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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성] 관상 :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것
관상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숨어 계신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몰랐던 하느님의 다른 면을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의 체험은 다양하게 우리에게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외부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 내면 안에 계신다.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자아인 ‘참 자아’(the true self)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는 ‘거짓 자아’(the false self) 혹은 ‘경험적 자아’(the empirical self)가 공존한다. 많은 영성가들은 관상을 거짓 자아에서 벗어나 참된 자아를 찾는 체험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권고한다. 가령 토마스 머튼은 자신의 저서 『새로운 사람』(The New Man)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상의 체험은 우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삶과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초월적 원천에 대한 체험입니다. 관상은 자신의 가장 은밀한 자아의 바로 그 중심에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신비입니다. 그분의 현존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올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다음 우리의 참된 자아를 찾게 되는) 홍해의 갈라짐을 통해 신비스럽게 그곳을 지나가게 됩니다.” 관상은 피상적이고 외적인 ‘나’가 사실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관찰과 반성의 범주를 넘는, 설명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나’, ‘참된 자아’를 자각하는 것이라고 머튼은 강조하였다.
이러한 참된 자아를 찾는 관상의 여정은 자기중심적이고 물질중심적인 오늘날 우리 시대에 관상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참된 자아를 회복한 이는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오히려 잃어버림으로써 내 안에 있는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자아를 회복한 이들이다. 그래서 더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신만을 사랑하며 사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며 살게 된다. 모든 재물이나 권력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알기에 이에 대해서도 자유롭다. 하느님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고 나누며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것이요, 예수님은 자신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로 관상의 길에서 자아와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관상을 통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체험할 때, 우리는 이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각각의 이웃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모두가 고유한 존재들이며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들이 아니며 동시에 서로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 모든 이들은 맞물려진 관계의 네트워크 안에서 함께 연결되어 있고, 우리 모두는 사랑의 숨겨진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참모습과 고유함을 발견하게 된다. 서로의 다양성 안에서 각자가 사랑으로 더 깊이 연대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과 더 충만한 관계를 맺게 된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하느님 안에서 다른 모든 이가 같이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이 ‘상호 의존’이라는 감각과 우리가 그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상호 책임’과 ‘상호 연대’라는 새로운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참된 관상은 사회 정의와 염려에 대한 감각을 중단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은 자의 책임감’이다.
따라서 사랑의 열매가 없는 관상은 울리는 징에 불과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관상의 깊은 체험을 한 이가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는 그릇된 관상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더 깊이 하느님을 체험할수록, 더 깊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경계를 넘어간다. 나와 다른 타인뿐만 아니라 자연과 피조물들로 이어지게 된다. 보편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이 하느님의 본성이듯이 관상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도 그렇게 사랑으로 성장해 나가는 이들, 사랑이 되어가는(becoming love) 이들이다. 『새 명상의 씨』에 나오는 머튼의 다음 말은 관상의 상태를 참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고 기꺼이 그분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나는 그분의 사랑을 내 마음에 간직합니다. 이제 내 뜻은 그분의 사랑과 같고 사랑이신 그분이 되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그분의 기쁨을 내 영혼에 받아들입니다.” 참된 자아를 찾은 이는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어 그분의 사랑과 기쁨을 세상에 나누는 사람이다.
[현대 영성] 관상은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이 아닙니다
관상에 대한 그릇된 개념 중의 하나는 관상을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으로 여기는 것이다. 초기 사막 교부들에게 신비주의(Mysticism)와 관상은 직접적인 하느님 체험을 다르게 표현한 두 용어였다. 그런데 16세기에 들어와 신비 신학은 점점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같은 신비가들을 연구하는 학문이 되어 갔고, 심지어 『가르멜의 산길』이나 『완덕의 길』과 같은 그들의 저서들은 영적인 삶의 단계를 상승하게 하는 기술을 배우는 안내서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관상에 관한 생각은 모호해지거나 잊혔으며 신비주의는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에 빠지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고, 보통의 사람들은 이를 피해야 하며 누군가 이런 체험을 하면 그 신앙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토마스 머튼은 단호하게 주장한다. “관상은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이 아닙니다. 이것은 광포한 힘에 의해 ‘점령된’ 감각적인 광신도 아니요, 신비적 광란에 의해 자유 안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새명상의 씨』) 이교도의 신비적 종파들과 원시적이고 밀교적 전례들이 주는 신비주의에 대한 부정적 암시는 현대에 와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사실 신비주의나 관상은 같은 것이며, 둘 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이는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이며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는 부득이하게 언어와 개념, 이미지 등 매개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친교(communion)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러한 매체가 불필요해진다. 언어의 영역을 넘어가는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의 영(靈)이 사람 안에 직접 내재하여 활동하실 때에는 사람의 사고와 감정과 상상은 하느님과의 ‘침묵의 일치’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인간의 언어와 개념 등은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계시하고 활동하시려는 자유를 제한하기에 이른다. 관상은 이러한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깊이 들어간 관상가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모두 침묵시키고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밀한 친교를 체험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존재가 본질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도달해야 할 ‘대상’이나 ‘목적’이라기보다는 ‘삶의 주제요, 내용이며 생명의 원리’가 되기에 이른다.
나아가 이제는 관상적 삶의 여정에서 은총의 선물로 주어지는 하느님 체험에 도달하려는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관상에서 오는 고요함과 평온 역시 하느님이 아니기에 영적 집착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관상을 통해 무엇인가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알기에 일상의 소소한 것에 더욱 충실하게 된다. 자신을 하느님께 집중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겸손하고 순수하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깊은 관상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에 도달하게 된 영혼은 자신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의 현존을 일깨워 주는 뜻밖의 은총의 선물을 기다리며 묵묵히 그리고 항구히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릴 수 있는 은혜도 얻게 되는 것이다.
관상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도달해야 할 삶 자체, 즉 천국에서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사람 가운데 “저는 결코 낙원에서 하느님을 뵙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을 뵙고 그분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희망한다. 아담이 있었던 인간 본래의 자리인 낙원에서 하느님과의 참된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 바로 관상이다. 이와 관련해 토마스 머튼은 『새 명상의 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조의 목적에 다다른 모든 사람은 다 천국에서 관상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많은 사람이 아직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이런 초자연적 영역으로 들어가 새로운 환경을 맛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리신 새 아담, 그리스도의 목숨 바친 자기희생적 사랑은 우리도 관상을 통해 새 아담이 되어 낙원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이 낙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모든 외적인 허물을 다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나는 하느님과 함께 벌거벗고 에덴동산에서 기쁘게 주님과 함께 거닐 수 있는가?’ 아니면 ‘부끄러움 속에서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대 영성] 침잠의 영성 (1) 하느님 안에 고요히 침잠하고 싶은 이들을 위하여
개인 피정을 갔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느님께 침잠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요? 내적 고독과는 다른 건가요?
분주한 일상 속에서 지친 우리는 때때로 모든 것 다 잊고 떠나 홀로 고요히 하느님 안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막상 개인 피정을 하기 위해 피정집에 머물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잠을 실컷 자는 이들도 있고, 성경이나 영적 서적을 읽는 이도 있다. 숲을 산책하거나 성당에 홀로 앉아 오랫동안 명상에 잠기는 이들도 있다. 같은 피정 공간을 사용하는데 어떤 이는 마지막 피정 면담 때 너무도 충만한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다며 감사의 인사를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지루하고 힘들고 불편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여기에는 공통적인 피정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다. 기도의 개념(기도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봉헌된 시간이다)처럼 피정의 첫 번째 목적이 ‘내’ 영혼의 쉼이나 ‘내’ 마음의 평화, 혹은 온갖 분석을 통해 ‘나의’ 내면의 어둠을 찾는 것에 있어서는 안 된다. 피정은 ‘하느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분 겉에 머물며 그분께 집중하여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특별한 시간이다. 우리가 많은 봉사와 노동, 그리고 관계들에 얽혀 잊고 지냈던 하느님 품에 안겨 그분 안에서 영적 쉼 시간이다. 피정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인가 성취하려는 태도는 피정을 세미나, 심리적 안정, 영적 공부나 수련 등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수녀원과 수도원에서 피정 지도를 할 때 많은 경우 한 시간 정도의 강의를 듣고 나머지는 혼자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하느님과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의 경우에는 아주 구체적인 피정 시간표를 짜고 지루할까 봐 ‘찬양의 시간’이나 ‘레크리에이션’도 갖게 하고 마지막 날에는 ‘주(酒)님(?)과 함께하는 친교의 시간’도 마련해 주는 경우도 있다. 고요히 혼자 머무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평신도가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필자가 있는 명상의 집에도 매달 정기적으로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며칠 동안 관상기도를 하며 피정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피정이나 일상의 삶 속에서 고요히 마음을 모으고 하느님 곁에서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적 침잠의 상태에 도달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흩어진 생각과 마음을 고요히 모으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집중하는 기도나 피정과 같은 시간은 하느님의 은총인 관상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준비로써 이를 영성가들은 Recollection, ‘침잠’(沈潛)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침잠’이란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침잠의 영성에 대해서 낯설게 느끼는 이가 많을 것이다. ‘Re-collection’은 ‘다시 모은다’는 뜻으로, ‘마음을 가라앉혀서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함’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가톨릭에서 이 용어는 “영성 생활에서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로 집중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용어는 하느님께 집중하기 위하여 외적이거나 세속적인 일로부터 마음을 물러나게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영혼이 하느님과 홀로 있는 내적 고독과 같은 의미이다.
침잠은 활동적인 침잠(active recollection)과 수동적인 침잠(passive recollection)으로 나눠진다. 전자는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의 노력이 더해져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침잠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영혼이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나 신적인 완전함에 집중할 수 있는 성향을 얻을 수 있다. 후자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에 의존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다. 이러한 수동적인 침잠을 많은 신비가들은 주부적 관상(注賦的 觀想)의 초기 단계로 묘사한다.
수동적인 침잠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첫 단계는 활동적인 침잠이다. 육체적, 정신적 긴장을 풀고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고요히 머물며 마음을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침묵과 고독으로 마음을 집중하다 보면 활동적인 삶의 다양한 의무들이 내면의 한가운데로 조용히 침잠 될 수 있다. 외부로부터의 다양한 일들에 사로잡히는 것은 침잠의 장애물들이다. 자주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 속에 머묾으로써 침잠은 그 자체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게 되고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가장 좋은 길이 된다.
[현대 영성] 침잠의 영성 (2) 침잠에 들어간 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현존의 빛 안에서 보게 된다
‘침잠’ 혹은 ‘거둠’은 추리적 묵상과 관상 사이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관상(Contemplation)의 은총을 얻기 위한 준비로 세 가지를 언급하는데, 추리적 묵상(Discursive Meditation), 거둠(Recollection), 고요의 기도(Prayer of Quiet)가 그것이다. 여기서 Recollection을 데레사 성녀의 영성을 연구한 이들은 ‘거둠’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외부로 흩어져 있던 자신의 지성과 기억, 의지 및 감각들의 활동을 거두어 잠잠하게 하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 안으로 모든 관심을 집중하여 그곳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통교하는 것이 바로 거둠이다.
토마스 머튼도 관상을 위해 필요한 침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마음은 하느님께 집중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나야 하고, 이를 위해 감각들은 침잠해져야(be recollected) 한다고 강조한다. 만약 감각들을 온종일 통제할 수 없다면 이것은 기도를 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기도 때에 하느님께 집중하여 믿음의 분위기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적절한’ 침잠은 모든 기도 시간에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에서 머튼은 “침잠은 영적 초점의 변경이며 우리의 온 영혼을 자신 너머, 저 위의 존재, 하느님께 맞추는 일”이라고 말한다. 즉, 세상에서 어지럽게 살았던 우리의 모든 삶과 감각들을 정화하고 하느님께 집중하여 그분의 뜻하심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침잠인 것이다. 그는 침잠과 집중을 구분하는데, 이 둘은 공존할 수 있지만 사고를 한곳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침잠은 “단순화를 통해 사고를 흩뜨려 긴장과 자기 관리의 수준 위로 들어 올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머튼이 말하는 침잠은 외적인 것들을 배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을 질서 있게 정리해 주는 것이 바로 침잠이다. 침잠에 들어간 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현존의 빛 안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잠은 하느님의 부재가 아니라 현존의 상태이다. 머튼은 침잠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앞에 현존하도록,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에게 현존하도록, 그리고 그분 안에서 다른 모든 것에 현존하도록 만들어 준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침잠의 열매는 무엇일까? 침잠은 무엇보다 현재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만들어 준다. 환상이나 헛된 망상 속에서 만들어 놓은 자신을 쫓으며 살아갈 때, 혹은 현실을 회피하며 과거나 미래에 얽매여 있을 때 우리는 결코 하느님 안에서 침잠할 수 없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먼저 현재의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삶의 근심이나 주의를 끄는 것들이 우리를 스스로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그러한 것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한, 마음은 집에 있지 않다. 실체에서 벗어나 환상에 빠져 그것을 쫓고 있는 것이다…. 미래와 과거는 항상 우리가 닿지 못하는 곳에 있으므로 우리 것이 아니다. 현재야말로 우리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이다.” 침잠은 우리가 ‘오늘’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침잠은 또한 외적인 활동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균형된 활동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지나친 외적인 활동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마음은 침잠에 방해가 되지만,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 안에 침잠해 있는 사람은 외적인 활동 가운데에서도 내적 순수성과 외적 주의력 사이에 균형을 가질 수 있다. 참된 침잠된 활동과 기도의 비결은 결국 자신이나 자신의 행동, 기도의 결과에 대해 초연하게 대처하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침잠에 들어가는 것을 치명적으로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다. 침잠은 궁극적으로 믿음에 근거하고 걱정, 근심은 믿음의 핵심을 침식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침잠은 영혼을 빛이나 공기가 없는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기에 내적인 금욕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있어 진정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행위 자체가 아닌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더 깊이 침잠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의 행위는 더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분주하게 일상을 살면서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침잠의 영성은 참된 하느님과의 친교(Communion)를 알게 해 줄 것이다.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도 외로운 상태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독과 침잠 속에서 자신의 외로움과 평화롭게 지내는 법을 배운, 자연적인 친분이 주는 환상보다 고독의 실체를 선호할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보이지 않는 친교를 알게 된다.”(토마스 머튼)
[현대 영성] 성모님 당신의 보살핌에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
“성모님, 당신께 저의 수도성소를 봉헌합니다.” 필자는 수도회 입회를 결심하던 고등학교 시절 매일 등교길에 묵주 기도를 바치며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성소를 키워갔다. 당시 부모님과 떨어져 친척집에 살면서 외로움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기에 성모님을 어머니로 생각하며 따뜻하게 안아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으로 여겼던 것 같다. 수도원에 입회해 생활하면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은 끝기도 후, 성당의 불이 모두 꺼지고 고요히 성모상 앞에서 홀로 기도할 때였다. 그러나 신학을 배우고 수도생활의 경륜이 쌓여갈수록 성모님보다는 예수님께 더 집중했던 것 같다. 성모님께로 나아갈수록 성모님은 사라지고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30년이 넘은 수도 여정에서 성모님께 간절히 전구를 청했던 때가 언제인지 되돌아보면 평화로울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낼 때였던 것 같다. 자신의 나약함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어머니 성모님께 기도를 청하며 용기와 힘, 지혜와 분별력을 달라고 수없이 간구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성모님은 필자에게 ‘지켜보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릴 때에는 성모님께서 모든 것을 돌보아 주었다. 그러나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아들을 간섭하지 않으셨다. 지켜보는 사랑을 하셨다. 심지어 아들을 찾아갔을 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고 반문하시며 오히려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 어머니고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얼핏 보면 어머니를 문전 박대(?) 하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아들 예수님의 말씀에서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모님은 그 누구보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신 분이셨기에 참된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의 어머니신 것이다.
우리도 성인이 되어 냉담하고 있는 자녀들이 있다면 성모님의 지켜보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을 배워야 할 것이다. 자녀들이 하느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하느님을 떠난 것일 수도 있다. 간섭하는 ‘부모님의 하느님’을 넘어 ‘나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방황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때 부모는 성당에 다니라는 잔소리보다는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날마다 미사하고 성당에서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집안을 돌보지조차 않고 이웃과 다툼을 하고 있다면 자녀들은 부모님이 믿는 하느님과 더 멀어지게 된다. 하느님은 성당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모든 곳에 계신 하느님, 특히 사랑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지켜봐 주고 기도해 주며 자신이 먼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께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함께하셨다. 십자가 아래에서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고통과 죽음에 함께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도 자녀들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함께해 주어야 할 것이다.한편, 필자가 성모님을 향한 새로운 영성을 배우게 된 것은 토마스 머튼을 통해서이다. 6살에 어머니를 위암으로 잃고 홀로 성장했던 머튼 신부님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성모 신심이 더욱 각별했다. 특별히 쿠바의 성모 성지를 순례하던 중 미사 때 강렬한 하느님 체험을 한 후, 그는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하고 첫 미사는 성모님을 위해 봉헌할 것을 서약하게 된다. 그는 이 체험에서부터 수도생활을 마칠 때까지 성모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살았다. 그에게 있어 성모님은 어머니요 연인이었으며, 관상생활의 스승이었다. 성모님의 아들로서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신뢰를 드렸으며, 사랑하는 여인인 마리아에게 순수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결핍된 모성애를 성모님의 품에서 채우며 성모님과 함께 수도 여정을 걸어갔던 것이다. “저의 온 삶은 변해야 합니다.”라고 성모님께 고백하는 기도문 속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성모님과 하나 되어 살았는지 잘 보여준다.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여, 저는 사랑 넘치는 당신의 중재와 보살핌에 저 자신을 온전히 맡깁니다. 당신은 저의 어머니시고, 저는 당신의 소중한 아들, 그러나 근심, 갈등, 실수, 혼란투성이인데다 자칫하면 죄를 짓곤 하는 당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온 삶이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제가 필요로 하고 근심하는 모든 것들과 함께 제 삶을 당신께 맡깁니다. 제가 자신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소서.” 아멘 (Learning to Love, 360).
[현대 영성] 성모님은 맑고 깨끗한 창문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에 대해 다양한 종류의 호칭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원죄 없으신 탄생’ ‘평생 동정’ ‘미혼모’ ‘과부’ ‘성모 승천’ ‘그리스도의 어머니’ ‘여왕’ ‘성모 발현과 기적’ ‘전구자’ ‘바다의 별’ ‘평화의 모후’ ‘천상의 모후’ 등등.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모님에 대한 이미지는 ‘주님의 종’이었다. 왜 그가 ‘주님의 종’으로 성모님을 강조한 것일까? 스스로를 ‘주님의 종’으로 묘사한 성모님을 통해 머튼은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초기 머튼에게 성모님은 모든 은총의 중재자였다. 그래서 성모님께 전구의 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후기 머튼에게 성모님은 ‘주님의 종’으로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신 분,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어 주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 드러나지 않는 감추어진 삶을 사신 분, 아들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신 분이셨다. 성모님은 머튼에게 있어 관상의 모델이 되었다. 성모님의 단순한 관상적 삶에 대해 머튼은 『논쟁점』(Disputed Questions)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모님은 인간과 모든 그 일상 안에서, 어떤 드라마틱하거나 굉장한 행복감 없이 그녀의 삶의 방식 안에서 단순하고 겸손하게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 가까이에 계신다.”
관상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머튼은 성모님의 생애와 예수님을 향한 태도 안에서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역할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받아들인 성모님의 완벽한 겸손과 순종에 매료되었으며, 드러나지 않게 자신을 감추고 온전히 예수님과 일치의 삶을 사신 성모님과 같이 자신도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관상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럼 머튼이 말하는 관상의 모델로서의 성모님의 순종과 자기 비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성모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에 ‘왜’라고 하지 않고 ‘예’라고 응답하셨다. 이 성모님의 ‘예’라는 순종의 응답을 통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성모님은 ‘말씀’이신 아드님과 태중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긴 기다림 속에서 함께하셨다. 관상은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관상은 성모님께서 아드님의 탄생을 위해 기다리셨고, 아드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기다리셨고, 아드님의 부활을 기다리셨듯이, ‘말씀’이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재탄생하시기 위한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성경 말씀을 읽고 맛들이며, 고요한 미풍 가운데 들려오는 침묵의 말씀을 들으며 기다릴 때, 어느 순간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하나 되어있는 체험을 하게 된다.
성모님께서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아드님과 일치의 삶을 사셨기에 머튼은 성모님을 유리창에 비유하며 그분의 자기-비움과 깨끗함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의 수도생활 초기에 벌써 일어났다. 그는 수도원 입회 후 6년째 되던 해 일기에서 “하느님의 어머니, 1947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에 첫 저녁 기도를 바친 다음부터 (당신에 대한 창문의 비유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머튼은 『새 명상의 씨』에서 “이기심이 전혀 없고 아무런 죄도 없는 성모님은 햇빛을 들여보내는 기능 이외에 다른 기능은 전혀 하지 않는 맑은 유리창과 같이 깨끗하십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성모님은 너무도 맑고 투명한 창문이시기에 성모님을 바라보지만 성모님은 사라지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머튼은 성모님을 창문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노래했다.
저의 뜻은 창문과 같기에, / 그리고 태초의 탄생이 교만이 아님을 알기에,
저의 삶은 빛에 의해 창문과도 같이 사라짐입니다.
저는 신랑의 태양의 강렬한 빛 안에서 온전히 사라졌습니다.
저의 사랑은 창문과 같기에, / 그리고 태초의 먼지와 같은 탄생이 수치가 아님을 알기에,
저는 저의 죽음의 새벽까지 온 밤을 기다렸습니다.
제가 저의 성령과 혼인하던 날, 그리고 거룩한 변모에 의해 빛 안으로 온전히 사라졌습니다.
머튼은 1962년 강론에서 “순수함과 겸손의 완전함에 의해 성모 마리아보다 하느님의 빛을 더 완벽하게 소유한 이는 없었다. 그녀는 빛이 비춰지면 온전히 사라지는 듯 보이는 깨끗한 유리창처럼 진리와 충만이 하나 되었다”라고 성모님과 하느님의 일치를 유리창에 비유하여 묘사하고 있다.
깨끗하고 맑은 유리창이신 성모님에 관한 머튼의 가르침을 묵상하며 지금 내 마음은 얼마나 깨끗한가 반성하게 된다. 지금 사람들이 나를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나는 나만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
[현대 영성] 자신을 온전히 비우셨기에 하늘의 큰 영광을 채우신 성모님
성모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신 분이시다. 그녀가 열어 준 이 가능성의 출발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 비움’(self-emptying)이다. 성모님의 가장 큰 영광은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자신을 비우셨기에 오히려 더 큰 하늘의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새 명상의 씨』에서 “비움을 찾는 것은 성모님을 찾는 것이다. 비움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은 성모님이 하느님으로 충만해 있듯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모셔오는 성모님의 사명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비우고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사실 당시 처녀가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죄에 해당되었다. 그래서 성모님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고백은 돌 맞아 죽을 각오로 한 엄청난 말인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천사의 소식에 오롯이 믿음으로 응답한 그녀는 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어야 했으며, 태어난 아기가 자라고 성장하고 공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하느님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 숨은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무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고, 그 아들을 먼저 무덤에 안장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렇듯이 성모님의 영광은 순종과 자기 비움, 기다림의 인내와 드러나지 않은 삶,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고통의 열매였다. 또한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늘로 불러 올림을 받으심으로써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비우며,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면 하느님의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삶의 고통 중에도 믿음과 자기 비움을 통해 성모님을 따라갈 때 우리도 성모님의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관계는 성모님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듯이 비워진 우리 자신 안에 예수님이 사실 때 완성된다(갈라 2,20 참조).
성모님의 자기 비움과 순종의 삶은 우리에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간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평생 동정’ ‘하느님의 어머니’ ‘원죄 없는 잉태’ ‘성모 승천’ 등의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이다. 성모님은 합리적 사고를 넘어 납득할 수 없는 신비로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그 안에서 예수님과의 일치를 선물 받았다. 우리 삶 가운데에서도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것이 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이성적인 생각을 넘어 자신의 것을 온전히 내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반면 미운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다른 모든 것도 부정적으로 보이는 경향도 생겨난다.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도 합리적인 인간의 사고를 넘어 더 큰 사랑과 자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마태 20,1-16; 루카 15,11-32 참조).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셨다. 우리도 우리 삶 안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있는 아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우리는 더 큰 사랑의 선물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 앞에 성모님처럼 믿음으로 순종하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모님의 자기 비움의 영성을 통해 일치(union)와 친교(communion)의 삶을 배워야 할 것이다. 자신의 뜻을 온전히 비우신 성모님,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자신의 것을 모두 비우신 아들 예수님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셨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를 통해 서로 참된 친교를 나누셨다. 이 친교는 영적인 친교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친교를 포함한다. 성모님은 태중에서 예수님과 몸의 일치를 이루셨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마음의 일치를 이루었으며, 하늘로 오르심으로써 영적 일치를 이루셨다. 일치를 이루신 두 분의 사랑의 친교는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성체를 통해 몸으로 예수님과 일치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마음으로 일치를 이루며, 우리의 영이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늘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삼으셨기에 성모님과 교회는 분리될 수 없다. 성모님과 교회의 지체인 우리 역시 분리될 수 없다. 가톨릭교회 역시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성령 안에서 영적인 일치를 이루고 세상과 친교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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