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일치하는 사랑… 이승에서 천국처럼 살다간 영성의 대가
가르멜수녀원 입회했으나 서원 2년 만에 불치병 생겨
육체 고통 속에 영성 성장… 작품들 남기고 26세에 요절
영혼 깊은 곳에 머무는 하느님에 대한 현존 체험 강조
10월 16일 시성되는 가르멜회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수녀.가르멜수도회 제공
프랑스 출신의 가르멜회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수녀(Blessed Elizabeth of the Trinity)가 10월 16일 시성된다.
아직 한국교회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대의 위대한 영성가인 성녀 소화 데레사에 버금가는 심오한 영성으로 ‘소화 데레사의 영적인 자매’로 불리는 엘리사벳 성녀. 시성을 계기로 그의 생애와 영성을 알아본다.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성녀는 26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까지 9개월간의 병실 생활을 포함해도, 수녀회에 머문 기간은 불과 5년 남짓.
하지만 이미 10대 초반에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이끌림을 체험했고, 어려서부터 가르멜 수녀로서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는 뜻을 굳혀가기 시작했다.
애당초 그녀의 삶은 스스로 고백하듯, 그리스도의 정배로서 평생을 살아갈 것으로 지향돼 있었다. 육체적 고통과 신적 은총을 함께 체험하며 짧은 생애를 마친 성녀는
1984년 11월 25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고, 2016년 10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을 앞두고 있다.
■ 생애
엘리사벳 카테즈(Elisabet Catez)는 1880년 8월 1일 프랑스 부르쥐 지역 아보르의 군영 막사에서 태어났다.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가족은 디종에 정착한다. 7살 때 첫 고해, 12살에 첫 영성체를 한 성녀는 14세 되던 해 가르멜 수녀로서의 성소를 깊이 확신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녀에게서 예민한 감수성과 탁월한 예술적 기질을 발견했고,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해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에 입회를 반대했다.
21세가 되던 1901년 성녀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디종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다.
입회 후 일종의 ‘영적인 메마름의 시기’를 통해 성녀는 영혼의 정화를 체험한다. 세심증을 겪고, 하느님 현존에 대한 확신도 빛이 바랬다.
공동체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원장인 예수의 제르멘 수녀의 도움으로 성녀는 이내 어둠의 시기를 넘어서고, 입회 2년 뒤인 1903년 첫 서원을 했다.
수련 생활의 여정에서 성녀는 자신의 영적 여정을 인도하는 성인들을 만난다.
서원을 한 직후에는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이 지닌 ‘관상적 측면’을 새롭게 발견하고, 십자가의 성 요한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인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신화 은총’을 깨닫는다.
1904년부터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를 만난다. ‘대화’라는 작품에 수록된 ‘삼위일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성녀가 가장 사랑했던 기도였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청하는 모든 것을, 그 기도 안에 담을 수 없었던 성녀는 자신의 영성에 가장 핵심인 ‘삼위일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기도’를 작성한다.
놀라운 영적 진전을 보이던 성녀는 그러나, 1905년 봄,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불치병이었던 애디슨병에 걸린다.
불과 1년 반 후 임종까지 성녀는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육체적으로는 극도의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이 시기는 성녀의 영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을 읽던 그녀는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에페1,12)라는 말씀을 자신의 평생의 소명임을 확신했다.
이때부터 성녀는 자신을 표현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영광의 찬미’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성녀는 임종까지 9개월 동안 병실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은 은총과 함께 왔다.
성녀는 이 시기에 주옥 같은 작품들을 썼고, 영적 여정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하느님과의 ‘변모적 합일의 체험’을 한다. 마침내 1906년 11월 9일, 성녀는 숨을 거두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빛이요 사랑이며 생명이신 분께 나아갑니다.”
가르멜수도회 제공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수녀가 6년간 살았던 프랑스 디종의 가르멜수녀원 옛 건물.가르멜수도회 제공
■ 영성
성녀의 영성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 번째는, 영혼의 심연에서 이뤄지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현존 체험이다. 성녀가 체험한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었다.
존재의 근원이자 목표요, 혼신을 다해 사랑해야 할 정배였다. 성녀는 이를 이론이 아니라 삶의 체험으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영원히 찬미하는 영혼이 되고자 했기에 스스로를 ‘영광의 찬미’로 불렀다.
하느님은 영혼의 깊은 곳에 살고 계신다. 그래서 자기 영혼의 심연으로 들어가면, 바로 거기에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성녀의 체험이고 가르침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루카 17,21)
두 번째 특징은 이승에서 이미 천국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는 곧 천국이며, 성녀는 이미 이승에서부터 천국에서의 삶을 살고자 했다. 자신의 영혼 깊이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영혼을 하느님과 일치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성녀는 하느님과의 깊은 사랑의 일치는 인간의 영적 여정의 최고봉이고, 이미 이승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한 이들은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고 전했다.
성녀는 자신이 발견하고 체험한 삼위일체 하느님을 찬미하며, 모든 이들이 함께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초대했다.
성녀의 영성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영혼’이 되는 것이다.
이는
첫째 순결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이며,
둘째 ‘가야금’처럼 성령이 신묘한 천상 화음을 연주하도록 스스로를 내어 맡기는 유순한 영혼이다.
셋째 침묵하는 영혼이다. 침묵은 영혼을 단순하게 하고 영혼의 줄을 고르게 해서 하느님이 연주하시는 천상 화음을 낼 수 있게 한다.
넷째 일상에서 늘 감사하고 그분 안에서 성장하는 영혼이며, 다섯째 영혼의 심연으로 들어가 그 안에 현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 대구가르멜수도원장 윤주현 신부 인터뷰
“거룩한 영적 여정으로 평범한 모든 이들을 초대”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성녀는 소화 데레사 성녀에 버금가는 심오한 영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이들을 거룩함으로 초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는 엘리사벳 성녀가 특별히 평신도들에게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성녀의 저술 중 절반 이상은 친구와 친지, 친척들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윤 신부는 이 편지들을 통해 성녀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 체험한 하느님과 합일의 경험을 전하고, 동시에 그들을 자신의 영적 여정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고 설명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제5장은 ‘보편적 성화 소명’을 말합니다. 누구나, 교회 안의 어떤 계층이든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완덕으로 초대받아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윤 신부는 공의회의 가르침과 똑같이, “100년도 훨씬 더 된, 오래 전의 봉쇄 수도원 수녀가 지금 현대인들을 ‘성성’(聖性)으로 초대하고 있다”면서 바로 그 때문에 성녀의 영성이 현대 세계에 매력적이라고 전했다.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성녀의 영성을 전하기 위해 윤 신부는 최근 원전 번역에 총력을 다했다.
“원전이 번역돼야 영성이 깊이 있게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 윤 신부의 지론이다.
때문에 학술적 깊이를 지닌 ‘가르멜 총서’,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르멜의 향기’, 포켓용으로 묵상과 기도에 도움을 주는 소책자 ‘가르멜 산책’ 등 가르멜 성인들의 원전과 연구서들을 범주별 시리즈로 출판하고 있다.
특별히 가르멜 총서 제25~27권은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성녀 전집으로 기획했다. 윤 신부는 이미 2006년부터 번역을 시작했고, 시성식에 즈음해 보다 많은 신자들이 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출판에 힘썼다.
박영호 기자 (가톨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