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한상원목사
신실한 신앙인의 가계도를 세우며 살아요 = 창세기11;10-26(200315)
PW : 믿음 BIW : 세우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신실한 신앙의 가계도를 세워가는 것이다.
아부지 직업이 뭐꼬?
코로난지 뭔지 때문에 학교 입학도 못하고, 개학도 못하고 있습니다.
4월이면 진정이 되어 입학도 하고, 개학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영미도 중학생이 될텐데 말입니다.
몇 년 전에 경상도 깊은 내륙 산간지방에 있는 어느 중학교에서 새 학기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학급이 편성되고 담임선생님께서 학생들 가정환경 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자~ 오늘은 가정환경을 조사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학생들 이름을 차례로 부르면서 가정환경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담임선생님께서 “김철수, 너그 아부지 직업이 뭐꼬?”
김철수라는 학생이 일어나서 "돼지 키우는 데예~!!!“
선생님께서 ”음! 양돈하시는구먼"
선생님이 다시 “다음은~ 박순돌이?"
박순돌이란 학생이 일어나서 "포목점 합니더.”
선생님께서 "응~ 상업이군...!"
선생님 다시 “고달순~ 너그 아부지는 뭐하시노~?”
고달순 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우리 아부지는 수산업에 종사하시는 데예~!”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이리 온나~ 이리 퍼뜩 나온나~!"
그러더니 손으로 고달순 학생 볼을 꼬집어 비틀면서 한마디 했습니다.
"뭐 이리 깊은 산 꼴에서 수산업은 무슨 수산업이고~??"
그때 여러 친구들이 나서면서 이구동성으로 "쎔님요, 맞는 데예~ 쎔님께서 큰 실수 하시는 겁니더~"
학생들의 말을 들은 선생님께서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고달순! 그래~ 수산업이라켔노? 그럼 수산업도 종류가 있을끼 아이가~ 뭐 하시노~?"
그러자 볼을 꼬집힌 고달순 학생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울 아부지요, 붕어빵 굽는데예~?"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붕어빵을 구워서 팔기 때문에 수산업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붕어빵을 구워서 팔면 어떻고 포목점을 하면 어떻고, 돼지를 키우면 어떻습니까?
요즘 시대는 무슨 일이든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 자체가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서민들의 삶이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가게는 있는데, 가게를 열지 못해서 장사를 못하고 월세는 꼬박꼬박 내야 하는데 월세조차도 낼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서민들이 너무 많습니다.
월세는커녕 살림살이 자체가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루빨리 코로나 바이러스가 진정이 되고, 서민들의 삶이 회복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속히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백신을 만들 수 있도록 은혜와 지혜를 주셔서 회복되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아멘.
P4.
하나님께서 나누라고 하시는데도 나누기를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억지로 나누도록 하신다.
창세기 10장은 하나님께서 나누도록 하셔서 자연스럽게 나누어지는 말씀이라면, 창세기 1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누라고 하셨는데도 인간들의 탐욕, 욕망, 죄악 때문에 나누려고 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나누어버리시는 말씀이다.
1-4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누어버릴 수밖에 없던 상황들을 설명하고 계신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구촌에 생존하던 사람들은 다같은 노아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언어와 말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
언어와 말이 하나였기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사람들은 동방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땅을 만나서 그 시날 평지에서 다 함께 지내면서 성읍과 탑을 쌓는다고 소개하고 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에는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할 때 모세가 지금까지 조상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구전 토라를 비로소 히브리글자로 성문 토라인 창세기를 기록하는 것이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에는 히브리 민족들에게는 동쪽 방향, 동방이라는 방향은 하나님을 떠나는 방향으로 인식하던 시기이다.
동쪽 방향은 하나님을 떠나서 태양신과 달신과 별신의 근원지였던 바벨론을 동쪽 방향으로, 동방으로 인식하던 시기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동방으로, 동쪽방향으로 이주한다는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는 악한 행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들은 동방으로 계속 이주하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서 그 시날 평지에 거류하면서 성읍과 탑을 쌓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날 평지가 바로 인본주의, 사탄주의, 바벨론 전통종교의 본산지이다.
본래는 사람들이 남방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기록해야만 옳다.
왜냐하면 아라랏산에 머문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후손들이 남쪽으로 이주해야만 시날평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라랏 산에서 동방으로 계속 이주하게 되면 욕단의 후손들이 이주한 것처럼 카스피해를 지나서 파미르고원을 지나고 천산산맥을 지나고 알타이산맥을 지나면서 시베리아 평지를 지나게 되고, 더욱더 동쪽으로 이주하게 되면 한반도를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11장에서는 시날 평지라고 소개하면서 그 시날 평지에서 성읍을 건설하고 커다란 탑,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쌓는다고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남쪽 방향으로 이주했는데도 불구하고 동방으로 이주했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남쪽 방향으로 이주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동방으로 이주했다고 기록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서쪽에 계시는 분이고, 서쪽에서 동쪽 방향을 향하여 계시는 분이다.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앉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양팔을 벌리면 하나님의 오른쪽 방향이 남쪽 방향이 되고, 하나님의 왼쪽 방향은 북쪽 방향이 된다.
하나님의 오른쪽 방향은 항상 의롭고 명예롭고, 정결하고 거룩하고 온전한 방향으로 인식한다.
하나님의 왼쪽 방향은 항상 불의하고 수치스럽고 부정하고 불온전한 방향으로 인식한다.
하나님의 오른쪽은 항상 좋은 것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왼쪽은 항상 좋지 않고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문화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동쪽 방향으로 가는 행위를 남쪽 방향으로 이주했다고 기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은 긍정적인 측면을 기록 해야 하기 때문에 모세가 3500년 전에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하나님을 떠나서 바벨론 전통종교를 세우고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의 죄악성을 좋은 방향인 남쪽 방향으로 이주했다고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는 죄인들의 행렬이기 때문에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서 그 시날 평지에 거류하면서 자신들만의 성읍을 건설하고 바벨탑을 쌓고 있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가계도를 형성시켜 나가는 것일까?
구원의 가계도는 어떻게 세워져 가는 것일까?
D4.
① 인간의 죄악상을 직접 보려고 내려오시는 하나님.
5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돔과 고모라 성민들의 죄악상을 직접 보시기 위해서 직접 내려오신다.
사사기 6장에서는 미디안 족속에 의해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사로 기드온을 세우기 위해서 직접 찾아오신다.
사사기 13장에서는 삼손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하여 삼손의 부모님에게 직접 찾아와서 삼손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삼손을 통하여 블레셋 족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악상을 직접 보시고 상황을 판단하시고 어떤 결정을 내리시기 위해서 직접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성령 하나님으로 직접 찾아오셔서 감동을 주시고, 감격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 하나님께서 영으로 우리들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계신다.
코로나바이라스 때문에 잃어버린 예배를 찾으시러 내려오신다.
인터넷 예배, 유투브 예배가 아니라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교회에서 온 성도님들이 함께 모여서 함께 찬송부르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예배를 찾으시러 내려오신다.
우리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만히 가만히 속삭여주시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시면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② 강권적으로 흩으시면서 나누시는 하나님.
인간세계에 내려오신 하나님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을 온 지면으로, 온 지구촌으로 흩으신다.
그러자 그들이 그동안 함께 모여서 건설하던 성읍도, 도시도 그만두게 된다.
하늘 높이 높이 쌓아 올리던 탑도 그만두게 된다.
8-9절에서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누라고 하실 때, 벨렉과 욕단의 후손들처럼 스스로 나누어서 온 지구촌으로 흩어졌다면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흩으시고 나누는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흩어지려고 하지 않았고, 나누어지려고 하지 않았고, 서로 뭉쳐서 죄악의 탑, 교만의 탑과 성읍을 건설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흩으시고 나누어버리시는 것이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도 우리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흩어버리고 나누어버리는 일을 진행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분명히 마태복음 28:19-20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건만, 예루살렘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온 땅으로 흩어져서 주님의 증인된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
신앙인들은 계속 예루살렘 성에 머물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만 신앙생활하려고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님을 순교의 자리로 불러내신다.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님을 돌을 던져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자 신앙인들은 순간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유대인의 핍박을 피해서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된다.
그런가 하면 헤롯 아그립바 왕이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 사도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야고보 사도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는 유대인들이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 사도까지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는 사건이 벌어진다.
예루살렘 교회를 향하여 본격적인 핍박과 박해가 시작되면서 예루살렘 성에 머물던 신앙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고 나누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고,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초대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아시아지역에 복음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강권적으로 흩으시고 나누는 작업을 진행시켜 나가신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증인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강권적으로 신앙인들을 흩으시고 나누는 작업을 진행시켜 나가신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징계하시기 위해서도 흩으시고 나누어버리신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똘똘 뭉치게 되면 온갖 죄악의 바벨탑을 쌓기 때문에 이들을 흩으면서 더 이상 교만과 죄악의 바벨탑을 쌓지 못하도록 흩어버리신다.
③ 장자가 아닌 셋째를 통해서 구원의 가계도를 세워가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셈의 후손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워주시고, 그 믿음의 후손들의 가계도를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의 길을 열어 가시려고 하신다.
셈은 창세기 10;22에 보면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라는 아들을 낳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셈의 장자인 엘람의 가계도를 통해서 메시야의 길, 구원자의 길을 열어가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엘람의 가계도를 포기해 버리신다.
엘람의 가계도를 포기하신 하나님은 둘째인 앗수르의 가계도를 통해서 구원자의 길을 열어가셔야 할텐데, 앗수르의 가계도도 포기해 버리신다.
하나님은 첫째와 둘째를 포기하시고, 셋째인 아르박삿의 가계도를 통해서 구원의 가계도를 세워가고 계신다.
첫째와 둘째를 포기하고 셋째를 통해서 구원의 가계도를 세워가시려는 것은 전폭적인 하늘 아버지의 주권과 의지와 계획과 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가계도이다.
창세기 11;10의 말씀을 보면 셈은 홍수 후 2년, 셈의 100세에 아르박삿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셈은 아르박삿을 낳은 후 500년을 더 살면서 자녀를 낳으면서 살다가 602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아는 홍수 후 350년을 더 살다가 95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창세기 9; 29절에 기록한다.
그러면 노아가 350년 더 살았다고 하면 어느 시대를 말하는 것일까?
셈이 홍수 후 502년을 더 살았다고 하면 어느 시대를 말하는 것일까?
창세기 11장에 기록한 연대를 계속 +하면서 계산해 보면 아브라함이 태어나는 연도가 홍수 후 292년이라는 년도가 계산된다.
그래서 350-292= 58이 된다.
결국 아브라함이 태어나서 58세가 되던 해까지 노아는 지구촌 어딘가에서 살아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셈은 홍수 후에 502세를 더 살았기 때문에 창세기를 연대기순으로 계산해 보면 야곱과 에서가 50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 것으로 계산된다.
ⓐ 데라(Terah)가 태어난 후에 셈은 280년을 더 살게 된다. (502-222 = 280)
ⓑ 데라가 205세에 죽었기 때문에 셈은 데라보다 75년을 더 살았다. (280 - 205 = 75)
ⓒ 데라가 170세(아브라함 100세)에 이삭이 태어난다. 데라는 이삭이 태어난 후에 35년을 더 살았다. (205-170 = 35)
ⓓ 데라는 아브라함이 13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다.(205 - 70 = 135)
ⓔ 셈은 데라보다 75년을 더 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 21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게 된다.(135 + 75 = 210)
ⓕ 아브라함은 실제로 1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셈은 아브라함보다 35년을 더 사셨다. (210 - 175 = 35)
ⓖ 아브라함이 160세에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1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을 때는 에서와 야곱이 15살이다.
ⓗ 셈은 에서와 야곱이 50살 되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 것이다.(35 + 15 = 50)
그러니 에서가 40세에 결혼하였기 때문에 셈은 10년을 더 살았던 것으로 계산이 된다.
곧 셈은 14대손 에서의 아들들이 태어나고 자랄 때에도 여전히 지구촌 어디에선가 살아계셨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노아나 셈은 살아계시는 동안에 무엇을 하면서 살았을까?
노아와 셈은 자신들이 처절하게 경험했던 홍수 사건에 대해서 생생하게 후손들에게 들려주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노아와 셈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역사와 인류의 역사, 타락의 역사, 홍수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이것이 구전 토라의 형태이다.
이들이 생생하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주던 구전 토라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모세가 광야생활하면서 모세5경을 기록함으로서 성문 토라가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장자우선권을 행사하신다.
그러나 간혹 하늘 아버지께서 추진해 나가시는 구원의 가계도는 장자우선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장자우선권을 사용하시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장자우선권을 포기하시고 다른 아들을 세워서 구원의 가계도를 세워가신다.
아브라함은 데라의 장자이지만, 이삭은 아브라함의 장자가 아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장자는 이스마엘이고, 이삭은 차자이다.
이삭의 장자는 에서이지만, 하나님은 장자인 에서가 아니라 차자인 야곱의 가계도를 사용하신다.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하나님은 장자의 가계도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네 번째인 유다의 가계도를 사용하신다.
유다의 장자는 엘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다의 장자 엘을 죽이고, 막내인 베레스의 가계도를 사용하신다.
이세의 아들들 중에서 다윗도 막내이다.
솔로몬도 다윗의 여러 아들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솔로몬은 밧세바가 네 번째로 낳은 아들이다.
역대상 3:5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그가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밧수아라는 여인이 밧세바여 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워가시는 구원의 가계도는 전적인 하늘 아버지의 주권에 의해서 진행시켜 나가신다.
구원의 가계도는 인간의 계산이나 인간의 의식세계나 가치관, 세계관, 유산관에 의해서 진행시켜 나가지 않으신다.
전폭적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가지신 의지와 뜻과 섭리와 주권에 의해서 구원의 가계도를 세워 가시고 인류의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시면서 구원을 이루어가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폭적인 삼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계획과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L4 & B4
그러면 우리들은 신앙의 신실한 가계도를 어떻게 세워가고 있는가?
우리 신앙인들도 신실한 신앙의 가계도를 세워가면서 우리 자손들,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세상의 족보, 자신의 성씨에 관한 족보를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전해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저는 청주한씨의 30대 후손이다.
저의 자녀들은 청주한씨의 31대 후손이 된다.
그렇지만, 신실한 신앙의 족보, 신앙의 가계도를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복음의 사명이 아닐까 싶다.
사사기 2:10에서 한탄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사기 2;10에 보면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뼈아픈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신실한 신앙인의 다음 세대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가 형성됨으로 인해서 하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예수그리스도 누구인지, 성령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떤 것인지 전혀 깨닫지도 못하는 세대가 형성된다면 신앙인의 유산, 신앙인의 가계도는 우리들을 끝으로 더이상 세워지지 않는 불행한 세대가 되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 다음의 세대를 믿음으로 세워야 한다.
우리 신앙인들과 다른 세대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뒤를 이어서 신앙의 가계도를 세워갈 수 있는 다음의 세대가 형성되어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자녀들, 후손들에게 부지런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야 할 의무와 사명이 있다.
입술과 말로만이 아닌 삶의 체험적인 신앙의 가계도를 세워가야 한다.
신앙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가는 것이 아니라 등으로, 삶으로 가르치고 전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신앙은 더이상 효과가 없다.
아무리 말로는 ‘교회에 가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주일성수해야 한다. 십일조 헌금을 잘 드려야 한다. 전도해야 한다. 교회 봉사 잘해야 한다.’ 등등 가르치지만,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등으로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등으로, 손수 삼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애정과 헌신을 보여주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가정에서 예배드리면서 신앙의 신실한 족보, 가계도를 세워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대전와우리교회 http://cafe.daum.net/GRACEOFJES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