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관일기 11-다시 생각되는 " 도파오심都把吾心 간태허看太虛"란 말

[반농]

9월 23일 화요일 창경원 돌담을 따라서

오전에는 붓글씨를 좀 쓰고 오후에는 《도산잡영》을 가지고 강의를 하였다. 오랜만에 엄박사와 김박사가 다 와서 함께 글씨연습을 하고 같이 점심을 먹었다.

엄박사가 가을을 소재로 한시 절구 한 수를 지었다고 보여주는데, 평측과 각운자만 맞추어 글자를 배열하였으나, 앞뒤로 뜻이 별로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뜻이 앞뒤로 통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다만 일본말로 된 시작법 지침서를 보고서 평측에 맞은 단어들만 골라서 나열한 것이라고 한다. 앞의 두 줄은 좀 고쳐주었지만, 시간이 없어 뒤의 두 줄은 고쳐주지 못하였다. 오후에 시 짓는 반에 가서 선생님에게 또 보인다고 하니 어떻게 고쳤는지 모르겠다. 나이 80이 다 된 화공학 박사가 그 나이에도 붓글씨도 익히고, 한시도 짓겠다고 하니 참 기특하다. 중국어도 배우고 있는데, 더러 자기가 지은 한시를 여자 선생님이 지금 북경어로 낭송을 하여 주는 것을 들으면 매우 황홀하다고 한다. 참 순진무구한 노 학구學究다.

김박사는 근간에 한시 모임에서 가는 사천성 기행에 다녀와서 쓴 일기를 복사하여 읽어 보라고 주었다. 과기처의 1급 공무원을 지내면서 역대 대통령 앞에서 자주 한국의 과학발전 대책을 부리핑하였다는 과학도가 일기를 붓펜으로 적은 것을 보니 좀 뜻밖이다. 나 같은 한학도도 컴퓨터로 일기를 적는데…

오후에 강의를 끝내고서는 수장생 두 명과 함께 긴 창경원 돌담을 돌아서, 돈화문 앞에 가서 차를 한잔 씩 마시고 헤어졌다.

9월 24일 수요일 비. 대구행

대구에 다녀왔다. 9시 반에 동대구역에 내려서 이질녀가 하는 한의원에 가서 이종사촌 누님도 만나 1시간 반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대구에 사는 동안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척이다.

점심은 신귀현 교수와 같이 먹으면서 한문 공부 이야기를 매우 진지하게 나누었는데, 그 사람이 매우 힘을 주어 강조하여 하는 이야기를 다 알아듣지는 못하였다. 같은 마을, 같은 중학의 동기에, 같은 대학, 같은 직장에 있었으니 역시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할 수 있으나, 한문에도 조예가 깊지만 서양 철학을 해서 그런지 늘 공부를 하는데 엄밀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나이도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아서 좀 만만하게 대하기는 어려운 친구다. 이미 80이 넘었지만 혈색이 좋고, 오늘도 오후에는 도청에 들어가서 무슨 자문회의에 참석한다고 한다. 이렇게 늙어도 하는 일이 있고, 또 하는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있으니 다행이다.

강의는 수강자 수가 좀 늘어 전 시간에 하였던 이야기를 좀 복습하고, 시 4 수를 더 읽었다. 끝나고 이영환 씨가 동대구역까지 차를 태워주어 5시 반에 상경하는 차표를 구입하였는데, 마침 서울에서 내려오는 박추현 교수(한국고전번역원 연수부)를 만나서 10여분 동안 한담을 나누었다. 서울의 강의 이외에. 밀양의 (고전번역원) 분원의 강의와 안동의 국학진흥원의 강의를 하기 위하여 내려온다고 한다. 영대의 중문과 학부과정과 한문과의 대학원을 다니고, 또서울의 고전번역원 연수과정에도 다니는 동안 한문서당을 하여가면서 아주 어렵게 오랫동안 공부를 계속하였는데,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정받고 두각을 나타내는 한학자의 한사람이 되었으니 정말 대견하다. 한문 실력도 대단하지만 인품도 정말 선비다운 사람이다.

서울역에서 저녁을 사서먹고 집에 들어오니 밤 9시 반쯤 되었다. 구파발 역 근처에서 내려 몇 10분 동안 걸어오면서 오늘 강의한 시 중에서 퇴계선생이 19세 때에 썼다는 〈영회詠懷〉라는 시의

독애임려獨愛林廬 만권서萬卷書하여

일반심사一般心事 십년여十年餘라

이래사여邇來似與 원두회源頭會하여

도파오심都把吾心 간태허看太虛라

유독 초당의 만 권 서책을 사랑하여,

한결같은 심사로 지내온 지 십여 년이 되었다네.

근래에는 근원의 시초를 만난 듯하여,

오로지 내 마음을 가지고 하늘의 이치를 살피네.

마지막 구의 번역이 과연 문법적으로나, 철학적인 의미로나 다 맞게 된 것인지 자꾸 의문이 생겼다. “오로지 내 마음이 하늘의 이치와 같다고 간주함을 파악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파”자를 전치사와 같이 볼 것이 아니라 동사로 보는 게 오히려 당시의 문법에 더 맞지 않는지? 또 “간看”를 “살핀다”고 한 것은 이 글자의 본 뜻(멀리 있는 것을 슬쩍 보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좀 더 조사를 해보아야 할 것 같다.

[흰구름/이상용]

조선중기 한문법이 지금과 달랐는지 모르겠으나 선생님의 글을 읽고 현대중국어책을 보니 把자가 목적어를 이끌어<把字文> 吾心이 목적어가 되는 것처럼 되어 있네요. 그러면 都, 즉 위에 언급한 모든것들(만권서, 일반심사 10년여,원두회등)이 나의 마음이 태허를 보게 한다는 내용이 되지 않겠나하고 비정해 봅니다.오람되이 선생님의 하교를 바랍니다..

[반농]

말을 듣고 보니 도자에 대해서도 유의하지 못하였네요. 말슴하신 대로 보아야 이 시 전체가 살아납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흰구름/이상용]

선생님께서 다시 보아 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환절기에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