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눈을 밝히 뜨자 (막 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이 시간에 “영의 눈을 밝히 뜨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몸이 1000량이라면 눈이 900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눈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못 듣고는 살 수 있어도 맹인으로는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눈이 보배입니다.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눈을 가진다면 그것만큼 보배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는데, 이처럼 눈 뜨는 문제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질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벳세다에서 한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목할 점은 바로 이 사건 후에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단순히 육신의 눈이 아니라 신령한 눈을 뜨는 비밀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영의 눈을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세상 관점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23절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왜 예수님께서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을까요? 마을이란 사람 사는 집단입니다. 일종의 한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관점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지요. 우물 안의 개구리는 그 세계가 전부인 줄 압니다. 우물 밖의 세상을 모른 것입니다.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이처럼 신령한 눈을 뜨려면 인간과 세상의 관점에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내 눈에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보편적일지라도 다 진리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사55:8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전3:18-20에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말한다면 신령한 눈을 가질 수 없습니다.
2. 자기 눈의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23절에 "눈에 침을 뱉으시며" 예수님의 행동은 계속적으로 이상한 행동입니다. 눈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를 통해서 무언가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이지, 우리에게 그렇게 신유를 행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 얼굴에 침을 밷는 일은 커다란 수치와 부정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신 것은 우리 인간의 눈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네 잘못된 눈 때문에 네가 망한다.’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죽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눈이 문제입니다.
또 롯의 눈에는 타락한 소돔성이 하나님의 동산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불 심판의 위기를 당했습니다. 역시 유대인들의 눈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요셉의 아들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많이 배웠다는 바울도 그가 예수를 만나보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의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박해를 했습니다.
그 뿐일까요?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정탐군들의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들은 작고 적들은 심히 크고 강대한 모습으로만 보였기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눈인데 어찌 그 눈에 침 뱉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가치관으로 살다가 지옥 가면 누구의 잘못입니까? 지금까지 이 잘못된 눈 때문에 넘어졌고 실패했고 멸망할 뻔했었습니다.
주님께서 침을 뱉으셨다면 우리는 자신의 눈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침을 뱉어야 합니다. 신령한 눈을 뜨지 못하면 멸망의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요9:39-41).
3. 신령한 눈을 뜨려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23-24절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먼저 두 번 안수하셨는데 왜 두 번 하셨을까요? 능력이 부족하셔서가 아닙니다. 영의 눈을 열기 위해서는 두 단계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의 눈이 열립니다. 시18:8에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아 줍니다. 시각이 바꿔지면 세상의 만사와 만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로, 인간이 구세주가 필요한 죄인으로, 예수님이 구세주로, 만물이 창조물로,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음을, 교회가 하나님이 피로 사신 몸으로 보이고,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내세관이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지식적인 배경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서양인의 시각과 동양인의 시각이 다르고, 불신자와 신자의 시각이 다릅니다. 헬라의 철학이나 로마의 현세적인 시각이나 불교 유교 유물론 진화론적인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그러면 우리 눈이 밝아집니다.
4. 신령한 눈을 뜨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안수해 주신 것처럼 말씀의 지식도 좋지만, 우리가 진실로 느껴야 합니다. 마치 “안다”는 말이 히브리어어로 “야라”인데 관계적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계시다 해서도 믿지만, 내가 매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산다면 더 좋습니다.
부흥사 무디가 성령을 체험하고 쓴 글이 있습니다. “뉴욕에서의 어느 날, 아, 그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입 밖에 내기조차도 조심스럽다.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하며, 나는 단지 하나님이 그의 자태를 나에게 드러내셨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나는 너무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하나님의 손길이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말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나는 전도를 계속했다. 설교는 전과 거의 같았고 그렇다고 새로운 진리를 표현한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다. 나는 결코 축복의 체험 이전의 나날들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온전히 변화하시기를 바랍니다.
욥도 전에는 내가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내가 주를 눈으로 뵈옵나이다 했던 고백과 같습니다. 사도 요한도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나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1:1-2)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눈이 열리려면 신령한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26절에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셨는데 집이 무엇일까요? 자기 집이죠. 그런데 달리 보면 집은 교회입니다. 교회 생활 잘해야 신령한 눈을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천국 가는 길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16:25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했듯이, 지금 이 시간에도 진리 같지만 진리 아닌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신령한 눈을 떠야 합니다. 뜨더라도 밝히 떠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세상적인 시각을 철저히 부정하고 교회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밝은 눈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밝히 보고 바로 행하는 신령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