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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입니다.
어제 밤부터 지금까지 비가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제 장마철로 접어드는 모양이네요. 자기 방에서 동화책을 읽던 승기가 형 슬기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형, 뭐해?”
“만화 그리고 있어. 담임선생님이 과제를 내주셨거든.”
“무슨 과제인데?”
“여름방학 책 중간 중간에 넣을 만화 10점을 그리는 거야.”
그러면서 슬기는 그려놓은 만화 한 장을 승기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벌거숭이 아이들이 폭포 밑에서 물장구치며 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이들의 표정이 아주 우스꽝스럽고 익살맞았습니다.
슬기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만화를 그렸으니 벌써 3년이 넘었어요. 그리고 슬기가 그리는 만화들의 주인공은 성후와 민희인데, 성후는 정의롭고 씩씩하게, 그리고 민희는 착하고 예쁘게 그려진답니다.
“형, 참 잘 그렸네! 이제 진짜 만화가로 나가도 되겠다. 그런데 왜 나는 형보다 만화를 못 그릴까?”
“야,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하긴 그래. 그러나 저러나 만화를 그려주면 돈도 주나?”
“선생님 말씀이 원고료를 준다고 하셨지만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그림이 아이들이 다 보는 방학 책에 실린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어쨌든 형은 좋겠다.”
그 말을 남기고 승기는 형의 방을 나갔습니다.
슬기의 만화그리기 솜씨는 꽤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올 봄부터는 동네에 있는 성당의 주보에 슬기의 4단 짜리 만화가 실렸는데, 이는 우연히 슬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주보 편집자가 슬기에게 만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해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슬기는 재능기부의 형식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아저씨는 만화 분량이 많아지면 한데 묶어서 책으로 내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슬기는 자신은 만화만 그릴 뿐 다른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하시라고 말했죠.
방학 책 삽화를 그린 지 1주일 뒤 슬기는 다 그린 10장의 그림을 가지고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그림 다 그렸는데요.”
“어디 볼까? 어 참 잘 그렸구나. 만화가들 보다 더 잘 그렸네, 허허”
“그저 흉내 낸 것뿐이에요.”
“아니야, 빈 말이 아니고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거야. 이제는 흉내 내는 단계를 넘어 창작의 단계로 접어든 거지. 너만의 아이디어가 그림 곳곳에 담겨져 있어. 손볼 것도 없이 그대로 방학 책에 실으면 되겠다. 정말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리고 원고료는 다음 학기 초에 주도록 할게.”
“안 주셔도 상관없어요. 방학 책에 제 만화가 실린 것만 해도 영광인데요.”
“원고료 문제는 선생님이 알아서 할게.”
슬기가 그림을 곧잘 그리는 데에는 아빠의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엄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빠도 슬기처럼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네요? 전국 사생대회에서 우승을 할 정도로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빠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대요. 왜냐하면 화가가 되기까지 뒷바라지를 계속해줘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남의 논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 가난하기 짝이 없었답니다. 결국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한 아빠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공장에 취직을 했대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아쉬움을 한처럼 가슴에 품은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해요.
지난 해 4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슬기가 응접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아빠가 퇴근해서 응접실로 들어오셨어요. 그러다가 슬기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게 되셨죠. 아빠는 슬기의 등 뒤에서 한참 동안 그림을 보다가 “제법이네” 한 마디를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이었어요. 아빠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물론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앞으로 키워나가야 할 좋은 재능을 타고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집안의 뒷바라지가 있어야 화가로서 클 수가 있는 거야. 그런데 지금 아빠가 다니고 있는 공장이 불경기 때문에 문을 닫게 되었어. 지금 이 나이에 다니던 직장에서 나오게 되면 갈 데가 마땅치 않아. 그래서 택배기사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그것도 어쩔지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예전의 아빠처럼 정 미대에 다니고 싶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빠가 뒷바라지할 거야.”
“아빠가 그렇게 힘드실 줄은 미처 몰랐어요. 하지만 그림공부만은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네 뜻은 충분히 알고 있단다. 다만 내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집안의 맏이로서 우리 집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으라는 뜻에서 말한 것뿐이야.”
“아직 어리지만 앞으로 제 길은 가능한 한 제가 개척해나가도록 할게요.”
저녁식사도 채 마치지 않고 슬기는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음이 착잡해서였지요.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어요. 머리위에 내리는 눈은 금세 쌓여 슬기는 눈을 털어내고 또 털어냈습니다. 그러고는 무작정 걸었지요. 하지만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만은 차가운 날씨에도 결코 식지 않았어요.
‘나는 결코 아빠 같이는 되지 않을 거야. 반드시 내 힘으로라도 일어서서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
동네입구의 소공원까지 온 슬기는 다짐에 또 다짐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몇 달 후 한 학년이 올라갔지요.
어느덧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루는 선생님이 슬기더러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봉투 하나를 건네셨습니다.
“자, 받아라. 네 원고료다.”
“받아도 되나요?”
“그럼 네 노력에 대한 상인데.”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는데..........”
“무슨 제안인데요?”
“학교 신문에 삽화를 그리던 친구가 손을 다쳐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는데, 어때 네가 그려보지 않으련? 할 뜻이 있으면 내가 추천을 해줄게. 물론 원고료도 나오지.”
“고맙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슬기는 선생님께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깜짝 놀라셨지요. 하지만 아빠가 힘든 일을 하고, 밤에 일이 끝나기 무섭게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공장에 다닐 때만 해도 아빠는 술을 그다지 마시지 않았는데 공장을 그만 두고는 날마다 술을 마셨습니다. 물론 힘든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갈수록 술의 양이 늘어났어요. 보다 못한 엄마가 말려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술 뿐 만 아니라 베란다에서 담배까지 피웠어요. 그러니 가뜩이나 좁은 집에 담배연기가 자욱했죠. 슬기는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일체 방밖으로 나오지 않고 방 안에만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아빠에 대한 원망을 그림그리기로 풀었지요. 아빠와 한 마디도 안한 지가 꽤 지난 어느 날 밤이었어요. 아빠가 슬기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들어가도 되니?”
“예”
방에 들어온 아빠의 입에서는 술 냄새에다 담배 냄새까지 났습니다.
“너와 승기에게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해 미안하다. 그동안 마음이 편치 않아 술을 마셨는데 지금부터 완전히 끊으마. 그리고 택배 일을 하면서 같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일거리를 찾으려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림책 공모전과 어린이 카툰 공모전 같은 것들이 있더구나. 우리 둘이 머리를 맞대면 못할 것도 없지. 한 번 도전해 보는 거야, 어때?”
“진짜로요?”
“그럼. 아빠와 아들이 함께 만드는 카툰과 그림책! 그럴듯하지 않니? 아빠는 직장에서 하루일이 끝나면 잠을 줄이더라도 그림을 그릴거야.”
슬기는 변한 모습으로 나타난 아빠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빠가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미술을 지금에라도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또한 그림을 사랑하는 슬기의 마음을 아빠가 알아주어 너무나 좋았어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아빠는 수채화 물감으로 손을 풀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1주일이 지나자 바로 예전의 솜씨를 되찾았습니다. 아빠의 그림 솜씨는 정말 멋졌어요. 물감색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답니다. 그러고 나서 슬기는 어린이 카툰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고, 아빠는 그림책 원고를 쓰기 시작했죠. 아빠가 쓴 것은 슬기가, 슬기가 쓴 것은 아빠가 고쳐주었답니다. 그리고 승기도 작업에 끼어들어 독자의 입장에서 원고를 읽어주었지요. 아참, 엄마도요.
이제 슬기는 그만의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답니다. 카툰의 새 주인공 이름은 다다와 도도입니다. 이들은 마법소년과 마법소녀예요. 마법사 할아버지에게서 마법을 배워 악의 무리를 쳐부순다는 스토리입니다.
아빠의 그림책은 ‘토끼와 거북이’를 소재로 한 유아용 그림책입니다. 아빠의 수채화 솜씨가 빛나는 아름다운 그림책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갔습니다.
내일이면 출판사에 원고를 내려고 합니다. 저녁 무렵 슬기는 문방구에 갈 일이 있어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려고 했는데 심하게 떨어진 아빠의 운동화가 눈에 띠였습니다. 뒤축은 다 닳았고 앞축도 너덜거렸어요. 힘든 택배 일을 해서 그런지 신발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 같았습니다. 슬기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해둔 봉투를 꺼내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시 현관으로 나와 헌 운동화의 치수를 줄자로 쟀습니다.
다음 날 학교가 파한 후 아빠, 슬기, 그리고 승기까지 원고를 접수하려고 출판사로 향했습니다. 아빠는 물론 슬기가 전날 사드린 새 운동화를 신으셨지요. 그리고 너무나도 좋아하셨습니다. 우편으로 원고를 보내지 않고 직접 방문접수하려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어요. 슬기네도 우편으로 보내려다가 혹시라도 소중한 작품들이 구겨지거나 찢어질까봐 직접 접수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 심사결과만 남았습니다. 온 가족이 최선을 다해 만든 작품들이 과연 어떠한 평가를 받을까요?
심사결과는 접수가 끝난 지 한 달 뒤에 발표되었습니다. 상의 종류는 대상과 우수상과 가작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슬기의 어린이 카툰 부문은 우수상, 그리고 아빠의 그림책 부문은 가작에 당선되었습니다. 아빠는 슬기가 전국적인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탄데 대해 너무나도 기뻐하시면서 아들이 아빠보다 낫다고 껄껄 웃으셨어요.
“아빠는 이미 대상을 받았어, 우리 슬기로부터 말이야.”
“무슨 상인데요?” 엄마가 물었습니다.
“슬기가 아빠 운동화가 떨어진 걸 알고 새 운동화 한 켤레를 사주었잖아. 나는 그 운동화를 신어본 순간 아빠를 향한 아들의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 생각해보면 이 보다 더 큰 상이 어디 있겠어!”
“슬기의 아빠 사랑이 저 보다 더 크네요.” 엄마가 웃으면서 슬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말했습니다.
“자, 그리고 이것은 작업을 도와준 승기에게 주는 아빠의 선물!” 그러면서 아빠가 쓰시던 수채화 도구 일체를 승기에게 주셨습니다.
승기는 너무너무 기뻐하며, 이제 자기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습니다.
슬기네 집에 모처럼만에 사랑과 행복과 기쁨의 무지개가 활짝 피었습니다.
이제 서로 마음과 뜻을 한데 모아 힘써 노력한다면 아무리 힘든 일도 너끈히 헤쳐 나갈 수 있겠지요? 마치 헌 운동화를 새 운동화로 바꾸는 것처럼 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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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련을 극복하는 가족의 모습, 감동입니다.
해피 엔딩이죠!
댓글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