님: 저는 법고 이전에 고등학교 3년을 밴드부에서 사이드 드럼을 쳤습니다. 그리고 또 군대를 갔는데 특기병을 뽑는다고 해서 포병으로 뽑혔지만 또 다시 군악대로 차출되서 북을 쳤어요. 사이드 드럼을... 그런데 제대하고 호텔 요리사 생활을 1년을 하다가 출가를 했는데 그리고 난 뒤에 해인사 강원에서 고두 소임을 보면서 지금까지 법고를 치니까, 저는17세부터 북을 쳤다고 봐야하고 출가하고부터 그 해부터 26년동안 법고를 쳤다고 봐야죠.
기자: 어떤 경지를 이루셨겠습니다. 스님이시니까 수행 체험도 있으실텐데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스님: 저 같은 경우는 법고를 치면서 늘 발원을 하면서 치는데 부처님 제 법고소리에 힘들었던 인연들이,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방해를 받았던 인연들이 제 법고소리에 다 벗어지기를 발원한다면 이것이 자애명상과 같은 얘기잖아요. 타인에게 연민의 마음을 내고 저는 법고를 통해서 타인을 이롭게 하는 마음을 내면서 치고 있으니까, 제가 법고를 치고나면 꼭 좋은 일이 생기더군요. 결국은 제가 좋은 마음을 내면서 공연 다녔던 그 공덕으로 저도 같이 좋아지는거니까, 성철 큰스님의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라는 의미가 법고에도 담겨있는 것 같아요. 남들은 악기로만 보겠지만 저는 부처님의 법에 다름 아니라 생각하면서 법고를 치고 제 역량만큼 부처님 법을 전달한다고 보는거죠.
기자: 스님! 법고만이 아니라 승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춤을 추신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춤을 추시는지요?
스님: 춤에 대해서는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아서 이야기 하기 참 곤란한 부분인데 전혀 배워본 적도 없고 전혀 행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생이지지처럼, 타고난 것처럼, 춤이 저절로 올라왔고, 그리고 음악만 나오면 춤이 나오는데, 법고로 공연을 한 것이 스님되고 한 십 몇 년 차부터 지금 26년차니까, 즉, 98년부터 공연을 다녔으니까, 법고를 치는 것은 좋은데 법고를 치고 난 뒤에 내 재능이 저절로 올라온 춤을 춰주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춤을, 일반 의식무인 나비작법, 바라작법이 아닌 그냥 춤을 춘다는 것에 거부심이 워낙 많기 때문에 일부러 제 춤을 공연 불러준 사람은 없었구요. 어떤 면으로는 제 스스로 에너지를 만든거죠. ‘스님! 저 법고만 말고 춤도 춰드릴까요?’라고 부탁하면서 추기도 했는데 불현 듯 20년이 지나고 나니 이미지 메이킹 된 거죠. ‘하유는 춤이다’ 저는 이 생에 춤이 저절로 올라온 것 때문에 춤을 추게 된 거고 이 춤의 의미를 모르는 분들은 형태가 없으니까 막춤으로 부르지만 저는 춤 못 춘다는 소리는 한 번도 안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알아 봤더니 춤이라는 장르 안에 생춤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제가 알게 되었어요. 생중계처럼 제가 춤을 전혀 연습을 안했는데도 음악따라 무조건 저절로 나왔으니 그것은 생춤이고 진정한 춤의 에너지는 생춤이라고 봅니다. 몇 달 동안 춤의 장르를 연습하고 발레를 하든 살풀이를 연습하던 어떤 것을 연습해서 그 공연을 한 번 하고나면 허망함을 느끼는 이유가 그 짧은 순간을 위해서 몇 달, 몇 년을 연습했던 그 노력 때문에 허망해지기도 하지만, 생춤이라는 것은 전혀 준비없이 그냥 무대에 올라가서 그 순간만 즐기면 되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이 순간을 보고 즐기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공연이 끝나고난 뒤의 시간에 허망함을 느끼지 않는거죠. 순간의 예술이 생춤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대한민국 대동평화 홍익정신 생활실천대회
기자: 긴 시간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가르침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몇 시간도 춤을 추신다고요? 어떤 힘으로 그렇게 긴 시간 추실 수 있으신지요?
스님: 저 같은 경우는 이 춤을 통해서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실천한다고 봅니다. 춤이라는 예술장르는 결과물이 남지를 않죠. 음악은 악보가 있고 문학은 책이 남고 그림은 그림으로 남잖아요.. 그러나 춤은 순간의 예술이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라는 불교와 제일 부합되는 예술인 것 같아요. 만다라도 그리고 난 뒤에 모래를 강물에 띄워보내는 의식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만큼 엄청난 공력을 들인 것을 집착하지 않고 모래를 물에 씻어낼 때는 이 우주의 무상함을 공부하는 마음연습이 만다라라고 그랬는데 저도 마찬가지로 춤 안에 그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며, 춤을 춥니다.
특이한 것은 몇시간을 춤을 추어도 힘들지 않고 보는 이들도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
가 춤을 출 때는 공연 형태로 올라간 적은 없어요. 기습적인 파격의 형태로 올라갔고 대동제 형태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격식을 깨고 싶은, 위선과 허세를 깨고 싶은 의미를 담아서 춤을 추기 때문에 결국은 스님이 춤을 추는 것 자체도 파격인데다가 위선을 벗어나는 모습이라고 보기 때문에 남들은 욕할지 몰라도 제 하심공부가 춤에 담겨있어요. 제 춤의 근원은 생이지지라고 봐야지 그 어떤 것도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남들은 체력을 그만큼 소모하면 쓰러져야 하는데 저는 춤을 추다가 멈추면 더 경락이 막히고 더 힘드는데 몇 시간이고 추고 나면 온몸이 홀가분해지고 훨씬 더 기운이 상승될 때, 이 이유를 답할 방법이 없고 타고난 생이지지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지요. 태어날 때 기운을 타고났다는 말 말고는 답을 할 길이 없어요. 왜냐면 세상은 다 보편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 하다보니 제 춤이 보편을 벗어나 있어서 어떻게 대답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자: 타고 나셨다면 일종의 숙명론적이라고 보시는지요?
스님: 저는 천재라고 불리는 애들이 영원히 천재가 아닐 때 저는 윤회의 교란으로 보거든요. 천재는 아뢰야식에 저장된 전생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애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천재성이 늙을 때까지 유지가 되어야 하는데 꼭 중간에 성장이 멈추거든요. 그것을 저도 똑같은 개념으로 봤을때 전생의 어떤 인과의 아뢰야식의 저장이 누구보다 강렬한 윤회의 교란으로 보는거고 전생의 춤의 기운이, 전생에 춤을 췄던 사람이니까 워낙 강렬해서 이 생에 안잊혀졌을 뿐 어느 시기가 되면 저는 춤의 기운이 다 녹고나면 소멸된다고 봐서 제가 재능으로 키워진 춤이 아니어서 그래서 생이지지라고 하는 겁니다. 차라리 배웠다면 그것은 재능인거죠.
기자: 말씀 중에 하늘의 뜻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스님께서 하늘이라는 단어를 쓰실 때 그 의미는 무엇인지요?
스님: 하늘이라는 단어를 쓸 때 그 의미가 오해의 소지가 있죠. 불교적 관점에서는... 그렇지만 저는 보이지 않는 기운의 작용말고는 답을 할 길이 없지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무당들이 하는 질문이 왜 신을 받았습니까? 그냥 살지? 그러면 대답을 할 길이 없는 거에요. 자기가 받고 싶어서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저도 똑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자: 스님께서 법고와 춤과 그 외에 스님으로서 활동하시거나 수행하시는 것은 있으신지요?
스님: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답은 저의 춤을 통해서 하신 질문이죠. 그 하늘이라고 표현했던..., 제가 왜 이렇게, 즉 춤으로 수행하는가를 아는 과정을 수행으로 삼고 제가 왜 춤이 왔을까, 남들과 다르게 이런 기운이 왜 왔을까를 끊임없이 관찰하다가, 어떤 몰입의 상태가 경험 되었습니다. 저는 춤을 통해서 저를 끊임없이 관찰하다가 공부가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제 인과를 알겠죠. 저는 제 춤이 공부재료로 왔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끊임없이 제가 지금 똑같은 질문으로 사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춤이 왔을까?
기자: 네. 그러시군요.
스님: 제 춤에 대해서 확연히 대답하면 한 소식 이룸이지요. 깨달은 다음에는 굳이 춤을 출 일이 아닌 거 같고 저는 깨달음의 과정 안에 춤이라는 장치가 있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춤을 추라는 것을 아는 것이 수행 그 자체로 완성되는 그 순간, 공부가 되는 그 순간 춤을 왜 추는가를 다 알아차릴 것 같아요.
기자: 춤추시는 것이 수행이라시는데, ‘계’와는 어떤 입장이신지요?
스님: 합리화로 들리겠지만, 저는 춤을 통해서 수행의 어떤 방편으로, 공부재료로서 춤이 왔다고 이야기 하지만 현상적으로는 분명히 계율을 어긴 모습 때문에 공격을 당하고 있죠. 왜냐면 사미십계 중에 일곱 번째 계가 춤추고 노래하고 풍류에 빠지지 말라거든요. 그렇지만 그냥 현상적 모습만 보고 공격을 한다면 제가 기꺼이 받아들여야지요. 평범한 재가자라면 저같은 유형의 스님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테니까요. 이해 못하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고. 파격적인 몸짓을 보이는 제가 잘못된 것이니까. 그 기운을 설명하기 이전에 겉모습만 보고 공격한다면 저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계를 잘 지키려 애쓰는 재가자분들이 춤을 지적을 한다면 기꺼이 참회를 하겠습니다.
기자: 참회하고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진정 수행자가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스님은 누구십니까?
스님: 그걸 알면 그래서 제 법명이 어찌 하에 있을 유, 마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그 찾는 과정이 공부이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답한다면 제가 이제는 공부가 끝났다고 봐야하죠. 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인터뷰 일시: 2017년 10월 27일
장소: 서울 종로 삼청동 명상의집 자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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