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 때부터 전주에서 이발 일을 배웠다.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기술로 그는 일찍 부터 손 기술 좋은 이발사로 인정받았다. 22살이 된 청년은 부모님의 성화로 선을 본 뒤 결혼, 서울로 상경한다. 그러나 퇴폐 이발소가 성행하면서 인생의 회의를 맛본 그는 25년간 몸담았던 직업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80년대 후반, 나이 쉰을 바라보던 때의 일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켜주며 5남매를 묵묵히 키워주었던 아내와 함게 그는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웃과 힘을 모아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일, 인생에서 가장 역동적인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귀촌 5년이 지난 지금 이제 그는 아내의 건강한 여생을 위해 또 바삐 움직이고 있다.
40여년을 함께 해주며 고생했던 아내가 위암과 자궁암을 선고받은 것이다. '아내에게 건강한 여생을 선물하고 싶다' 는 소망은 이강선 씨 여생의 목표가 되고 있다.
25년간 삶이 되어버린 직업을 버리다.
1962년 부모님의 성화로 이강선 씨는 전주의 작은 찻집에서 장정자 씨를 처음 만났다. 조용한 말투 속에 강인한 성품이 느껴지는 외유내강의 여성이었다. 장정자 씨도 꾸밈없고 유괘한 이강선 씨의 모습이 좋았다.
동석했던 부모님과 누나는 '성품이 좋은 여자' 라며 장정자 씨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모님과 누님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 배필로도 손색없겠다.' 다른 가족들과의 원만한 관계도 반려자를 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한 청년은 그렇게 배필을 맞았다.
"가난한 시골집으로 시집와줘서 고맙구려." 어렵게 꺼낸 그의 인사에 새색시는 미소만 지었다.
서울로 상경해 이발사 일을 계속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은 5남매로 늘었고 풍족하진 않았지만 행복하던 나날이 계속되었다.
"미안하구려.오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신발이 다 찢어진 사람이 있기에 봉투에서 꺼내 주고 왔소, 그래도 우리는 신발 꿰매 신을 형편은 되지 않소? 허허."
특유의 큰 웃음을 터트리는 남편을 보고 아내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우리 형편도 넉넉지 않으면서 남 신발 살피기 바쁘시구려."
가난한 살림에도 이웃에 대한 온정과 배려를 몸에 지닌고 다니던 이강선 씨였다. 그러던 즈음, 이강선 씨는 25년간 투신했던 이발사라는 직업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성매매가 이뤄지는 퇴폐 이발소의 성행으로 이발사라는 직업이 자식들 앞에서 더 이상 자랑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강선 씨는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 곡성으로 내려간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생의 마감을 기다리고 계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89년 그의 삶의 터전이 곡성으로 옮아 간 순간이었다.
곁을 지켜준 아내의 희생
평생의 업이라 생각한 직업을 버리고 나니 생계도 걱정이었지만 일생 보람을 느낄 또 다른 업을 만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노환의 어머니 곁에서 그는 부모님이 남긴 시골의 작은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아내는 서울과 곡성을 오가는 생활도 마다하지 않고 시어머니 병수발을 도왔다. 아내는 시골에 들어오면 서울에 남겨놓은 아이들 걱정에 잠을 못 이루고 서울에 있으면 시어머니와 남편 걱정에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아내에게 슬며시 귀촌하고 싶은 꿈을 밝혔다.
"여보, 이발 일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고 여기서 농사를 지어보고 싶소."
아내는 망설이기만 하고 답을 주지 않았다. 아내의 눈빛에는 5남매에 대한 걱정과 생계에 대한 불안이스쳤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이강선 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농사 기술과 정보를 물어 작은 농장을 짓고 흑염소 사육과 토종 벌꿀 생산을 시작했다. 아내는 서울과 곡성을 오가며 남편의 농장 일을 돕기 시작했다.
농장 일손이 바빠 힘들만도 했지만 염소를 돌보는 아내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내의 표정 속에서 그는 시골에서도 보람을 느낄 일생의 두 번째 업을 발견했다. 부부는 생활 터전을 곡성으로 옮기고 시골의 식구가 되었다.
체험마을로 변신 시작하다
25년간 가위만 잡아본 손으로 처음 농기구를 쥐었다. 서툰 손놀림 때문에 손이 부르트고 태양빛에 피부는 쌔까매졌다. 비로소 흑염소들의 친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흑염소는 1년에 네 마리 정도 새끼를 출산한다.
이 중 두 마리를 판매해 사료비를 충당했다. 농장운영비를 줄이고 매년 농장의 규모를 2배 이상 성장시킬 수 있었다. 5년이 지나자 10마리로 시작한 농장은 1백 마리로 늘었다. 초기 2년은 큰 수익이 나지 않아 고생했지만 손실은 토종 꿀로 보전했다. 벌이 날아드는 풍경을 보는 것은 꿀맛처럼 달콤했다.
항생제를 쓰지 않은 흑염소는 인기가 좋았고 서울에서 일하던 시절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놀러와 농장에서 기른 흑염소 요리를 먹고 가기도 했다. 놀러온 친구들은 한결같이 현조마을의 풍경을 창찬했다.
"마을이 참 포근하네." "우리 처갓집 풍경하고 비슷해, 소박한 정취가 아주 좋아." "뒷산도 조금만 정돈하면 근사한 산책로가 되겠는걸." 현조마을을 찾는 외부인들의 감동에 놀란 것은 마을 사람들이었다. "우리 마을이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들 칭찬을 할까?"
깊은 골짜기와 맑은 봉조천이 있는 현조마을은 웅장하진 않지만 소박한 천혜 자원이 널려있는 곳이다. 밤, 매실 등 임산물과 능이버섯 토종 꿀 등 특산 물이 많았다. 마을에 놀러 온 외지인들이 봉조천에서 해질 때까지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머리를 갸웃했다. 주민들에겐 친숙했던 것이 외부인들에겐 신선한 것이었다.
의아함과 동시에 관광 마을로의 가능성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산책로도 정비하고, 봉조천 바닥에 부드러운 흙을 깔아 아이들 다치지 않게 해줍시다."
외부인을 배려하려던 주민들의 소박한 아이디어는 본격적인 관광산업의 서막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곡성군청 공무원이 마을을 방문한다.
"마을을 농촌체험 마을로 만들어 보면 어때요?" 이장님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마을 최초로 찾아온 마을 전체를 뒤흔드는 변화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반대하는 마을 사람들도 많았다.
"귀찮은 일이 많아질텐데 젊은 사람도 없이 누가 그런 일을 다 맡을 건가?" "볼 것이라곤 뒷산하고 봉조천인데 그런 걸로 도시 사람들이 좋아하겠어?"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설레기 시작했다. 잘 되리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주민들이 밤을 밝히며 아이디어를 내는 날이 이어졌다.
마을 공동의 일이라며 항상 앞장서 하던 이강선 씨는 체험마을의 운영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96년에 폐교돼 마을 어귀에 스산한 건물만 남아있던 봉조학교를 인수, 농촌 체험 학교로 만들기로 했다. 이강선 씨는 학교 꾸미기를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창고나 부엌에서 쓰던 오래된 생활 용품들을 꺼내 학교에 기증했다. 이강선 씨는 학교를 농촌 생활 전시장으로 꾸미고 교실 두 개를 농사와 가사를 체험할 수 있는 사랑방으로 꾸몄다. 방문객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도시 아이들은 마을에서 물놀이를 하고 밤과 매실을 따는 것만으로도 신나서 떠들었다. 학교마저 폐교되면서 아이들이 사라진 마을이 오랜만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북적댔다. 아이들은 학교 안의 생활 용품들을 함부로 놀리거나 장난치기 일쑤였지만 생활 용품에 깃든 농민들의 수고나 가난한 삶의 조건을 극복한 선조들의 지혜를 설명하면 금방 태도가 변하곤 했다. 어린이들을 비롯해 도시인들이 마을 어른들을 깍듯하게 대하며 예절을 배우고 가기도 했다.
집안 농사를 돌볼 겨를도 없었던 때
마을의 변신과 함께 이강선 씨의 대외 활동 폭이 넓어지면서 염소 농사와 꿀벌 돌보는 일은 고스란히 아내 장정자 씨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강선 씨는 마을 민박 건립 등에 바빳고 아내는 남편 몫까지 두 사람분의 농사에 바빳다. 혼자 힘으로 벅찬 상황이 되자 아내가 밖에 나가는 남편을 붙잡고 '우리 집 염소는 어떡할 거냐'고 화를 내는 일도 잦아졌다.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아내를 다독이고 뛰어 나갔다.
"집안 농사는 자네가 잘 맡아주게. 혼자 층청망청 살려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을 주민이 다 같이 잘되는 일에 뛰고 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게."
하지만 아내 혼자의 힘으로 1백여 마리의 염소를 돌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흑염소가 집단 폐사되는 사고를 당한다. 전염병이 돌아 새끼 염소까지 모조리 쓰러진 것이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사고를 당하자 아내는 망연자실 농장에 주저앉았다. 그 날도 이강선 씨는 학교 운영위원회의 때문에 집을 나섰다. 아내는 눈물을 쏟으며 1백여 마리의 시체를 홀로 치웠다.
아내는 의료 혜택도 변변치 한은 시골 마을에서 병을 알지도 못하고 죽을 뻔했다고 말해따. 병을 발견해준 곳이 결국 도시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남편에 대한 서운함도 숨기지 않았다.
가족의 희생과 마을 사람들의 오해
"선친에게 물려받은 우리 땅도 다 마을에 제공해서 민박집 만들었어요. 마을 일에 우리 돈까지 다 썼지요."
이강선 씨는 방송국이나 기업으로부터 받은 개인 명의의 표창 수상금도 일체 마을 시설에 사용했다. 마을 만들기에 헌신한 것이다. 마을 회관 짓는 데 땅을 무상 제공한 것도 아내는 사실 찬성하지 않았다. 이강선 씨는 아내의 고생을 조금은 이해한다는 듯 옅은 웃음을 지으며 아내를 다독였다.
"자네가 도와준 덕에 우리 마을이 이렇게 발전했지 않았는가?" "내 몸뚱이가 아프고 나니 이젠 싸우기도 힘드네요."
남편은 특유의 너털웃으으로 아내의 하소연을 받아준다.
"아프지 않았을 땐 나 타박하기 바빴잖아, 허허."
아내가 빠져나간 방에서 이강선 대표는 슬며시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아내의 병을 고쳐주고 싶은 소망을 표현했다.
"민박을 겸해서 지은 이 황토방은 사실 아내를 위한 건강 회복실입니다. 황토 자체가 항균성과 방충성이 있어 우리 몸에 좋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둥도 나무 원목을 사용했고 황토 벽 위에 암에 좋다는 성분을 덧발랐어요, 아내의 병을 낫게 할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고생해 준 아내에 대한 제 작은 보답니다."
이웃의 격려가 가장 큰 보람
이강선 씨가 농촌체험마을의 운영위원장을 거쳐 대표를 맡은 지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을은 연간 8천여 명의 방문객이 꾸준히 찾는 곳이 되었고 마을 전체의 민박 소득, 체험 활동 소득과 농산물 판매로 마을 전체의 수익의 연간 5천만원에 달한다. 민박에 참여하는 농가가 20여 개인 것에 비하면 아직 적은 수익이지만 마을의 관광 가능성은 더 커지고 있다. 이강선씨를 비롯해 헌신적인 농민들이 앞장 선 덕에 마을 주민들의 삶에도 활기가 넘친다.
이강선 씨는 마을의 변화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보람을 느낀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처음 시작할 당시 냉소를 보낸 마을 사람도 있었고 지원금에 대한 오해로 일부 주민이 운영화에서 탈퇴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수고를 인정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조마을 염경석 이장은 이강선 씨를 찾아 슬며시 어깨를 두드려 주곤 했다.
"자네가 제일 앞장 서 준 것 마을 사람들이 다 잘 알지 않는가, 애초에 자네가 제안해 시작된 사업이기도 하고 우리 마을 전체의 숙원 사업이니 힘 모아서 잘 완성시켜 보세."
주민들이 수고한다는 말 한마디 전해줄 때 이강선 씨는 마음의 상처가 씻기는 듯 위로를 얻었다.
"정부 지원금이 들어오니까 '혹시 앞장서 다니면서 자기 활동비 정도는 챙기지 않았을까" 의심을 보내는 사람도 없진 않았죠, 그럴 때 제일 마음이 아팠어요. 우리 가족들은 선친의 땅마저 마을에 다 쏟아 부었다고 화내고, 일부 마을 사람들은 이익도 없는 일 하겠느냐며 저를 욕할 땐 그 사이에서 많이 힘들었죠."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은 잊은지 오래다. 비난이 겁나서 해야 할 일을 안 하면 또 다른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을 사업은 지금부터 더욱 본격화될 예정이다. 방문객들이 늘면서 산촌개발 사업 등의 명목으로 지원금을 받아 인프라 구축 사업에 돌입했다. 염경석 이장은 "정부에 사업 신청을 해서 사업비를 지원받게 되면 시설 인프라를 늘릴 예정" 이라며 "마을 주민들의 땅을 지역 공동부지로 매입해 여기서 나오는 수익은 모두 마을 운영비로 돌릴 계획" 이라고 밝혔다.
5남매가 농촌에서 대가족을 이룰 날을 꿈꾸며
이강선 씨의 5남매는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학교성적 문제 등에 일절 간섭한 적없는 아버지 덕에 모두들 자율적인 청년들로 자라주었다. 이강선 씨의 가장 큰 걱정은 자녀들이 결혼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5남매 중 결혼한 자녀는 셋째 딸 선남 씨뿐이다. 농촌을 떠나 살면서 홀로 사는 것에 익숙해 진 것은 아닐까?
셋째 딸 이선남 씨는 농촌에서 수고한 부모님의 노고에 안쓰러운 마음을 표했다. "어머니가 아프신 뒤 도시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치료를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발로 뛰어 마을을 멋지게 일으킨 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귀촌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가족을 이루고 귀촌하겠다는 자녀가 있진 않을까?, 이강선 씨는 작은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 아버지만 해도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귀촌할 거라곤 생각 못하셨던 것 같아요. 유언도 대부분 도시생활에 대한 염려 뿐이셨죠.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금 제 모습을 보면 상당히 놀라실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도 자기 길을 가다 언젠가 저 처럼 시골 생활을 선택할지도 모르는 일이죠. 농촌에 아이들과 노인들이 북적대며 사는 소박한 꿈, 우리 마을을 통해 언젠간 이뤄지겠지요?"
-내인생의 코페루니쿠스 혁명- 중에서 |
출처: 우리농(농림부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새농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