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복음서 사52:13-53:12
주신 말씀 이사야 52:13-53장 12절을 중심으로 제5복음서라는 제목으로 주시는 은혜 받는 귀한 시간 되기 원합니다.
본 단락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속하시어 회복시키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로 하나님의 구원 약속에 의지한 이사야 선지자의 선민을 향한 삼중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내용 중에서 특히 역사의 캄캄한 암흑기에 한줄기 빛으로 오실 예수님이 고난과 질고를 통해 인류를 구원해 주실 메시야이심을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기독교 명절중 성탄절과 부활절 성령 강림절이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인데 한국교회에서는 이상하게 성령강림절은 중시하지 않고 추수감사절과 맥추 감사절을 중시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성탄절이 무엇입니까?
X- mas는 Xristos misass 즉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만나는 날인데 미국 백화점에서 매출을 제고하고자 상술로 선물을 주고받고 카드를 주고 받으며 화려한 트리를 만들어 소비를 부추긴 문화가 분별없이 한국땅에 들어와 버린 것이죠.
할로인데이도 북유럽에서 유행하는 정령 악령 유령 노름인데 마치 기독교의 문화처럼 자리잡아 갑니다.
성탄절을 마귀에게 받치고 할로인데이로 마귀의 종이 되어버린 서유럽과 미국 캐나다에서 성경교육은커녕 가지고 다니는 것도 죄가 되고 성경을 인쇄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경까지 오며 동성애를 인정하면서 이제 기독교가 쇠락이 아닌 몰락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전 부활절을 경건하게 보냈쬬.
교회 종탑 공사를 하는데 성탄트리를 걸어야 하니까 고리를 만들고 설계를 변경해가면서까지 트리를 설치해야 한다합니다.
원래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2월 중순경입니다.
왜냐하면 목동들이 겨울을 나고 우리에서 벗어나 들에서 방목을 하는 시기가 2월 중순부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가 하는 의문이 들것입니다.
로마의 황제는 태양신으로 간주되어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는 동지를 중심으로 황제를 경배하는 날로 12월 25일을 정하고 로마제국의 모든 백성들이 함께 축제를 벌이도록 했습니다. 이 축제에 나오지 않으면 반역행위로 처벌했기에 초대교회부터 기독교인들이 축제에 나와 함께 노래하고 잔치를 벌이며 경배하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로마가 쇠퇴하면서 로마황제 경배는 시들해져가고 예수님을 경배하는 전통이 자리잡기 시작해 결국 12월 25일이 성탄절로 지정되고 예수님 오신 날로 예수님을 경배하고 만나는 날이 된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생일날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전통에 따라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킨다고 해서 잘못이 아닌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은 한 사람의 생일이 아니라 어느날인지 정확히 모른다면 기왕에 오심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예배하고 경배하며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만나고 예수님의 인격과 인품을 닮아가려는 삶의 노력이 필요한 줄 믿습니다.
얼마전 시카고시티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시청사 앞에 성탄절준비로 설치한 마굿간 구유에 뉘워놓은 인형이 사라진 것입니다. 언론과 경찰 그리고 시청직원들이 혈안이 되어 누가 예수님 인형을 훔쳐갔나고 야단 법석을 떨었는데 성탄절 정오쯤 되어 인형을 안고 있는 거지 노인이 나타났죠.
왜 예수님 인형을 훔쳐갔느냐고 추궁하자 당신들은 예수님 없이도 산타클로스가 있고 트리가 있고 서로 주고 받는 선물과 카드로 충분히 즐거운데 실상 예수님은 없어도 되잖아요. 홀로 계신 예수님이 너무 추워보여 내가 안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없는 성탄절 예수님 없는 부활절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예l수님 없는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시겠습니까?
이 땅에 질고와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려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경배하고 예배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첫째로 보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52: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의의 확립과 구원의 약속을 주셨으며, 이러한 구원을 체험하게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성하여 믿음의 삶을 살라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냐는 것입니다.
보라(חנה힌네)라는 말씀은 여화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하는 주님의 팔이 어떻게 역사하는가 두눈을 똑바로 뜨고 주의를 집중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54장 55장에서 선민의 영광회복과 만민을 향한 구원잔치로의 초청은 여기에서 구체적인 구원의 방법과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의 궁극적인 승리와 승귀는 여호와의 종의 고난과 질고를 통해 이루어진 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려고 이 땅에 죽으려고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이 바로 여호와 종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출애굽하면서 열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굴복시키시고 많은 노획물을 가지고 나오게 하셨습니다.
홍해의 물을 갈라 마른땅처럼 바다를 건너게 하시고 추격하는 애굽군대를 수장시켰을 뿐아니라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보호하시어 옷과 신발이 닿지 않게 헤지지 않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며 길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반대로 구원의 방법이 고난과 죽음이라는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칠백년전에 여호와의 종의 자기비하 및 종의 고난의 동기 목적 대속 수난의 구체적 참상, 최종 승리와 그 결과등에 대한 매우 세밀한 묘사는 유일하신 참된 여호와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유일사건인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 마26,27장 막15:4-5, 요19:15-25등에 묘사되고 있는 메시야의 고난의 모습을 본 단락에서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예언의 백미이며 4복음서에 비교함직한 제5복음서인줄 믿습니다.
보라! 차렷 ! ATENTION! 주목!
관심을 촉박하며 긴장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을 성취하시는 종이 어떠한 자인지 기대감을 갖고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관심을 가지고 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라 역사의 캄캄한 밤중에 한줄기 빛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고 희망과 소망 가운데 바라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둘째로 흠모할 만한 것이 없도다.(53:2)
공동묘지에서 결혼한 커풀중 이혼한자가 없다합니다.
인생의 가장 행복하고 즐겁고 좋은 때 인생의 가장 쓸쓸하고 슬픈 무덤을 바라보며 자기가 죽고 겸손하고 겸허하게 자기를 비워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할 때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가신 그길을 나도 걸어야 하네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나도 따라가야하네
주님이 행하신 행적과 교훈을 본받아 주님을 닮아가야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사신 모습을 보고 영혼이 힐링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연한 순 같았습니다.
연한 순(כיונק카이요네크) 여호와의 구원의 팔인 메시야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과 정치적 능력을 겸비한 다윗과 같은 사람이 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연한 새싹 같은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강한 참나무나 백향목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실줄 알았는데 토끼도 뜯어먹을 수 있는 연한 순같은 모양으로 오신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랑드롱처럼 뛰어난 미남도 아니시고 기골이 장대한 삼손같은 모습도 아니시고 초라하고 야윈 모습이셨다는 것입니다. 머른땅에 나온 뿌리같이 옹색한 모습이고 연한 순같이 약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결실을 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올라온 순을 잘라내둣이 무가치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보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른 땅에 나온 뿌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듯이 여호와의 종의 목숨을 위협받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 보기에 보잘 것 없고 초라해 보이지만 여호와의 보호아래서 여호와의 관계성 가운데 자라게 될 것입니다.
메시야께서 생명이 위협을 받는 마른 땅에서 태어나 이스라엘과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영생수를 제공해 주는 생명수되어 생면의 근원이 될줄 믿습니다.
셋째로 어린양 같아야합니다.(7)
4-6절에서 여호와의 종의 고독하고 처절한 대속 수난을 받을 것을 예언하되 종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5-9절까지는 인종 즉 여호와 종 메시야가 받은 고난이 합당하지 않은 대속수난이었다면 여기에서는 합당하지 않은 수난과 희생일지라도 그 사실을 다 알고도 싫다고 피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부당한 고난을 당할지라도 결코 파히자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두영이 넘는 천군천사를 불러 로마군을 물리치고
당당한 모습으로 역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물을 주권적 섭리대로 운행하시는 여호와의 뜻을 겸손히 따르는 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다는 ( שׁ נג 나가쉬) 강제권을 발동해서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부당하게 학대하고 압제하는 것으로 메시야가 폭력적인 방법으로 부당한 학대를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질고를 지신 것은 우리의 존재적인죄 즉 원죄를 말하고 우리의 슬픔은 우리생활의 죄를 말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은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털깍는 양이 목동에게 순종하여 반항하지 않고 겨울내 입고 있떤 털까지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우리의 원죄와 생활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시기 위해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라 합니다.
얘수님이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 나음을 받았도다합니다.
예수님은 신성모독죄 성전모독죄르 대제사장들에 의해 고발 당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으신줄 알면서도 대중에게 인기를 얻으려 채찍질하고 온갖 부당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메시야는 잘못된재판과 억울한 고난을 당하고 형언할 없는 고난을 당해도 결코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어린 양(שׁה 세)은 번제 희생으로 드리는 양,유월절 때 잡았떤 어린양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양(צון 촌)이 아닌 어린양 세가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의미와 부합하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잡혀 죽으실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고 흔들리지 않았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잡으로 온자들에게 아무 저항없이 자신을 맡기신줄 믿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이 넘치게 하옵소서
양은 자기 몸에서 털을 깍는 순간도 몸부림치지 않고 울지 않는다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극히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인생의 질고와 슬픔을 아시는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 위로가 되시는 줄 믿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무시 무시한 징벌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은 치유와 은헤와 평안을 선물로 받게 될줄 믿습니다. 아멘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으심을 앍고서도 .
첫댓글 소중한 설교 자료 감사드립니다.
설교 자료 감사드립니다.
아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