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명작’ 어떻게 읽힐까
- 이 글은 이오덕님이 쓴 삶·문학·교육(종로서적, 1987)에서 뽑았습니다 -
- 책읽기 교육에 도움이 되는 내용입니다 -
1. 외국물의 홍수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
지금 우리 나라의 아이들은 외국물과 외국 글의 홍수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옷이고 신발이고 가방이고 할 것 없이 아이들이 입고 신고 쓰는 모든 물건에는 외국 글자가 적혀 있으며, 아기들의 인형은 아예 서양 아이로 되어 있고, 듣는 노래와 추는 춤까지 서양 것이다. 한 가족이 모여 사는 집도 서양 집이고, 집단에서 쓰고 있는 모든 가구가 서양식이다.
서양 옷을 입고 서양 집에 살면서 서양 인형으로, 서양 춤으로 자라나는 아이가 우리 겨레의 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 겨레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될까?
20년쯤 전에는 시골의 국민학교 1․2학년 아이들이 그린 그림에서 대체로 ‘개성’이란 것을 찾아볼 수 있었고, 순박한 농촌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리 깊은 산골이나 외딴섬에 살고 있는 아이라도 도시의 아이들과 똑같이 서양 아이의 인형 같은 얼굴만을 그린다. 만화고 텔레비전이고 공책 표지고 상품 포장지고 보는 것은 서양 아이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서 살아갈 길이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자연이나 우리 나라 아이의 얼굴을 그려 놓은 공책이고 책받침이 어디 있는가? 날마다 시간마다 눈만 뜨면 어루만지고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 서양 인형이고 서양 아이의 얼굴 그림이니, 겨레의 어린이 교육에서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없다.
이 땅에서 살아갈 아이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로서 우리 겨레의 혼을 이어 주어야 할 일이 얼마나 급하고 중요한가를 이런 데서 깨닫는다.
그런데, 너무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아이들은 문학에서조차 남의 나라의 것만을 찾도록 되어 있다. 그것도 재탕 삼탕에 온갖 잡탕으로 울궈낸 외국 명작물의 찌꺼기를 파는 저질 상품으로서다.
외국의 문학을 어떻게 읽히고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 글은 이런 상황에서 쓰게 되었다.
2. 외국의 명작을 읽혀야 하는가
우리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불순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 온갖 문화의 요소들이 남의 것이요 특히 서양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외국 문학을 아이들에게 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이미 우리는 세계 속에서 살아온 지 오래다. 외국 문학을 받아들이지 말자는 것은 우리가 입고 있는 양복을 벗어 버리고 옛날의 우리 옷을 입자고 하는 말과 같다. 그렇게 할 수가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올바른 겨레의 혼을 이어가자면 덮어놓고 남의 것을 배척해서는 안 되며, 도리어 세계 여러 나라, 여러 겨레의 지혜와 정신을 어느 만큼씩 받아들이는 데서 비로소 잘할 수 있다. 한편 우리가 똑똑한 세계인 노릇을 하자면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버리고 남의 것을 따르고 흉내내는 데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것을 귀하게 가지면서 그것을 더욱 잘 키워가기 위해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로소 전체 인류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도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외국 문학은 당연히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인류 공통의 문학 유산이라 하겠다.
우선 문학이란 말부터 생각해 본다. 우리가 문학이란 말을 쓴 것은 일본을 통해 서양의 문학이 들어오고부터다. 아동문학도 마찬가지여서 동화를 쓰고 소설을 쓰는 것 모두 서양 문학에서 배웠다. 옛이야기나 민요를 훌륭한 우리 자신의 문학으로 알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새로운 문학 창조의 원천으로 인식하게 된 것도 서양 문학을 살피고 나서다. 따라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문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어떤 작품을 주어야 하나 하는 문제를 생각할 경우에도 서양의 것을 아주 물리칠 수는 없고 물리쳐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음은 ‘인간교육’이란 관점에서 문학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교육을 하는 데는 편의상 두 가지 관점을 들 수 있다. 하나는 보편적 인간, 곧 세계인을 기르는 일이고, 또 하나는 우리 겨레의 한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국내 작가의 창작물이 대체로 겨레의 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감정과 생각과 삶을 몸에 붙이도록 하는 문학이 되어 있어야 하는 데 대해, 다른 나라의 문학은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깨닫고 느끼고 가져야할 세계를 가르치는 것으로 된다. 따라서 외국의 문학을 모르고 자라난 사람의 정서와 생각과 앎의 세계는 어쩔 수 없이 좁고 빈약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현대에서는 그렇다. 외국의 문학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이들 교육에서 크나큰 손실을 가져온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우리 문학의 빈곤을 보충하는 수단으로써 외국 문학을 생각하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정책, 8․15 이후의 남북 분단으로 인한 정치․경제․문화의 파행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동문학은 겉으로 나타난 모양과는 달리 그 알맹이가 너무나 빈곤하다. 아동문학은, 모국어의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철학․역사, 그 밖의 모든 부면의 교육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상에 가까운 방법으로 할 수 있는데, 우리의 아동문학은 아직 그 어느 분야의 교육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국내 작가들의 작품으로 충분히 하지 못한 문학교육을 외국의 문학작품으로 보충 보완할 필요가 있다.
가령 과학에 관한 책만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지구의 생성이나 생물의 진화, 우주의 신비, 온갖 발명과 발견에 관한 얘기를 쓴 책이 거의 없다. 그래서 외국의 과학소설이나 동화, 과학자의 전기를 읽힐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의 지리와 역사, 사회와 풍속을 알게 하는 데도 그 나라 그 시대의 소설을 읽히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또 우리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깊이 이해하여 그것을 붙잡아 보여 주는 소설이고 동화고 수필이 너무나 빈약하다(자연을 멀리서 건성으로 보고 그린 작품은 얼마든지 있지만). 동물소설이나 동물동화라고 할 만한 작품도 없다. 동물을 의인화해서 인간의 얘기를 쓴 동화는 있어도 동물 자체를 주제로 해서 문학적 진실을 표현한 작품은 없다. 그래서 자연을 알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마음을 심어 주기 위해서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나온 동물문학의 고전들을 아이들에게 읽혀야 하겠다. 이런 작품 가운데서 그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진 것만 들어 본다.
시이튼「내가 알고 있는 야생동물」
시이튼「산드힐 숫사슴의 발자국」
잭 런던 「야성의 부르짖음」
터휸 「위대한 개 랫트」
롤링스 「아기사슴」
위다 「플란다스의 개」
슈웰 「검은 말 이야기」
그레이암 「두꺼비 이야기」
파브르 「곤충 이야기」
본젤스 「꿀벌 마야」
잘텐 「아기사슴 밤비」
바이콥 「위대한 왕 호랑이」
비앙키 「숲 신문」
이러한 동물이나 곤충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아이들을 얼마나 사람다운 세계로 인도한 것인가? 사람의 이야기를 쓴 동화나 소설들은 거기 여러 가지 그릇된 정치적 의견이나 인종적 편견이 들어 있기 쉽지만, 동물의 이야기를 쓴 이런 작품은 다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목숨들의 참 모습을 보여 주고 사랑을 가르칠 뿐이다.
이밖에 「이솝 우화」「성경 이야기」「그리스 신화」「아라비안 나이트」「서유기」「불교 동화」등 세계의 고전들을 어릴 때부터 읽히는 것이 좋겠고, 인류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는 「사람은 어째서 거인이 되었는가?」(이리인),「엉클 톰의 오두막집」(스토우) 등을 필독 독서로 꼽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집 없는 아이」(말로), 「홍당무」(르나르), 「로빈훗트의 모험」,「긴 겨울」(와일더), 「별의 왕자」(생텍쥐베리), 「에밀과 탐정들」(케스트너), 「날아가는 교실」(캐스트너) 같은 작품들을 읽게 할 것이고, 인간 사회의 참 모습과 바른 삶의 길을 찾게 하기 위해서는 「쿠오레」(아미치스), 「톰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마크 트웨인),「걸리버 여행기」(스위프트), 「바보 이반」(톨스토이) 같은 작품들을 읽힐 필요가 있다.
3. 받아들이는 자세
외국의 문학은 읽혀야 하지만, 거기에는 신중한 선택과 감상․비평 지도, 즉 문학 교육이 필수 조건으로 따라야 한다.
우리가 현재 세계의 명작이라고 하여 아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은 구라파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의 거의 모두가 18세기 이후에 씌여져 나온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라파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로 진출하면서 식민지를 빼앗는 싸움을 가는 곳마다 일으켜 원주민을 죽이고, 내어쫓고, 그 땅을 점유하여 자원을 앗아 갔다. 그럴 때 그들에게는 용감한 기상과 먼 바다 저쪽에 있는 황금의 섬을 찾아가고 싶어하는 꿈을 온 국민에게 심어 주기 위한 정책과 교육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무인도와 보물과 해적과 야만인과 난파선과 용감한 백인들이 나오는 수많은 소설들이며 동화들은 이렇게 하여 씌어졌던 것이다. 서구에서 가장 일찍 산업혁명이 일어난 나라,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졌던 나라 영국에서 가장 먼저 아이들을 위한 책을 만들었고, 아동문학이 맨 먼저 발달하여 많은 세계적 명작을 남겼다는 사실은 우리가 아동문학의 역사를 검토하고 아동문학의 나아갈 길을 찾을 때 한번쯤 단단히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그리고 영국뿐 아니라 구미의 여러 나라 문학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주려고 할 때도 그러한 문학이 생겨난 역사의 배경과 사회의 토대를 확실히 알아야만 올바른 문학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부유한 나라들이 꽃피워 낸 아동문학이 아무리 자연과 인정을 아름답게 그려서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어 모든 아이들에게 읽힌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문학이 만들어진 사회적 토대가 식민지로부터 약탈해 온 재물로써 이뤄진 것이어서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일 때 우리는 그러한 문학을 우리 자신의 역사와 사회와 문화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런 나라의 세계적 명작 중 상당한 수의 작품이 정치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서구인 중심의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학-이른바 세계의 명작들은 부모나 교사들의 아무런 배려도 없이 무조건 우리의 아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단지 세계명작이란 이유만으로!
한 가지 예를 들면, 영국뿐 아니라 세계의 고전이라고 하여 수많은 아이들이 읽고 있는 「로빈슨 표류기」에는 원주민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야만인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 주영 씨가 쓴 ‘세계명작 동화, 어린이에게 해로운 것도 많다’란 글은 매우 적절한 지적을 하였기에 좀 길지만 끝 부분만을 생략하고 그 전문을 다음에 들어 본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여학생들이 성형 수술을 많이 한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혹은 사회로 나가면서 자신의 얼굴을 새롭게 만들어서 새로운 환경 속으로 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못 생긴 얼굴을 예쁘게 가꾸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형 수술은 주로 코를 뾰족하게 높이는 것이나 눈을 크게 하는 쌍꺼풀 수술이라고 한다. 그들은 뾰족하게 높은 코와 쌍꺼풀 눈이 예쁜 얼굴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언젠가 내가 담임하고 있는 5학년 어린이들에게 각자 자신의 모습에 대한 생각을 발표하게 한 일이 있었다. 60여 명의 어린이가 대부분 자신의 용모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특히 여학생들은 더욱 비관적이었다. 낮은 코와 뭉툭한 코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못남의 상징이었거니와, 까만 머리와 까만 눈동자까지도 못 생긴 모습으로 생각하는 어린이가 있음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중의 몇 어린이는 자신의 눈에 쌍꺼풀이 없다거나 파란색이 아닌 것을 탓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머리카락의 색이 까만 것보다는 노란색이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하였다.
누구나 자신의 용모에 대해서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못생겼다고 생각되는 얼굴을 예쁘게 하고 싶은 욕구 또한 꼭 잘못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촌의 수많은 인종과 민족은 원래 제각기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자기의 생김새를 스스로 못났다고 비관하고 다른 인종이나 민족의 모습을 예쁨의 표준으로 생각한다면 참으로 슬프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인종이나 민족 가운데서도 그 사회의 미(美)의 기준에 따라서 예쁨과 못남이 있다. 백범 김 구는 과거에 낙방하고 집에 와서 방문을 잠그고 3개월이나 ‘마의상서’를 펴 놓고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관상을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책에서 못나고 흉함의 조건으로 써 놓은 것들이 모두 자신의 얼굴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범은 비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 잘남보다 몸 좋은이, 몸 좋음보다 마음 좋음이 더 낫다’라는 글귀를 마음에 새기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혔다.
이처럼 외모보다 내면을 갈고 닦으려는 자세를 보기가 나날이 더욱 어렵다.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서구 중심의 미의 기준을 따르려 하는 사실 그 자체는 어찌 보면 그다지 심각한 일이 못될 것 같기도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로 인하여 얻게 될 마음의 병은 실로 무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청소년이나 어린이들이 자기의 얼굴이 서구형으로 생겼더라면 예쁠 걸 하고 생각하는 것은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또한 이 사회의 서구 지향적 풍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린시절에 수없이 읽게 되는 서구의 동화책들은 더욱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동화책이야말로 어린이들의 마음을 파헤쳐 그 속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게 하며, 동화책 속의 가치는 모르는 사이에 어린이들의 정신 세계 속에 일찍부터 자리잡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땅의 어린이들이 읽는 책의 80퍼센트가 동화책이고, 또 그중의 90퍼센트가 서구 중심으로 쓰여진 소위 ‘세계명작’들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읽어서 좋다고 추천한 책들을 살펴보면 「톰소여의 모험」「소공녀」「보물섬」「로빈스 크루소」「피노키오」「쿠오레」「작은 아씨들」「삼국지」 등이 항상 10위 안에 든다는 조사 발표도 있다.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서구의 열강들이 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아시아 등지를 침략하면서 식민지를 확대하는 시기에 쓰여졌다. 따라서 그 시대의 서구 열강들이 추구하던 가치관이 강하게 들어 있다. 이 책들은 대륙과 대양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어가며 팽창주의에 들떠 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어린이들에게 읽히기 위해 번역한 것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도 일제의 식민지였던 1920-40년 사이에 이런 책들이 마구잡이로 번역되어 나왔다.
1950년대의 혼란 속에서도 우리 작가들의 손으로 쓰여진 창작동화들이 어렵사리 출판되어 피땀 흘리는 노력으로 이같은 마구잡이 번역 동화들에 맞서려 했으나 그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번역 동화들은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고도 성장과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더욱 마구 찍혀 나왔고, 서적 외판원들에 의해 어린이들 손에 ‘세계명작’이라고 들려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 작가들이 창작한 동화를 인세나 원고료를 주고 사서 새로 펴내는 것보다는 값싼 번역료로 외국 동화를 옮기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이미 찍어서 판 책의 지형을 헐값에 사서 전집물로 만들어 월부로 파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안전하다는 일부 출판인들의 상업주의,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세계명작’이라는 제목과 앉아서 살 수 있는 월부책이라는 데 현혹된 어머니들에 의해 어린이들은 노랑머리와 파란 눈, 그리고 하얀 피부를 가진 외국인 주인공들에 빠져 버렸다.
또, 그런 책들을 각색한 외국의 만화 영화에 열광하게 되었다. 그 주인공들이야말로 용감하고 정의롭고 착하고 바르고 신나는 생활의 주인공이다. 아름다운 소공녀 세라, 빨간머리 앤, 용감한 엘시드, 환상의 소녀 요술 공주 밍키, 미래의 소년 코난… 그 어린이들이 되고 싶다. 「십오소년 표류기」의 브리앙처럼 무인도에서 모험을 즐기고 싶고,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처럼 달리고 싶고, 소공녀가 되고 싶다. 그런데 나는 전혀 그렇게 생기지가 못했다. 그저 작고 옆으로 찢어진 까만 눈에 낮고 뭉툭한 코의 못생긴 아이일 뿐이다.
‘세계 아동의 해’에 4명의 어린이가 「십오소년 표류기」의 영향을 받아 무인도로 가겠다고 집을 나간 일이 있었다. 각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깜찍한 모험의 꿈’이라고 크게 보도하였다. 그러자 그 기사의 영향을 받은 다른 어린이들의 가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내가 맡고 있던 어린이 한 명도 무인도로 떠나려다 붙들렸는데, 어머니와 나의 노력으로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무인도로 떠나는 이러한 모험의 길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많은 어른들이 모르고 있다. 진취적인 기상과 모험심과 용기를 갖게 해 줄 것 같은 동화책들이 한편으로 어린이들에게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환상에 도취되는 나약함을 길러 줄 위험도 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소위 세계명작이라는 동화들은 또 그릇된 세계관과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해 주는 것이 많다. 흑인이나 인디언에 대한 편견, 백인은 우월하며 황인종 등의 유색 인종은 열등하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줄 위험성이 큰 것이다. 서구 중심의 수많은 동화들이 그런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백인은 우수하고 이지적이고 정의로운 듯이 표현되는데 흑인이나 황인들은 비열하고 야만스럽고 우둔하게 표현된 내용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십오소년 표류기」에는 영국․미국․프랑스의 소년과 흑인 소년이 등장한다. 영국 소년은 착하고 정의롭고, 미국 소년은 이지적이고 합리적으로, 프랑스 소년은 개성이 강하고 고집이 있게 그려지고 있으나 흑인 소년은 배의 요리사로 아주 충실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해양 진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로빈슨 크루소」에서는 어떤가? 로빈슨은 혼자서 28년 동안이나 한 무인도에서 온갖 고난과 위험을 용감하게 이겨내고 살아 남는다. 그런데 그 섬에 흉악한 토인들이 온다. 바닷가의 모래밭에 맨발의 발자국이 있다. 그들은 사람을 불로 구워서 먹으려 한다. 로빈슨은 정의롭게도 혼자서 토인들을 물리치고 한 토인을 살려낸다. 그 토인은 충실한 노예, 진심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는 노예가 되고 로빈슨은 그 이름까지 지어 주고 있다.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쓰여진 「톰 소여의 모험」도 마찬가지다. 유색인종인 인디언 조가 등장한다. 인디언 조는 그 동화에서 가장 증오받는 인물의 역할을 썩 잘 해내고 있다. 심지어는 동굴 속에 갇혀서 박쥐를 잡아먹고 양초를 씹어 먹으며 열 손가락이 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어린이들이 그처럼 열광하는 「타잔」에서도 영국인은 신사이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사람은 악인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잡아가고 야생동물들을 생포하거나 살육하여 밀림의 평화를 깨뜨리는 잔인한 사람들이다. 영국 귀족의 아들인 타잔은 위험에 빠진 흑인과 동물들을 구해 주는 정의롭고 용감무쌍한 사나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계 역사에서 영국인만큼 유색인종을 잔인하게 학대한 민족이 없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다가 북아메리카에서 노예로 부리고, 신대륙을 ‘개척’한답시고 수천만의 인디언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자가 누구였는가? 바로 영국인, 앵글로 색슨 족이다.
이런 동화를 읽으면서 어린이들은 즐거워하고 손에 땀을 쥐며 흥분한다. 어린이들은 그 속의 함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 주인공 편이 되어서 함께 세계를 여행하며 식인종을 죽이고, 야만인을 멸시하고,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감을 체득하게 된다. 그래서 “아동문학을 무시해도 좋다. 다만 민족의 넋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어 왔는가를 무시해도 좋다면 말이다”라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서양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쓴 동화, 백인 우위의 사상을 가진 작가들에 의해 씌어진 ‘명작’들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읽힐 때는 작품을 엄선해야 하고, 다음은 그 엄선한 작품에 대해서도 적절한 해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위에 인용한 글로서도 충분히 깨닫게 된다.
미국의 작가 터휸이 쓴 「위대한 개 랏트」는 감동을 주는 좋은 동물문학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여주인 집에 들어가는 도둑이 흑인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분명히 이 작가가 흑인을 멸시하고 있는 증거다.
역시 미국의 작가인 로프팅의 「돌리틀 선생 여행기」에는 토인 추장의 아들이 하얀 얼굴이 되고 싶어하는 꿈을 꾸는데, 그 얼굴을 하얗게 해주고 일행이 석방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참으로 좋은 동물문학인데 아깝게도 이런 결함이 있다.
미국 문학에서 인디언을 가장 깊이 이해해서 썼다고 하는 「모히칸족의 최후」조차도 내가 보기로는 백인 중심을 벗어나지 못한 인종관을 가졌다.
문학작품에서 조그만 결점은 더욱 큰 감동에 의해 묻혀 버린다. 작품의 가치는 그 커다란 감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위대한 개 랏트」나 「돌리틀 선생 여행기」와 같은 경우에는 거기서 받은 문화적 감동으로 하여 작품을 읽은 아이들은 흑인이나 원주민을 멸시하는 사상이 더욱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된다. 그러니 작품의 줄거리로서는 얼핏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듯한 ‘작은 결함’이 아주 큰 결함으로 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제3세계에서는 서구의 동화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 보기로 하자. 다음은 ‘세계로 열린 창’「유네스코 꾸리에」(86년 8․9월호)에 실려 있는 에콰도르의 작가 호르해 엔리께 아둠의 글 ‘동화에 나타난 가시’다. 이 글은 이미 같은 책 1979년 3월호에 실렸던 것인데, 이번에 ‘세계의 명문선’이란 특집으로 그 일부를 다시 수록한 것이다.
부루노 베텔하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느 땐가 모든 어린이는 왕자나 공주가 되길 꿈꾼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열대평원이나 고원지대의 어린이에게 만약 이들(동화)의 이미지가 강요되지 않았다면, 또 그것이 때로는 섬뜩한 구스타베도레의 판호나 월터 디즈니의 넌더리나는 만화에 의해 더욱 구체적인 현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과연 그러한 꿈을 꾸었을까?
작가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동화에 등장하는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는 필연적으로 관대하며 자비롭고, 그들의 백성에게서 사랑받으며 귀족들의 존경을 받는 모습으로 비친다. 그들은 군대나 경찰도 갖고 있지 않으며(기껏해야 몇몇 친절한 사냥관리인 정도만 있고), 또 결코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는다. 백성들이 감옥이나 사형대에 끌려가는 일은 극히 드문일이며, 있더라도 이는 단지 사악한 계모의 악의에 찬 계략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더구나 왕비와 공주는 모두 뛰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어린이들은 이 점을 쉽게 인식하며, 자기의 현실 생활과 비교하여 이 모든 것이 단지 어른들의 커다란 거짓말에 지나지 않음을 곧 알게 된다.
유럽의 동화는 스칸디나비아, 독일과 슬라브의 전통에서 유래하므로 등장인물은 자연히 흰 피부에 푸른 눈과 금발을 하고 있다(유일한 예외는 백설공주인데, 그녀의 머리는 ‘흑단처럼 새까맣다’). 그런데, 경제적 차별이 대개 항상 인종적 특징에 대한 차별과 함께 병행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아름다움을 착함과 같은 것으로 묵인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차별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토박이와 혼혈아들은 열등감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림형제의 신데렐라 이야기에서는 그러한 형태의 아름다움과 착함의 동일시는 매우 고의적으로 나타난다. “이 여자(계모)는 두 딸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비록 아름답고 흰 살결을 갖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악하고 음흉하였다.” 이 경우 작가는 등장인물의 예외적 성격을 돋보이기 위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용어를 씀으로써 문장 속에 숨겨진 이념적 내용을 호도한다. 위의 문장을 뒤집어서 ‘딸들은 비록 추하고 검은 살결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며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 속에 숨겨진 인종주의적 내용은 그것이 아무리 고의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잔혹할 정도로 뚜렷이 드러난다. 라틴 아메리카의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이야기 중 가장 마음 편하거나 적어도 가장 덜 잔인한 동화는 한스 안델센의 「미운 오리새끼」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문제의 해결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천우신조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더구나 이것이 굴종의 대가로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왕자가 신데렐라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며, 백설공주와 잠자는 공주의 경우에도 왕자들이 같은 일을 하게 되고, 용과 용사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도착하여 푸른 수염의 사나이의 셋째 부인을 구해 낸다. 두 세기가 지난 오늘날 이런 상황은 현대화되었다. 술집이 문을 닫을 시간에 보잘 것 없는 그릇닦이 여자가 일을 하며 노래하는 것을 구석에 앉아 있던 영화감독이 ‘발견하여’ 그녀를 영화 배우로 출세시킨다. 불행히도 마릴린 몬로는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백만에 달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성냥팔이와 거위 치는 아이와 신데렐라들은 성인이 되어도 신데렐라로 남아 있을 운명을 지닐 뿐이다. 그들을 고생에서 해방시켜 주고 누더기를 비단 옷으로, 또 샌들을 유리구두로 바꾸어 주는 요술 지팡이를 가진 동화 속의 선녀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해 줄 왕자도 없으며, 대통령이나 산업재벌, 혹은 은행가의 아들과 같은 더욱 평범한 현대판 왕자들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신데렐라의 꿈은 백설공주의 어려운 혈실이 된다. 만일 그녀가 머리 위에 지붕이 있는 곳에서 쉬기를 원한다면, 난쟁이들을 위하여 ‘침대를 정리하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바느질하고, 실을 짜며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돈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문학을 그들에게 지배당하던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이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이른바 그 명작물의 대부분을 만들어 낸 서구라파 사람들이 갖는 감정과 생각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위의 글을 쓴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와 같은 생각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것으로 믿는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스스로 온전히 서지 못하여 아이들의 독서 교육조차 외국 만학에 많이 기대고 있는 나라는 어디나 마찬가지로 아주 어릴 때부터 서구의 동화에 몰두하게 하여 저도 믈게 서양을 숭배하는 생각을 갖게 하고 자기의 모습, 자기의 것은 부끄럽게 여겨서 열등감을 갖도록 한다. 지난 5월에 나온 「어린이와 책」(어린이 도서 연구회 엮음)에 실렸던 ‘어린이와 학부모의 어린이책에 대한 인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어린이 250명과 학부모 130명이 가장 좋다고 하는 책을 알아본 결과, 아이들이고 부모고 거의 모두가 구라파와 미국의 ‘명작’들을 들었다고 한다. 더욱 놀랄 일은 아이들이 「소공녀」와 「소공자」를 각각 1위와 2위로 뽑고, 어머니들은 「소공녀」를 1위로 뽑았다는 것이다.
「소공자」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영국의 귀족주의를 맞세우고, 여기에다 귀족의 상속 문제를 얽혀 놓은 얘기다. 하필 왜 이런 작품이 우리 나라의 아이들과 어머니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읽을 거리로 알려져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소공녀」는 귀족 얘기는 아니지만 이것은 영국 사람이 그들의 식민지인 인도에 가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하여 결국 마지막에는 그것이 성공하게 되고 막대한 유산을 소녀가 받게 된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회, 우리의 삶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이 따위 얘기가 아무리 거기 순진 명랑한 아이의 얘기가 나오고 아름다운 마음의 소녀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 땅의 아이들과 어머니들에게 가장 좋은 책으로 뽑혔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짐작으로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어는 ‘후진국’에서도 「소공자」「소공녀」를 가장 좋은 책으로 뽑는 아이들과 어머니들은 없을 것으로 본다.
뒤에 알아 보니, 이 「소공자」「소공녀」가 실제 책으로 읽힌 것은 아니고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다고 한다. 텔레비전을 보고 이렇게 응답하다니 이만하면 우리의 문학 교육은 전혀 없는 상태라고 할 밖에 없다.
그리고, 텔레비전에다 하필 이런 작품을 명작이라고 방영하는 사람들도 넋이 빠져 있고, 이런 불확실한 통계를 조사 발표하여 잘못된 독서 경향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 일도 무책임하다(말이 난 김에 적어두지만, 소공자니 소공녀니 하는 말은 일본인들이 번역할 때 쓴 이름이다. 그걸 그대로 우리가 따라 쓰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말이 우리에겐 없다. 마땅히 「소공자(The Little Lord Fauntleroy)」는 「귀공자」로, 「소공녀(The Little Princess)」는 「꼬마 공주」나 「공주님」으로 써야 할 것이다).
도대체 귀공자나 공주님의 얘기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당이나 한가! 순수한 우리의 옛이야기에는 완자고 공주고 왕비고 하는 따위들이 나오지 않았다.
서양의 명작들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교묘하게 합리화하거나 모호하게 덮어놓은 작품들을 빼고, 또 공주나 왕자, 귀족이나 귀공자들의 시시한 얘기를 엮어 놓은 작품들을 모두 빼어 버린다면 서양의 아동문학이 얼마나 빈약할 것인가. 서구 동화에서 가장 좋은 문학적 감동을 준다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 안델센의 작품들이다. 그런데 안델센의 작품 가운데서도 훌륭하다고 모두가 말하고 있는 「미운 오리새끼」(앞에서 인용한 호르헤 엔리께 아둠의 글에서도 이 작품만은 좋게 보았다)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미운 오리새끼가 알고 보니 백조란 이야기인데, 이것이 가난하고 불우한 아이가 마지막에는 엄청난 재산을 상속해 받는 귀족이 되거나 큰 돈방석에 올라앉게 되는 따위-개인적으로 귀한 신분으로 올라가고 부자가 되는 따위와 그 삶의 목표며 길이 잘 합치되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으로서 보여 주어야 할 참된 삶의 목표, 삶의 길이 결코 이런 것일 수 없다. 미운 오리새끼가 어디까지나 미운 오리새끼의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든 아이들의 실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끝으로 일본 문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아동문학이 우리 아동문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살피고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 아동문학의 문제점을 시원스레 밝히게 되는 지극히 중요한 일이 되겠는데, 아직도 이 문제를 다룬 논문 한 편을 보지 못했다. 워낙 평론이 없는 아동문학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버림받은 아이들과 아이들의 문학적 상황이 이런 데서도 나타나는가 싶다. 어차피 이 문제는 누가 밝히게 되겠기에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하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아동문학은 일본 아동문학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고, 일본 아동문학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아동문학은 동요․동시가 우리의 전통-입으로 전해온 민요나 동요의 세계를 이어받은 것이 되지 못하고 일본의 동요시인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했고, 이것이 우리 동요의 전통이자 아동문학 전반을 지배하는 전통이 되어 버렸다고 본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동요적 발상’이란 말을 써서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다. 일본 동요․동시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대표적 작품을 여기 한 편씩 들어 본다.
빨간 새 아기새
北原白秋
빨간 새 아기새
어째서 빨간가]
빨간 열매 먹었지
하얀 새 아기새
어째서 하얀가
하얀 열매 먹었지
파란 새 아기새
어째서 파란가
파란 열매 먹었지
장난감 새
四條八十
눈 오는 밤
엄마의
무릎에 기대어
생각하는 것-
빨간 돛을 단
장난감 배는
여름날 냇물에
잊었던 배는
어디로 흘러
갔을까
일제시대에 동요를 쓰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의 작품을 이 일본 동요와 비교해 볼 때 거기 어떤 차이를 발견 할 수 있을까? 아니, 이 두 작품을 작자의 이름을 적지 않고 우리 나라 동요작가들의 작품 속에 섞어 두었을 때 누가 이것을 외국 사람이 쓴 것이라고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이런 경우 ‘아이들의 세계는 국경이 없다’고 하여 예사로, 혹은 당연하게 여겨도 괜찮을까?
그 시대 일본의 군국주의는 온갖 간악한 수단을 써서 우리의 땅을 약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자기 나라의 아이들만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나도록 하기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재미있는 얘기와 달콤한 노래를 문학으로 즐기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문학을, 바로 그들에게 짓밟혀 목숨조차 겨우 이어가던 식민지의 백성들이 그대로 흉내내어 자기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과연 옳은 아동문학의 길이었던가? 일본의 명치․대정 시대의 문학이 아무리 그들의 아름다운 자연과 인정을 그려 부러운 문학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감미로운 문학을 그대로 우리 아이들에게 비판 없이 준다는 것은 우리 겨레의 혼을 마비시키는 노릇이 된다고 나는 본다. 이런 뜻에서 일제시대에 노골적으로 일본제국을 찬양한 글을 쓴 사람이 아니고 단지 일본문학에 심취하여 그것을 모방한 작가나 시인들까지도 나는 친일문학자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아동문학에서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겨레를 말살하려고 했던 일본의 제국주의가 만들어 낸(적어도 그 제국주의자들이 보호하고 키웠던) 문학은, 그것이 아직은 다른 서구라파의 문학같이 우리 아이들에게 많이 읽히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일본문학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은 사회가 되어 가고 있기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보다는 일본의 문학이 벌써 우리 나라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아주 병들고 비뚤어진 측면과 형태로서 말이다. 지금의 30대, 40대의 작가들은 이것을 부인하겠지.
“우린 일본말도 모른다. 일본 작가의 영향은 절대 안 받았어!”
그럼 누구의 영향을 받았단 말인가?
서양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단 말인가?
“우린 존경하는 우리 나라의 여러 선배들의 영향을 받았지.”
그러나 그 선배들이란 사람들이 거의 모두 일본 문학을 모방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4. 먼저 해야 할 일
건전한 외국의 문학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읽히기 위해 교육자와 문인과 아동문화 운동가와 출판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부터 차례로 적어 본다.
첫째, 세계 여러 나라의 작품 중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꼭 읽혀야 할 작품을 가려뽑아 그 목록을 만든다.
둘째, 이 기본 책 목록이 되었으면 그 작품을 한 편 한 편이, 일반적으로 아이들의 나이(학교의 학년)의 어느 단계에서 읽는 것이 적당한가를 밝혀 놓는다.
셋째, 작품을 읽을 때 부모나 교사가 어떤 도움말을 주어야 하는가를 조사해 둔다. 예를 들면 그 작품이 감동을 주는 훌륭한 작품이지만 어떤 대문에서 부정되어야 할 세계관이나 인생관이 표현되어 있다고 할 때 그점을 함께 토의하여 깨우친다든지 하는 일이다.
넷째, 번역을 할 때 어떤 점에 주의하여야 하는가? 예를 들면 그 작품이 본래는 아이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어서 그 나라에서도 아이들에게 읽히기 위해서는 원작을 다시 쉬운 문장으로 고쳐 써서 읽히고 있으니 원작은 그대로 완역해서는 곤란하다든지, 어느 출판사에서 낸 텍스트를 쓰는 것이 가장 좋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다섯째, 우리 나라에서 번역 또는 번안한 책들을 조사 비교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한 작품을 여러 출판사에서 옯겨 놓았을 때 옮긴 사람, 책이 나온 연도, 책의 체제와 쪽수들을 밝혀 대조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어떤 대문의 번역 문장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하여 가령 「쿠오레」는 ㄱ출판사의 것이 가장 정확하다든지, 「걸리버 여행기」는 ㅅ출판사의 것이 비교적 낫다든지 하는 의견도 붙여 놓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섯째, 번역가들이 충분한 시일을 두고 필생의 작품을 남긴다는 생각으로 성의를 다하여 번역해 주었으면, 그리고 출판인들은 먼 앞날을 내다보고 인간 교육을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지속적은 투자를 하여 충실한 번역물을 내도록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해주었으면 싶다.
이렇게 하여 좋은 번역 작품이 출판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주로 교육자들이 이런 책들을 선택해서 아이들에게 읽히는 독서 교육을 할 차례가 된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의 정수를 우리 아이들에게 읽힐 때 어떤 관점에서 지도를 해아 할까?
작품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의 지도 목표를 세울 수 있다.
①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가,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깨닫게 하고, 평화를 염원하고 평화를 지키는 노력을 모든 사람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② 사람다운 생각과 정을 가지고 바르고 참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은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인류는 한 가족이란 믿음을 가지게 한다.
③ 인간이 어떻게 해서 이 지구에서 삶을 이어왔는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사람의 길인가를 깨닫게 한다.
④ 온갖 어려운 일들을 당했을 때 다른 나라의 아이들을 어떻게 그것을 참고 어떤 슬기로 그것을 이겨냈는가?
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세상에서 다른 나라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 자기들의 바르고 깨끗한 마음을 지키고 키워갔는가?
⑥ 여러 가지 동물과 곤충, 식물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인간은 자연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⑦ 모든 나라의 문학은, 그 각 나라의 퐁토와 역사와 사회가 낳은 산물이란 것을 깨닫게 한다.
⑧ 항상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자기의 삶을 문학으로 키워가고 싶어하는 태도를 가지게 한다.
⑨ 세계의 명작이라고 하는 훌륭한 작품도 알고 보면 뜻밖에 잘못된 생각으로 씌어진 대목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⑩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무인도를 점령하거나 하던 강대국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입장에서 세계를 보고 생각하고 생동한 일을 문학작품으로 아름답게 쓰면서, 자기들이 당했던 어려움들을 이겨낸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꾸며 만든 사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도록 한다.
⑪ 우리도 우리의 처지에서 남의 나라를 보고 생각해야 하지만, 남의 나라를 침략한다든지, 보물을 얻으러 무인도를 찾아간다든지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망상이란 것을 알려야 한다. 그리하여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을 나라마다 할 뿐 아니라 나라와 나라가 손잡고 해야 한다는 것과, 세계가 한 나라같이 되고 온 인류가 한 동포가 되도록 노력하는 길만이 우리가 살아갈 길임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세계의 문학으로 아이들을 키워가는 문학 교육의 길이다.
그런데 아무리 세계의 문학을 아이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의 말로 씌어진 남의 나라의 문학이다.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문학 교육, 온전한 인간 교육을 할 수 없다. 우리의 아이들을 우리의 겨레가 되게 하자면 우리의 전통을, 역사를, 이 땅의 자연을,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이 일은 남이 할 수 없고 우리 자신이 해야 한다. 곧 우리 자신이 창조한 문학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옛날부터 이 땅에 전해 오던 이야기를 들려 주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앞날의 역사를 창조해 나갈 사람다운 바탕과 바른 정신을 가진 겨레의 아이들로 자라나게 하는 동화와 소설과 수필과 시를 우리의 손으로 써서 읽혀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는 우리의 문학작품과 외국의 문학작품을 아이들에게 주는 비율이 6대 4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문학이 풍부하다면 7대 3이 되도록 욕심을 부리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못된다 6대 4도 현재는 어렵다. 아무리 우리것이 빈곤하더라도 5대 5, 즉 반반은 되어야 할 터인데 실제로는 거꾸로 3대 7이 되어 외국문학이 절대다수다. 이것은 문학교육의 적신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다 그렇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외국문학-세계명작물들을 또 거의 모두 그 원전의 문학적 감동과 향기를 찾아볼 수 없는 줄임판 엉터리 번안물들이라, 이런 책으로 대강의 앙상한 줄거리만을 읽고 있는 아이들은 도리어 그 원전에서 부정되어야 할 측면만을 주로 받아들이는 경향조차 있다. 우리의 창작동화의 빈곤과 함께 민화 채집의 방치 및 실기 문제와 아울러 생각할 때 문학 교육의 황폐함이 그 극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을 안 가질 수 없다.
언제 우리의 아이들이 외국의 것이라도 제대로 번역된 진짜 문학작품을 읽을 수 있을까? 문학 교육이 없는 곳에 또 무슨 교육이 있겠는가?
-1987 봄 「외국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