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등반은 이제 시작이다. 가슴에 찬 벽 오르겠다”
2008년 바투라2봉 초등 후 하산 중이다. 뒤로 스노 샤워가 연이어 쏟아지고 있다.
내 등반의 밑바탕 멀티4 원정대
1992년 지리산을 올랐다. 3월 노고단의 새벽은 내게 자연의 경이로움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산을 떠나 살 수 없다는 운명을 직감했다. 1997년 4월, 전문등반을 배워보기 위해 개미산악회에 가입했다. 입회한 후 나는 선배들(오장근, 박성룡)과 알프스 3대 북벽 원정을 준비했다. 등반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초보자였지만 훈련을 하는 동안 내 가슴 한편에는 긍정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충만했다. 등반의 세계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1998년 나라 전체가 외환위기로 어려운 상황을 맞았지만 선배님들은 후배들의 원정에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알프스에 도착한 우리는 아이거, 마터호른, 그리고 그랑조라스 북벽을 연이어 오르며 첫 거벽등반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 11997년 아이거 북벽 죽음의 비박지에서.
- 22004년 멀티4 원정 당시 알파인스타일 로 신루트를 개척한 힌두쿠시산맥의 시카 리봉(왼쪽 가장 높은 봉우리).
2001년 내 등반의 밑바탕이 된 카라코람 멀티4 원정대(대장 서기석)에 참가했다. 열정을 먹고 사는 걸출한 7인의 등반가과 함께 근 100일간 파키스탄의 오지를 누볐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더 의욕적으로 등반하지 않았던 내가 후회스럽기도 하다. 우리는 원정 동안 베이스캠프를 세 번이나 옮기며 다섯 봉우리를 올랐다. 포터들이 부당한 임금을 요구할 때는 기꺼이 등짐을 메고 베이스캠프까지 짐수송도 마다하지 않았다. 쌀이 떨어져 주식을 수제비로 바꿔가면서까지 등반에 나섰던 우리가 찾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건 오직 등반하기를 원했고, 그로 인해 살아 있음을 몸서리치게 느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로컬버스 지붕 위로 그 많은 짐을 옮기면서도,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장거리 버스에서도, 카라코람의 뜨거운 길도 우리에게는 오직 산으로 가는 여정에 지나지 않았다.
- 3파이네 중앙봉 등반중. 뒤로 포타렌자와 에스 쿠스가 보인다.
- 4단란한 우리 가족(맨 오른쪽 이명희, 중간 최 보건).
원정 말미 등반비가 부족해지자 형들은 아끼던 장비를 하나씩 팔아가며 등반 자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100일. 모든 등반을 마치고 경유지 방콕에 도착한 우리가 돈을 탈탈 털어 햄버거 3개를 사서 6명이 나누어 먹었다. 12시간을 기다려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자 초라한 몰골과 대비되는 반짝이는 눈망울의 동료가 보였다. 그들의 확신에 찬 눈동자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눈을 뜬 나를 보았다.
결혼과 출산, 그리고 6년만의 등반여행
- 1 2009년 캐나다 킬러 케이브의 M9급 고난도 혼합등반 루트 스릴러 오버행에 진입했다.
- 2헌터 등반중 닥친 눈사태를 피하고 있다.
- 3문라이트 버트레스 루트의 고난도 크랙을 돌파하고 있다.
2001년 멀티4 원정에서 돌아온 그해 12월 여성 거벽등반가인 이명희와 결혼했다. 이듬해 아들 보건이를 낳았고, 이때를 기점으로 나의 주 관심사는 산에서 가정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삶의 터닝포인트를 맞은 이때 내가 받아든 것은 선택과 책임, 그리고 가장이 된 기쁨이었다. 하나 임신과 출산으로 산행에 전혀 나설 수 없었던 명희는 우울증을 앓았다. 아차! 싶었다. 내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의 처지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명희의 문제는 아이를 돌보는 것이 싫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 과하게 변한 데서 기인했다. 치유의 약은 산에 있었다. 암장에 나가 다시 운동을 시작했고, 부모님께서 보건이를 봐주는 날이면 유축기를 들고 인수봉과 선인봉을 오르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아이를 키우며 부부가 함께 등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프로치 가까운 암장이 등반대상지 선정의 제1 기준이 되었다. 이로도 만족되지 않은 등반 욕구는 실내암장에서 풀었다. 결혼 후 달라진 생활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지기까지 5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재도약을 위한 혹독한 시기를 잘 버틴 명희는 2006년 알프스로 원정을 떠날 수 있었다. 나 또한 결혼 6년만인 2007년 1월, 파타고니아 파이네 원정대(대장 노시철) 대원으로 남미의 거벽으로 떠났다. 김창호 형과 함께했던 이 원정에서 우리는 파이네 중앙봉을 한국 초등했다. 창호형과의 인연은 2008년 서울시립대 바투라2봉(7,762m) 초등 원정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돌이켜 보면 고산 경험이 없던 나를 두 번씩이나 원정대에 초대한 김 대장의 부담과 어려움이 짐작된다. 바투라2봉은 유럽의 몇몇 팀들이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한 미등봉이었다. 정상을 향해 파죽지세로 오른 우리는 기어이 정점에 섰다.
초심으로 쌓은 등반력
미국 등반투어중 로스트룸의 크랙을 돌파하고 있다.
바투라 2봉 등반 이후 느낀 바가 많았던 나는 초심으로 돌아와 나의 등반을 되짚어 보았다. 그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등반이 무엇이며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바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09년 캐나다에 산재한 빙벽과 믹스등반 루트, 알파인등반 대상지를 오르기 위해 공감1 원정대를 김대우 선배와 친구인 안종능씨와 함께 꾸렸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시 우리는 정말 많은 벽을 올랐다. 한국에서 몇 년 동안 할 등반을 이 기간에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캐나다는 빙벽과 믹스등반의 천국이었다. WI7 R의 난도에 이르는 고난도 빙벽은 가장 두껍게 언 얼음에 10cm로 스크루가 절반만 박힐 정도로 그악했다.
이런 확보물도 중단부를 넘어서자 설치할 수 없었다. 추락하면 사망에 이를지 모르는 빙벽에서 피크의 이빨 한두 개를 믿고 오르는 행위는 내가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의 마음을 빙벽에 투영하며 간신히 위험지대를 돌파했다. 정상에 서자 가슴으로 서서히 밀려오는 아름다운 풍광에 더해진 성취감은 지상의 감정이 아니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거대한 오버행을 이룬 당시 M12급의 최난도 믹스등반 루트 도전에도 기꺼이 나섰다. 성공과 실패가 문제 아니었다. 내면과 함께 등반력을 쌓은 이때의 등반이 후일 나를 변화시켜 줄 동력으로 작용하리라 나는 굳게 믿었다. 공감1 원정대의 등반 목적 중 하나는 고난도 믹스등반 체험을 통해 한국에서 잘 정립되지 않은 난도 체계를 알리고, 고난도 혼합등반 루트를 개척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곧바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한국 산의 암질이 대부분 화강암이라 적합한 고난도 믹스등반 개척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12년에서야 그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암장이 발견했다. 현재 개척 작업은 진행 중이다. 이듬해 나는 공감1.5 등반대를 이끌고 미국의 인디언크릭, 자이온, 요세미티 등지로 암벽등반여행을 떠났다. 많은 클라이머들이 등한시하는 크랙등반을 원없이 해보기 위함이었다.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미래 등반은 대암벽에서의 자유등반이 될 것이며, 자유등반 중에서도 크랙등반이 기본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고정확보물의 설치가 최소화될 앞으로의 등반 방향에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여러 크랙루트를 오르던 이 시기 나는 부족함도 느꼈지만 가능성도 함께 보았다.
- 1헌터 북벽 공감 변형 루트(붉은색).
- 2헌터 북벽 정상에서의 환희.
- 3M12의 고난도 혼합등반 루트 무사시의 그악 한 루프에 붙었다.
2011년 알래스카 헌터 북벽으로 향했다. 2년 동안 닦아온 정신과 기술을 쏟아 부을 알파인 등반지였기 때문이었다. 헌터 북벽은 지금껏 내가 마주했던 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팔랐다. 심지어 WI6급이 넘는 고난도 빙벽이 루트 중간에 있었으며, 어려운 혼합등반과 인공등반의 연속이었다. 2박3일 동안 줄창 수직벽을 돌파한 우리는 전원 등정에 성공했으며 이로 인해 한국 초등을 이뤘다.
헌터 북벽 공감 변형(Sympathy Variant) 루트 개척
2012년 4월 헌터(4,441m) 북벽으로 출발을 앞둔 나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으로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였다. 놀라운 것은 출발일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등반대에서 빠지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었다. 산에 다니면서 한 번도 직면한 적이 없는 이런 감정에 의문은 더욱 깊어갔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나는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음대륙에 도착한 순간, 나를 괴롭혀온 의문과 공포, 그리고 두려움은 일거에 사라졌다. 헌터 북벽 등반 전까지 나의 등반은 미래를 위한 준비와 경험을 축척시키는 데 포커스가 맞추어졌다. 하나 이번 원정은 달랐다. 내가 간절하게 원하며 동시에 하고 싶은 등반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파생된 부담감이 내게 있었지만, 벽을 보는 순간 사라진 것이었다. 새로운 등반 방향을 선택한 나의 시발은 세계 최난 거벽 중 하나인 헌터 북벽에 신루트를 내는 것이었다. 미국 알래스카에 위치한 이 벽은 랜딩포인트에서 1시간 30분이면 벽 밑에 도착할 수 있는 짧은 어프로치, 북벽을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의 위치 등 최고의 등반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 북벽은 데날리(6,194m)를 들고 난 당대 최고 클라이머들의 도전을 매몰차게 뿌리쳐왔을 정도로 험난한 벽이었다. 1983년에야 초등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우리가 마주한 북벽은 백지 캔버스와 같던 당시의 벽과 너무도 달랐다. 이미 수많은 팀이 신루트 개척을 타진한 미완의 선, 또는 위험을 내포한 등반 불가의 라인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위험을 어려움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둘도 없는 동료인 문성욱, 안종능의 등반력과 팀워크를 나보다 더 신뢰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등반불가의 벽일 수 있지만 어려움과 곤란함을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료와 함께한다면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비록 등반 중 중단부 빙벽이 붕괴하면서 신루트 개척의 희망이 함께 낙하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바는 단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고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나와 동료, 그리고 자연을 느끼고 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 변형루트라는 차선의 성과에 아주 만족할 수 있었다. 이상이 15년 나의 등반인생이다. 이를 함축적으로 이야기하라면 “등반이란 나를 바라보는 창, 나에게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 내 답이다.
최석문(39세) 개미산악회ㆍ노스페이스
1998년 몽블랑 등정(4,807m), 알프스 3대 북벽 등정
1999년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 탈레이샤가르(6,904m) 등반
2001년 파키스탄 카라코람 카체블랑사 주봉•북봉 초등(5,600m) 혼보로 신루트 등반(5,500m) 레이디스 핑거 등반(6,030m) 힌두라지 시카리 신루트 등정(5,928m)
2003년 청송 달기우폭 카르마 개척(M8, WI5+)
2007년 파타고니아 파이네 중앙봉 한국 초등(VI, 5.11C, A1)
2008년 파키스탄 카라코람 바투라2봉(7,762m) 초등
2009년 캐나다 안드로메다(3,450m, strain V, 5.9, A2, AI4) 등정 2010년 일본 홋가이도 카무이 레라 M10(온사이트 등반), 아베 M10 (온사이트 등반)
2010년 미국 요세미티 노즈(16시간 40분)•로스트럼 등반
2011년 마운트 헌터 등정(4,441m, Moonflower Buttress, AK6, 5.8, A2, M5, AI6)
2012년 마운트 헌터 북벽 공감 변형루트 개척(ED4, AK6, M7+,A2+, AI6+ R)
자격 국제산악연맹 루투세터 대한산악연맹 루트세터
수상 2008년 사람과 산 알파인클라이머 수상 2010년 한국산악회 제1회 김정태상 수상 2012년 대한민국 산악상 개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