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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압의 불만 / 사무엘하 19:1-8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마음에 대해서 도외시한다면, 그는 진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린 십자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척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기뻐하는 척 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예수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서는 아닐까요? 솔직히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안되는 일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없던 돈도 있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뻐하는 척, 감사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항상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것입니다. 부모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에 마음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돈을 마음에 둔다면, 그는 부모의 마음에 드는 자식이 되기 위해, 효도를 가장할 뿐입니다. 많은 유산을 받기 위한, 잠시 동안의 술수인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이런 수준일 뿐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왜 나같은 자를 위해, 피 흘리고 죽는 길을 가셨는가를 헤아릴 때, 비로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고, 그제야 신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난과 아픔을 헤아리지 않을 때, 우리의 관심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며, 대신 나 자신이 큰 관심거리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가 아무리 십자가를 외치고, 은혜를 말한다고 해도, 그가 노리는 것은 이미 다른 것이기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이 식음 전폐하고 통곡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는 이렇게 목 놓아 울었습니다. 33절에 보면,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참으로 비통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는 아주 복잡합니다. 압살롬은 반역자입니다. 그가 죽었다는 건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즐거워해야지 왜 통곡하는 걸까요? 여기에는 성서기자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어떤 곡절이 숨어 있지 않을까요? 다윗에게는 배다른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성서에서 실명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왕자들을, 나이순으로 거론하면,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 그리고 솔로몬입니다. 이들 중간에 다른 왕자들도 많았습니다만, 이들이 대표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네 명은 모두 출중한 왕자들이었습니다. 이중에서 누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할까요? 순리적으로만 말한다면 큰 아들인 암논입니다만, 실제로는 가장 어린 솔로몬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뜻밖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모든 걸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너무 크게 발휘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서가 제공하는 그 역사적 흔적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곧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고 있는, 다윗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이 명실상부하게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왕으로 등극한 다음에, 자기 수하의 장군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빼앗았습니다. 성서 기자는 좀 짓궂습니다. 다윗이 한창 잘 나가는 순간에, 그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서기자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윗 왕조의 원초적 욕망과 죄를 더 물고 늘어집니다. 그것은 곧 근친상간과 골육상쟁입니다. 큰 아들 암논이 배다른 누이인 다말을 성폭행했습니다. 암논은 자신의 욕심을 채운 다음에, 다말을 창녀보듯 무시했습니다. 버림받은 다말은 친오빠인 압살롬의 집에서 쓸쓸하게 지냈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다윗은 화가 났지만, 암논이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밧세바 사건이 그에게 양심의 가책으로 작용했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은 앙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2년쯤 지난 뒤에 압살롬은 흉계를 꾸며서 암논을 죽이고,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 도움을 받아 망명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가인의 아벨 살해를 연상시키는 이 사건이, 오빠로서의 분노인지, 아니면 왕권투쟁의 결과인지, 그 속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인, 다윗 가문에서 일어난 수치스러운 이 일을, 성서기자는 삼하 13장에서 가감 없이 사실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3년의 세월이 흐르자, 암논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이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게 되었고, 압살롬을 향한 노기도 풀렸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요압 장군이, 다윗을 설득해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압살롬의 귀국을 허락받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압살롬은 왕을 알현할 수는 없었습니다. 2년이 지난 후에야 정상적으로, 왕자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압살롬은 계획적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면서, 민심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4년 동안 애를 쓴 결과, 그는 수하에 많은 장군, 책사, 제사장, 관료들, 그리고 백성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왕으로 나서는 일만 남았습니다. 다윗을 추종하는 세력이 아직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압살롬은 일단 헤브론으로 나가서 대세를 얻을 계획을 짰고, 그의 계획대로 일이 전개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모인다는 소문을 들은, 다윗과 측근들은 야반도주하듯이 예루살렘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압살롬에게 죽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렇게 원수로 맞서게 되었습니다. 압살롬과 다윗의 싸움은 누가 보더라도, 오랫동안 반역을 준비한 압살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습니다. 그는 성취욕이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 누이 다말이 성폭행을 당한 뒤로 2년 동안 참았다가, 배다른 형 암논을 죽이고, 망명생활 3년, 귀국해서 2년은 죽은 듯이 살았고, 그 뒤로 4년을 준비했으니까, 11년을 기다려 이제 반역을 실행한 겁니다.
그런데 역사는 당연하게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연하게 흘러가는 수가 많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건이 작용합니다. 한 가지는 내부 사건이고, 다른 한 가지는 외부 사건입니다. 다윗이 거의 잠옷 바람으로 도망하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당장 쫓아가서 초전박살을 내야, 다윗을 따르는 백성들이 겁을 먹고, 압살롬에게 돌아온다는 아히도벨의 의견을, 압살롬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큰 세력을 결집한 다음 천천히 압박해 들어가서, 다윗을 치는 게 좋다는 후새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후새는 지금 압살롬에게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다윗 편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이 전력을 추스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외부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윗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숨어 기다리던 다윗의 밀정 두 사람이 발각되었지만, 그들을 우물 속에 감추어 준 어떤 여인의 도움으로, 그들은 위기를 모면하고, 무사히 다윗에게 가서 압살롬의 계략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당장 다윗을 치자는 의견을 냈다가 묵살당한 아히도벨은, 다윗 일행이 강을 건너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민심이 조금씩 압살롬으로부터 다윗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실제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리라는 건,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승리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과, 승리와 상관없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다윗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슬픔은 단순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에서 보게 된, 자신의 죄로 인한 슬픔이며 애통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승리로 인한 기쁨에만 도취되어 있을 뿐인 것입니다.
1-3절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1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왕이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승리한 자로서 당당하게 성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한 것처럼, 가만히 성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다윗의 슬픔 앞에서, 백성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에게는 기쁨의 사건이지만, 다윗에게는 슬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서 요압이 불만을 갖게 됩니다. 6-7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다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승전의 잔치를 벌여도 시원하지 않은 판국에, 왕이 통곡하고 있으니, 군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요압은 울고 있는 다윗 왕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을 위해서 우리가 생명을 걸고 싸웠는데, 이럴 수 있느냐? 우리가 죽고 압살롬이 살아있는 게, 당신에게 훨씬 좋았을 것 같다. 더 이상 울지 말고 신하들에게 따뜻한 말을 하시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이라도 모든 신하들이 당신 곁을 떠나게 될 것이며, 결국 당신은 지금까지 당한 것보다 더 큰 불행을 당할 것이다.” 요압의 말을 들은 다윗은 마지못해, 왕이 신하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성문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압살롬의 반역에 얽힌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요압이 다윗에게 한 말은 이중적입니다. 그는 한 나라의 총사령관답게,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 왕에게 진언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왕을 위협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군사들을 끌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약간 이상합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니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자신의 부탁을 어겼다고 해서, 요압을 당장 처벌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책임 추궁은 있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반대로 요압의 위협에 굴복하고 맙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이미 다윗은 왕권을 행사할만한 위치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조짐은 이미 압살롬의 반역에서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압살롬이 민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다윗에게 반역을 한다는 건, 다윗의 왕권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됩니다. 이때부터 이미 이스라엘의 실권이, 요압에게 넘어갔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결국 요압은 훗날 아도니아와 솔로몬의 왕권투쟁에서, 아도니야 편에 섰다가 죽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압살롬이 살고 자신들이 다 죽기를 원했다는 것처럼, 다윗을 몰아붙입니다. 요압의 불만은 압살롬의 죽음보다는, 자신들의 수고와 승리를 높여주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심정보다는, 자신들의 승리가 높여지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행위와 수고가 높여지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 역시 헤아리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으로 역사 속에 묻혀 버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의 현실로 날마다 발생하고 있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하늘의 생명에 참여한 자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과거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찌 예수님의 죽으심에 마음을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마음에 둔다면, 과연 죽음의 현장인 십자가 앞에 나와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공로, 나의 수고, 나의 기쁨이겠습니까? 아니면 죽어야 할 원수인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우리의 공로와 수고는 가당치가 않습니다. 내가 담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것이,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나와 있는 성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에게는 다윗의 슬픔 따위는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슬픔은 자신들의 공로와 수고를 무시하는 것으로 여기고, 불만을 보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불만을 보입니다. 십자가만을 말할 때, 십자가가 진리며 십자가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는다고 하면서도, 왜 자신들의 공로와 수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느냐는 불만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되 자신들의 수고와 공로에 대해서도 말해주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와 함께 자신들도 높여지기를 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는 기도하고 말씀 보며,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때에, 그 분께 받는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에 대한 체험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바라시는 내용이, 얼마나 신령하고 의로우며, 거룩한 참생명에 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느끼는 기쁨과 재미와 감격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현실의 형통과 안락을 위해, 눈앞에 벌어진 문제의 해결에만 관심을 쏟아 붓습니다. 교회생활만 재미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 버립니다. 모든 신앙 행위와 현실의 삶을,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됨을 고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압이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다윗의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압은 자신이 얻어낸 승리의 기쁨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우린 요압의 불만을 보면서, 우리 역시 이러한 불만에 쌓여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의 관심은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압살롬의 죽음의 여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마음을 생각지 않은 요압은, 승리와 전공에 마음을 뺏겨 압살롬을 죽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공로를 앞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이 오늘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분이 복 받고 잘사는 것입니까? 많은 일을 하여 하늘의 상을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달린 독생자 예수님이겠습니까?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전부입니다. 십자가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로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 역시 당연히 십자가를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세워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성도의 수고와 열심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수고와 열심에 대해 칭찬하실 뜻도 없으십니다. 맥 빠지십니까? 봉사할 맛이 사라집니까? 요압과 같은 불만이 일어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믿음 아닌 믿음에 머물러 있다고 봐야 합니다.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 자신만 관심거리고, 여러분의 수고와 공로가 헛되이 되지 않고자 하는 욕심으로만 살아갑니다.
요압은 7절에서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라고 요구합니다. 다윗의 슬픔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으니 그 마음을 위로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슬픔에 대해 생각하지 않음으로, 자신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만 위로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압은 만약 다윗이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을 합니다. 이러한 요압이야 말로, 현대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소위 신앙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받고자 하는 목적에서입니다. 하나같이 예수님이 나를 위로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도 위로가 없고, 평안이 없고, 주어지는 것이 없다고 여겨지면, 가차 없이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태세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내가 위로 받기를 원하고, 내가 평안하기를 원하고, 내가 잘살기를 원하는 이 목적으로만 예수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말하니,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지금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왕의 체통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통곡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눈물인가요?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압살롬이 누굽니까? 다윗을 이어 왕이 될 형 암논을 죽였습니다. 다윗의 용서를 받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다음에, 흉계를 꾸며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죽음을, 다윗이 정말 슬퍼했을까요?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대목에서, 다윗의 부성애를 강조합니다. 옳은 말인가요? 제가 보기에 다윗은 지금 압살롬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 때문에, 울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그는 압살롬을 포기했을 겁니다. 그에게는 압살롬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실제로 문제는 요압입니다. 평생 전쟁만 하던 다윗은, 결국 군인들에 의해서 왕권을 행사하기 힘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현재 그런 상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역사를 보도하는 성서기자들은,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여기서 압살롬의 죄가 핵심이 아니며, 다윗의 부성애도 주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의 삶도, 일개 촌부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성서기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글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룬 위대한 정치적, 군사적 업적도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근친상간과 골육상쟁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관료와 장군들에 의해서 쉽게 흔들립니다. 평생 동안 쌓아온 엄청난 업적들이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삶의 근본으로 들어가 보면, 그런 업적을 남긴 왕이나 없는 촌부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일까요? 지금 예수 믿는 우리의 인생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비록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게 겉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시련을 당하고 통곡하니까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사람은, 기우뚱거리면서도 자신이 궁극적으로 삶의 무게를 두어야 할 대상을 놓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특별한 점들이 별로 보이지 않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을 거두어들이지 않는다면, 비틀거리다가도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의 통곡은, 자신을 향한 연민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호소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의 진정한 호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붙들어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용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찾은 여러분,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아무런 관심도 없이 습관처럼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위로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수고와 공로가 높여지기를 원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 잘못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모임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하며, 그로 인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무한한 은혜와 사랑에, 깊이 빠져 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만이 아니라 이 갈보리교회가 존재할 때까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질 모임의 이유이며 목적이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