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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로만(2) (히 4:14-16)
종교 개혁자들의 표어가 오직 믿음, 오직 성서, 오직 은혜로만 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오직 은혜”라고 할 때
그 은혜는 무엇에 대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까?
루터는 이 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데 있어서 우리가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직 은혜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은혜라 할 때에 그 은혜의 내용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성경말씀 히브리서 4장 14-16절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즉, 죄가 아직 이 땅에 있지 않을 때,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어느 곳에 가던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다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따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이들에게 즐거움이었지만,
이들이 죄를 짓고 난 후 하나님이 동산을 거닐 때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수풀 속에 숨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멀어짐입니다.
처음에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지만
죄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피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 때문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사람들의 죄를 씻기 위해서 희생제물을 대신 잡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인간의 죄가 죄 없는 어린양을 잡아 죽이면
사함을 받고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피 흘림이 바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바쳐진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독일어에 wider-gut-macheng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뜻은 “wider-다시 gut-좋은 macheng-만들다”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명사로는 “배상금”을 뜻하지만
그 의미를 곱씹으며 생각해 보면 “좋은 관계 만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은 1, 2차 대전을 일으킨 나라이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이런 과오를 범한 독일 정부는 전쟁이 끝난 후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배상금(wider-gut-macheng)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2008년까지 독일이 지불한 배상 금액이 한국 돈으로 “10경”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국 정부 1년 예산의 30배입니다.
독일정부는 이렇게라도 해서 그 피해당한 가족들과 다시 좋은 관계를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 보면,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이라 칭합니다.
히브리서 전체를 보면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칭하면서
또 다른 표현으로 제물, 어린양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은 제물을 죽여 바치는 제사장이 됨과
동시에 제물 자체가 되시는 분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사람들은 어린 양을 제물로 잡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 보면 예수님이 제물, 어린양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독일 정부가 10경을 지불하여 사람들과 좋은 관계가 되었듯이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셔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직 은혜로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 받으니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또 15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여기 나오는 대제사장은 예수님이신데,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은 문법적으로 보면 이중부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법에서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의 뜻인데 즉, 강한 긍정을 이중부정으로 표현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진정으로 강하게 동정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제 삼자 입장에서 우리를 동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진심으로
마치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심정으로 우리를 깊게 이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연약함이나 단점을 보면 어떻게 반응을 하십니까?
예수님처럼 진심으로 그 약함을 동정하는 분이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이나 약점을 보면 즉시 공격합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안 그렇지만 나중에는 비난하거나 아픈 부분을 계속 공격합니다.
제가 부산에서 대학교 교수로 섬겼던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우리 부부가 시장을 지나다가 우연히 금붕어 파는 곳을 들리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신혼 때이기도 해서 신혼 분위기가 더 날 것 같아서
금붕어 6-7마리를 사다가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제가 그 금붕어들을 애지중지하게 키우는데
어느 날 유심히 보니 금붕어 한 마리의 몸에 조그마한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상처 난 금붕어를 신경 써서 관찰을 하였는데,
다른 금붕어들이 상처 난 그 금붕어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금붕어가 일주일 정도 지나니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사람에게도 이런 똑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금붕어처럼 다른 사람의 연약함, 약점을 공격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런 경험을 못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약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철학의 ex eventum 이라는 공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것 이외는 이해할 수 없다는 공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에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사랑을 정의하면
“사랑은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것”이 됩니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들의 입장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공감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그러다 보니 공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 가족을 예를 들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가정에서 부인에게 있어 가사 일이 얼마나 많고 힘이 듭니까?
그래서 제 집사람이 제게 항상 가사 일이 힘들다고 합니다.
저녁이 되면 집 사람은 몸이 아프다고 저에게 몸을 주물러 달라고 합니다.
그럼 저는 몸을 주물러 주면서도 속으로 ‘집도 좁은데 뭐가 힘들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집안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집안일을 제가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인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집사람이나 우리 아이들은 제가 설교준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목요일 정도 되면 제게 “설교준비 안하세요?”라고 합니다.
금요일, 토요일이 되면 “아버지, 설교준비 안하고 뭐 하세요?”라고 자꾸 이야기 합니다.
그 때 제가 힘들다고 하면 아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가 택한 일인데 좋아해야지, 왜 힘들어 합니까? 기쁘고 즐겁게 해야죠.”
저는 집안일을 별로 경험하지 못했고
집사람이나 아이들은 설교 준비하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각자가 남의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 외에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입장을 100% 이해 못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든지 아니면 공동체에서든지
이해받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고독하고 외로워집니다.
얼마 전에 신문 기사를 보니, 행복 전도사였던 최윤희 씨가 자살을 했습니다.
제가 이 분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꽤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최윤희 씨는 오랫동안 행복 강연을 하셨고 행복에 대한 책도 20여권 이상 썼고
TV 토크 쇼에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분에 대해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는데,
이분은 루푸스란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루프스란 병이 얼마나 힘든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어떤 분이 이 병을 앓은 적이 있기에
이 병이 얼마나 힘든 병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최윤희씨는 병으로 많은 통증이 있었고 그래서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쓴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정말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제가 ‘행복’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방법으로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행복을 말해왔지만 그동안 루프스란 질병에 시달려 왔는데 그것이
나에게 700가지가 넘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아무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저는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700가지가 넘는 고통에 시달려 왔는데
그럼에도 그런 고통을 감추고 행복을 말하려니
그 사람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녀를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니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웠겠습니까?
결국 이 분은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15절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약점을 이해하고
동정하시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말 못할 약점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식이나 부모 친구에게도 말 못하는 어려움이 있을 때
신자는 예수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의 고통과 연약함을 이해 못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이해하고 동정하시며
받아주시고 감싸주시며 사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로만에서 은혜는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루프스 병을 않던 최윤희씨가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그분의 고통을 예수님이 다 받아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런 기사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하셨습니다.
심리학자 레오 버스키야가 지은 책 중에 이런 이야기 있습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그 할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켰지만
암 선고를 받은 그 할아버지는 성격이 난폭해지고
주변에 욕을 해대고 아무도 안 만나려고 하고
심지어 간호사와 의사에게도 포악하게 대했습니다.
근심이 된 가족들이 도움이 될까 해서
옛날 친구들을 들여보냈지만 소리를 치고 쫓아버리고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몸이 건강하였을 때 동네의 한 꼬마와 같이 산책을 했었기에
가족들은 그 아이를 불러서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병실에 있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들여보냈습니다.
그 아이를 들여보내는데 삼십분이 지나도 그 아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해서 가족들이 들어갔더니
할아버지가 유순하게 바뀌었고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의아해하며 소년을 붙잡고 물어보니
그 소년이 말하기를,
“저는 들어가자마자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울었습니다.
할아버지도 저를 안고 30분 동안 울기만 했습니다.”
아이의 눈물, 그 할아버지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이 할아버지의 포악한 성격을 치유한 것입니다.
남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워서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기에는 매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예화에 나오는 꼬마 어린이와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픈 병에 시달리거나 진퇴양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안아주시고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한 사람의 아픔을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들에게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신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처지를 진정으로 이해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아시며,
또 신자들이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충분히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지어야 할 십자가,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업보,
우리가 짊어질 십자가를 예수님이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십자가를 대신 안고 죽음,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16절 전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신자인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긍휼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긍휼이란 히브리어로 ‘레캄’이라 하는데 이 말은 여자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여자의 자궁이 복중태아를 보호하는 것에 집중하듯이,
예수님의 긍휼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신문에서 파평 윤씨의 묘를 개장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묘에서 약 4백 년 전의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인의 미라였습니다.
그 당시는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아이를 낳다가 산모가 죽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왕이었던 단종이 바로 이런 경우로 태어났습니다.
난산인 경우는 아이가 죽던지 산모가 죽던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산파가 산모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아이를 살리고 나를 죽이라고 합니다.
긍휼 안에 담겨진 뜻을 보면
‘우리를 살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고 자신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며, 진정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계속해서 16절 후반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은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위기의 순간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 길 가운데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죽을병에 걸릴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때를 따라 돕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때를 따라 돕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 16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말씀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신자들은 교회에 나오면 첫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받는데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받으면 뒤에 또 다른 은혜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렸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제가 한국에 있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한국의 16강 진출이었습니다.
한 번도 한국이 16강에 올라간 적이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반드시 16강에 올라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으로 한국 팀이 16강에 올라가게 되고 8강, 4강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16강만 바랬는데 한국 팀이 4강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16강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은혜라고 할 수 있고
나머지 8강, 4강은 그야말로 덤입니다.
이 8강, 4강이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신자가 십자가 은혜를 받았더니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도와주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위에 은혜를 받는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1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
히브리서는 박해 시대 때 쓰인 책으로 이 당시 신자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성서학자들은 히브리서가 쓰인 시기가 로마 황제 어느 때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히브리서가 쓰인 시기가 네로황제시대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16절에 표현되어 있는 보좌는 왕이 앉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네로 황제가 이 보좌에 앉아있습니다.
만약 어떤 죄인을 이 네로 황제 앞에 끌고 오면
황제의 엄지손가락을 위로 하느냐 아니면 아래로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됩니다.
황제가 엄지손가락을 내리면 죽고 올리면 사는데
만약 죽을 사람이지만 황제가 손가락을 올렸을 대
그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있어 그 보좌는 은혜의 보좌가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말하는 은혜의 보좌는 바로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면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하나님이 인정사정없이 우리의 죄를 판단하시면 모든 사람은 다 지옥에 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때,
그 때 이런 우리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보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대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사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다면 가능합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모두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고 초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16절 말씀에 분명히 우리에게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천석 목사님이 한얼산 기도원을 지을 때 일입니다.
이천석 목사님은 한얼살 기도원을 지었지만
건축 빚을 감당하지 못해서 빚쟁이들한테 쫓겨 다녔습니다.
이 목사님이 도망 다니다가 한얼산 귀퉁이에다 토굴을 파놓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 분은 3개월 동안 딱 두 마디 기도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입장을 바꿔놓고’입니다.
이 두 마디의 기도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때문에 기도원을 세웠는데 어떻게 이런 고통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기와 서로 입장을 바꿔놓고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당당하게 기도했더니
암에 걸린 재벌가 며느리가 기도원에 온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암에 걸린 며느리를 위해 기도하였더니 나은 것입니다.
그래서 재벌가가 그 돈을 대 주어 빚을 갚게 되었습니다.
한 번에 은혜로 모든 것이 다 풀렸습니다.
이 목사님처럼 당당하게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자가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우리의 부족함을 받아주시고 도와주세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입니다.
또 하나는 “주님,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해 주시고
주님의 은혜를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입니다.
무엇을 당당하게 기도하겠습니까?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라고 했지만 어떻게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십니다.
믿는 신자들은 인생이 어려울 때 다른데 가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예수님 십자가를 붙드시고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질병에서 나음을 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얻으시는 우리가되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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