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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곡(泉谷) 송공(宋公) 시장 (諡狀)
본관(本貫)은 전라도 여산군(礪山郡)이다.
증조부 승은(承殷)은 선략장군(宣略將軍) 충좌위 부사맹(忠佐衛副司猛)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추증받았고, 증조모는 숙인(淑人)을 추증받은 나주 박씨(羅州朴氏)이다.
조부 전(琠)은 진용교위(進勇校尉)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추증받았고, 조모는 숙부인(淑夫人)을 추증받은 화산 전씨(花山全氏)이다.
아버지 복흥(復興)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송화 현감(松禾縣監)을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추증받았으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을 추증받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공(公)의 이름은 상현(象賢)이고 자(字)는 덕구(德求)이며, 스스로 천곡(泉谷)이라 호하였다. 우리나라의 여러 송씨(宋氏)들 중에 오직 여산 송씨가 가장 오래되었고 또 문세(門勢)가 크다. 12대조인 송례(松禮)는 벼슬이 시중(侍中)에까지 이르러 고려 시대의 명신(名臣)이었으나, 선략(宣略) 이후로는 점점 못하다가 송화공(松禾公)에 이르러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여러 대(代)의 묘가 모두 고부군(古阜郡) 천곡산(泉谷山)에 있다.
공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신해년(1551, 명종6) 1월 8일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남달리 준수하여 10여 세에 경사(經史)를 모두 통달하였으며, 두세 번 읽으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였는데, 시험관이 그의 글을 보고 놀라 감탄하기를,
“이 수재(秀才)는 다음에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함께 사귀는 사람이 모두 당시의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그가 지은 시문은 반드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20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또 6년 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병자년(1576, 선조9)에 문과(文科)에 뽑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되었으며, 무인년에 저작(著作)에 오르고 기묘년에 박사(博士)에 올랐다. 다시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에 천거되어 제수되었다가 임기가 다 되어서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계미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불러들였는데, 그사이에 호조(戶曹)ㆍ예조(禮曹)ㆍ공조(工曹)의 정랑(正郞)을 역임하고 갑신년에 질정관(質正官)으로 경사(京師)에 갔다왔고, 을유년에 다시 질정관으로 임명되어 두 번째 다녀왔다. 병술년에 또 지평(持平)에서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ㆍ북평사(北評事)로 좌천되었다가 정해년에 다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지평(持平)이 되었다. 무자년에 배천 군수(白川郡守)로 3년간 외직(外職)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ㆍ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과 사재감(司宰監)ㆍ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을 역임하고, 신년에 집의(執義)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대개 이때부터 조정의 논의가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으나 공은 정도(正道)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고, 또 이발(李潑)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내직(內職)에 안정할 수 없어서 내직과 외직을 자주 옮겨 드나들었다. 이발이 패하여 죽은 뒤에도 그 무리들의 노(怒)함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공 역시 당세에 용납되지 못할 줄 스스로 알고 군읍(郡邑)으로만 돌아다니면서 헐뜯음을 피하였다. 그때 마침 병술년 이래로 나라에는 왜인(倭人)들과 틈이 생겨서, 언제 전쟁이 터질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동래(東萊)는 왜적들이 오는 길목인 까닭에 공을 문무가 겸비한 인재라 하여 동래 부사로 임명했으나 실은 선의(善意)에서가 아니었다.
공은 부임하자, 백성을 다스리고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한결같이 진심과 신의로써 하여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모두 부모처럼 받들었다. 그때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이 정산 군수(定山郡守)로 있었는데, 공이 시를 지어 보내, 왜구(倭寇)가 이르면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뜻을 보이므로 선생이 그 충분(忠憤)을 사모하여 그 시를 새겨 현(縣)의 벽에다 걸어 두었다. 다음해 임진년 4월 13일에 왜적이 침범해 와서 14일에는 부산을 함락시켜 첨사(僉使) 정발(鄭撥)을 죽이고, 15일에는 동래부를 공격해 왔다. 이보다 앞서 경상 병사(慶尙兵使) 이각(李珏)이 무리를 거느리고 성(城)으로 들어와서 함께 지킬 계책을 세우더니, 왜적이 매우 많은 것을 보고 도망쳐 나가려 하였다. 공이 의(義)롭지 못함을 들어 꾸짖고 함께 죽을 것을 말하자, 각(珏)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나대로의 진영이 있으니 내가 지켜야 할 곳은 그곳이고, 이 성을 지키는 것은 공의 책임이오.”
하고는, 노약자 30명만 데리고 마침내 달아나니,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흔들렸다. 공이 개연(慨然)히 대중에게 맹세하고 성에 올라 방어할 차비를 하니 총탄이 빗발치듯 하였으나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 종[奴] 신여로(申汝櫓)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지키는 신하의 의(義)로써 당연히 죽기를 맹세해야 하지만 너는 늙은 어미가 있으니, 부질없이 죽을 것이 없다. 빨리 도망가거라.”
하였다. 이날 적군이 성을 넘어 어지러이 들어오매 공이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급히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남문(南門)에 올라가 손을 맞잡고 의자에 단정히 앉으니, 그 모습이 태산과 같았다. 이윽고 적이 가까이 육박해 왔는데, 적 가운데 평조익(平調益)이란 자가 있었다. 이 자는 일찍이 평조신(平調信)이 통신사(通信使)로 왕래할 때 같이 따라와서 공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공이 자못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이에 조익이 동감해서 평소 공을 위해 은혜를 갚으려 하였던 차에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성(城) 한쪽의 틈 있는 곳을 가리키며 공에게 피하라고 하였다. 공이 응하지 않으므로 그는 공이 알아차리지 못한 줄 알고 다시 옷자락을 손으로 끌었다. 공은 하는 수 없이 의자 아래로 내려와 북쪽을 향해 재배(再拜)하고 나서, 아버지 송화공(松禾公)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외로운 성(城)에는 달무리지듯 적병에 포위되었는데 다른 진영에서는 모두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자고 있으니,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매 아버지와 아들의 은혜는 가벼워집니다.”
하고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있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니, 그때에 42세였다. 공은 죽음에 임하여서도 정신과 자세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평소와 같았으며, 아랫사람에게 말하기를,
“나의 허리 아래에 콩알만 한 검은 사마귀가 있으니, 내가 죽으면 그것을 증표로 하여 시체를 거두라.”
하였다. 얼마 뒤에 적장 평의지(平義智)ㆍ현소(玄蘇) 등이 이르러 서로 공의 충성심에 감탄하고, 공을 해친 적병을 잡아 처형하여 군중에 돌려 경계시켰다. 신여로(申汝櫓)는 공의 말을 듣고 떠났다가 하루 만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공은 임금을 위해 죽으려 하는데, 나는 왜 공을 위해 죽지 않겠는가?”
하고는 바로 되돌아와 공의 뒤를 따라 죽었고, 공의 첩(妾) 금섬(金蟾)은 함흥(咸興) 사람인데 적을 꾸짖고 몸을 깨끗이 보존하여 죽었다. 적이 공의 시신과 금섬의 시신을 거두어 동문 밖에 묻어 주고 나무를 세워 표하고 시(詩)를 지어 제사 지내 주었다. 이때부터 남문 위에는 밤마다 빛나는 자기(紫氣)가 곧바로 하늘에 뻗쳐 있어 몇 해 동안 흩어지지 않으니, 적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갑오년 겨울에 경상 병사(慶尙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적장(賊將) 청정(淸正)을 진중에서 만나 그러한 사실들을 모두 듣고 장계를 올리니, 상(上)이 무한히 감탄하고, 특명을 내려 관작(官爵)을 추증(追贈)하고 정려(旌閭)를 세우게 하였으며, 그의 아들 1인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했는데 그 글의 대략에,
“바른 기상 외로운 기품, 훌륭한 모습 우뚝하다. 재주는 문무(文武)를 겸하였고, 덕은 충효(忠孝)를 보전하였다. ①수양(睢陽)이 포위당했을 때 하란(賀蘭)이 구원하지 않았고, 북군(北軍)이 패할 때 안고경(顔杲卿)의 충분(忠憤)이 격발되었다. 구차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 죽음에 나아감이 영화로워라. 의리를 태산처럼 중하게, 목숨은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여겼으니, 정충(精忠)이 있는 곳에 장한 기운 꺾이지 않았네. 적들이 아직 남았는데 경(卿)의 눈 어이 감겠는가.”
하였다. 을미년에 집안사람들이 조정에 청하여 고향에 옮겨 장사하려 했으나 적병들이 아직 변경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이 도신(道臣)에게 하교(下敎)하여, 그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시신을 찾아오게 하여 년 월 일에 청주(淸州) 가포곡(加布谷)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공의 관(棺)이 돌아오자, 백성들이 모두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1백 리 밖까지 추송(追送)하는 이가 수백 명이었고, 적장 청정(淸正) 이하가 모두 말에서 내려 엄숙히 보내었다. 동래부에 매동(邁仝)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공의 제삿날이 되거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음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었고, 뒤에 공의 아우 상인(象仁)의 집에 와서 공의 절사(節死)한 상황을 들려주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고기를 주어도 먹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오늘 우리 공의 아우를 보니 우리 공을 다시 본 듯한데, 어찌 고기를 먹겠습니까.”
하였다. 공에게 이씨(李氏) 첩(妾)이 있었는데, 적병에게 잡혀갔으나 역시 굴복하지 않았다. 적도 그가 공의 가속(家屬)임을 알고 더욱 공손하게 대하여, 수절(守節)하고 사는 관백(關白) 가강(家康)의 누이 집에다 거처를 정하여 함께 있도록 하였는데, 홀연 폭풍우가 몰아쳐 벽과 지붕이 모두 무너졌지만 이씨가 있는 곳은 아무렇지 않으니, 적이 매우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마침내 우리나라 사람에게 딸려 돌려보내어 공의 삼년상을 추복(追服)하게 하였다.
을사년에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훤(尹暄)이 공의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 초기에 ‘충렬(忠烈)’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묘에 제사 지내기를,
“교활한 오랑캐들이 허(虛)를 찌르니 많은 장수들 풀처럼 쓰러져, 영남(嶺南) 고을에 의사(義士) 하나 없었다. 경(卿)은 수신(守臣)이 되어, 그 뜻이 열렬하나 군대는 1교(校)도 못 되고 성(城)은 텅비었다. 엄숙한 황당(黃堂 태수(太守)의 집무처(執務處))엔 오직 하늘과 땅뿐인데, 관복 갖춰 입고 길이 공수(拱手)할 제 엄연하기 태산과도 같았다. 적병들 숲같이 많았어도, 오히려 모기떼처럼 여겼으니, 옥(玉)이 부수어진들 정광(精光)이야 가시랴.”
하였으니, 아, 열성(列聖)의 충신을 숭상하고 보답함이 이에 이르러 다하였다 하겠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신묘년(1651, 효종2)에 윤문거(尹文擧)가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공의 사당이 남문(南門)의 곁에 붙어 있어 너무 시끄럽고, 또 옛날 대략 지은 것이라 소략하여 혼령을 편안하게 모시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여기고 마침내 고을의 선비들과 함께 힘을 모아 내산(萊山)의 남쪽 안락리(安樂里)로 옮겨 세웠는데, 그 규모가 커서 서원(書院)으로 삼았고, 청주(淸州)ㆍ고부(古阜)에서도 선후(先後)하여 제사를 모시니, 사림(士林)에서 높이 받드는 바가 조금도 유감이 없게 되었다.
공의 부인 이씨(李氏)는 충의위(忠義衛) 온(熅)의 딸이고, 승지(承旨) 문건(文楗)의 손녀인데 문건은 기묘 명인(己卯名人)이었다. 2남(男) 1녀(女)를 낳았는데, 장남의 이름은 인급(仁及)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고, 둘째는 효급(孝及)으로 진사(進士)이다. 딸은 현감(縣監) 이창원(李昌源)에게 시집갔으나 자손이 없다. 정랑(正郞)은 아들 근(根)을 낳았는데,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을 지냈고, 진사는 외딸을 두었는데 정복규(鄭復圭)에게 시집갔다. 직장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문병(文炳)ㆍ문전(文烇)ㆍ문정(文烶)ㆍ문수(文燧)이며, 큰딸은 김전(金澱)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김규(金鍷)에게 시집갔다.
공은 덕성이 심후하고 도량이 크고 넓어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앞섰고, 희노(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경전을 깊이 공부하였고 제자(諸子)와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병가(兵家)의 서적도 두루 섭렵하였다. 내행(內行)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어버이가 있으면 비록 추운 겨울이거나 더운 여름일지라도 예를 갖추어 건(巾)이나 띠[帶]를 벗지 아니하고 오직 명령을 받들어 모셨으며, 아우 상인(象仁)과도 우애가 매우 지극하였다. 큰누이가 정자(正字) 장언오(張彦吾)의 아내가 되었다가 일찍 과부가 되므로 여러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공에게 의지하고 살았으나 공이 그를 매우 조심스럽게 섬겨 오래도록 소홀함이 없었으며, 조카들을 자신의 친자식과 다름없이 돌보아 양육(養育)하니 이웃 마을에서까지도 ‘누구나 따를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집을 다스리는데도 법도가 있어, 평소에 성낸 말이나 얼굴빛을 보이지 아니하고 자애로써 두루 거느리므로 집안사람들이 모두 그 위엄을 두려워하고 그 은혜에 감복(感服)하여 숙옹(肅雝 공경스럽고 화목함)의 덕화(德化)가 있었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항상 평온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키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강직으로 대처하고 아첨하지 않았다. 절개를 지켰으며 죽음에 임하여서는 태도가 자연스럽고 뜻이 안한(安閒)하여 아무 일 없는 듯 평소와 같았다. 이는 그 학문이 바르고 수양이 깊어 사물의 경중(輕重)을 분별함이 본래 속마음에 정해져 있음이니, 하루아침에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목숨을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까닭에 미천한 잉첩(媵妾)들까지도 한 사람은 적을 꾸짖고나서 뒤따라 죽고, 또 한 사람은 죽기를 맹세하고 절개를 지켰다. 미천한 종으로서도 의(義)를 지켜 목숨을 버려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덕에 감화되고 의(義)로움에 감동되어 그 이해(利害)의 유혹과 생사(生死)의 두려움마저도 잊게 된 것이다.
또 다스리던 고을의 백성들이 울며 사모하고, 사림(士林)들이 정성을 다해 제사(祭祀)를 모셔 오래도록 잊지 못하며, 포악(暴惡)한 오랑캐들까지도 경복(敬服)할 줄 알아 공의 깨끗함에 감히 무례한 행동을 가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으로 보아 공의,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고 멀리까지 감복시킴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아, 사람이 사는 도리는 인(仁)과 의(義)일 뿐인데, 인(仁)은 부자(父子)간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의(義)는 군신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천명(天命)이고 인성(人性)이기 때문에 고금(古今)이 같고 미개한 오랑캐와 문명한 중국이 다름이 없으니, 자기의 직분을 다해 목숨을 바치는 의로운 이치가 누구에게나 없겠는가. 그러나 다만 평소에 그것을 밝히는 술(術)이 없고 또 수양하는 공(功)이 없으면 이리 쏠리고 저리 쫓기어 세상에 비굴하게 아첨할 뿐이다. 그래서 이해(利害)의 갈림길에 서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낭패(狼狽)하고 당황하며 두렵고 나약해서, 마침내 그 인의(仁義)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윤강(倫綱)의 아름다움을 깨뜨리기 때문에 중국(中國)이 이적(夷狄)에 빠지고 사람이 금수(禽獸)와 같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이 다 이러하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공의 학문(學問)의 본말(本末)을 뒤에 태어난 짧은 학식으로써 헤아릴 수는 없으나,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미루어 보면 그 학문이 세속(世俗)의 장구 문사(章句文辭)만을 일삼아 녹(祿)만을 구하고 세상의 조류와 더불어 따라가는 것과는 다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나아가는 바가 이와 같이 훌륭했던 것이다. 이제 신독재(愼獨齋) 김공(金公)이 어릴 때 일찍이 공에게서 수학(受學)하여 우뚝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이 되었는데, 그 학문이 비록 모두 공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공의 연원(淵源)을 대략 알 수 있다. 이로써 말한다면 집에 있을 때의 훌륭한 행적이 위에 기록한 것뿐만이 아닐 것이며,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섬길 때의 언론(言論)과 풍채(風采)의 훌륭함이 반드시 사관(史官)의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비부(秘府)에 소장되어 있는 사적은 지금 볼 수 없지만, 가승(家乘)의 기록마저 자세하지 않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공의 벗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이 공을 위해 열전(列傳)을 지었다. 그 말이 비록 간략하나 말을 아는 군자는 오히려 징신(徵信)할 것이다. 오성(鰲城) 상공(相公) 이항복(李恒福)은 공을 애모하는 글에서,
“외로운 성(城)에 왜적이 달무리 지듯 포위했을 때 담소(談笑)하면서 지휘한 것은 공의 열(烈)이 아니겠는가. 번쩍이는 칼날 아래에 단정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은 것은 공의 절개가 아니겠는가. 남문(南門) 위 자기(紫氣)가 북두성에 뻗친 것은 공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 말이 세간에 많이 전해 내려오지만 그것만으로 공을 다 형용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의 군자들은 오히려 제사와 증직(贈職)이 늦은 것을 탄식하면서 ‘무엇으로 충성을 권(勸)할 것인가?’라고까지 하였으니, 당시에 공을 대접함이 오히려 소홀했다고 여기게 한다.
그러나 끝내 공으로 하여금 당시의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게 하고, 또 변성(邊城)으로 내쫓겨 큰 절개(節槪)를 세워 우리나라 수백 년 전통의 강상(綱常)을 붙들게 했으니, 이는 하늘이 공(公)을 성취시킨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며, 당시의 공을 미워한 자들의 현명 여부가 어떠했는가를 알 만하니, 공에게야 무슨 유감될 것이 있겠는가.
지난 임진년 가을에 공의 증손(曾孫) 문병(文炳)이 많은 선비의 뜻에 따라 나에게 와서 시장(諡狀)을 청하였다. 나는 그럴 사람이 못 된다고 굳이 사양한 지 4년째가 되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굳게 요청하므로 끝내 사양할 수 없고, 또 생각해 보건대 이제 공이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나 묘 앞의 나무가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는데도 현창(顯彰)하는 비문이 아직 없으니, 세도(世道)의 치란(治亂)을 이로써 상상해 볼 만하다. 따라서 사실을 기록해야 할 글을 머뭇거리고 지어놓지 않으면, 비록 공의 큰 절개야 끝내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평생의 본말(本末)은 갈수록 어두워져 증거할 수 없게 될 것 같기에 그 가장(家狀)과 여러 사람들의 서술(叙述)을 대략 들고, 짧은 이야기 한두 가지를 참고해서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태사씨(太史氏)의 참고가 되도록 하고, 아울러 당세의 군자(君子)들에게 고(告)한다.
숭정(崇禎) 을미년(1655, 효종6) 2월 일(日)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은 삼가 시장(諡狀)을 쓴다.
① 수양(睢陽)이 …… 격발 : 당 현종(唐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리에 장순(張巡)이 수양(睢陽)에서 적병에게 포위되자,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구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하란진명이 시기한 나머지 원병을 보내지 않아 장순이 포로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켜 죽었다. 안고경(顔杲卿) 또한 안녹산의 난에 사사명(史思明)의 군사에게 포위되어 왕승업(王承業)에게 원병을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아 포로가 되어 피살되었다. 송상현(宋象賢)이 임진왜란 때 동래성(東萊城)에서 항전하다가 적에게 피살되었으므로 이들에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舊唐書 卷192 顔杲卿張巡列傳》
시장 諡狀
재상(宰相)이나 학자(學者)들에게 시호(諡號)를 주려고 관계자(關係者)들이 의논(議論)하여 임금에게 아뢸 때에, 그가 살았을 때 한 일들을 적은 글발.
송상현은 고부군 천곡(현 정읍시 농소동 천곡마을) 출신으 로 자신의 고향 이름 천곡泉谷을 호로 삼았다. 천곡마을 은 백제계 석탑으로 알려진 천곡사지 7층석탑(보물)이 있 는 동네이다. 이 마을에 송상현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송상현의 후손이 청주로 이거한 후, 그의 묘도 동래에서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으로 이장되었다. 1659년에는 그의 묘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다.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 이 글씨를 썼다. 이 신도비는 지난 1984년 충청북도 기념 물로 지정되었다. 송상현의 충신정려 또한 청주시 수의 동에 있다.
후손들이 자신의 선조를 선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 다. 문제는 송상현이 고부의 인물에서 청주의 인물로 잘 못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손들이 청주에 살고 있고, 그의 묘를 청주로 옮겨왔다고 해서 그의 고향이 고부 에서 청주로 바뀔 수는 없다. 송상현의 호 천곡에서 분명 하게 알 수 있듯 그는 고부 천곡이 고향이다.
지금 천곡마을에는 몇 년 전 정읍시에서 세운 ‘동래부사 송상현의 고향’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표지판 하나로 송상현이 우리고장 출신이라고 널리 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부산에서는 부산시 진구의 중앙대로 한복판 에 송상현광장을 대규모로 조성하고 송상현 선양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초라하 기 이를 데 없다.
[출처] 전북문화살롱 통권44호(2022년 11월)-호남충절의 상징, 정읍 정충사(손상국 프리랜서 PD)|작성자 전북문화살롱